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93 88. 1609년 =========================================================================
“큰 거 잡으려면 봉돌을 빼고 하세요, 큰놈들은 예민해서 물 흐름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부자연스러운 입감을 경계하거든요. 바닷물이 빙빙 도는 곳에 입감 무게만으로 살살 가라앉혀보세요.”
“됐네요. 어린이님이나 낚시질하세요. 입감은 미끼를 말하는 건가?”
애들을 돌려보내고 낚시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민호와 민영, 감불까지 셋이서 땡볕 아래에서 꽤나 오래 낚시를 했는데도 한 마리도 못 잡았다.
반면에 아이들은 허술한 대나무 낚싯대만으로도 잘도 잡았다. 큼직한 것을 연달아 낚아 올리며 어종에 따라 치어로 구분되는 작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여유도 부렸다. 비록 이 동네 아이들이라 해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한참 잡던 아이들이 고기를 갖고 마을로 달려가더니 잘 구워왔다. 그리고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고기를 내밀었다.
“아저씨들, 예쁜 누나! 한 마리씩 드셔보세요.”
“험! 험! 고맙소, 동자님.”
고기를 받아든 이민호의 말투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아이들과 옹기종기 앉아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감성돔을 먹었다. 민정이 도시락과 함께 음료수를 내놓아 아이들과 나눠 먹었다.
“소금을 치지 않았는데도 맛있네.”
“맛있죠? 아저씨, 아니 형들은 어디서 왔어요? 먹을 것을 주고받았으니 이제 말씀 편하게 하세요.”
장작불에 구웠는지 시커멓게 탄 감성돔의 등 가시를 빼고 껍질을 벗긴 다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허연 살을 조금씩 입에 넣었다. 고소한 살이 입에 착착 감기고 향기로운 육즙이 입안에 감돌았다.
“응. 왕도에서 놀러왔어.”
“와! 왕도에 사는 사람들이 제일 부러워요.”
“부러울 것 없다. 항상 바쁘게 살아야 한단다.”
시골 사는 아이들이 수도를 선망하는 것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 같았다. 고산국 왕도가 다른 나라 수도들에 비해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어느 나라보다 구경할 게 많았다.
“왕도에는 놀이공원도 있고 박물관하고 동물원도 있잖아요.”
“왕도에 사는 아이들이 매일 그런 곳에서 노는 건 아니란다. 여기하고 똑같아. 그리고 너희들도 수학여행 가서 보잖아?”
“왕도에는 큰 건물도 많고 서양 상인들도 많이 돌아다니잖아요. 그리고 멋진 왕궁도 있어요. 작년에 왕도에 갔다가 국왕전하 행차를 구경했어요.”
“오! 운이 좋았구나.”
“주상께서는 워낙 검소해서 행차도 간소히 하시는 것 같아요. 말로만 듣던 황금마차가 아니라 승합차에 타고 가시던데요?”
“승합차가 편하고 안전하니까 그러겠지.”
1600년에 교황이 성지 순례를 했을 때 사용했던 승합차들 중에서 몇 대가 방탄차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어차피 승용차를 만들지 않을 바에는 마차보다 방탄 승합차가 훨씬 안전했다.
“마을 어른들이 국왕전하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들어봤어?”
“그런 건 외지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래요. 정보국 직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은근히 물어본다고 해요.”
“나는 정보국 사람이 아니야.”
칭찬을 듣고 싶었는데 아이들은 말을 아꼈다. 정보국에서 여론 조사를 하는 건 당연하고 벌을 주는 것도 아닌데, 발언에 대한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사람들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야! 국왕전하에 대한 칭찬은 마음껏 해도 된다고 했잖아.”
“맞아. 그랬지. 하지만 욕을 하면 절대 안 돼.”
“국왕전하를 욕할 사람이 어디 있어? 누구 덕택에 먹고 사는 건데.”
“더, 더.”
아이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에 이민호가 헤죽거리며 웃었으나 속으로는 무척 씁쓸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보통 백성들이 권력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했다.
언론의 자유, 즉 책임을 지지 않고 말할 자유를 보장한다고 예전부터 몇 번이나 약속했었지만 사람들이 정부를 비판을 할 때는 몹시 조심스러운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 국왕은 신성한 영역에 속해서 아예 언급을 회피했다. 비판해도, 찬양해도 욕을 먹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커서 뭐할래?”
“그야 다른 형들처럼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를 2, 3년 다녀와서 생각해봐야죠.”
