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87 87. 1608년 =========================================================================
지난 8월에 인도 북서부 구자라트의 무역항인 수랴푸르, 현대의 수라트 항구에서 최초로 공식적인 잉글랜드 대표부가 개설됐다. 대표는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윌리엄 호킨스 선장이었으며, 국왕 제임스 1세의 특사로서 국서를 무굴 제국 황제에게 바치고 답서를 받아오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현재 인도 서부에서는 포르투갈이 무굴 제국의 주요 항구인 수랴푸르를 중심으로 100년 가까이 무역을 독점하는 중이었다. 바로 이곳을 몇 년 전부터 네덜란드와 잉글랜드가 비상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개척 위주인 식민지인 브라질 빼고는 항상 그랬듯이 교역만 방해하지 않으면 현지 주민들과 그럭저럭 잘 지내는 편이었다. 유럽인 침략자치고는 그렇다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가진 것이라곤 돈보다 화약이 더 많아서 교역하기 전에 일단 총이나 대포부터 먼저 쏘고 봤다. 그러나 수랴푸르에 입항한 잉글랜드 상선들은 생각보다 얌전했다.
향신료나 보물을 가득 실은 상선들이 유유히 주변 바다와 타프티 강 하구를 오가는데도 놀랍게도 잉글랜드 뱃사람들의 악명에 걸맞지 않게 해적질도 하지 않았다. 그 항구에 이미 포르투갈이 요새를 지어놓고 육지는 물론 바다로부터의 침략에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랴푸르는 네덜란드나 잉글랜드가 아니라 포르투갈이 1512년과 1530년에 두 차례에 걸쳐 황폐화시킨 적이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전설적인 도시이며 파르시, 즉 페르시아 출신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이란을 정복한 무슬림들의 박해를 피해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정착한 곳이기도 했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인도에 도착해서 침을 흘리고 있는데도 가만히 지켜만 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야.”
“인도는 인구가 너무 많죠?”
“공식 발표보다, 추정치보다 몇 배 많을 거야. 인도는 그래.”
이민호가 인도에 대한 개입을 포기하자 혜영이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이민호는 피식 웃었고, 혜영은 토라져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이민호는 군사적인 정복도 아니고 그저 약간의 대화나 거래, 혹은 경제적 지원을 통해 영토를 쉽게 쉽게 넓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영토가 편입되면 그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예방 접종하고 교육시켜야 하는 일은 대부분 혜영에게 떨어졌다. 물론 잘 되면 국왕인 이민호가 그 지역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지금까지 혜영은 내조를 아주 잘했다. 전문적인 관료에게 맡길 필요가 없을 만큼이 아니라, 오히려 관료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앞으로도 웬만한 일은 모두 다 혜영에게 떠맡길 작정이었다. 그런 의도를 얼굴 표정만으로 알아챈 혜영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험! 험! 미카! 포르투갈이 장악한 도시에 잉글랜드 상선들이 평화롭게 입항해 있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다.”
“예상하신 대로여요, 주인님. 잉글랜드 상선들이 더 많이 찾아올수록 항구에 불안감이 점증할 거여요. 최근 인도에 포르투갈 병력이 증강되긴 했으나 필요한 만큼 포르투갈 본국에서 충분히 보내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에스파냐 출신 귀족들이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보내주는 돈은 좋아해도 돈을 써서 방비하기는 싫은 거겠지. 결국 수랴푸르 항을 잉글랜드에게 내주고 인도에 대한 무역 독점권도 잃게 될 거야.”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수랴푸르 항구에서는 조만간 누가 진짜 주인인지 결판을 낼 것 같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요.”
“인도인들의 땅에서 외국인들이 주인을 논하다니, 참 너무한다.”
이민호가 걱정한 것처럼 결국 싸움은 일어나게 돼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1612년에 수랴푸르 항구 근처에서 잉글랜드 갈레온 네 척이 포르투갈 나우 네 척과 비무장 바르크 26척을 상대로 맞붙은 작은 해전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한다.
