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798화 (747/1,000)

00798  89. 1610년, 모험시대의 개막  =========================================================================

“요즘 바쁘시네요. 백성들이 취미생활을 즐기게 해주려는 거죠? 일만 하는 것보다는 자기 생활과 여유를 찾는 게 인간의 행복인 것 같아요. 백성을 어여삐 여기시는 임금님을 둔 고산국 백성들은 참으로 행복하겠어요.”

활짝 웃으며 집무실에 찾아온 혜영이 서류 작업에 바쁜 이민호에게 말을 걸었다. 혜영이 이토록 진심으로 이민호를 칭찬한 적도 드물었다.

동네마다 건립된 현대 스포츠 센터 개념의 체육시설 말고도 깨끗한 수영장과 안전한 해수욕장, 놀이기구가 가득한 유원지와 편안히 쉴 수 있는 온천 등 갖가지 위락시설을 건설해서 백성들이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외에 등산과 낚시, 바둑신문 창간과 기보 발행, 축음기를 이용한 초기 형태의 노래방, 심지어 화투짝과 트럼프 카드 판매 등 등 백성들이 소일거리로 삼을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지원해주기 위해 정부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준다는데, 예산 문제가 걸리지 않는다면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방과 경제에 치우쳤던 이민호의 관심이 백성들의 삶으로 기울자 혜영도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바로 이래서 혜영은 순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물건을 개발하고 판매하게 하는 거? 그거야 당연히 국내는 물론 외국에 팔아먹기 위해서지. 고산국 본토에서 유행하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 영토에서 유행하고 곧이어 명나라와 조선, 유럽에서도 유행하게 돼 있어. 관련 산업체들이 바쁘게 돌아가는 거 보면 몰라?”

“예? 세상에!”

“물론 바깥에는 방금 혜영이 말한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좋겠지. 뭐가 우선이든 상관없으니까 우리 혜영이도 그렇게 알고 있어도 좋아.”

이민호가 눈을 찡긋하자 혜영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토해냈다. 요즘 후궁들끼리 대화하거나 관리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이민호에 대한 칭송이 자자해서 혜영은 몹시 기뻤다. 그러나 이민호는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면서도 항상 경제 문제를 중요하게 고려했다.

“아무리 그 동안 금이 부족해서 불안했다지만 이제 한숨 돌렸잖아요?”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꾸준히 금을 보내주고 있으니까 가능한 사업들이기도 해.”

고산국이 건국 이래 급속히 발전하면서도 만성적인 경기과열 현상이나 인플레이션을 겪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왕실과 이민호 개인, 혹은 정부에서 각종 수익사업을 운영하면서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전기, 수도, 전화,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을 직접 건설하고 운영하다 보니 의외로 많이 남는 장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치가와 재벌기업들이 욕을 먹어가면서도 경영 효율을 이유로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거나, 다국적기업들이 제3세계의 사회간접자본에 억지로 진출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민영화되는 순간 서비스 가격이 대폭 올라간다.

그리고 현대 국가의 민간 건설업체들이 장마철을 제외하고 일 년 내내 꾸준히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고산국에서는 건설, 토목 사업도 시중의 통화량을 면밀히 계산한 다음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중앙은행이 재할인율이나 국채 이자율을 변동시켜 시중의 통화량을 조절할 수 없는 실물경제 체제라서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 사업체 대부분이 국영, 혹은 왕실 소유라서 전국적인 경제 통제가 가능했다. 물론 매달 김수공이 눈이 빠지도록 서류를 살피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계산해야 했다.

“므부투 국왕이 짜증을 많이 내더군요.”

“왜? 생각지도 못한 금을 받게 됐으면 기뻐해야지.”

“풋! 한 지역에서 그렇게 많이 산출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거죠. 배가 몹시 아플 거여요.”

현대 지명 요하네스버그 남쪽의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 금광들 전체를, 금맥이 지하에서 서로 연결됐다는 이유로 하나의 금광으로 인정받았다. 아프리카 왕국의 관리가 금광에 파견돼서 산출량을 파악하고 매장량을 추산하다가 낯빛이 파랗게 변해서 므부투에게 달려갔다는 이야기는 지난번에 들었다.

