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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783화 (732/1,000)

00783  86. 1607년  =========================================================================

밑에서 바스락거리더니 어느새 몸이 결합됐다. 여름이라 침전에서 가볍게 입었다가 제대로 막지 못했다. 사실 막을 생각도 없었다.

“너 벌써 스물세 살이나 돼서 아직도 어리광이나 피우니?”

“헤엥~ 주인님 딱 한 사람한테만 이래요.”

나코가 이민호의 가슴에 딱 달라붙어서 숨을 쌕쌕거렸다. 어렸던 아이가 어느덧 다 커서 이제는 여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드센 여진족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고산국 국왕의 부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만으로 기죽지 않고 꿋꿋이 성장한 아이였다.

“그래도 왕이라 했으니 여왕은 안 된다. 둘 다 왕궁에서 살아. 나는 내 여자를 밖으로 내돌리지 않겠다.”

“네? 비올레타 님도 그렇고 아이슬란드 여왕님도 밖에서 사시잖아요? 물론 저는 주인님이 원하시면 왕궁에 남겠어요.”

이민호가 눈을 매섭게 뜨고 노려봤다. 그러나 두 손은 아이누 후궁의 엉덩이를 잡아 움직이고 있어 설득력이 많이 떨어졌다.

비올레타를 새강릉에 살게 한 것은 친정 식구들과 함께 살게 하려고 배려해준 면도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는 동시에 외국 이주민들이 많아진 북미 동해안 지역이 고산국에서 분리하려는 경향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이 핵심적인 목적이었다.

“그 두 사람은 예외다. 아이누 족장들의 후계자들 중에서 왕을 뽑으란 것은 능력이 좋은 사람을 통치자로 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야. 아이누 부족들을 통합시키기 위해서다. 너희들은 족장 후계자가 아니니까 자격이 없어. 네가 아이누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를 원한다면 임기제 총독 정도는 시켜줄 수도 있다.”

“저는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왕으로 선출된 자가 아이누들의 반란으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요? 부족들이 분열돼 있어서 이럴 때는 차라리 족장 후계자가 아닌 자들 중에서 뽑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너희들은 아니야.”

“그럼 주인님이 저를, 아니 저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직접 증명해보세요.”

“어쭈? 5분이면 나가떨어지는 주제에 까불어?”

활짝 웃는 나코를 발라당 눕힌 다음 더운 여름날 오전부터 땀을 흘렸다. 잘못했다고 반성할 때까지 아주 혼쭐을 내줬다.

주상아 공주가 만든 제모제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것 같았다. 어렸을 때 허벅지와 배 등에 수북하게 났던 털이 다 사라져 지금은 어딜 봐도 매끈했다. 그러나 몹시 마음에 든 듯 민망한 곳까지 너무 과용한 경향이 있었다.

결국 마음이 급해진 이민호가 직접 아이누 섬으로 움직였다. 출발하는 날 삿포로의 총독부에서 전체 아이누 족장과 그 후계자들을 소집했고, 이민호가 도착한 날 바로 회의를 열 수 있었다.

아이누 섬 동쪽의 농업연구소 분소에서 무선통신이 가능했다. 그리고 아이누 족장들이 말을 탈 줄 알게 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소집이 가능했다. 페르가나 말은 아니었지만 전시에 동원할 목적으로 전마로 쓰기에 충분히 큰 말을 농업과 수송용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했다.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소. 그래서 그 동안 시간도 주고, 젊은 후계자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도 충분히 주었소. 그러나 문제가 생겨서 이렇게 내가 직접 오게 됐소.”

파란색 바탕에 흰색 혹은 붉은 색 천을 덧대 멋을 낸 전통 복장을 입은 아이누 족장들은 국왕이 겸손하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민호의 턱수염이 짧다는 이야기였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아이누라면 다들 머리 크기 이상으로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다. 고산국 왕도에서 대학이나 사관학교를 졸업한 족장 후계자들도 수염 길이만큼은 족장들에 비해 짧지 않았다. 그래서 20대와 50대를 구별하기 어려웠다.

“저...... 두 분 여왕님이 통치를 아주 잘하십니다. 게다가 대왕님의 후궁들이니까 안심하고 맡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 아이누 족장이나 후계자들 중의 하나가 아이누 왕이 된다면 다른 부족들이 불만을 품을 것입니다.”

눈치를 한참 살피던 족장들이 조심스럽게 반론을 펼쳤다. 족장들의 표정을 보아 하니 후궁들의 통치력을 믿고 있는 듯했다.

