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69 85. 1606년 장강에서 =========================================================================
원정군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농민 반란군을 뒤쫓았다. 반란군은 관도 위주로 이동했으나 도시를 만날 때마다 산길로 우회해 계속 남쪽으로 향했다.
원정군은 장갑차와 기병은 관도로 행군하고 구르카 연대에서 1개 대대씩 교대로 산길에서 반란군을 추격했다. 반란군은 도시 지역을 지나면 금방 다시 관도로 내려섰다.
추격을 며칠 계속하다 보니까 차차 긴장감과 적대감도 줄어들었다. 반란군도 고산국 원정군이 바로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감동이 어떠냐?”
“아무 일이 없는 것이 더 긴장됩니다.”
“나도 그렇다만, 며칠 더 기다려봐라. 혹시나 다른 길로 빠지려고 하면 장사로 몰아라.”
반란군을 뒤에서만 추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란군에서 기마정찰대를 동쪽이나 서쪽으로 보내면 아군 기마정찰대가 관도 쪽으로 쫓아 보냈다. 숫자가 대폭 줄어든 반란군 주력은 역습을 할 수도, 다른 방향으로 도주할 수도 없게 됐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 공격하는 빈도가 줄어들었다가, 나중에는 적당히 거리만 두고 행군하게 됐다. 반란군과 원정군의 행군이 며칠째 평화롭게 진행돼서 두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 주민들은 양쪽을 같은 편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장사를 앞두고는 장갑차 선두 차량과 늦게 출발한 반란군 후미 부대가 거의 맞붙은 채 서로 멀뚱멀뚱 지켜본 적도 있었다. 같은 시냇물에서 서로 상대방을 못 본 척 물을 떠오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패주하는 반란군 부대의 최후는 뻔했다. 날이 갈수록 도망병이 늘어나 숫자는 계속 줄어들고 반란군이 와해되기 직전이었다. 지휘부를 비롯해 반란군 대부분이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미치는 자들도 속출했다.
급기야 반란 수괴의 수급을 바칠 테니 추격을 중단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요청을 한 자들은 반란군 수괴 밑에서 이른바 대장군과 승상 칭호를 받았던 지도자들이었다.
“잘 도망가다가 왜 그래?”
“현재 2천 명 정도 남았습니다, 도련님.”
오후 늦게 일찌감치 군막을 친 반란군을 슬쩍 보면서 감동이 보고했다. 반란군 수뇌부는 농민 반란군과 다른 새로운 왕조를 세울 군대라는 위세를 부리기 위해 억지로 군막과 각종 깃발을 수송하고 있었다. 이런 짐 때문에 이동 속도는 당연히 더 떨어졌다.
“의외로 더 이상 줄어들지 않는구나. 수괴의 수급을 받을까 말까.”
“우리 입장에서는 수급보다는 생포가 나을 텐데요. 수괴를 넘기라고 해도 저들이 자기들 대장을 살려서 보내주지는 않겠죠?”
“그렇겠지. 수괴가 반란군 지도부나 자금을 지원한 자들의 명단을 토해내면 곤란할 테니까. 자금원을 추적해보면 상인들 외에 일부는 지주나 중앙 관료들과 연결됐을지도 몰라.”
이번 반란은 예년과 달리 지나치게 조직적이었다. 그리고 농민이 주력인 반란군 주제에 화포와 화승총을 대량 활용한 것도 수상했다. 관병 주둔지의 무기고가 털렸다 해도 짧은 시간에 농민들이 화약무기를 익숙하게 다루는 모습은 더더욱 미심쩍었다. 굶주림에 내몰린 농민 반란군의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도련님이 명령을 내려주시면 반란군 수뇌부를 급습해서 모조리 생포해오겠습니다. 참! 5년 전에 절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조고원의 아들이 이번 반란의 수괴라고 합니다.”
“그래? 다음 반란 때는 조고원의 다른 아들이나 손자를 자처하는 자가 이끌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명목상의 수괴에 불과하겠지.”