해전에서 유일하게 침몰한 배는 소형 바르크 한 척이었다. 한밤중에 화선으로 습격하려고 잉글랜드 배들에 접근하다가 대포에 맞아 침몰했다. 항구 안에 포위된 채 선원들이 밤에도 자지 못하고 주변을 살핀 덕택이었다.
“포르투갈의 방해로 교역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 버틸 거래?”
“국서를 휴대한 특사라는 사정이 있잖아요? 잉글랜드 선장이 무굴 제국 황제에게 바친 잉글랜드 국왕의 국서에 대한 공식적인 답서를 얻을 때까지 있을 거래요. 하지만 포르투갈 사람들이 은근하고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어요. 해적질이나 개인적인 암살로 보이게끔 말이에요.”
“호킨스 선장이 잉글랜드에서 출발할 때 황금 2만 5천 매를 자금으로 가져 왔다고 했지?”
“예. 바로 그것이 소문나는 바람에 포르투갈이 공식적으로는 잉글랜드 상선을 보호해줘도, 남들이 안 볼 때는 계속 공격을 시도하고 있어요.”
호킨스 선장 개인이 암살 시도를 여러 번 겪었고, 결국 황금도 포르투갈 해적인지 아닌지 모를 자들에게 다 빼앗긴다. 이후 선장과 선원들은 2년 동안 머나먼 인도 항구에서 버텼음에도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게 됐다. 제임스 1세가 자한기르 황제에게 보낸 국서의 회답도 받지 못했다.
잉글랜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지 8년이 넘었다. 그러나 소속 탐험선들이 동인도 해역으로 위험한 항해를 계속했음에도 이익을 남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원래 1609년에 특허 기간이 끝나고 교역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없으면 완전히 해체하려고 했다가, 기한을 1612년 말로 3년 연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해의 마지막 탐사단 네 척이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투자자들의 염원을 안고 1612년 1월 1일에 출항한다.
이 열 번째 탐사선단이 포르투갈과 싸워 이긴 다음 거의 연말에 가서야 무굴 제국의 구자라트 주지사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포르투갈 선원들이 평소 메카순례자들을 핍박했던 죄과를 고스란히 받은 셈이었다. 탐사단을 이끈 토머스 베스트 선장이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조약을 비준하겠다는 편지를 받은 것은 1613년 1월 6일이었다.
“머나먼 곳의 일인데 정보국이 아주 잘하고 있다.”
“아체의 여제독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오호! 그 여제독님 참 대단한 분이었지. 여전하시군.”
항공대장 이면이 결국 여제독의 딸을 첩도 아닌 본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부친 이순신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할머니가 우시며 말리는데도 이면은 당당하고 차분하게 설득했다고 한다.
이면이 모친의 허락을 받아 조선에서 돌아왔을 때는 눈두덩이 퍼렇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모친께 허가를 받았다고 좋아했다.
“아체의 여제독이 강할까, 아니면 항공대장의 어머니, 그러니까 총함장님의 부인이 강할까? 아! 아냐. 못 들은 걸로 해줘.”
호랑이 같은 여걸들이라서 이민호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혜영과 미카가 여우같은 웃음을 지어서 등골이 아주 서늘했다.
“에. 정보국 해외부의 인원을 보강해달라고 했지? 그렇게 해. 하지만 내가 평소에 강조했듯이 직원들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캐지 말고 현지인들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거야. 알았지? 그 나라 정치에 간섭했다는 비난을 들으면 절대 안 돼.”
“네, 주인님. 고마워요. 조금 전에 아무 것도 못 들었어요.”
미카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나 혜영은 워낙 큰돈을 움직이기에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어 이민호가 벌벌 떨었다.
“별 것 아니에요. 일요일에는 가족들과 함께 있어주세요.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에요.”
“음. 내가 가장이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쓸데없이 일요일에 일을 들고 오는 인간들이 있단 말이야.”