건국과정과 그 이후에 아무리 고산국에서 지원을 많이 받았다지만 므부투도 인간인 이상 거대한 금광지대가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고산국에서 뜻밖에 매달 일정량의 금을 보내줘서 아프리카 왕국도 한결 여유가 생겼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비극을 막기 위해 국가총동원 체제가 계속 유지되는 바람에 므부투는 남아프리카 쪽에 진출할 여력이 별로 없었다. 시선이 온통 서쪽에 쏠린 덕택에 고산국 기술자들이 금광지대를 여유롭게 개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알기로 남아프리카에서는 금광보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더 큰 규모를 자랑했다. 각지로 나뉘어 파견된 자원탐사대가 눈에 불을 키고 다이아몬드를 찾으러 다녔다.

지금 서아프리카에서는 흑인 왕국들끼리 전쟁 중이었다. 므부투의 아프리카 왕국은 노예무역이 행해지는 아프리카 서해안에 도달하기 위해 중소 흑인왕국들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유럽이나 중동 지역에 판매하기 위해 노예사냥에 가담했던 올망졸망한 크기의 서아프리카 흑인 왕국들에게 좋았던 시절은 이제 다 지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아프리카 왕국의 힘에 압도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무역에 종사하는 서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말을 타고 다니며 전쟁에 화승총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화승총과 단발총의 대결에서 승부를 가늠할 때는 사격 속도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사거리와 명중률, 그리고 병사들의 훈련도도 계산에 넣어야 했다. 열 배 이상 압도적인 병력 차가 나지 않는 이상 서아프리카의 흑인 왕국들은 항상 일방적인 패배만 당했을 뿐이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노예를 대량으로 구입하는 탓에 노예무역이 계속 유지되고 있어요. 설탕 값을 더 내리면 안 될까요? 조금만 더 내리면 노예를 사지 못하게 될 것 같은데요.”

“지금도 많이 내린 거야. 여기서 가격을 더 낮췄다간 설탕 값보다 운송비가 더 많이 들겠다.”

브라질과 카리브 해의 여러 섬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 노동력을 흑인 노예에 극도로 의존하는 한 노예무역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민호가 여러 차례 유럽 국가들에게 경고하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는 상품 가격을 깎아주기도 했지만 밀무역까지 근절시키는 것은 요원했다. 두 나라 상인들이 노예무역에 개입하는 경우는 줄어들었지만 농민들이 다른 나라 노예상인들을 통해 노예를 구입했다.

“므부투 국왕이 잘해주길 바래야겠군요.”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

“므부투 국왕의 나이가 있잖아요. 환갑 넘었죠?”

“글쎄. 자기 입으로는 40대 중반이라 하는데, 얼굴만 봐서는 도저히 공감하기 어렵지.”

유럽 각국의 축구 리그에서 활동하는 흑인 선수들이 흔히 나이를 속인다고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나이가 사실이라면 흑인은 육체적으로 빨리 완성되고 빨리 노쇠해지는 셈이었다.

“혜영이 요즘 얼굴이 많이 피었어.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그 동안 남들 모르게 고민했던 게 다 사라졌으니까요.”

유럽 금화를 녹여 고산국 금화를 주조하고, 남아프리카에서 금을 본격적으로 생산하자 금 보유량 부족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다. 그리고 이면이 단호하게 개똥이를 왕도에 버려두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개똥이는 며칠 동안 시무룩했으나 평소 활달한 성격 그대로 다시 웃고 떠들고 다녔다. 혜영 입장에서는 모처럼 모든 일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예뻐졌어.”

“풋! 원래 예뻤어요. 주인님만 몰라요.”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평소 과로를 자주 해서 그렇지 가꾸지 않더라도 혜영은 꽤나 미인이었다. 또한 왕비도 아닌 일반 후궁으로서 다른 후궁들을 잘 제어하고 있었다. 내명부에 공식적인 위계가 없더라도 혜영이 실질적인 왕비노릇을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북극 탐험대가 내일 출발한다고 대서양 탐사전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디 아무 사고 없이 돌아오면 좋겠어요.”

“여름이니까 얼음이 녹아서 배가 최대한 북극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거야.”

대서양 탐사전단 소속인 북극 탐험대는 지난 2년 동안 그린란드에서 교대로 극지적응 훈련을 받았다. 그린란드 횡단만으로도 탐험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이민호와 탐사전단 대원들의 시선은 온통 북극점에 가 있었다. 지구 자전의 중심축인 진북보다는 먼저 나침반의 북극인 자북을 목표로 삼았다.

쉽게 말해 탐험대라고 하지만 지원인력까지 포함해 총인원은 꽤나 많았다. 썰매 끄는 개도 수백 마리가 이 일을 위해 동원됐다. 북극점까지 가는 길 중간 중간에 릴레이 형식으로 식량을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식량을 지키기 위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북극곰은 무조건 총을 쏴서 잡도록 했다.

