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29 92. 1613년 =========================================================================
국왕좌승함과 호위함대는 네덜란드 쾨벤하운에서 며칠 묵은 다음 출항했다. 북해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램지 중령이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탄 범선 두 척과 다시 마주쳤다.
원래는 해적선이지만 지금은 용병 수송선인 두 척은 역풍에 시달리며 며칠 동안이나 지그재그 항해를 했다고 한다. 그런 악전고투 끝에 겨우 덴마크 북부 해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배에 탄 사람들이 이상해졌다. 처음에는 전염병이 돈 것으로 오해했다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을 알고 순양함에서 먼저 접근했다.
“이봐! 상태가 안 좋은데? 이러다 유령선 되겠어.”
“고산국 국왕전하! 부디 먹을 것 좀 나눠주십시오.”
커다란 타에 기댄 채 축 늘어진 선장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나머지 선원이나 용병들도 갑판 곳곳에 널브러져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상태가 심각한 것 같아 이민호는 즉시 호위전대장에게 지시해 물과 음식을 스코틀랜드 배에 넘겨주었다.
“휴!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전하.”
“물과 음식이라면 보통 배에 몇 달치 정도는 싣고 다니지 않나?”
해적이 틀림없을 선장이 램지 중령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대답했다. 그 사이 램지 중령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 글쎄! 국왕전하께서 조언해주신 대로 외레순 해협을 지나가려는데 스코틀랜드 용병 놈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한밤중에 반란을 일으킨 놈들이 저와 램지 중령에게 잔뜩 모욕을 준 다음 단정에 얼마 안 되는 물과 식량을 모두 싣고 떠나버렸습니다. 가까운 거리라 처음부터 많이 싣지도 않았습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간다던가?”
“아닙니다. 용병 놈들이 제 버릇 개 주겠습니까? 약탈하겠다고 노르웨이 해안으로 향했습니다만, 바로 그 날 밤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아마 해안에 닿기 전에 단정들이 죄다 전복됐을 겁니다.”
그래도 대단한 게, 스코틀랜드 용병 지휘관인 램지 중령이 부하들이 일으킨 선상반란을 겪고도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어떻게든 외레순 해협으로 향했다는 점이었다. 이민호는 선장과 램지 중령을 칭찬하며 물과 식량을 추가로 나눠주었다. 범선에서 오래 선상생활을 하면 썩은 음식만 먹을 것 같아서 유럽 서민들은 사먹을 꿈도 못 꾸는 생선 통조림도 몇 상자 건네주었다.
“난관을 극복하고 끝끝내 계약을 이행하려는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어. 나중에 램지 중령과 자네 부하들을 고용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 스코틀랜드 군 소속 알렉산더 램지 중령의 이름을 기억해두겠네.”
“칭찬 고맙습니다, 전하.”
이 시기 유럽의 다른 용병단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용병들은 뜨내기라서 금방 없어지거나 적과 내통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용병은 전시에 정규군으로 복무하는 군인들이 용병 일을 하는 체제라서 농민 출신이 주력인 란츠크네히트 등과 성격이 조금 달랐다.
이 시기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아일랜드나 이탈리아 귀족의 경호원,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을 때는 프랑스 국왕의 호위, 때로는 러시아 차르의 군대에 복무하기도 했다. 스위스 용병들처럼 죽음으로써 고용주를 지키는 인상적인 활약은 펼치지 못했지만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실력과 신뢰로써 고용주에게 확실히 보답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선장 이름이 로버트 스튜어트라고 했지? 선장도 일확천금의 꿈을 버리고 무역선을 운영하면 어떤가? 내가 새원산 무역회사에 추천서를 써줌세.”
“대서양과 북해를 장악한 고산국 함대 때문에라도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 같은 해적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잘 생각했네.”
로버트 스튜어트가 해적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강하게 압박하자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이민호는 오늘도 대서양의 평화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었다.
고산국 함대가 카리브 해와 대서양에 진출한 이후 유럽의 해적 사업은 점점 사양 산업이 되어 몰락 중이었다. 약탈 현장에서 걸리면 보통은 배와 함께 침몰당하는 즉결 처분이었고, 해적 섬에 모여 사는 자들 중에서 성인 남자들은 재판을 통해 거의 일평생을 탄광에서 보내야 했다.