부친, 총함장 이순신, 육군총사령관 계복, 항공대장 이면 등이 일요일에 일을 만드는 사람들이라 이민호가 쉽게 거절하지도 못했다. 부친과 총함장 이순신은 조선에서 더 많은 인생을 보낸 옛 사람들이라 일주일 체제를 지켜달라고 요구하기도 어려웠다.
조선에서 관리들은 왕실의 제삿날이나 가문의 제삿날을 휴일로 삼았다. 물론 제사를 지내거나 참가해야 했기에 가족과 함께 편히 쉬는 온전한 휴일이 될 수가 없었다.
“놀이공원은 아직 개장이 멀었어? 가족들과 다 함께 가보고 싶다.”
“괜히 청룡열차라는 것을 만드느라 어렵게 됐잖아요. 아이들이 타는 기구니까 안전에 특별히 유의해야 해요.”
“그건 개장 후에 완성해도 되는데 말이야.”
괜히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이민호가 전면에 나서서 설쳤다가 놀이공원 개장일만 늦춰지게 됐다. 그 와중에 놀이공원 안의 여러 가지 시설이 사진에 찍혀 신문에 보도되는 바람에 각 도시 어린이들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만들었다.
여러 지역의 거점도시별로 디즈니월드보다는 못하겠지만, 이 시대에 그에 버금가는 진짜 놀이공원을 만들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어린이들보다 청춘남녀들이 더 자주 이용할 것 같았다.
드디어 남아프리카에서 금이 발견됐다. 그것도 아주 대량으로 발견됐다. 바위를 뚫고 들어가는 동굴 같은 금광이 아니라 땅거죽을 걷어치우자마자 누렇게 드러난 두터운 금맥이 아프리카 남동부에 넓게 펼쳐져 있다고 했다.
자원탐사대 여섯을 보냈더니 이민호가 지도에서 대충 찍어준 곳에서 모조리 다 금맥을 발견했다. 그것도 한 탐사대에서 금맥 서너 곳을 발견하고, 물을 구하려고 오다가다 또 두세 곳을 더 발견했다. 이 금맥들이 다 연결됐는지 확인하는 중이었으나 지질구조가 복잡해서 단순한 조사만으로 판별하기 어려웠다.
“이게 시험 삼아 정련한 거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급히 보고하느라 일부만 가져왔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금맥을 찾으라고 보낸 자원탐사대에서 금 10톤 가량을 정련해서 왕궁으로 가져왔다. 아직 본격적인 채굴을 하기도 전인데, 너무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금광석을 분쇄해서 금을 뽑으려면 육중한 기계설비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주변 강에서 순금 형태로 채굴된 금덩이들을 모아 녹여서 형태만 갖춘 것뿐입니다.”
“나뭇잎 구성 성분이 금과 원자 단위로 대체된 것도 있구려. 주변에 흑인 마을은 없었소?”
현세의 식물이 아닌 듯 커다란 나뭇잎 형태의 금이 액자 안에 담겨 있었다. 국왕 진상품이라고 이렇게 멋들어지게 포장까지 해왔다. 마치 캐나다에서 발견된 커다란 단풍잎 모양의 금 같았다.
혜영이 그 순금 나뭇잎에 매료돼 있어서 팔을 쿡 찌른 다음 눈을 찡긋해주었다. 혜영이 금이나 보석을 밝히는 여자가 절대 아니었지만 순금 나뭇잎을 주겠다는 이민호의 표현에 혜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교육용으로 쓸 거여요. 얼마 전에 최 선생이 이런 물건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거든요. 도시마다 학교마다 들고 가서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자연현상의 아름다움을 말이에요.”
역시나 이민호보다 혜영이 더 제대로 된 지도자였다. 백성들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는 이민호가 아니라 혜영이었다. 머쓱해진 이민호가 잠시 우물쭈물하는 자원탐사대원에게 발언을 허락했다.