극지 탐험을 위해 준비한 것이 정말 많았다. 순록 가죽을 무두질할 때도 이누이트 전통방식을 따라서 냄새가 좀 심하지만 방한 성능만큼은 최고의 방한복을 만들었다. 이민호는 고어텍스를 만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으나, 극지 탐험에서는 효율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작년에 진수된 그 배는 말이 쇄빙선이지 추진력이 너무 약한 것 같아요.”

“어쩌겠어? 새로운 동력원이 개발되지 않으면 그 정도 성능이 한계일 거야.”

원자력 쇄빙선이 아니라면 동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민호가 원자력을 개발할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고산국에서는 석유 등 에너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했고, 대체에너지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북극이나 남극까지 비행기로 가면 안 돼요?”

“되긴 하는데,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한 사람의 힘만으로 극점을 정복하는 게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20세기 초반에 비행기나 비행선을 타고 북극점을 지난 사람들은 훈장도 받고 명성도 크게 얻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 유럽과 북미 대륙, 혹은 아시아를 잇는 더 빠른 항로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런 게 의미가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우리가 먼저 극점에 도달하면 다른 누군가가 북극이나 남극을 영토로 주장하지 못할 거야.”

이 시대에는 탐험과 지리 조사 결과를 공개하는 것이 영토 획득 선언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이 북미에서 싸운 것을 보면 역시나 말보다 주먹이 앞섰다.

“북극은 바다니까 영토로 선점하지 못하더라도 남극은 대륙이니 가능하잖아요?”

“남극을 영토로 만들겠다고? 해안선 40km마다 등대를 세우고 그 중간에 초소를 건설해서 국경경비대원들을 배치할까? 최소 2만 명쯤 필요할 것 같은데, 주둔 비용을 국고에서 지급한다면 나도 찬성할게.”

“아뇨.”

고산국이 남극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이후 실제 역사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유럽 탐험대들이 도착할 것으로 예상됐다. 만약 남극대륙을 고산국 영토로 선언할 경우 병력을 파견해 지켜야 하는데, 현재는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남극의 추위에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미국이나 구소련 같은 강대국들이 남극대륙을 나눠먹으려 시도하거나 서로 가지려고 싸우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4월 말에 히말라야 원정대가 안나푸르나 중턱에 올라 정상 공략을 준비했다. 지원대에 포함된 통신사들이 단파통신을 통해 왕도에 매일 보고했으나 잡음이 심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면과 원정대가 정상 등정을 마칠 때까지 꽤나 초조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초에 단파 통신기의 잡음 너머로 기쁨에 찬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인명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원정대가 안나푸르나 등정을 성공시킨 것을 자랑하고 싶었으나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었다. 유럽에서도 아직 알프스 등정도 못하던, 아니 안하던 시절이었다. 보도 자료를 돌려서 신문 일면에 기사가 실리고 하단에 등정 축하 광고도 크게 냈으나, 어째서 힘겹게 위험한 산에 올라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축하하네. 큰일을 해냈어.”

“사람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서 전하께서 크게 실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뭐, 사람들이 아직 의미를 모를 수도 있겠지. 자네도 실망하지 말게.”

이면과 원정대가 5월 하순에 왕도로 돌아왔다. 군악대를 동원해 아리수 항에서부터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동원된 군인들만 항구에 우글거릴 뿐, 민간인들은 가족 외에는 거의 없었다. 안나푸르나 등반대가 평일 낮에 도착하는 바람에 함께 기쁨을 나눌 산악인들도 극히 적게 참가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저희들은 등정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합니다. 도전할 산봉우리가 아직 열 개 넘게 남은 것도 저희들에게 큰 기쁨입니다.”

“남의 취미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 그런데 이번 일은 취미의 차원이 아니야. 자네 이름은 인류사에 영원히 기억될 걸세.”

“조만간 세계 최고봉에 도전하겠습니다. 그때도 이번처럼 지원해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물론이지! 그런데 이번 기회에 승진시켜주면 안 되겠나?”

“절대 안 됩니다!”

훈장 수여식이 진행되는 동안 대화가 너무 길어졌다. 이민호가 이면의 예복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 다음 악수를 나눴다. 펑펑 터지는 사진기 조명 소리는 아직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번 환영 행사에서 개똥이가 왕자로서 공식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안나푸르나 등반대원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개똥이가 등반대원들에게 꽃다발을 주면서 아주 부러워 죽으려 했다.

============================ 작품 후기 ============================

사정이 생겨서 오늘은 한 편만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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