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97 89. 1610년, 모험시대의 개막 =========================================================================
탐험은 탐사대원들의 훈련과 노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해군을 비롯한 군의 체계적인 지원과 통신청, 관상대, 예조 등 범정부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북미 탐사대를 위해 아이리시울프하운드를 조련했던 아일랜드 소년은 결국 군견 훈련 교관으로 자리 잡았다. 혹한의 극지에서 썰매를 끌 개들은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이 육종과 훈련을 맡았다.
그리고 탐험의 성공을 위한 중요한 요소로서 장비도 무시할 수 없었다. 두랄루민, 즉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함으로써 가볍고 튼튼한 장비 제작이 가능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조립식 사다리 하나만으로도 고산국의 과학 수준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저만치 앞서감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사다리를 쇠로 만들었다면 최소 다섯 배 무게는 더 나갔을 것이다. 겉은 쇠막대처럼 보이더라도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더욱 가벼운 것을 이제는 당연하게 여겼다.
“전하! 이것은 국방연구소에서 개발해서 군용으로만 사용하는 배낭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이것을 민간에 등산용으로 팔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사장. 그래서 내가 사장을 부른 것 아니겠소?”
탄소섬유로 만든 가볍고 질긴 배낭을 두고 등산장비 제작업체 사장이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전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군용 배낭이 민간에 풀리면 자칫 외국에 유출될 수도 있다고 아뢰옵니다. 고산국 과학력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이 귀중한 천을 외국에서 복제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몹시 두렵습니다.”
“베낄 능력이 있으면 베끼라고 하시오. 사장의 애국심은 충분히 알겠으나 전혀 걱정할 것 없소. 국방연구소에서 소재를 제공할 테니 사장은 배낭을 만들어서 판매하시오.”
등산장비 제작업체가 필요했을 때 마침 30대 중반 사업가가 창업을 했다. 처음에는 등산용 신발과 지팡이, 모자 등 간단한 것을 만들었으나 오랜 등산 경험에서 우러난 실용적인 도안으로 산악인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민호는 이 사업가가 더 좋은 도안을 만들 것으로 기대해서 제작업체로 선정한 것이다.
“명을 받드옵니다, 전하.”
“그리고 창업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렇겠지만 품목이 많이 부족한 것 같소. 천막과 야외 취사도구, 지도와 나침반, 물통, 석유 등잔, 우의 등등 군용 장비를 전용해서 민간용 등산 장비로 만드는 일을 추진하시오. 예전에는 무심코 넘어갔는데 생각해보니 산악인과 군인은 비슷한 장비를 사용하는 것 같소.”
“감사합니다, 전하. 도무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이 너무 심하게 고동치고 있습니다.”
군용 장비 대부분을 원래 민간에서 제작해야 하는데 현재 민간과 국방연구소 사이에 기술 수준 차이가 너무 심했다. 그래서 군에 필요한 모든 장비의 생산을 국가가 떠맡고 있었다. 보안에도 분명 도움이 됐다.
그러나 국방연구소의 업무 부담이 과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예전에도 단순 제작 업무는 민간 회사에 발주시키거나 국방연구소 직원에게 창업을 시켜서 일을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생산 품목이 너무 다양해지면서 단순 제작이 가능하거나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 분야는 민간에 과감히 넘기기로 결정했다.
“물론 사장이 운영하는 회사 말고도 다른 기업 두세 곳을 선정해서 경쟁을 시킬 것이오. 새로운 제품과 기술 개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러나 단순한 가격 경쟁으로 한두 곳이 망하는 것보다는 회사별로 특성화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오.”
“제가 예전에 산을 타고 다니면서 생각했던 것을 제품에 구현해보겠습니다. 자주 쓰는 것은 허리띠에 달린 주머니에 넣거나 배낭을 멘 채로 손만 뒤로 돌려 필요한 물건을 빼내는 것도 생각해두었습니다.”
역시 취미를 가진 사람이 그 분야 제품을 생산하는 편이 좋았다. 군에서는 그 장비를 실제로 활용하는 병사들이라도 새로운 제안을 하기도 어렵고, 그 제안이 통과돼서 장비 개선에 반영되기도 어려웠다.
반면에 민간에서는 이렇게 자유로운 발상이 훨씬 쉽게 나오고 제품에 금방 실체화됐다. 여기에 소비자들의 다양한 의견까지 반영해 차차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아주 좋소. 그런데 혹시 사장에게 사시, 그러니까 회사 경영 이념이 따로 있소?”
“부끄럽지만 튼튼한 장비를 만들자는 것이 제가 만든 기업의 구호입니다. 요즘 백성들이 남는 시간과 돈을 선용하기 위해 취미 생활을 새로 시작한 경우가 많습니다. 백성들이 등산을 즐기며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하는데 저도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시오.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오. 다만 공장을 새로 만드는데 자금이 많이 들 것이오. 보아 하니 사장은 정부에 지분을 하나도 안 내놨더군요.”