혈통을 중시하는 것은 고위 관료나 소작농이나, 심지어 반란군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계승자는 황자들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하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고 모인 반란군에서도 수괴의 자리는 역시 수괴의 자식이 이어받아야 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긴 왕자가 ‘개인 재산인’ 나라를 되찾는 이야기가 시대를 불문하고 인기를 끌었다. 20세기에 영화화된 라이온 킹 이야기 그대로였다. 이민호가 몹시 경멸을 담아 말했지만 반대로 오해한 감동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역모죄에는 연좌제가 확실히 적용돼야 합니다. 이번 반란은 무창성을 순조롭게 점령했다면 어느 정도는 성공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개입하는 순간 실패하게 돼 있었지만 말입니다.”
“앞으로 반란이 갈수록 고도화, 조직화될 거야. 10만 명 전원이 화승총으로 무장할 수도 있어. 지주나 상인들이 자금을 지원했을 테니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야.”
순수하게 농민만으로는 반란이 지속될 수 없었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자주 보이는 염상이나 대지주들이 주도하거나 최소한 자금을 지원하지 않으면 농민반란은 금방 진압되거나 자연적으로 해산하기 마련이었다. 이민호는 농민 반란을 주도한 세력의 꼬리를 잡은 것 같았다.
“끔찍하군요. 유럽에서는 총질하는 적군이 적었는데 동양에서는 주로 총을 씁니다. 역시 명나라나 조선, 망하기 전의 일본은 선진국들입니다.”
“뭐 보병 위주인 국가가 특히 그렇지. 명나라에서 남병은 총병 비율이 높고 북병은 주로 기마병이잖아.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금이야.”
“황제나 개국공신이 되고 싶은 자들이야 어디나 있지 않겠습니까?”
유럽의 대포와 총이 더 우수하고 강력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동양 3국이 더 많은 화기를 전장에 배치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주력무기가 활에서 조총으로 빠르게 전환됐다. 그러나 크림한국이 화약을 오스만 제국에 수출하면서도 야전의 주력은 여전히 기병이듯이, 지형에 따라 화약 무기가 한계를 드러낼 수도 있었다.
반란군을 며칠 더 추격했다. 악양을 지나고 장사를 앞둔 어느 날 밤 기마병 20여 기가 빠져 나간 것을 확인했다. 그 다음 날부터 반란군이 완전히 조직력을 잃었다. 두목들이 도주했다는 소문이 돌자 반란군들은 도망갈 의욕마저 잃고 관도 주변에 주저앉았다.
장갑차들이 오랜만에 속도를 내서 관도를 질주했다. 기병 연대가 관두 주변을 포위하고, 구르카 여단은 길가에 늘어진 반란군들을 오랏줄로 묶어 생포했다. 기력을 잃은 반란군들이 저항 없이 오라를 받았다.
“적 수뇌부가 사라졌다. 기병연대를 풀어라.”
“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칭 황제, 장군, 승상이라는 자들이 부하들을 다 버리고 도망갈 줄은 몰랐어.”
이민호는 잠시 난감했다. 사방으로 트인 지역에서 도망간 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협지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항상 도망자였기에, 도망치는 방법 여러 가지가 떠올랐으나 잡는 방법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추적에 강점을 가진 기마정찰대가 장사 서쪽에서 기마 20기의 행적을 찾아냈다.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라면 인구 밀집 지대라는 뜻이었다. 화려한 갑옷이나 관복을 입은 기마 20기가 관도를 지나쳤다고 알려줄 증인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그 사이 관도에 늘어진 반란군들을 줍다시피 생포했다. 며칠 동안 추격해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남은 반란군의 핵심 전력이었다. 지방에서는 나름 힘깨나 쓴다는 자들이었으나 겁에 질려 일전을 각오할 용기도 없었다.
“너는 제법 눈빛이 살아있구나.”
이민호가 장갑차를 세우고 도포를 입은 전형적인 문사를 가리켰다. 지방에서 유명한 신사가 아니라 지휘부에 끼지 못하고, 복장이 특이하고 자존심도 강해서 그 동안 도망치지 못한 것 같았다.