고산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남자들은 군대를, 여자들은 대학에 갔다. 군대에서도 세상을 넓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해군에, 체력을 단련하고 싶으면 육군을 선택했다. 항공대는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았지만 정작 항공대에서 복무해야할 사병 지원자는 별로 없었다. 어쨌든 예전과 달리 단기 복무 지원율이 점차 올라가서 병력을 증강하기 훨씬 편해졌다.
고산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어렸을 때 이민 온 아이들은 부모 세대와 달리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그들이 사는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하고 부유하다는 믿음은 인생에서 웬만큼 힘든 일을 겪을 때에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기본 소득이라는 것이 매달 은행 계좌에 꼬박꼬박 쌓이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절로 여유가 생겼다. 미성년자의 기본 소득 절반을 보호자가 가사와 양육에 사용해도 된다고 법에 규정돼 있었으나 아이의 미래를 위해 전액 저축하고 용돈을 따로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산국의 부모들은 그럴 능력이 되고도 남았다.
“가업을 잇는 게 아니라? 고향에서 어부가 되는 것도 좋잖아. 가두리양식장을 운영하면 농민만큼 돈을 많이 번다고 들었어.”
“어른들이 그러시는데요, 고산국에서는 돈을 벌어도 쓸 곳이 없대요.”
“맞아요. 집도 배도 양식장 시설도 다 나라에서 나오는 걸요?”
이민호가 말문을 닫았다. 고산국에서는 항상 이게 문제였다. 인구가 적고 정부와 왕실 수입이 넘쳐흘러서 의료와 교육을 무료로 해줬더니 백성들이 돈을 쓰는 재미를 잃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분야별 건설 원가가 낱낱이 공개된 주택 건설비 이상으로 임대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
“조선에서 땅을 사서 소작을 주려다가 사기 당한 사람들이 많대요. 땅 주인이 외국인 신분이라서 고향에 사는 친척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더니 그 친척이 땅을 꿀꺽해버린 거여요.”
“저런!”
아이들하고 땅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게 다 돈을 쓸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산국에서는 땅이나 부동산을 개인이 살 수도 없고 전혀 투자가치가 없어서 논외로 치고, 임대상가 건물 위치가 상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화젯거리였다. 임차인으로 시청에 등록된 상인이 다시 다른 상인에게 웃돈을 받고 그 가게를 임대하는 등 몇 가지 문제가 생기기에 매년 추첨을 통해 가게 위치를 바꾸게 하려다가 말았다.
“농부와 어부들은 세금을 절반이나 내는데 불만이 있지 않을까?”
“세금이 아니라 국왕전하에게 바치는 소작료나 어선 임대료여요. 반을 내고도 그만큼 많이 버니까 살만하대요. 우리 할아버지가 가끔 조선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양반이 아니면 살기 참 어려울 것 같아요.”
아이들하고 세상 이야기하는 게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산촌이나 어촌에서는 외부인에게 극도로 배타적인 면이 있는데 아이들은 쉽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대화중에 멀리서 마을 어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 지기 전에 낚시하세요.”
아이들이 눈치를 채고 일어섰다. 이민호가 보기에도 아이들을 외지 사람과 같이 두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요. 우리도 큰놈을 한 번 잡아 봐요, 도련님.”
“그래. 대어를 낚아보자.”
그러나 바닷가마을 아이들이 30cm가 넘는 감성돔 여러 마리를 낚는 동안 감불은 겨우 새끼 볼락 한 마리를 낚았다. 이민호는 어업연구소에서 방류한 것이 틀림없을 복어 새끼 한 마리를 잡았다. 자그마한 복어가 생명의 위기를 느꼈는지 허연 배를 잔뜩 부풀리는 꼴이 가관이었다.
“아! 우린 이렇게 애들에게 패배하고 마는 걸까? 감불이 넌 고산국의 장군이면서 낚시 면허증도 가진 낚시꾼이잖아! 어떻게 좀 해봐.”
“도련님은 국왕이면서 그러세요. 애들이라고 하지만 어부의 자식들입니다. 그리고 여긴 아이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야. 저 애들이 잡은 것보다 훨씬 큰 놈을 낚아 애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
“우리가 애들에게 얻어만 먹을 수는 없겠죠?”
남자 둘이 괜한 승부욕에 불타오르는 동안 민정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아래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는 평화로웠다.
“와아! 농어다!”