희색이 만면하던 사장의 얼굴이 갑자기 퍼렇게 변했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좋은 아이템을 받았으면 상납하는 게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이민호 개인이 치부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모두 국고 수입이 되어 백성들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취미생활용 도구를 만드는데 감히 나랏돈을 쓰기 어려웠습니다.”
“어째서 나랏돈을 쓰기 어렵단 말이요? 자본을 정부와 공유함으로써 더욱 투명한 회계를 하고 더 많은 이익을 내어 국가에 기여하고 사회에 환원할 수 있소. 그러니 정부 지분 신청제도를 적극 활용하도록 하시오.”
그 동안 민간에 자본이 축적되면서 개인이 순수 민간 자본만으로 회사를 창업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성공할 만한 사업이라고 자신하는 경우 정부 자본을 기피하는 경향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이민호는 돈이 될 만한 사업을 호락호락 내주기 싫었다. 이민호와 혜영은 해운회사나 대규모 방직, 방적공장들처럼 돈이 될 만한 사업에 정부 지분을 투자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민간 자본을 키우면서도 과실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어,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등산장비 제작업체 사장은 새롭고도 다양한 사업품목을 얻어서 기뻐하는 동시에 정부 자본에 휘둘릴 것을 걱정하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이민호는 가끔 이렇게 강압적으로 기업 경영자들에게 요구할 때도 있었다. 민지에게 다음 면담 계획을 물었다.
“이번에는 도박용 소품을 만드는 회사에요.”
“국가에서 도박을 지원해도 되나?”
“주인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민간에서 투전이나 골패, 쌍륙, 척사 등등 다양한 노름을 하고 있어요. 심지어 바둑과 장기도 도박에 활용될 수 있어요. 도박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건전하게 즐기게 하는 편이 좋다고 혜영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래? 그렇구나.”
척사는 윷놀이를 뜻했다. 현대의 스포츠 도박이 그렇듯 이 시대에도 승부를 겨룰 수 있는 모든 것이 도박에 활용됐다.
조선이나 명나라에 비해 제도적으로 빚을 지기 어려운 고산국에서는 도박 중독에 빠질 가능성이 적은 편이었다. 그리고 적은 돈을 걸고 심심풀이로 가볍게 하는 도박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심각한 도박 중독에 빠진 것으로 법원에서 판정한 사람들은 여지없이 치료감호소에 수감됐다.
이민호는 수십 명이 넘어가는 자식들과 일일이 놀아줄 수가 없어서 자식들끼리 놀게 해주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중의 하나가 화투와 카드, 이른바 서양 화투였다. 패만 있으면 노는 방법은 얼마든지 만들어졌다.
석유를 원료로 제작에 진작 성공하고도 군사용 외에는 거의 활용하지 않던 플라스틱을 민간용에 처음으로 제대로 사용한 곳이 바로 화투짝 재료였다. 여덟 살 먹은 공주가 양반다리를 한 채 화투짝을 능숙하게 치는 모습을 보고 귀여워서 까무러칠 뻔했었다. 물론 아이 어머니인 후궁은 그 모습을 보고 아주 기겁했다.
“국왕전하를 뵙습니다!”
“벌을 주기 위해 부른 게 아니니 너무 겁내지 마시오.”
알현실에 새로 들어온 40대 사업가는 지은 죄는 없지만 쌍륙판과 말을 만들던 사람이라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나무로 만든 판에 나무와 동물의 뼈로 만든 말을 움직이는 놀이가 쌍륙이었다.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유물이 있는 백개먼과 비슷한 이 놀이는 삼국시대부터 주로 여자들이 규방에서 하는 놀이였지만 이 역시 도박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을 보시오.”
“오! 패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쇄된 그림에도 색이 들어가 몹시 화려합니다.”
“놀이의 규칙은 이 종이에 써놓았소. 같은 조 네 장에 12개 조가 있소. 다른 놀이로도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을 것이오.”
민화투와 고스톱을 고산국에 전파하는 현장이었다. 골패의 게임 규칙이 화투로 넘어가면 ‘섯다’가 된다.
“하온데 저를 부르신 연유는 무엇이옵니까?”
“이것을 사장 회사의 명의로 판매하는 것이 일이오. 48장에 추가 두 장까지 해서 50장이 한 묶음이오. 6전에 넘길 테니 10전 이내에서 알아서 판매하시오.”
플라스틱도 탄소섬유나 두랄루민처럼 오직 고산국에서만 생산 가능했다. 이민호는 이 신소재들을 가급적 오랫동안 고산국에서 독점하길 원했다. 유럽 북부 지역 일부에서도 고산국처럼 석유를 난방연료로 쓰고 있지만 석유를 원료로 다른 물질을 만들 상상도 못할 것으로 단정했다.
