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78 86. 1607년 =========================================================================
“공작은 현재 에스파냐의 전체 국가 부채가 어느 정도인 줄은 알고 있소?”
“아니요. 부채 규모가 방대하고 채권자는 수없이 많습니다. 계약관계도 복잡해서 어느 누구도 정확히 추산할 수 없습니다.”
다른 에스파냐 사절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이들도 정확한 부채 규모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고산국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에스파냐라면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이민호도 인정했다.
펠리페 3세가 지나친 사치를 해서 갑작스럽게 국가 부채가 늘어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선왕 펠리페 2세, 그리고 그 이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겸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1세 때부터 에스파냐는 어마어마한 부채를 안고 있었다. 일벌레로 소문났던 펠리페 2세도 재위 기간 중에 네 번, 혹은 비공식적으로는 그 이상으로 자주 국가 파산을 겪었다.
“혹시 매년 지급해야 하는 이자의 규모와 지급 대상은 알고 있소?”
“모릅니다. 그런 자세한 것은 하급 관리들이 맡아서 할 일입니다. 채권자가 채권증서를 제시하면 지급하는 방식이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휴우~ 전체 규모는 모르더라도 최소한 매년 이자 지급액을 알아야 에스파냐를 도와줄 것 아니오?”
어느 국가가 국가 파산과 채무 불이행을 선언할 경우 적당한 채무 감경과 이자 감축을 받는 조건으로 원금과 이자 지급 계획서를 채무자들에게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채권자 입장에서는 채무자인 국가가 완전히 파산하지 않고 빚을 갚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에 집단으로 뭉쳐 강요하기도 한다.
이민호는 매년 지불하는 이자 규모를 알면 도와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신대륙에서 흘러드는 은을 비롯해 에스파냐의 수입이 많기 때문에 악성 채무만 정리해도 숨통이 트일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도움을 받을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에스파냐 왕실에서 이탈리아 여러 은행으로부터 급전을 빌리는 과정에서 계약을 잘못하는 바람에 일부 채무의 이자가 연 4할을 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소. 과도한 이자를 지급하기로 한 계약은 수정할 필요가 있소.”
“전하! 그것은 계약 당사자의 문제입니다. 뭔가 사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고금리로 부채를 일으켰겠지요. 고산국에서는 따지지 말고 대충 몇 천 만 에스쿠도 정도 도와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물론 현재 에스파냐의 사정으로는 아마 빚을 갚지 못할 것입니다.”
사절단과 협의하는 자리에 배석한 호조와 예조 간부들이 뒤로 넘어갈 뻔했다. 혜영은 얼굴 표정을 잔뜩 찌푸리며 이민호에게 에스파냐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공작! 갚지 않을 작정이라면 더 이상 돈을 빌려줄 수 없소. 신대륙에서 실어 나르는 에스파냐의 은이 고스란히 피렌체 은행가의 손으로 들어간다는 소문을 들었소.”
“피렌체 은행가의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빚을 갚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은행 빚은 갚고 고산국의 빚은 갚지 않을 작정이오?”
“고산국에는 그 금액에 합당한 면적의 영토를 떼어주기로 왕실에서 합의했습니다. 조만간 포토시의 은이 바닥을 드러낼 경우 남미 전체를 할양할 계획입니다. 사실 에스파냐에 남은 재산이라곤 영토밖에 없습니다. 대신 좀 비싸게 받아야겠지요.”
고산국 입장에서야 고마운 일이지만, 외교관이 에스파냐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두 손 들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펠리페 2세 시대에 비해 전반적으로 에스파냐 외교관들의 능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국왕과 권세를 쥔 총신의 능력이 그 모양이라서 나머지 관료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국가 모든 영역에 걸쳐 무능과 부패의 기운이 엄습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신대륙에서 채굴한 은의 몇 배를 계속해서 들이붓더라도 에스파냐의 파멸이 멀지 않았다.
“공작! 그 사실을 밝히면 안 됩니다.”
“뭐 어떻소? 다 아는 사실인데 고산국에도 조만간 이 정보가 들어가겠지요. 이미 들어갔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이제는 사절단 안에서 분란이 터져 나왔다. 사실 이 사절단이 출발하기 전에 이미 필요한 정보를 캐냈다. 적당한 뇌물만 주면 서로 먼저 알리지 못해 안달했다.
이민호가 손을 내저으며 공작에게 선언했다.
“고산국은 건국한 지 겨우 20년째요. 단기간에 급격한 영토 팽창이 있었소. 더 이상 새로운 영토를 관리하기는커녕 감당할 여력도 없소.”
“그래도 돈은 빌려주셔야지요.”