“넌 뭐야? 농민은 아닌 것 같은데.”
“도탄에 빠진 농민들의 고달픈 삶을 불쌍히 여겨 역사의 흐름에 몸을 던진 부평초 같은 유생입니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세상에 불만을 품은 지식인이구나. 그래. 세상을 뒤엎기가 쉽지 않지?”
이민호가 그렇게 해석하자 멋들어진 문장을 머릿속에서 만들고 있던 유생의 표정이 변했다. 화를 내려던 유생은 힘이 빠져 만사를 포기했다.
“우린 패했소.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농민 반란군은 무식해서 네 말을 안 듣고 지휘부는 잘난 척하느라 더더욱 네 말을 안 듣지?”
“알면서 그러십니까? 조롱하지 마십시오.”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 자존심 때문이냐?”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망가면 관도 주변 마을에서 민단을 운영하는 자들이 내버려둘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본대에서 도망친 자들 대부분이 산에서 굶어죽거나 민단에 의해 목이 잘렸을 것입니다.”
“잘 아는군.”
그런 현실을 아는 반란군들은 끝까지 본진에서 버티려고 했으나, 지휘부가 도망쳐버리는 바람에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 몇몇은 상인 복장을 하고 관도에 나섰으나 대부분이 정체가 발각돼 관아에 끌려가거나 현장에서 목이 잘렸다.
“상사! 문사 복장을 한 놈들을 포박해 따로 구금하라!”
“예! 전하.”
구르카 중대장에게 지시하자 반란군들 사이에서 유생들을 따로 끌어냈다. 그 외에도 반란군들 중에서 비싼 옷을 입은 한 자들을 밧줄로 꽁꽁 묶어 따로 선별했다. 특히 관복을 입은 자들은 남의 것을 빼앗아 입은 자라도 확실히 체포했다.
“유생들이 의외로 많이 남았습니다, 도련님. 그 동안 채질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마치 농민 반란이 아니라 유생들이 주도한 반란이 된 것 같다.”
“농민은 반도 안 되겠는데요?”
3만 명에서 2천 명으로 줄어든 다음에 반란군을 제압하고 보니 포로들의 신분만으로 판단할 때 더 이상 농민 반란군이 아니게 됐다. 평소 반란과 전혀 달리 농민은 절반도 안 돼서, 유생과 상인, 지주들이 주도하는 반란에 농민들이 끌려와서 가담한 반란으로 해석이 변질될 수 있었다. 통계의 마술이었다.
앞으로 명나라 각 지방의 유생, 지주, 상인들이 반란의 배후 혹은 주도 세력으로서 날벼락을 맞게 될 것이다. 명나라 조정은 남방에 주둔군을 늘리거나, 평소 같은 편이던 지주들을 탄압하는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이게 됐다.
“세상에! 이 자들은 다 뭡니까? 농민 반란군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분과 상관없이 확실한 반란군들이오. 그대는 누구시오?”
“주애공 대인께 호광총독 이 가가 인사 올립니다. 무창성과 한양, 한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쪽 장사에서 올라오는 관병 5천 병력의 지휘관은 호남과 호북의 민정과 군권을 장악한 호광총독이었다. 관병이라 하나 아병 일부를 제외하면 40~50대 비리비리한 농민군이었다. 북방에서 직업군인으로 변신한 마병이나 장성 주둔군 14만과 수준이 전혀 달랐다.
“비록 늦게 도착했으나 적의 진군로를 차단한 공적이 있으니 총독도 토벌에 참전한 것으로 해주겠소. 이곳 포로 2천을 인수해서 그대의 전공으로 삼으시오.”
“대인께서 양보해주셨으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인!”
반란군의 군세 총 6만 중에서 무창성을 공격한 4만 중에서, 첫 날 전사한 1만과 마지막 날 생포된 2천을 제외한 나머지 도망자들은 모두 이민호의 공적이 됐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민호가 조정에 수급을 바치지 않더라도 다른 장수나 관료들의 보고를 통해 전과를 인정해줬다.
