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26 92. 1613년 =========================================================================
“유럽에서 전쟁이 나면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신 건가요? 최근에 종교 갈등이 깊어지는 바람에 아무래도 조만간 큰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요.”
전쟁은 상인에게 큰 기회였다. 덴마크 서인도회사는 전쟁에 대비해 군수물자를 가득 비축하고 유럽 여러 국가와 영지에 공급계약을 맺는 등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역시나 대주주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비했고, 고산국 왕도와 북미 동해안에서도 생산량을 미리 늘려놓았다.
그러나 폭력이 극대화하는 전쟁 기간에 어느 누구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했다. 여자와 어린이처럼 상인들도 얼마든지 피해자 대열에 낄 수 있는 문제가 생겼다. 특히 국왕의 군대가 아닌 용병 위주의 전쟁일 경우에 피아를 불문하고 아무나 약탈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만약 신구교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대 황제 아돌프 그 사람 탓이오. 사람이 일관적이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헤매다가 전쟁이 날 빌미를 주었소.”
“보헤미아 말씀이시군요. 오빠는 이 기회에 덴마크 영토를 넓히고 싶어 하세요. 스웨덴의 어린 국왕도 마찬가지에요.”
“별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알아서 결정할 일이오. 다만 고산국은 무조건 중립을 지키겠소. 아이슬란드도 개전 초반에 아예 중립을 선언하는 게 좋을 것이오.”
“풋! 아이슬란드에 군대라는 것이 아예 없잖아요. 전쟁에 참가할 이유도 없지만 능력도 없어요.”
아이슬란드 해안경비대가 웬만한 나라의 해군을 뺨친다는 이야기는 구태여 헤드비히에게 할 필요가 없었다. 자그마한 해안경비대 함정 겨우 네 척이 교대로 근해를 순항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과소평가하기 쉬웠으나 그래도 이 시대에는 매우 강력한 3인치 함포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은 병사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병사들이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물자를 보급하는 병참의 역할이 더더욱 중요해지는 시기였다. 그래서 전쟁에서 상인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전근대의 전쟁에서 비전투 요원이 낮은 비율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처럼 병참선이 길어질 경우 보급병이 전투병의 세 배에 달했다. 현대 미군의 편제에서도 전투부대보다 비전투부대가 항상 더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 시대에 보급을 담당한 부대가 아예 없거나 작더라도 전쟁터를 따라다니는 상인과 일꾼, 여자들을 합하면 언제나 전투요원보다 많았다. 그런데 용병을 고용한 고용주들이 보급을 해주는 대신 현지 약탈을 허락함으로써 전쟁보다 더한 재앙을 독일 땅에 가져왔다. 전쟁은 상인에게 큰 기회지만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상인이 중립을 지키며 양쪽 모두에게 물품을 공급한다면 오히려 양쪽 모두에게 적으로 몰릴 우려도 있소.”
“그 문제를 항상 유의하고 있어요. 그래서 국왕이나 영주의 직접적인 구매 요청이 있을 경우에도 동일한 군수품을 적군에게 판매할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아서 판매에 응하려고 해요.”
“비키가 잘하겠지만, 몹시 걱정이오.”
위험 부담 없이 돈 벌기에는 차라리 10년 전처럼 전 지구적인 기근이 닥치는 편이 훨씬 쉬웠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고통을 겪기에 자연재해가 오길 바라지는 않았다. 만약 이민호가 악한 인간이었다면 아이슬란드의 화산을 인공적으로 분출시켰을지도 몰랐다.
“너희들은 이번에 정식 행정관이 될 것이다. 아이슬란드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시험은 아니고 너희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차원에서 물어보는 것이니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라. 그래. 카타린 너부터.”
“국왕전하께서는 영토 내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애쓰셨어요. 아이슬란드라고 다를 것 같지 않아요.”
행정관 역할을 맡을 아이슬란드 출신 후궁들 셋이 몽롱한 눈길로 이민호를 바라봤다. 주민들의 행복을 위한 행정이라는 면에서 고산국을 따라올 나라가 없었고, 모든 행정체계와 조직의 존립 목적을 이민호가 만들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민호는 아이슬란드를 구한 영웅으로 받아들여졌다. 만약 아이슬란드를 내버려뒀다면 여전히 해적들에게 시달리거나 지난 기근 때 다들 굶어죽었을 것이다. 지열발전소와 알루미늄 공장은 식품 보관 용기와 항공기 소재라는 면에서 고산국에 큰 이익을 가져왔지만 아이슬란드에게도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사람들을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줄 구체적인 방법은 있느냐? 구체적인 정책 없이 말로만 백성의 행복 운운하는 인간들은 죄다 거짓말쟁이, 사기꾼들이다.”