“더 이상 빌려줄 돈은 없소. 그 동안 진 빚이나 어서 갚으시오. 그리고 남미 대륙이라 해도 브라질 빼고 베네수엘라 빼고 이미 다른 나라들이 점령한 기아나, 수리남 지역 빼면 도대체 뭐가 남소?”
“브라질은 아직 포르투갈이 많이 개척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브라질까지 다 주는 건 아니지 않소?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영토요. 그리고 국왕이 같은 사람이라 해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여전히 법적으로는 다른 나라요.”
실질적으로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을 집어삼켰다고 해도 법적으로 동군연합은 군주의 개인 사정일 뿐이었다. 물론 동군연합인 상황을 기화로 포르투갈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정해진 이상으로 서쪽으로 진출했고, 에스파냐에서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포르투갈 총독에게 지시하도록 국왕께 보고하겠습니다. 레르마 공작이 반대하겠지만 급한 재정상황을 그 멍청한 인간도 알 것입니다. 아니면 뇌물을 좀 바치면 헬렐레하겠지요.”
“부친에게 원한이라도 진 것 같소.”
“아주 비열한 인간입니다, 레르마 공작이라는 자는.”
집안문제를 굳이 공개석상에서 거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정보국을 통해 내린 결론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분위기를 감지했다.
만약 고산국이 에스파냐의 적국이라면 부자지간을 이간질하는 정치공작을 통해 에스파냐를 더욱 나락으로 빠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고산국의 우방이라 해서 이 상황을 이용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브라질까지 합해서 금화로 7천만 에스쿠도, 어떻습니까?”
“에스파냐를 위해 일부러 채무를 반으로 줄여줬는데 그 이상을 요구하는구려.”
“구아노를 급히 채굴해서 따로 보관할 필요 없이 아예 구아노가 산처럼 쌓여 있는 땅을 사십시오. 국왕전하께서 포토시 은광 채굴권을 보장해주셨기에 나머지 땅을 그리 비싸게 부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민호는 마치 부동산 중개업자가 권하는 말을 듣는 것 같았다. 문제는 에스파냐의 현재 상태로는 7천만 에스쿠도 정도로 채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에스파냐 같은 강대국이 빚에 휘둘려 쩔쩔 맨다면 앞으로도 기회가 많았다.
“혜영이는 반대야?”
“멕시코와 알토 페루가 여전히 에스파냐 영토로 남는다면 남미를 얻어봤자 별로 쓸모가 없어요. 남미 대륙은 어떤 곳인가요?”
사실 혜영도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최근 들어서 유럽 배들이 태평양에 쏟아져 들어와 아무 섬에나 깃발을 꽂고 다녔기 때문이다. 어느 섬에서는 영토 표지석이 훼손된 경우도 발견됐다. 물론 그런 섬들은 고산국이 발표한 지도에 대부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영토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산국 백성들에게 이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무역선을 빙자한 유럽 탐사선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않는다면 본토 가까운 무인도에도 유럽 국가의 깃발이 휘날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다.
고산국 백성들에게 유럽인들은 잔인한 야만인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민호도 동남아시아를 유럽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런 인상을 강화시키긴 했지만, 유럽 해적 겸 상인들이 걸핏하면 보르네오 섬을 약탈해서 인상이 매우 나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고산국 건국 초부터 점잔을 빼면서 교역을 했기에 그나마 인상이 나았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거의 왜구나 도깨비 수준이었다.
“고원지대와 열대 우림이 펼쳐진 곳이야. 개척하려면 고생 깨나 하겠지.”
“나중이라면 몰라도 인구가 적은 지금은 무리에요. 게다가 남미는 개척민과 크레올, 흑인과 원주민들이 뒤섞여 사는 곳이라 관리하기도 벅차요. 자금 사정은 어때요?”
“매입자금이 부족하지는 않아. 어느덧 왕궁 지하 창고를 확장할 때가 됐는데 더 이상 넓혔다간 무너질 것 같아. 금으로 만든 기둥으로 지하 창고를 보강할까?”
금 2천 톤 정도야 반출해도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북미에 이어 남미도 만약 매입한다면 아예 개인 자금으로 살 생각이었다. 영토가 애매하게 국가 소유가 아닌 왕 개인의 소유라는 점이 개발과정과 이후 징세 문제에서 큰 장점으로 돌아왔다.
“주인님은 남미 영토를 매입하는 것보다는 그저 불안해서 금을 내놓고 싶으신 거군요.”
“모든 후궁들의 침대를 황금으로 바꿔주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그런 사치는 제가 용납하지 않아요.”
“알아, 알아. 그러니까 물어봐서 적당한 가격이면 싸게 사두자.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멕시코는 안 팔겠죠?”
