00764 85. 1606년 장강에서 =========================================================================
장강을 따라 강변에 관도가 놓인 곳이 많아 강 주변 야산에 산채가 꽤 많이 있었다. 왕명명이 그 동안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산채들을 하나씩 소탕해나갔다.
주변에 산채 여럿이 몰려 있으면 소탕하기 좋을 텐데, 산적들에게 영업지역이 따로 정해져 있는지 산채마다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 산채 하나씩밖에 소탕하지 못했다. 이번 작전에 동원된 순양함이 겨우 네 척이라 함대를 나누기도 어려워 함께 이동했다.
“새벽에 작전하고 낮에 이동하니까 병사들이 피곤해하는 것 같다.”
“명나라 군사들은 아무 하는 일도 없이 피곤하기만 할 거여요.”
“산적들이 못 빠져 나가게 포위망을 갖추는 것도 중요한 일이야.”
산채 하나에 산적이 많아봐야 200명에 불과했다. 이들을 상대로 거의 만 명 단위가 움직여서 하루에 하나씩 토벌하는 비효율적인 작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명나라 군사들은 산채 주위로 넓게 포위망을 펼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을 전투에 내세울 수준이 도저히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오르도스에서 유목민 기병들과 싸우던 명나라 북병이나 척계광이 이끌던 남병 수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훈련 시간이 군대의 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였다.
“주인님! 바로 여기가 태조께서 20만 수군으로 진우량의 60만 수군을 격파한 파양호(鄱陽湖)에요.”
“호수에서 양쪽 합해 80만이 싸웠다고? 과장이 너무 심하다.”
“믿기 어렵더라도 진우량이 동원한 수군이 명 태조를 따르던 20만보다 많은 것은 확실해요. 그럼 최소한 40만이 넘어요.”
“배 타고 싸운 군사보다 호수 주변 땅에서 싸운 자들이 많았겠지. 물론 결정적인 승부는 수전으로 판가름 났을 테고 말이야.”
호구(湖口) 현 북쪽으로 장강 물길이 동서로 연결돼 있고 현 남서쪽은 길이가 100km 넘는 파양호의 입구였다. 다른 호수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 호수가 장강의 수류를 일정하게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장강의 수위가 일정한 반면 호수 면적은 극심하게 변동했다.
1363년에 벌어진 파양호 전투는 명 태조 주원장이 건국하기 전에 참전한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고, 이후 장사성의 세력이나 원나라를 오히려 더 쉽게 격파했다. 기록에 따르면 진우량이 동원한 배가 훨씬 커서 전투에 유리했지만 주원장이 화약을 실은 작은 배 일곱 척을 적 함대에 돌입시키는 화공으로 제압했다고 한다. 이로써 주원장이 황제로 등극하는 것을 방해할 세력이 거의 사라졌고, 이후 주원장은 원나라를 북쪽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배가 크다고 유리한 건 아니야. 호수에서 모래톱이나 말뚝에 걸리면 곤란해질 거야.”
“호수 전체가 수심이 급변하는 지역이에요. 흘수가 깊은 순양함은 빼고 작은 배와 수송선들만 들여보내는 편이 좋겠어요.”
“그게 낫겠다. 수송선들을 낮에 들여보내고 밤에는 돌아오라고 해야겠다.”
수적은 관과 결탁해 직접 처리하기 곤란했으나, 파양호 주변에도 도로를 따라 산채가 꽤 많이 분포했다. 직접적인 공격은 구르카 여단, 포위는 기병연대와 명나라 군대가 맡으면서 산채 다섯 곳을 거의 동시에 불태웠다.
다른 산채들처럼 저항은 별로 없었다. 새벽에 산채가 완전히 포위된 것을 확인한 산적들은 순순히 잡혀왔다.
호구 현에서 기다리던 이민호가 잡혀오는 산적 포로들을 살폈다. 웃통을 벗은 깡마른 몸인데도 다들 꽤나 탄탄하게 생겼다. 날이 더운 지역이라서 호피를 입은 봉두난발의 산적은 없었다.
“나리! 저희들은 양민을 해치지 않고 그저 통행료만 받았습니다. 지나친 벌을 내리시면 곤란합니다.”
“통행료 받아서 그 중 일부를 세금으로 냈어?”
지방의 치안이 불안한 중국에서 삼국지의 중심인물들을 배출한 전통적인 임협이나 자경단, 민병대 조직이 흔했다. 그런 지방의 치안유지 조직들이 가끔 상인들에게 통행료를 받아 운영비를 조달하는 경우가 있어서 통행료 징수가 곧 산적의 약탈행위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웠다. 농사를 짓다가 부업으로 산적을 하는 자들은 더더욱 구별하기 애매했다.
“그건 아닙니다만, 관청에 지현을 비롯해 관리들에게 조금 바쳤습니다.”
“그건 뇌물이고.”