“고산국 본토에서는 높은 기술력으로 유럽에 최고급 상품을 수출하고 북미에서는 드넓은 농경지를 기반으로 곡물과 담배를 생산해요. 각 지역에서 나는 잉여 생산물을 다른 지역에 판매함으로써 재산을 늘리고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어요. 아이슬란드에서는 넘쳐나는 전기를 이용해서 알루미늄을 생산하고 있어요. 또한 화산의 온수를 농사와 양어장뿐만 아니라 공장 가동에도 이용이 가능할 거여요.”
“현상은 잘 파악했는데 정책의 구체성은 떨어지는구나. 그래도 대답을 잘했으니 상을 주마.”
카타린과 입을 맞추고 몸 곳곳을 만져주었다. 누구 좋으라는 상인지 헷갈리지만 상을 받은 후궁은 아주 좋아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 그래. 다른 의견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한다.”
“지열발전소와 알루미늄 공장에서 아이슬란드 정부에 매년 납부하는 금액을 확인했어요. 국가의 일을 대리하는 몇몇 귀족과 촌장들에게 고정적으로 지불하는 녹봉과 해안경비대 운영비용을 제외하더라도 매년 엄청나게 큰돈이 남아요. 몇 만 명에 불과한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평생 풍족하게 쓰고도 남을 금액이었어요. 그런데 그 금액이 매년 계속 쌓인다는 거여요.”
“제대로 봤구나. 지열발전소와 알루미늄 공장에서 납부한 세금을 어떻게 쓰는지가 아이슬란드 행정의 핵심일 것이다. 그럼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써야 할까?”
지열발전소와 알루미늄 공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대서양 해령에 자리 잡은 아이슬란드의 지하에는 엄청난 양의 뜨거운 물이 들끓었고, 지열발전을 통해 아주 싼값에 전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전기를 전기 먹는 하마인 알루미늄 생산 공정에 바로 이용할 수 있었다. 알루미늄은 깡통 외에 창호나 항공기 소재 등으로 사용했고 철보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매출액이 매년 급증했다.
알루미늄 매출액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지열발전소가 추가로 지어지고 기존 알루미늄 공장도 설비를 대폭 증설했다. 앞으로 더 큰 금액이 아이슬란드 정부 계좌에 토지사용료 혹은 세금 명목으로 입금될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평생 아무 일도 안 하고 먹고 살만한 돈이 꾸준히 나왔다.
“매년 큰 금액을 수령하므로 사실 아이슬란드에서 생산이란 의미가 없어요. 고기잡이와 작은 온실에서 생산한 채소가 얼마나 돈이 되겠어요?”
“생산이란 다른 의미가 있지만 계속해봐라.”
“아무 일 안 해도 충분한 수입이 생기더라도 사람들은 직업이 있기를 원해요. 그래서 아이슬란드의 행정은 사람들에게 직업을 만들어주는 것이 핵심 사업이 될 거여요. 물론 전기와 알루미늄 생산 외에는 큰돈이 되지 않겠지만, 재원이 이미 풍부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거여요.”
“모든 사람이 국가의 관리가 된다면 그것도 이상하겠구나.”
“고산국 본토에서 전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교사와 경찰, 군인과 공무원으로 고용하셨어요. 심지어 의사와 간호사, 마부, 어린이집 보모들도 모두 공무원이에요. 훨씬 큰 고산국에서 가능했으니 작은 아이슬란드에서도 같은 정책을 시행할 수 있을 거여요.”
“아이슬란드라서 가능할 것이다. 재정 면에서는 고산국보다 낫겠다.”
아이슬란드 인구가 아직 적어서 가능하지 몇 백만 수준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산국도 이제는 정부 분야보다 민간 분야의 고용이 훨씬 많아졌다. 그러나 현재 10만이 안 되는 아이슬란드 인구를 알루미늄 공장만으로 충분히 부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일을 해야지 정부에서 지급하는 보조금만 갖고 살라고 하면 놀면서도 삶의 회의가 들 뿐이다. 현대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 원주민 사회도 그런 식으로 자체 붕괴될 뻔했다가 주정부에서 카지노 등 몇몇 특혜를 주면서 자생력을 갖춰 나갔다. 북미 원주민들은 도박꾼들 앞에서 열심히 패를 돌리고 입구마다 기도를 서면서 삶의 현장에서 흘리는 땀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아주 훌륭하다. 잘 배웠구나. 하지만 아이슬란드만의 특수성이 있다. 그리고 모든 국가, 그러니까 왕실이나 정부가 모든 정책에 앞서서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이 하나 있다.”
“백성들의 목숨이에요.”
