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68 85. 1606년 장강에서 =========================================================================
다음 날 아침 남경의 명나라 고관들, 그리고 무창성을 지켜낸 관병들의 환송을 받으며 원정군 지상군이 남쪽으로 향했다. 순양함과 수송선들은 보급품을 내려놓은 다음 모두 하류로 떠났다.
한양과 한구의 반란군은 어제 무창성 앞에서 반란군 주력 병력 4만이 쓸려나가는 즉시 사라져버렸다. 두 도시의 탈환을 무창성 관병과 남경에서 지원하러 오는 병력에게 맡기고 고산국 지상군은 반란군 패잔병 추격에 나섰다. 명승 중의 하나인 동호(東胡)는 구경도 못해보고 지나쳤다.
그러나 출발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나 무창성이 안 보일 때쯤 전군의 전진이 멈췄다. 말을 탄 감동이 장갑차로 와서 보고했다.
“도련님! 적 병력 3천 정도가 6km 남쪽, 8천이 10km 남쪽에 있습니다. 방어준비가 아니라 잠시 쉬었다 가는 것 같습니다.”
“밤새 여기까지밖에 못 왔어? 온 천지에 호수가 널려 있어서 멀리 도망가지 못했군. 우리도 점심 먹고 가자.”
복장이야 다른 기병들과 비슷했지만 그 동안 쌓인 연륜이 있어서인지 요즘에는 감동이 진짜 장군처럼 보였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민호가 비웃어도 꿋꿋하게 콧수염을 길렀다.
“예? 지금 오전 열시 좀 넘었습니다, 도련님.”
“뭐 어때. 천천히 가야지.”
행렬을 정지시키고 점심을 먹기 위해 쓸데없이 숙영지를 건설했다. 정상적인 속도로 숙영지 건설에 두 시간, 식사에 한 시간, 숙영지 해체에 한 시간이 걸리니 네 시간은 벌었다.
장갑차와 기병의 기동속도야 원체 빠르다 치고, 구르카 용병들이 걷지 않고 거의 뛰다시피 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 매년 설산에서 산악행군을 할 때마다 놀라던 구르카 용병들의 체력이었다.
그런데 구르카 용병들을 히말라야 현지에서 체력 시험을 통해 뽑다 보니 지원자들의 체력이 매년 꾸준히 향상되고 있었다. 히말라야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고산국에 용병으로 취업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연습한다고 했다. 잘하면 산악행군에 최적화된 새로운 인종이 생길지도 몰랐다.
“혹시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들을 몰아붙여서 다른 효과를 노리시는 겁니까?”
“아니. 혼슈와 달리 이 주변에 샛길이 너무 많아서 몰이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대충 몰고 가면서 광동으로 빠지려고.”
“저들에게는 보급품이 거의 없습니다. 주변 마을이나 도시를 약탈할지도 모릅니다.”
“약탈하면 미리 가서 때려잡으면 돼. 그보다는 중간에 술술 샐 거야.”
정규군이 아닌 반란군의 특징이 따로 있었다. 승세를 타는 동안에는 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패주하는 동안에는 마른 땅에 물이 스며들 듯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이민호는 어제 전투에서 반란군 전사자가 아무리 많아도 1만을 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면 반란군에 3만이 남아야 하는데 하루 사이에 벌써 1만으로 줄어들었다. 현재 패주 중인 반란군이 군대의 구성을 갖추는 시간도 며칠 남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주변 마을들이 반란군에 부역했다고 관병들에게 의심받아 초토화되겠죠?”
“당연히 그러겠지. 관병들이 약탈할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 그걸 알고 주민들이 피난 가잖아.”
이민호가 저 멀리 언덕길에서 움직이는 피난민 행렬을 가리켰다. 반란군이 몰려왔을 때도 마을에 머물러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야 비로소 피난을 떠나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반란군을 피하고 관병에게서 멀어지면서 자기들만 알고 있는 피난처로 향했다.
그렇다고 관병들이 약탈을 멈출 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들이닥쳐 반란군을 색출하는 척하다가 반란군을 내놓으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협박하는 경우가 흔했다. 반란군을 숨기면 마을 전체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주민들 중 단 한 명도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도 관병들이 이렇게 위협하면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한두 명쯤 자수하게 마련이었다. 그 다음 단계는 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재물을 모아 관병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아니면 관병들이 전공을 세우기 위해 자수한 자를 체포해가거나,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어지러운 시대에는 흔한 일이었다.