“세 살짜리야. 수백 마리나 돼!”
갑자기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이민호가 고개를 길게 빼서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니 은백색 비늘을 반짝거리며 농어 떼가 유영하고 있었다. 마릿수가 족히 5백은 넘었다.
아이들이 낚싯대를 옮겨 농어들 사이로 낚싯줄을 던졌다. 그러나 농어가 커서 아이들이 한 마리 잡아 올리는데 족히 5분은 넘게 걸렸다.
이민호도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두 마리를 낚아 올렸다. 그러나 세 마리째에 낚싯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민호가 줄을 잇느라 허둥거리는데 민정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 물었어요! 이거 어떡해요?”
“낚싯대 세우고 있어.”
줄이 끊어진 낚싯대를 버린 이민호가 민정과 함께 잡아당겼다. 농어가 좌우로 신나게 털기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이 쩔쩔 맸다. 그 와중에 감불은 느긋하게 채비를 교체하고 있었다.
“흠! 형수님 계신 자리에서 보여드릴 만한 것은 아닙니다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 제가 농어를 많이 낚아서 도련님의 명예를 되찾아오겠습니다.”
“뭐든 빨리 해봐! 농어 떼가 금방 지나갈 거야.”
감불이 갈고리처럼 세 방향으로 구부러진 커다란 바늘을 달아 물에 던졌다. 그리고 낚싯대를 힘차게 잡아채서 물속을 좍좍 그었다. 그러다 갑자기 낚싯대가 거의 절반으로 접혔다.
“아싸! 걸렸다!”
“이놈이 힘이 만만치 않습니다.”
낚시에 걸린 고기가 요동치면서 도망가려 했으나 감불의 힘에 금방 끌어 올려졌다. 45cm 길이에 달하는 농어는 옆구리에 바늘이 걸린 채 땅 위에 오른 다음에도 펄떡펄떡 뛰었다.
“와! 아저씨 잘한다. 이 깔따구는 세 살짜리에요. 계속 잡아 봐요.”
“아저씨가 뭐냐? 형이라고 해라.”
“형! 농어 떼가 도망치기 전에 얼른 잡아요!”
감불이 다시 훌치기로 농어의 등을 꿰었다. 농어가 퍼덕거렸으나 다행히 감불이 쓰던 낚싯줄은 더 굵고 튼튼해서 계속 조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반 낚시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농어를 낚아 올리는 감불과 그것을 구경하는 어린 애들이 아주 신이 났다. 그 사이 민정이 이민호에게 물었다.
“농촌마을은 보통 집을 1층으로 외양간 포함해서 넓게 짓잖아요? 그런데 어촌마을은 왜 2층인가요? 시멘트로 지어진 게 마치 새원산 북쪽에 방어용 보루를 겸한 농가 같아요. 해적이나 적의 상륙에 대비한 집모양인가요?”
“아니. 바닷가에는 가끔 해일이 몰아치거든. 어촌이 대체로 언덕에 있는 것도 그런 이유야. 그런데도 해일이 언덕까지 휩쓸어버리는 수가 있어.”
“자연의 힘은 인간이 항거하기 어렵군요.”
“태평양 건너편 남미에서 지진이 나면 여기까지 여파가 미칠 수도 있어. 중간에 해일을 막아줄 섬이 별로 없잖아.”
고산국 본토 동해안은 중국 대륙의 방파제 역할을 할지언정 대신 막아주는 섬들이 없었다. 태평양에서 발생한 해일을 일본 열도가 막아주는 조선이 어찌 보면 천혜의 땅이었다.
“이 마을에는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사는 것 같아요.”
“농촌이 아닌 어촌인데도 그래?”
민정에게 듣고 보니 아이들이 조금 달라 보였다. 피부가 약간 가무잡잡한 아이는 고산족인 것 같고, 머리를 빡빡 민 애는 아무리 봐도 중국 동자의 행색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기차 시간이 돼서 이만 돌아가야겠다. 잡은 게 너무 많아서 다 못 들고 갈 것 같은데 너희들이 두 마리씩 가져갈래?”
“형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감불이 굵직한 농어를 50마리쯤 낚아서 30마리는 얼음상자에 넣고 20마리는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아이들이 양손에 큼직한 농어를 한 마리씩 들고 신이 나서 마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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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은 없습니다만, 이제 슬슬 후계구도를 고민할 때도 됐죠. 그런데 주변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됩니다. 너무 길어서 잘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