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89화 (738/1,000)

00789  88. 1609년  =========================================================================

88. 1609년

“끼야아아아~”

배 모양을 한 커다란 놀이기구가 그네처럼 앞뒤로 오르내렸다. 그 기구에 탄 여자들과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남자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표정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놀이공원에 새로 만든 기구가 많았고, 그래서 연초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예전에 이민호가 기억하는 모든 것을 놀이공원에 재현해 놓았다. 제트코스터, 흔히 청룡열차라 부르던 것도 기어코 만들었다. 안전문제에 대한 우려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운영 중에도 여전히 불안해하는 시선이 적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내지르는 즐거운 비명 속에 묻혀 버렸다.

“저것이 주인님이 설계하신 청룡열차인가요? 무서울 것 같아요.”

“그래. 좀 무서우니까 애들은 나중에 타는 게 좋겠다.”

오전에 사람이 적은 시간에 왕실 가족들이 단체로 타기로 했다. 그러나 줄은 끝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국왕과 왕족 경호를 한다는 핑계로 특별히 새치기를 했다.

놀이공원에 놀러온 사람들이 기쁘게 양보해줬다. 청룡열차를 만든 사람이, 그것도 국왕이 타보겠다는데 양보해주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전하께서는 얼굴 표정을 왜 그리 찡그리고 계시나요?”

“무서운 건 절대 아냐. 암!”

이민호와 후궁들이 줄을 지어 청룡열차에 올라탔다. 이민호는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후궁들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타고 말았다. 안전 철봉이 양 어깨에 내려오고 직원들이 제대로 결속됐는지 확인하는 동안 얼굴이 점점 허옇게 변했다.

“남자가 이런 일로 겁을 먹어요?”

“어머? 아예 말씀을 못하시네.”

“주인님 이 악문 것 좀 보세요. 귀여워요.”

기차가 오르막을 천천히 올랐다. 온통 파란 하늘이 이민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시야가 점점 내려와서 멀리 아리수 강 건너편 방직공장들이 보인다고 느끼는 순간, 기차가 내리막길로 달리면서 속도를 높였다. 열차 바퀴와 철로가 마찰을 일으키며 굉음을 울렸다.

“꺄아아아아~”

이민호는 심장을 압박하는 중력 때문에 괴로웠는데 후궁들은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이민호는 청룡열차의 속도가 너무 빠르며, 진동이 심하고, 철로 주변에 심어진 나무에서 뻗은 가지가 사람 얼굴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다.

이민호는 겁이 좀 많았다. 청룡열차가 정해진 코스를 다 돌고 속도를 줄일 때까지 눈을 질끈 감았다.

“와아! 국왕전하 만세!”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서 내려오는데 차례를 기다리던 백성들이 마치 개선식 때처럼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백성들이 왜 그리 기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민호는 청룡열차에서 내린 것이 그저 기뻐서 백성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함성이 더 커졌다.

“왜 저리 좋아하는 거야?”

“그야 국왕전하도 행락객들처럼 놀이기구를 즐기니까요.”

혜영이 이민호의 팔짱을 끼는 척하면서 부축해줬다. 조금 전에 아주 미세하게 휘청거렸던 것을 혜영이 알아차린 것이다.

“국왕도 탔으니까 안전하다고 여긴 거겠지.”

“그런 면도 있어요. 어쨌든, 경제도 중요하고 국방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이 즐겁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즐거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지.”

“그렇게 되고 있어요.

혜영이 활짝 웃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혜영이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청룡열차에서 방금 막 내려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나무로 만든 이상한 배에 타게 됐다. 계속 혜영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을 때까지 놀이공원 직원들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배가 뒤로 확 빠졌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엄청난 속도로 나아갔다. 파란 하늘이 다시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전혀 원하지 않았던 바이킹, 고산국 이름으로 해적선에 탄 것이었다. 이민호는 바지가 젖지 않기만을 바랐다.

오후에는 오랜만에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샀다. 후궁들은 새로운 옷과 물건에 정신이 팔렸고 아이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녀서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 층 단위로 다른 손님들을 입장 금지 시켰다. 하도 정신이 없다 보니 그 동안 사적인 영역에서는 결코 남용하지 않았던 권력을 마구 휘두르게 됐다.

“주인님! 이 옷 어때요? 예쁘죠?”

“응. 민영이 예뻐. 진짜 좋아. 아름다워.”

“별로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요. 다른 걸로 골라 볼게요.”

“왜에에?”

“전하! 제가 고른 옷은 어때요?”

“글쎄. 아까 그 파란 옷이 좀 더 나을 것 같은데? 새똥아! 진열된 옷을 얼굴에 문지르면 안 돼!”

“어머! 아까 제가 입었던 옷을 기억해주시는군요. 아이 좋아라~ 그럼 저는 이걸로 할게요.”