“내 후궁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이누 섬 경영에 참여해왔기 때문에 족장의 후계자들과 직접 비교할 수 없소. 그리고 스스로 통치할 지도자 하나 못 뽑는다면 아이누가 독립할 자격이 있겠소? 내가 왕도로 돌아가면 족장들이 다시 모여 차분히 지혜를 모으도록 하시오.”

“여왕님들이 안 된다면 대왕님께서 앞으로도 쭉 아이누 섬을 맡아주십시오. 예전처럼 우리끼리 싸우게 될까봐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그게 제일 낫습니다. 지금까지 대왕께서 잘 해오셨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십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이민호 입장에서 매우 골치 아픈 소리를 아무렇게나 쉽게 지껄이는 족장들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해달라고 해서 더욱 얄미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지난 15년 동안 아이누들은 아주 편하게 잘 지냈다. 아이누 섬에는 전쟁도 없고 부역도 없고, 심지어 세금도 없었다. 농업연구소에서 땅을 개간할 때 한 달에 며칠씩 도와주면서 일당을 받아, 그 돈으로 생활을 편하게 해주는 신기한 물건을 사고도 남아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특별히 추웠던 3년 동안에는 농작물이 전혀 자라지 않았지만 고산국에서 나눠준 곡식과 물고기만으로 여전히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공짜로 받는 게 미안해서 농업연구소 일을 도와줬더니 임금을 더 많이 받아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 풍요롭게 살게 됐다.

아이누 섬에서는 농업연구소의 주도로 북쪽과 서쪽, 그리고 동쪽에 펼쳐진 대평원을 농지로 개척하고 있었다. 몇 년 개간하고 보니 식량은 이미 남아돌았고 얼마 전에 시작한 목축으로 소와 양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산아저씨의 눈치를 보면서 위험한 산에서 사냥할 필요도 없었다. 농업연구소의 일을 도와주거나, 곡식과 연어 말린 것을 외국에 팔아서 남는 돈으로 넓고 따뜻한 2층 석조 건물을 짓고 살았다. 무수히 많은 하천에 수력발전소를 세운 탓에 마을과 집집마다 전기도 들어왔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늙은 주술사들, 그러니까 역사 선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옛날에도 아이누들이 지금처럼 편하고 배불리 살던 때가 없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아이들 이름 짓기가 아이누들 사이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이누의 아이들은 역신을 피하기 위해 더러운 동시에, 세상에서 유일한 이름을 지어줘야 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 아이들에게 걸맞은 더럽고도 유일한 이름을 찾아서 짓기 어려웠다.

위생을 위해 따뜻한 물에 자주 씻고 마을 주변에서 쓰레기장이 사라지면서 더러운 이름을 만들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똥꼬나 겨드랑이, 발가락 사이나 사타구니는 더 이상 더럽지 않아 아이들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대로 편하게 살려면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단 말이오. 아이누 섬이 인구는 적은데 아이누 총독부에 인원이 가장 많이 배치됐소. 대부분이 아이누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오.”

“그래도 경험이 적은 아이누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고산국 관리들이 훨씬 일을 잘합니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말이오! 아이누 사람이 아이누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 하오!”

아이누 사람들이야 편하겠지만 고산국 입장에서는 행정 역량의 낭비라는 문제에 부닥쳤다. 아이누 섬은 고산국과 문화가 전혀 다른 아이누 족들의 터전이며, 공적인 일 대부분을 총독부에 맡기는 바람에 인구가 열 배나 많은 다른 지역을 다스리는 것과 거의 맞먹는 만큼의 노력이 들었다.

아이누 사람들이 어려운 일은 죄다 고산국과 총독부에 다 떠맡긴 채 유유자적하는 것이 이민호 마음에 영 안 들었다. 현재 아이누 전 지역이 전통과 합리의 교차점을 찾아 잘 발전하고 있는 만큼 언제까지나 고산국 품안에서 키울 수는 없었다.

아이누 섬이 고산국 나머지 지역과 다른 점은 토지 소유 제도에 있었다. 아이누들이 옛날부터 살아왔기 때문에 집과 밭, 일부 산들이 개인 혹은 마을, 또는 부족 소유로 돼 있었다. 농지가 넓은 대신 인구가 적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적은 토지이용형 농법을 주로 하면서 농가당 생산량이 충분히 높은 편이었다.