“맞다. 그래서 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병원을 세워 질병을 고친다. 아이슬란드의 경우 특히 화산 폭발에 대비해 피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마지막 정답을 말한 안경 쓴 후궁의 몸을 이민호가 힘차게 끌어안았다.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를 사회의 유지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근대나 현대나 그 국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인구 증가 여부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명나라보다 많은 인구를 부양한 청나라가 현대 들어서 역사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물론 한족 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 시대의 인구 증가가 만주인 정부의 정책과 상관없이 고구마 재배가 확산된 덕택이라고 폄하한다.
“만약 화산이 분출하는 기미가 보이면 즉시 아이슬란드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항구에 정박한 배를 타게 해라. 각 지역 항구마다 배치된 배에는 그 지역 인구가 한 달 간 먹을 식량과 북미로 갈 수 있는 연료가 적재돼 있다. 재산은 버려도 되지만 목숨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내 말을 명심해서 혹시나 퇴거 명령 발령을 망설이다가 사람의 목숨을 재산보다 가볍게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해라.”
“네!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은 아이슬란드에서 부끄러운 일이 결코 아니에요. 자연을 적으로 삼아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바로 그거다. 북미에는 충분히 넓은 땅이 있으니까 몇 년 살다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한 나라가 됐으니 다른 나라에 폐를 끼친다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해라.”
개인 소득으로 따지면 아이슬란드가 훨씬 높아서 아이슬란드가 고산국의 식민지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제적 기준으로 현재는 아이슬란드가 고산국의 피보호국이지만 이미 사실상 같은 나라였다.
“흥! 저한테 잘 보이셔야 할 걸요? 아이슬란드에 대한 제 지분이 절반이에요.”
“어이쿠! 여왕폐하 왜 그러십니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여왕폐하를 모시겠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헤드비히 여왕의 콧대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슬란드를 전혀 대체할 수 없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일본이나 필리핀 등 화산대와 가까워 지열발전이 가능한 지역이 고산국 영토 내에 꽤 있었다.
호주 동쪽 새섬만 해도 제2의 알루미늄 생산 공장이 들어서서 본격적인 생산을 앞두고 있었다. 새섬은 호주 북동부의 보크사이트 광산에 가까워 조금 더 싸게 알루미늄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그 전에 고산국에서 체구가 큰 남자들을 골라 전사의 춤을 열심히 익히게 한 다음 마오리 원주민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물론 원주민들에게 선물 공세를 퍼붓는 등 강온양면 정책을 구사했기에 평화적으로 공존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아이슬란드의 자원보다 지정학적 위치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태평양에 이어 대서양과 북극해를 고산국의 내해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슬란드의 입지가 무척 중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아일랜드까지 고산국 영향력 아래에 둔다면 대서양의 안전은 절반 이상이 보장된다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은 알겠으니 몸을 바쳐서 모셔보세요.”
헤드비히가 모로 누우면서 달콤한 목소리로 강요했다. 이민호는 헤드비히가 원하는 대로, 그리고 국가를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동침할 기회가 적은 이민호의 후궁들은 조금 늦은 나이에 출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민호와 만나는 많지 않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왕궁을 떠나 순행을 나와 있는 동안에도 이민호 혼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민호는 오랜만에 만난 헤드비히와, 피부와 얼굴, 몸매와 교양 등 무엇 하나 떨어지지 않는 아이슬란드 후궁들을 만나 한 침대에서 뒹구느라 힘을 쏟았다. 안경 쓴 청초한 모습의 행정관에게 다시 결합하는 순간 이민호의 어깨에 닿은 손이 있었다.
“오늘 일곱 번이나 정을 쏟으셨어요. 주인님의 건강을 위해 이만 자제하시길 당부 드려요.”
올해 초에 새로 호위대장이 된 선영이 가로막았다. 민희, 민영, 민정 등 1세대에 이어 지수와 지영 등 2세대 호위들도 훌륭하게 임무를 마쳤다. 호위대에서 아주 나온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왕자나 공주를 돌보며 내정에 전념하고 있었다.
선영은 이민호가 뭘 하든 항상 조용히 있다가 규정된 선을 넘는 순간에 나서는 스타일이었다. 선영의 말을 듣는 편이 좋다는 것은 이성으로 충분히 납득했으나, 울먹이는 행정관을 본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만 딱 1분만 더......”
“안됩니다!”
할 수 없이 행정관의 몸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울먹거리는 행정관을 달래느라 바빠졌다.
“자정을 넘는 순간 너부터 다시 안아줄게.”
“어머! 한 시간 남았어요.”
덴마크 쾨벤하운까지 갔다가 국왕 크리스티안과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 이번 순행의 일정이었다. 헤드비히와 아이슬란드 행정관들뿐만 아니라 덴마크 여기사들과 여진 호위를 안을 시간은 아직 충분했다.
============================ 작품 후기 ============================
미국의 정책을 살펴보면 전초기지로서 아이슬란드가 의외로 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추석연휴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계속 쓰겠지만 미리 인사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