여자와 함께 쇼핑을 갖다오면서 남자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가까운 친척이 사망한 것 이상의 강도라고 들었다. 남자는 말 자체를 중시하지만 여자가 대화할 때는 말 외에 여러 가지 비언어적 정보로 얻어 판단한다. 그렇게 남자와 대화 방법이 다른 여자 수십 명을 상대하고 틈틈이 애들을 봐줘야 해서 이민호는 미칠 것만 같았다.

왕실 전체 식구들 중에서 겨우 4분의 1에 해당하는 후궁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과 백화점에 다녀온 날 저녁, 이민호는 완전히 녹초가 됐다. 그리고 앞으로 3주 더 일요일마다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목욕할 때도 축 늘어졌고 식사할 때는 아예 눈을 감고 있어서 후궁들이 떠먹여줘야 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 생전 처음으로, 아니면 두 번째로 밤에 그냥 잤다. 후궁들이 쑥덕쑥덕 말이 많았고, 이민호에게 남자의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지 의심을 샀다. 다행이 다음 날 아침에 지난밤 미뤄둔 숙제를 마침으로써 그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1월부터 에스파냐에서 ‘바스크 마녀 재판’이 시작됐다. 마녀 재판이 흔히 그렇듯 죄 없는 여자들을 핍박하는 마녀 사냥인 줄 알고 후궁들이 몹시 분노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 진행되는 재판의 조사보고서를 입수한 다음 다들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마녀 재판을 빙자한 여성 혐오 관습의 관철이나 영주에 의한 재산 약탈, 혹은 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정치적 목적은 없는 것으로 판별됐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되는 재판은 마녀 사냥이라고 하긴 애매하고, 로마가톨릭이 국교인 에스파냐에서 국교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도 있는 이교도 재판이라고 봐야 했다. 다행이랄까, 흔히들 상상하는 것처럼 교황청에서 성직자들에 의해 피의자에 대한 잔악한 고문과 처형 위주로 무지막지하게 진행된 재판은 아니었다.

반대로 국왕에 의해 정식 임명된 재판관들이 정식 재판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조사한 다음 판결을 내렸다. 비록 중간에 광신적인 조사관들이 고문을 해서 어린이나 남자들까지 마녀로 만들었지만, 정식 재판정에서는 피의자들이 진술을 번복할 기회를 가졌다.

중앙집권적이며 계층적 재판 제도가 확고히 자리 잡은 에스파냐 같은 곳에서는 예전부터 마녀 재판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녀로 판별돼 처형당한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반대로 300곳 이상의 정치 단위가 저마다 법전을 보유했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가장 많은 마녀 재판이 열렸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영국의 경우 지방 유력자들이 재판을 맡았던 임시 법정에서는 피의자 91퍼센트를 처형한 반면, 에든버러의 최고 재판소에서는 사형 판결을 내린 비율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영국 국왕이 임명한 순회재판소에서는 사형 판결 비율이 겨우 16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런 에스파냐에서 대규모 마녀 재판이 진행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봐야 했다. 바스크 전설에서 기후를 관장하는 마리 여신에 대한 열광적인 숭배 현상이 바스크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지며 종교적 현상이 됐고,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 했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소르기나크는 마리 여신의 보좌역이며, 또한 바스크어로 마녀를 뜻하는 단어였다. 나바레 인근 로그로뇨에서 열린 이 대규모 재판에서 비슷한 건으로 최종적으로 거의 7천 건이 조사됐다.

부적을 치료 목적에 사용한 몇몇 성직자들도 이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은 몇 년을 끌 것으로 예상되며, 아직 최종 판결이 나온 사례는 없었다.

3월에 네덜란드 법학자 그로티우스가 라틴어로 <자유로운 바다>, 즉 <항해의 자유>를 출간했다. 이 책은 자연법에 기반을 둔 국제법의 효시로 유럽 학계에서 절찬을 받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초판본을 입수한 이민호는 즉시 번역을 시켰다.

언어 능력이 출중한 최 선생은 능숙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중세 유럽 대학생만큼 라틴어를 구사했다. 실제 번역은 유럽 출신 교수들에게 나눠서 맡겼더라도 마지막 원고 교정은 최 선생이 담당했다.

그러나 번역된 책을 읽던 이민호는 도대체 이해가 안 돼서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초등학생들도 이해하기 쉽게 책을 만드는 최 선생이 번역을 주도했기에 번역체라서 따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국 이민호가 최 선생을 불렀다.

“번역을 아주 매끄럽게 잘 끝낸 것 같소. 인간의 본능에서 유래한 공정한 재산권에 기초로 동산과 부동산을 구분하는 문제를 한참 설명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소. 요약해서 설명해주시오.”

“네. 그로티우스는 네덜란드 사람이에요. 동인도라고 부르는 여러 나라와 보다 자유롭게 무역을 하고 싶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포르투갈에 동인도 지역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효로 만들고 싶어 해요. 그 근거는 부동산인 토지와 부동산이 아닌 바다를 비교하는 데에 있어요.”