산적 포로들에 대한 심문은 왕명명이 맡았다. 반란 모의를 꾸미는 자들이 일부 있어서 이들은 더 자세히 조사하라고 남경으로 먼저 보냈다.
그런데 수적이 분명한 자들이 배를 타고 몰려와서, 산적 토벌을 돕겠다고 자청했다. 산적들이 수적들의 영업에 방해가 돼서 평소에도 자주 충돌한다고 했다.
“너희들 진짜 수적이 맞아?”
“예, 대인. 하오나 저희들은 말이 수적이지 강을 오가는 표국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관에서도 세곡 운송 같은 일을 자주 맡깁니다. 왕 부인의 명을 받아 잡곡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일도 맡고 있습니다.”
왕명명이 이 지역에서는 왕 부인으로 통했다. 빈민 구호 사업을 진행하면서 수적들에게 일을 시키면서 안면을 익혔기에 왕명명은 수적들을 보호해주려고 노력했다.
“주인님! 수적이란 자들은 다 이 지역 출신들이고 관청이나 마을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있으니 양해해주세요.”
“청년 수적들이 실업자가 될까 두려워?”
“기존 수적들을 토벌하면 다른 지역에서 세력권을 확장한 수적들이 이 지역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 끼칠 수 있어요. 아무래도 토착화한 수적들이 민폐를 덜 끼치겠죠.”
“알았다. 백성들에게 피해만 안 끼치면 잡을 이유가 없지. 좀 더 두고 보마.”
“그런데 파양호 수적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는 모양이에요. 한 번 들어봐 주시겠어요?”
살다 살다 수적들이 제기하는 민원도 들어줘야 했다. 들어보니 세상에는 참으로 무섭고 신비한 일이 많았다.
“나리! 도창현 북서쪽 노야묘 근처에서 배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흔합니다. 기껏 살아남은 자들은 미쳐버립니다.”
“침몰한 배의 잔해가 떠오른 적이 있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 물질 잘하는 수적들을 잠수시켰는데 밑바닥에서 아무 것도 못 찾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적들 몇이 또 사라졌습니다.”
노야묘(老爺廟)라면 1960년대부터 30년 동안 배 200척이 침몰하고 1,600명이 실종되어 중국의 버뮤다라는 별명이 붙은 수역이었다. 1985년에는 단 하루에 배 13척이 실종된 적도 있고, 심지어 1945년 일본군의 2천 톤 급 수송선 고베마루가 침몰해 일본군 200명이 실종되기도 했다.
이민호가 노야묘 주변 지역을 살펴보니 사고가 나기 좋은 지형인 것은 일단 맞는 것 같았다. 갑자기 병목처럼 좁아지는 수역이라 물살이 빠르고, 주변을 가리는 높은 지형 때문에 바람이 굉장히 강하게 부는 곳이었다.
음향탐지기를 발신해 조사해보니 수중 지형도 꽤나 복잡한 것으로 추측됐다. 가끔 소용돌이가 일어난다는 증언을 들어보면 수로 밑에 거대한 동굴이나 지하를 흐르는 강이 모래로 덮여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여기가 북위 30도에 해당하는군.”
“도련님. 북위 30도라면 버뮤다나 피라미드가 위치한 곳 아닙니까?”
“그렇지. 이상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웬만하면 피하는 게 좋아.”
다행히 작전 중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이민호는 수적들에게 딱히 설명해줄 길이 없었다. 그저 파양호 노야묘 구간을 되도록 지나다니지 말라는 권고만 했다.
“수적들은 이곳 파양호 말고 차라리 바다에서 일하는 게 안전할 거야. 웬만하면 수적질 그만 두고 바다에 나가 정식 선원으로 일하는 게 어때?”
그러나 수적들이 고향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가난한 지역이라 청년들이 직업을 구하기 어려워 수적을 그만 두지도 못했다.
산적의 경우 수적과 달리 그 지역 출신자들은 드문 편이었다. 수적은 임협이나 자경단과 비슷한 성격을 공유했다. 물에 가까운 지역 주민들이 물질에 익숙해져 수적이 되기도 쉬웠다.
“주인님! 산적 포로들은 역시 탄광행이죠?”
“아니. 탄광 강제노동을 시키면 수형 기간이 지나서 고산국 백성으로 받아줘야 하잖아. 외국인 산적 범죄자들을 백성으로 받아줄 수는 없지.”
그리고 이제는 석탄을 캐려고 일부러 범죄자들을 투입해 탄광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명나라나 필리핀에서 충분히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석탄보다 석유를 훨씬 많이 소비했다.
“명나라 군대에 넘기면 다 처형할 거여요. 주인님이 다 데리고 갈 수 없나요?”
“범죄 혐의가 크지 않으면 변경에 충군시키기로 했어. 산적들도 다 알고 순순히 항복하는 것 같던데?”
병력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명나라에서는 범죄자를 군대에 소속시키는 것이 벌의 하나였다. 그만큼 군대 조직의 저질화, 약체화를 피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에는 비리를 저지른 관리들을 수군에 충군시키는 벌이 있었다.