이 시기 멕시코의 남쪽 경계는 파나마 북쪽, 현대의 코스타리카까지 확장돼 있었다. 만약 이민호가 적절한 시기에 북미를 매입하지 않았더라면 멕시코가 탐험대를 내륙에 보내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나, 네바다, 콜로라도, 캔자스까지 영역이 미쳤을 수도 있었다.
“국왕전하! 아무리 펠리페 3세가 지능이 낮더라도 멕시코는 아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동안 에스파냐에서 공들여 개척했다는 점도 감안해주십시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서 가질 생각도 없소, 공작.”
멕시코와 남미 북부 해안에 걸쳐 수많은 에스파냐 도시들이 건설돼 있었다. 그 거주민들만 해도 수백만에 달해 고산국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협상은 며칠을 끌었다. 알고 보니 사절단은 남미 대륙을 적당한 금액에 판매하는 협상에 관련된 전권을 이미 갖고 왔다. 이민호가 살 듯 말 듯 간을 보고, 혜영이 적절한 순간마다 사면 안 된다고 초를 치면서 에스파냐 사절단의 애간장을 타게 만들었다.
우세다 공작은 쓸모없는 남미 대륙을 팔아서 에스파냐 궁정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질 목적이었기에 반드시 팔려고 안달을 했다. 이런 좋은 조건에서 비싸게 사면 바보였다.
“별로 살 생각은 없지만, 우방국이 어려움에 처했으니 도와줘야 할 것도 같소.”
“이 땅은 고산국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사야 합니다.”
“공작 말씀은 고맙지만 문제가 많소. 특히 포토시의 은광 채굴을 위해 원주민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있는데 그 영역이 너무 넓구려.”
“그 영역을 줄이면 원주민들이 다 도망갈 겁니다.”
포토시 은광도 사버리면 좋겠지만 가격이 몇 배나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포토시에서 일하는 원주민 노무자 약 6만 명 중에서 부역 노동자, 즉 미타는 10분의 1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계약 노동 혹은 자유 임금 노동자들이었다.
멕시코처럼 페루에서도 이미 잉카의 부역 노동 체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바로 이 해에 페루 부왕이 매년 흑인 노예를 최대 2천 명까지 매입할 권리를 에스파냐 왕실에 요청한다. 수리남과 브라질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아직 흑인들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직전이었다.
“지금은 부역이나 고용이나 비슷하게 비용이 들어간다고 알고 있소. 만약 우리가 남미를 사게 된다면 원주민 부역 제도를 철폐하고 원주민들이 원하는 금액으로 고용하시오.”
“잘 아시는군요. 남미를 사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포토시 은광은 광맥이 마를 때까지 팔 예정이오?”
“저희들도 염치가 있습니다. 앞으로 딱 50년만 채굴하겠습니다.”
“30년이오.”
“예. 요즘 광맥이 말라가고 있으니 그 정도로 족합니다.”
은 생산량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1800년대까지 은을 캔 곳이 포토시였다. 거대한 산의 고도가 수백 미터나 줄어들 정도로 세로 리코 산 자체가 은광이었다.
“남미 지도를 가져오시오.”
예조에서 가져온 남미 지도는 정밀 측정한 지도를 빼고 일부러 대충 주요 지역에 위도와 경도만 찍어 간단히 제작한 지도였다. 괜히 고산국이 남미에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시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민호는 우세다 공작과 함께 자를 들고 국경을 그었다. 자를 아주 조금만 옮겨도 수만 평방킬로미터가 될 수 있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르면 브라질 국경은 서경 43도 37분이 아니오?”
“현실은 법이나 조약과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조약대로라면 포르투갈령 브라질은 아마존 하구에서 상파울루를 잇는 선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개척자들이 슬금슬금 경계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전하께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북동부 해안에 네덜란드인들이 개척하고 있으며 프랑스와 잉글랜드 탐험가들이 강을 따라 꾸준히 내륙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소. 포르투갈에게는 국경선을 지키라고 하시오.”
“포르투갈에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남미 북쪽의 국경은 어디로 설정할까요? 혹시 파나마 운하를 국경으로 정해서 운하 운영권을 고산국에서 가져가시겠습니까? 적당히 보상만 해주십시오.”
이민호는 얼씨구나 하고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다가 운하 운영에 필요한 인원을 생각하고 즉각 포기했다. 노동자와 군인 수천 명이 운하 하나에 묶이는 것은 고산국 입장에서는 큰 낭비였다.
============================ 작품 후기 ============================
이어질 내용입니다.
원래 계획에서 남미는 30년 전쟁 기간 중에 인수하려고 했습니다만, 태평양 도서지역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미리 인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