이 시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민호는 영해와 접속수역과 배타적 경제 수역 EEZ, 그리고 대륙붕 협약 등 세상의 모든 국가들이 바다를 나눠 먹기에 혈안이 된 시대를 살다 왔었다. 그리고 내수면도 개인이나 단체가 소유하거나 점유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시대에 살았다. 그가 보기에 바다는 토지처럼 부동산이나 진배없었다.

“그게 그거 아니오?”

“새로운 토지는 울타리를 치거나 관청에 등록함으로써 소유가 가능하잖아요? 물론 일정 기간 점유했다는 시효도 필요해요. 하지만 바다는 깊어서 울타리를 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누구도 점유하지 못하기에 바다는 모든 이에게 공유될 수밖에 없다, 즉 누구나 자유롭게 항해하고 교역할 수 있다는 주장이에요.”

“그러니까 포르투갈은 네덜란드 배가 아시아 바다로 들어가서 교역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그런 주장이오?”

“요약을 잘하시네요. 맞아요. 하지만 반대로 잉글랜드는 국제 무역에 참가하기에는 자격이 모자란다고 주장해요.”

남이 가진 기득권을 부정하고 자기가 가진 기득권을 지키려는 네덜란드의 의도가 그로티우스의 학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요구하는 현 상황에 유리한 법적 논리를 만들려다 보니까 자체적으로 모순이 생기고 말았다.

“욕심이야 뻔하지만 꽤나 그럴 듯하오. 어쨌든, 이 학설이 국가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폭넓은 지지를 받을 경우에 대비해야겠소.”

“예. 이 학설이 국제적으로 통용될 경우 우리에게 불리해요. 아이슬란드와 북미 북동쪽 해안의 어업권과 관련돼 있으니까요.”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겠소?”

“우리는 해안선에서 일정한 범위의 바다를 영해로 두고 그 바깥으로 확장된 바다를 경제 수역으로 묶어두는 편이 유리해요. 그런데 영해는 비교적 간단히 설정할 수 있고, 이 주장이 바다로부터의 침략을 두려워하는 여러 나라에 먹혀들게 만들 수 있어요.”

17세기 후반 이후 네덜란드에 이어서 바다를 제패한 영국은 자국은 물론 타국의 영해도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영해만을 인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영국은 처음에 영해를 설정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3해리로 선포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차츰 영해를 넓혀가자 매번 뒤늦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영해는 당연히 대포가 닿는 거리가 될 수밖에 없소. 시간이 흐를수록 대포 사거리가 늘어날 테니 그에 따라 영해도 넓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오. 그리고 경제 수역은 청어와 대구, 연어의 산란지와 관련해서 주장해야겠소.”

“맞아요. 어업연구소에서 물고기 알을 부화하고 치어를 키워서 방류하는 것은 유럽에서도 유명해요. 부자 나라라서 전혀 쓸데없는 짓을 한다 말이에요. 청어와 대구, 연어가 회유하는 바다 전체를 우리 소유로 일단 주장해볼게요.”

유럽 상선들이 대서양을 건널 때 사용하는 해도도 비록 북미와 부속 도서들에 대한 영토주권을 선언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고산국이 공짜로 나눠준 것이었다. 유럽 상인과 어민들이 안전하게 대서양을 항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온전히 고산국 덕택이었다.

“일단? 그럼 거기서 물러서겠다는 것이오?”

“대서양 전체를 우리 바다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다만 다른 나라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요. 여러 나라들이 평등에 근거한 산술적인 평균이 아니라 수산자원의 번성과 항해 안전에 기여한 대가를 받아내야 해요.”

“오!”

“다른 나라들이 국가 간의 평등을 내세워 반대하겠지만 협상 과정에서 우리가 양보해주는 대신 다른 것들을 최대한 챙길 수 있어요. 저번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륙붕에 대한 개념도 내세워볼게요. 영토가 넓고 섬이 많으니까 이럴 때 우리가 매우 유리해요.”

“오오!”

최 선생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이민호는 만국이 평등한 해양경계선 획정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말을 듣고 보니 고산국이 항해의 안전과 수산업 진흥에 기여한 것이 많았던 것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좋은 카드로 변했다.

물고기가 넘쳐나는 바다에서 알을 인공부화하고 치어를 키운 효과를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인공부화와 방류사업이 어획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아이슬란드와 뉴펀들랜드 어장에서 유럽 각국 어선들에 배정된 어종별 어획고가 매년 큰 차이가 난 것으로 이미 증명됐다.

“역시 그대는 나의 등대요.”

“어머! 혜영 총리님에 대한 찬사가 아니었나요?”

“제발 잊어버리시오! 혜영에게 절대 이르지 마시오!”

이민호가 화들짝 놀랐고 최 선생은 그저 베시시 웃었다. 최 선생에게 입막음을 하려면 오후에 따로 시간을 낼 필요가 있었다. 후궁들이 아니라 국왕이 몸으로 정치를 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한 챕터는 몇 년 단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새 써도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군요. 이제 자러 갑니다.

오늘도 한 편만 올려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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