“대신 이들 전체를 살려서 남경으로 보내도록 하시오.”
“휴우! 저들은 유생들이로군요. 유관(儒冠)을 쓰고 난삼(幱衫)을 입은 자는 하나도 없지만 말입니다.”
총독은 포로가 된 유생들 중에 진사는 물론 거인도 하나 없다고 했다. 자그마치 향시에 합격한 거인이 반란에 참가할 이유는 없었다. 총독이 유관과 난삼 운운한 것은 그것들이 향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은 생원의 복장이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의 과거제도는 조선과 달라서 진사는 황제가 친람하는 전시에서 합격한 극소수의 인재였다. 명나라에서는 지현과 지부가 감독하는 시험에 합격하고 제학도시에 입격하고 복시에서 최고 성적을 올린 1인이 비로소 생원이 되어 향시 응시 자격을 받는다.
성(省) 단위에서 실시하는 향시 초시의 수석 합격자인 비수와 다섯 명을 늠선 생원이라 하여 관청으로부터 매년 은 12냥을 받는다. 향시에 합격해 회시를 치르는 자를 거인이라 하고, 회시에 급제하지 못하더라도 관료로서 출사가 허락된다.
이상은 장유의 문집 <계곡만필>에 수록된 명나라 말기의 시험제도다. 현시, 부시, 원시, 향시, 회시, 전시까지 모두 장원을 한 사람은 중국 역사상 딱 한 사람뿐이었다.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유생들이 반란에 대거 가담했다는 것이 문제요. 반란의 양상이 예전과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뜻일 것이오. 총독이 조사하지 말고 반드시 남경의 사례감 병필태감에게 맡기시오.”
“예, 대인. 명을 받들겠습니다.”
동창의 환관이 조사를 맡으면 적당한 고문을 통해 작은 사건도 크게 부풀려지고 정치적 의도에 따라 수사 결과가 달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명나라 지방 지주 계층을 공략하는 일은 이민호가 직접 나설 필요 없이 예전부터 지주들과 견원지간인 환관들에게 맡기면 충분했다.
반란군 수뇌부를 추격하러 나섰던 기병들이 돌아왔다. 어떻게 잡았는지 수뇌부는 상처 하나 없었고 그들이 탔던 말도 멀쩡했다. 그리고 웬 궤짝들이 반란군 수뇌부가 아닌 원정군 기병들의 말안장에 얹혀 있었다. 반란군의 군자금이 분명했지만 호광총독이 궤짝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첩을 올리신 대인께서 피곤해보이십니다. 장사에서 며칠 쉬어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불충한 자들이 많아 군대를 이끌고 즉각 이동해야겠소.”
“그럼 대인께서는 어느 방향으로 가시겠습니까? 요즘 광동에 산적과 수비(水匪)가 창궐하고 있다고 합니다. 양광총독이 병력을 소집해 도적들을 토벌하고 있다 하니, 대인께서 총독을 지휘해 전공을 세우시길 바랍니다.”
호광총독이 이민호에게 남쪽으로 진군하길 권했다. 주상아가 요청한 곳도 장사에서 남쪽인 광동, 광서 지방이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먼저 들를 곳이 있었다.
“예로부터 월중에는 도적이 많다고 하지요. 양광총독이 잘하고 있을 것이오. 본작은 묘족과 이족 등이 조만간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정보를 얻어서 그들을 위무하러 가고자 하오.”
“과연 대인은 대명에서 제일가는 충신이십니다. 대인의 건승을 빌기 위해 무당산에 관리들을 보내 북극진무현천상제께 제를 올리겠습니다.”
“고마운 일이오.”
호광총독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민호는 장사에서 며칠 쉬었다 갈까 하다가 내친걸음이라 진군을 계속하기로 했다.
포로들을 호광총독에게 넘기고 원정군은 장사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멀리서 동정호의 너른 호수를 구경하며 상덕을 지나 귀주성에 진입했다. 귀주 지방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 작품 후기 ============================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무서운 계략입니다.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