“아! 왕실의 일을 대리하게 돼서 영광이옵니다. 하온데 이렇게 얇고도 단단하게 만들려면 숙련된 목수라도 꽤나 어렵겠습니다.”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요. 그리고 이것은 종이로 만들었소.”
이번에는 트럼프 카드 한 묶음을 내놨다. 역시나 세세한 경기 규칙이 인쇄된 종이가 포함됐다. 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규칙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포커와 블랙잭 등의 규칙을 단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냥 13조짜리 골패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요.”
“예, 전하. 제 벗들과 함께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이 노름을 널리 알리겠습니다.”
사장의 벗이라는 자들은 도박꾼이거나 노름판에 기생하는 왈패일 것으로 예상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예상이 고스란히 들어맞았다.
“이것은 사장이 직접 종이에 인쇄해서 판매하시오. 이렇게 새로운 상품을 제공했으니 사장 회사에서 정부 지분을 받아들이도록 하시오.”
“물론입니다, 전하!”
자기가 만들던 것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에서 제작한 것을 판매대행하는 일에 가까우므로 사장이 정부의 지분 참여를 쉽게 수락했다. 화투패와 카드를 만들어 파는 회사를 작은 구멍가게로 오해하기 쉽지만 독점일 경우 의외로 돈이 된다. 국왕인 이민호가 나설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밖에 관련 공무원이 대기하고 있소. 자세한 사항은 그 사람하고 협의하시오.”
“저를 선택해주셔서 백골난망이옵니다. 전하께 입은 은혜를 반드시 갚겠사옵니다.”
“장사를 잘하는 것으로 충분하오.”
돈 벌었다고 생각한 사장이 히죽거리며 절하고 나갔다. 화투나 트럼프 카드는 생산하거나 소지한 그 자체만으로 범죄가 구성되지 못한다. 도박이 아닌 순수한 놀이로만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투짝 판매 대행업자 겸 카드 제작자로 이 사람을 선택한 것은 겁이 많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세금도 아주 정직하게 바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아이 아주 튼튼하게 자라는 것 같소.”
“예. 하지만 아기 이름이 쥐똥이가 뭐여요?”
비올레타의 아들이 아기 침대 안에서 벌써부터 기어 다니고 있었다. 마르그레타와 유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민호가 아기를 안았다. 아기가 앙증맞게 작은 손을 뻗어 이민호의 볼을 잡아 늘이더니 까르르 웃었다.
“어렸을 때 한시적으로 부르는 이름을 아명이라고 하오. 크면 바꿀 테니 신경 쓰지 마시오.”
“첫째 왕자님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개똥이로 부르실 거죠?”
“그놈은 워낙 자주 속을 썩여서 이름에 징계의 의미가 있소. 그건 그렇고, 비올레타! 어제 관현악단 공연에서 연주된 음악을 기억하시오?”
어젯밤 왕립극장에서 열린 공연에 왕실 식구들이 단체 관람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중구난방이었던 악기들의 규격이 어느 정도 정해진 이후라 연주자들의 실력이 예전보다 훨씬 안정됐다.
“물론이에요, 전하. 애절하게 흐르는 첫 소절만으로도 제 고향 에스파냐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이었어요. 전하께서 진정한 명곡을 작곡하셨어요. 두 번째 곡은 너무 남부 풍이 묻어나왔지만 역시나 이슬람이 아닌 에스파냐의 음악이었어요. 전하께서 이토록 음악에 소질을 갖고 계신 줄 미처 몰랐어요.”
“뭐, 별거 아니오.”
어제의 감동에 다시 젖은 비올레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랑훼스 협주곡 2악장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이민호가 생각해도 명곡이었다. 그래서 진짜 작곡가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얼른 써먹었다. 다만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작곡가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기타 선율이 그토록 처연하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여러 관악기와 현악기에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어요.”
“다시 듣고 싶지 않소?”
“하지만 연주회는 어제가 마지막이었잖아요. 다음 연주회는 최소한 3개월 후에 계획하고 있대요.”
비올레타가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서 이민호도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예쁜 아내를 위해 남편으로서 준비한 것이 있었다. 축음기에 판을 올리자 비올레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제 연주회를 녹음하셨어요? 아아! 정말 기뻐요.”
판이 돌아가고 애절한 기타 선율이 흘러나오자 비올레타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비올레타의 고향은 에스파냐 북서부로서 오히려 포르투갈과 언어적, 문화적으로 더 가까웠다. 그러나 에스파냐 문화를 공유한 분명한 에스파냐 사람이기도 했다.
비올레타가 멍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모를 따라 고향을 떠나고, 다시 육아를 위해 새강릉을 떠나 왕도에 머무르는 동안 축음기가 비올레타에게 위안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레코드판에서 자기 테이프로 음성 기록 장치를 바꾸려는 노력이 계속됐지만 아직 몇 년째 답보상태였다. 작동 원리도 모른 채 사용하던 것을 재현하려니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작품 후기 ============================
이만 자겠습니다. 당연히 자정에 못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