“험한 꼴을 많이 봤더니 앞으로 일어날 과정이 눈앞에 훤히 보입니다. 백성들만 죽어나가는 거죠.”
“우리가 수색을 끝났으니 마을을 침탈하지 말라고 패를 세워놓는 것은 어떨까?”
“만약 관병들이 도련님 명의로 세운 패를 무시하면요?”
“목을 날려야지.”
이민호가 허리띠 아래 달린 상방검을 툭툭 손으로 쳤다. 처음에는 단순히 도적을 소탕한다는 핑계로 장강 일대에 원정을 왔다. 무한까지 와서 반란을 진압한 다음에는 이민호에게 슬슬 욕심이 생겼다.
“처음에는 자의적 판단으로 충분한 병력을 명나라 영토 안에 투사해서 작전하는 것이 목적이었어. 그런데 이 기회에 명나라에서 민심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명나라 고관들이 수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당연히 수상하지. 아무리 부마도위라지만 외국인이 외국군을 이끌고 영토 안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마땅히 의심해야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접근하는 자들이 많아. 그들도 미래에 대비해야 하니까.”
누가 보더라도 명나라는 멸망의 길을 향해 차곡차곡 걸어가고 있었다. 대안이 없는 현실에서 명나라 민중들의 인심을 살 수 있다면 나중에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팻말 수백 개를 만들어 행군로 주변 마을에 세우기로 했다. 기마정찰병들이 팻말을 들고 주변 마을을 돌아다녔다. 반란군을 토벌하면서 이 마을에 반란군 가담자가 없는 것을 확인했으니 민폐를 끼치지 말라, 만약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황상께서 하사한 상방검으로 엄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내용과 이민호의 직명이 거의 같은 글자 수를 차지했다.
“명나라 영토는 안 가지겠다면서요?”
“중국 땅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고산국에서는 간접적인 영향만 끼치는 식이 좋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 다만 고산국이 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느냐가 문제지.”
“그래서 일단 백성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말씀이죠?”
“그래. 여차하면 강남 지역에 괴뢰국 하나 세우지 뭐. 감동이 너 왕 한 번 해볼래?”
예전에 계복에게 동해국 왕이 되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때 계복이 짓던 어이없어하던 표정을 감동에게서 다시 보게 됐다.
“됐습니다.”
“쯧쯧! 젊은 놈들이 도전 의식이 부족해.”
“갑자기 영토가 대폭 불어나서 다들 은근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분열하면 곧 고산국 전체가 멸망한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어요.”
현재 고산국 왕실이 강력한 구심력을 갖고 있다 해도 영토가 워낙 넓고 인종이 다양하다 보니 지방마다 독립을 원하는 기운이 움틀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나 아직 어느 곳에서도, 심지어 최근에 영토로 편입된 서 시베리아나 의도적으로 통제를 가하지 않고 있는 동몽골 부족들 사이에서도 아직 독립 움직임이 없었다.
조선 출신이 아닌 이주민으로서 가장 큰 비율을 자랑하는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그런 쪽으로 의심을 받을까봐 몹시 조심스러워 했다. 오랜 기간 분열되고 강력한 이웃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은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인들은 고산국 그늘 아래에서 처음으로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특정 지방이나 대륙이 고산국에서 분리된다면 군사 및 경제적으로 자립적인 국가를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주민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다들 부족함이 없으므로 왕실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있는 동안에는 괜찮아.”
“도련님이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잖아요. 후손들에게 책임을 져야죠.”
“9백년쯤 살도록 노력할게.”
가장 중요한 무장 세력인 군대는 왕실에서 직접 통제하고 있으며, 대위 이상 중견 장교들은 고향을 떠나 만리타향에서 근무하게 되는 일도 흔했다. 이들은 지역이나 고향이 아닌 국가, 그보다는 왕실이나 이민호 개인에게 충성했다.
인구가 많고 경제적 자립도가 높은 북미라 해도 독립을 추구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유럽을 상대로 교역을 하는 북미 입장에서 해군 세력을 지금처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예들이 오히려 해방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달리, 고산국의 그늘 아래에서 충분한 이익을 누리고 있는 한 독립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원치 않았는데도 상황에 따라 독립하게 된다 해도, 다시 통합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됐다. 고산국 백성들은 현재 상태를 바꾸는 모든 것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어쨌든 중국 땅에서 영토를 안 갖는 편이 좋겠습니다. 자그마한 영토라도 중국 내에서 지켜내려면 국력을 기울여야 해요.”