“예. 바로 얼마 전까지 노예사냥꾼들이 쓸고 갔던 곳이라 흑인 마을이 거의 없습니다. 노동력이 많이 필요할 텐데 걱정입니다.”
“아! 포르투갈이 노예 시장용으로 항구 요새를 건설했다가 폐쇄한 곳에 가깝소. 쯧쯧!”
아프리카의 자원은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쓰기로 아프리카 왕국을 건국하기 전부터 므부투와 합의했었다. 그러나 유일한 예외가 고산국에서 아프리카 왕국의 건설을 도와주면서 반대급부로 받을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이었다.
고산국에서 지정한 일정한 지역에서 산출되는 지하자원은 온전히 고산국의 것이었다. 이민호가 기억하고 있는 요하네스버그 주변 지역이 맞다면 예상외의 대규모 금광 지역을 고산국이 갖게 된다.
그러나 많은 일을 하면서 자금난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왕국에도 일부를 넘겨줄 예정이었다. 이민호는 매정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너무 많이 퍼준다고 주변인들을 걱정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프리카 왕국은 유럽인이나 노예사냥꾼들과 전면에서 싸우는데 우리는 안전한 남아프리카에서 금이나 캐고 있으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드는구려.”
“계약에 의거한 합당한 결과일 뿐입니다. 심려치 마옵소서, 전하!”
아프리카 왕국 건국 전부터 거의 무제한이라고 할 만큼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해준 다음 이제야 자그마한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아프리카 왕국을 지원해주도록 지시한 이민호도 이제 조금 체면이 서게 됐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아직 금광 몇 곳과 특히 다이아몬드 광산이 남았다. 다이아몬드 광산도 세밀한 조사를 거쳐 시험 채굴을 할 예정이었다.
“참! 유럽 은행에 연말까지 보낼 순금 물량이 10톤 부족해요.”
“이, 이걸 보내면 되겠네. 유럽 은행이 흑자 도산할까봐 김수공이 몹시 걱정했었는데 잘 됐다.”
금이 왕궁에 들어오자마자 단 며칠도 못 버티고 고스란히 바깥으로 실려 나가게 생겼다. 요즘 고산국은 금 보유량이 전체적으로 줄어들어 몹시 허덕이고 있었다. 전 세계가 고산국 금화를 화폐로 쓰는지 아무리 주조를 해도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굴 제국에서 매 분기별로 대량으로 수입해 갔다. 무굴 제국은 16세기 중후반에 은화를 대량 발행하면서 부족한 은을 명나라에서 수입해, 명나라에 잠시나마 은 품귀현상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금을 가져와서 금화를 사주면 좋겠지만, 금화를 수입하면서 결제하는 것은 항상 은이나 다른 상품이었다. 고산국의 재산은 시시각각 불어나고 있었지만 금으로 결제해야 할 경우가 많아 항상 부도 직전이었다.
“금은 부족하게 돼 있어. 늦기 전에 신용 화폐로 전환해야 된다니까!”
“그까짓 종잇조각을 누가 믿겠어요? 아직은 현물이어야 한다니까요.”
남아프리카 금광 덕분에 당분간 재정위기는 사그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커지면 화폐에 대해 전면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금본위제로 금태환 지폐를 발행하면 언젠가는 금본위제 자체가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금본위제를 시행하는 나라들과 무역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어찌 됐든 문제를 피하려다가 더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화폐는 그저 교환의 매개수단에 불과해야 해.”
“그 신용을 줄 수 있는 나라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 고산국이라면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김수공이 말했어요.”
“정말이지?”
“한 300년 후에요.”
혜영의 농담에 이민호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 금광 덕택에 급한 불은 끄게 됐다. 여차 하면 은행을 파산시킬 생각도 했었는데 앞으로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디플레이션을 의도적으로 일으킬 수는 없었다. 불경기에 고통 받고 좌절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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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하루를 빼먹을 수 없어서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