군대가 산적들을 토벌하는 동안 왕명명은 주상아 공주의 이름으로 빈민 구제 사업을 진행했다. 쌀도 아닌 잡곡을 받으면서도 빈민들은 몹시 고마워했다.
왕명명은 농민들에게 고구마 재배법을 가르쳤으나 가난한 농민들은 고구마를 재배할 의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잡곡도 지주나 관청에 빼앗기고 고구마만 먹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농가에 새로운 품종을 도입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 농민들이 가난한 것은 흉년 때문이 아니라 경작지 면적의 과소, 즉 구조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돕는 신부가 칭찬을 받는 반면 가난한 자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해 비판하면 종교인이 정치에 개입한다는 비난을 받듯이, 농지 개간이나 이주 같은 해결책을 관청에 제안하기도 어려웠다.
- 다그닥 다그닥~
“와아!”
- 타탕! 탕!
이민호는 밤에 국왕좌승함에서 자다가 바깥이 시끄러워서 잠이 깼다. 육지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산적들도 토벌군에게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밤에 고산국 토벌군이 주둔한 호구 현에 대규모 야습을 가해온 것이다.
“한 시간 전부터 야습의 전조를 파악하고 감동 사령관님이 대비해뒀어요. 주인님은 주무세요.”
“응. 그래.”
이민호에게 자라고 권한 호위들은 이미 전투복 차림이었다. 구경하러 나가고 싶었지만 호위나 감동에게 괜히 신경 쓰이게 할까봐 나가지도 못했다. 이민호의 목에 매달려서 자는 척하는 왕명명 때문에 움직이기도 곤란했다.
어제 저녁에 산적이 야습할 테니 대비하라고 지역 주민들이 알려주었다. 수적들도 수상한 무리들이 호구 현으로 집결하고 있다고 함대에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런 소문 같은 정보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도 없었다. 고산국 군대는 야습에 대비해 항상 일부 병력이 야간 경계에 투입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게다가 산적들이 호구 현에 접근하는 중에 미리 발각돼서 더 많은 병력이 야습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야습하는 쪽에서 그리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 삐유우~ 펑!
그러나 산적들은 지상에 주둔한 병력이 아니라 아무래도 순양함이나 수송선에 대한 공격을 하러 온 모양이었다. 비화가 날아가며 특유한 소리를 낼 때마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로 끝났다.
조선의 신기전기처럼 명나라에도 비창 같은 로켓을 연발로 발사하는 체계가 있지만 야습에 수레를 끌고 오기는 어려웠다. 단발로 쏴봐야 티크 목재로 건조한 순양함이나 수송선에 불을 내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산적들까지 화약무기를 사용하다니, 확실히 화약시대로군.”
“200여 년 전에 명 태조가 파양호에서 화약을 사용해서 이겼다니까요.”
“그래, 그래. 명나라의 과학력은 세계 제일이다.”
“지금은 옛날 일이 돼버렸지만요.”
왕명명이 별로 아쉽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왕명명은 한족 출신도 아니었고, 명나라가 멸망한다면 고산국이 명나라를 계승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여자였다.
“내 호위대장입니다.”
전화가 울리고 민지가 받았다. 감동이 산적들의 야습이 끝났다고 보고했다. 천여 명 넘게 몰려왔다가 절반쯤 죽고 나머지는 도주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밤 산적들이 야습을 했던 결과물을 살폈다. 산적 사망자가 200여 명, 도망가다 길을 잃거나 새벽에 출동한 기병 연대에 생포된 산적 포로가 300여 명이었다.
고산국 군대가 아무리 총으로 무장했다 해도 야간 전투에서는 명중률이 확연히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적외선 조준기를 만들어야 하나 이민호가 잠시 고민했다.
“산적도 섞여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산적이 아니에요.”
“그렇지?”
이민호를 뒤따르는 왕명명이 매서운 눈길로 포로들을 샅샅이 살피다가 의견을 냈다. 이민호도 바로 동의했다.
아무리 이들이 산적 연합군이라도 수적도 아니고 산적이 화약무기를 쓴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게다가 비화나 비창이라면 관에서 탈취한 군용 무기가 분명했다.
그리고 보조 무기나 장비를 휴대하지 않는 것으로 산적과 농민 반란군의 초기 복장이 구별됐다. 전투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장 쓸데없는 무기나 장비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게 된다. 그러나 반란 기간이 길어지면 나중에는 반란군이 산적들보다 훨씬 많은 도구를 이고지고 다니게 됐다.
“이들이 농민이라는 말은, 반란이 시작됐다는 뜻이겠죠.”
“설마 무한이 벌써 어떻게 되지는 않았겠지.”
포로들을 명나라 관리와 병사들에게 맡기고 함대는 바로 출발했다. 북서쪽 150km 정도에 무한이 위치했으나 강이 구불구불해서 하루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북서쪽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는 수적들이 고산국 함대에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