“알았다. 내 생각도 그래.”
“이제 더 이상 영토 확장은 안 하죠?”
별로 확장할 생각은 없었으나 감동을 놀려먹는 재미가 있었다.
“어느 나라나 건국 초에 약간 무리해서 영토를 넓힐 수도 있는 거 아냐?”
“북미나 시베리아처럼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라면 모를까, 명나라는 인구가 너무 많아서 흡수하는데 무리가 있습니다. 기존 고산국 백성들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혹시나 영토를 넓히더라도 명나라 영토는 제발 제외해주세요.”
“내 생각도 그렇다.”
중국 땅을 정복하는 것은 역대 유목민 정복 왕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상황에 따라 어렵지 않을 수도 있었다. 중국 왕조가 말기에 접어들어 국가 자체를 유지하기 버거운 시기에는 정말 허망할 정도로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을 정복한 다음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유목민 정복 왕조는 인구가 수십 배 많은 한족에 쉽게 동화되어 두세 세대만 지나도 일반 한족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그때는 이미 유목민 정복 왕조의 장점을 잃고 쉽게 와해돼 버리는 경향이 컸다.
“지금 이대로도 몇 세대만 지나면 우리 고산국도 억 단위 인구가 됩니다. 잘 먹고 잘 사는데 괜히 인구만 많은 지역에 욕심을 낼 이유가 없지요.”
“그렇다. 하지만 중국은 고산국에 위협이 될 정도로 충분히 커서 신경을 안 쓸 도리가 없다.”
“지금처럼 불가근불가원하세요.”
“오오! 감동이 문자 쓴다.”
감동이나 감불은 어렸을 때부터 이민호에게 배우긴 했지만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한 적은 없었다. 사관학교 단기 속성 과정은 정기 교육 과정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민호만의 착각이었다.
“저 예전에 독학으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저 고졸 자격이 있다고요. 도련님은 초졸도 안 되잖아요.”
“헉! 정말?”
고등학교와 대학교 과학 교과서 여러 종을 집필했고 대학원 교과 과정을 만들었어도 이민호의 공식 학력은 무학이었다. 다만 조선에서 과거시험 향시에 합격한 것이 2년제 대학 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됐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만간 이 특례제도는 사라질 예정이었다.
오후에 추격전이 다시 시작됐다. 전방에 첨병으로 내세운 기마정찰대가 수차례 매복 공격을 받아 부상자가 열 명 가까이 늘어났고 전마 20마리를 잃었다. 어쩔 수 없이 기마정찰대를 본진 가까이 활동하게 하고 장갑차를 선두에 내세웠다.
- 타탕! 탕!
관도 근처 숲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장갑차에 뭔가 튀는 소리가 났다. 기마정찰대에게 파악하지 못한 적의 매복이 있었다. 수풀이 무성한 곳이라 이런 곳에 매복하면 거의 땅굴을 파고 숨어든 수준으로 찾기 어려웠다.
장갑차에서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한 다음 기병 1개 중대가 적이 매복한 곳으로 돌입했다. 기병들이 돌아왔을 때 허탈해져서 모두가 웃었다. 반란군 총병 달랑 두 명이 쓰러져 있고 다리 관통상을 입은 한 명은 필사적으로 기어가다가 잡혔다고 했다.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던가? 최소 100명쯤 매복한 줄 알았네.”
“야간에 당했으면 큰 혼란이 왔을 겁니다. 훈련을 다시 시키겠습니다.”
“아니야. 놀라는 게 당연하지.”
반란군이 매복해서 기습한다지만 화승총의 유효사거리보다 훨씬 먼 곳에서 쏴서 인명피해를 입히려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끄는 것에 불과했다. 반란군이 제법 지연전을 잘 펼쳤다.
반란군이 신속히 도주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때 가족을 대동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해봤다. 그러나 정찰대의 보고로는 거의 남자들만 있다고 했다.
“며칠 안으로 다 흩어질 거야.”
반란군이 남서쪽 악양 방면으로 방향을 틀었고, 고산국 원정군은 거리를 유지하며 추격했다. 가끔 관도에 반란군의 사체가 버려져 있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서로 죽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주변 마을을 약탈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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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에서 1만이 죽었는데 남은 게 거의 없습니다.
사건이 없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