농업연구소의 주도로 새로 개간한 지역은 왕토로 선언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지를 강제로 왕토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경제적인 면에서 무척 복잡해서 차라리 자치제를 확대시키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아무리 속국이라도 기본적인 행정, 경찰과 해안경비, 소방 업무나 의료 정도는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아이누 사람들은 귀찮다면서 그런 일은 하려고 들지 않았다. 족장들이 총독부의 일을 도와준다기보다는, 총독부가 족장들을 돕는 식으로 분위기가 돌아갔다. 고산국에서는 더 이상 아이누 섬에 행정 인력을 지원해줄 수 없었다.

“내 후계자들 중에서 바보나 폭군이 서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최소한 기본적인 자치정부를 만들어놓아야 외부의 학정으로부터 버틸 수 있을 것이오.”

“고마운 고산국인데 학정 좀 펼치면 어떻습니까? 나쁜 국왕이 즉위했다가도 다음에는 다시 좋은 국왕이 통치하겠지요.”

그러나 족장들은 이민호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아이누들의 왕이 되어줄 것을 강요하는 족장들을 설득하느라 아주 혼이 났다.

그 와중에 족장들 사이에서 임진년부터 이민호를 아이누의 왕으로 모셨는데 이제 와서 배반할 수 있느냐는 비난까지 터져 나왔다. 아이누들은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아서, 아이누의 현재를 만든 이민호라도 현 상태를 바꿀 위험이 있다면 비난할 기세였다.

“우리 툭 까놓고 이야기합시다.”

흰색 원수 예복을 입고 온 이민호가 위쪽 단추 두 개를 풀었다. 족장들도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어 장기간 토론에 대비했다.

“지도를 보시오.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계자들이나 어린 학생들은 이미 봤겠지만 이것은 아이누 섬과 주변을 그린 지도요. 남쪽에 일본 혼슈, 북쪽에 사할린 섬, 서쪽에 동해국이 있소. 바로 이곳이 지금 회의가 열리는 삿포로요.”

“예. 그 지도는 총독부나 농업연구소 분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 세계를 그린 지도요. 이곳이 고산국 왕도가 있는 섬이오. 이곳이 조선, 이곳이 일본 혼슈, 이곳이 동해국, 바로 이곳이 아이누 섬이오. 동쪽에 북미와 남미 대륙, 서쪽에 유럽과 아프리카가 있소.”

“아이누들의 섬이 이렇게 작을 줄 몰랐습니다. 고산국 영토가 상상 외로 넓습니다.”

족장들이 풀이 죽었다. 아이누 섬이 고산국 전체 영토의 4분의 1쯤은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극히 좁은 영역에 불과했다.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고산국 입장에서 아이누 섬은 그리 중요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족장들이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족장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세계 지도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아이누 섬의 위치를 보시오. 태평양 북서쪽에 있소. 그런데 이 넓은 태평양 전체가 에스파냐의 식민지인 멕시코를 제외하면 고산국의 영토 안쪽에 있소.”

“아! 그렇다면 우리 아이누들은 안심해도 되겠습니다. 대왕의 슬하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지도를 보여준 뜻을 알아먹은 족장이 극소수나마 있었다. 다른 족장들은 무슨 소린지 몰라 그 족장에게 물어봤으나,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입을 다물었다. 이민호가 직접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맞소. 나는 태평양을 안전한 내해로 삼아 바다 주변의 고산국 영토들을 편히 관리할 계획이오. 그러니 아이누를 속국에서 벗어나지 않게 할 것이오. 아이누는 앞으로도 영원히 독립할 꿈도 꾸지 마시오.”

“그런 꿈을 꿀 생각도 없습니다. 대왕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아니, 화라도 내지 말이오. 다른 나라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나라를 팔아먹었다거나 민족 반역자 소리를 들을 것이오.”

아무리 강한 나라가 종주국이라 해도 가끔은 이익이 충돌하고, 사안에 따라 속국이나 식민지가 종주국에 반발하게 돼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대영제국 소속이었던 식민지들은 대부분 독립했다. 카리브 해 연안의 아주 작은 섬들도 독립을 꿈꿨다. 명목상 종주국과 속국인 중국과 주변국들도 마찬가지로 국경이나 무역 이익을 두고 심심할 때마다 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고산국과 아이누 섬은 이익이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다. 동쪽 평원의 대부분이 왕토, 즉 고산국 농업연구소 소유로 들어갔어도 아이누 섬은 아직 충분히 넓은 미개간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업도 내수면 연어 어획에 그쳐서 예전에는 일본 어민들이 아이누 섬 주변의 어장을 독차지했었다.

============================ 작품 후기 ============================

내용이 더 이어질 예정입니다.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 한 편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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