두꺼운 쇠로 만든 거대한 고산국 순양함들을 막을 만한 해양 세력은 대서양 연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같으면 배 숫자를 믿고 도전해볼 만도 하지만 체급 차이가 워낙 커서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 순양함보다 훨씬 작은 경순양함 시대에도 몇 배나 많은 프랑스 해적선들을 일방적으로 박살낸 것이 고산국 함대였다. 그 사건을 기억하는 유럽인들은 고산국 함대가 자국 항구에 정박하더라도 그저 아무 일 없이 쉬거나 교역하다가 떠나가기만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호위함대는 올해에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서부에 위치한 에이모이덴 항구와 센 강 하구 르아브르, 그리고 아일랜드 더블린을 차례로 들렀다. 에이모이덴과 르아브르는 고산국 함대가 키워준 항구나 다름없었다. 에이모이덴은 암스테르담의 서부 외항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고 르아브르도 해안 언덕에 방어용 요새를 건설한 다음부터 도시로 급격히 확장됐다.
항구에 입항할 때마다 해군 승조원들과 해병들에게 교대로 한나절씩 외출 시간을 주었다. 이제는 병사들도 자기들이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숙지했고, 지급받은 외출 수당은 식사와 군것질, 그리고 가족에게 줄 선물 값 등으로 남김없이 사용했다.
고산국 함대가 입항할 때마다 그 항구도시는 큰 호황을 맞았다. 말이 호위함대지 웬만한 대규모 무역선단 뺨치게 많은 물품을 교역하기 때문이다. 함대에서 파는 것은 시대를 앞서 가는 공산품과 향료 등 먼 나라에서 나는 진귀한 물건들, 그리고 사는 것은 유럽의 예술품과 문화재였다.
“작년에 비해 가격은 두 배로 오르고 질은 절반으로 떨어졌어요. 다만 정기적으로 입항하다 보니까 동유럽 예술품이 시장에 많이 등장한 것은 고무적인 소식이에요.”
“음. 큰 문제야. 무역 수지 균형을 위해서니까 적당히 지불해줘. 출처가 불확실한 것은 진품으로 추정되더라도 가격을 확 깎아버려.”
호위대장 선영이 불평하는 것에 이민호도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래도 그림과 조각품이 단단히 포장된 채 배에 실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민호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왕궁에 도착해서 예술품을 다시 정리할 때도 행복했다. 모조품이 더 흔했지만 아주 가끔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진품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우리 때문에 유럽의 옛무덤 도굴이 활성화되는 것 같지만 신경 쓰지 말아야겠죠? 무덤의 부장품이라도 지역과 매장 시기 같은 출처를 확실히 해주면 좋은데 기대하기 어렵겠어요.”
“부장품일 가능성이 높으면 구매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현지 관리의 입회하에 거래하도록 해. 웬만한 도굴꾼들은 다 도망갈 테니까.”
유럽에 올 때마다 예술품과 문화재를 싹싹 쓸어가도 국왕좌승함에 적재한 금이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예술품이라면 최근에 제작된 것도 거절하지 않았기에 유럽의 화가, 조각가들만 신이 났다.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여유가 약간 생기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며 화풍에 변화가 생긴 것은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유럽에서 유통되던 옛 금화는 모두 교환된 지 오래였고 이제는 모든 상거래를 고산국 금화와 합금 주화로 해결했다. 한때 위험 수위를 오가던 지급 불능 위기를 넘긴 다음부터는 통화 수요와 공급이 매우 안정적이라 다행이었다.
국왕이 직접 탑승한 함대가 유럽 항구들을 도는 것은 대서양에 면한 유럽 지역 전체가 고산국 영향력 안에 들었음을 만방에 과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외교적 협상은 주로 이때 이루어졌으나, 얼마 전에 국왕이 암살당한 프랑스는 아직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해 외교 교섭도 하지 못했다.
유럽 순방을 짧게 마친 호위함대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로 돌아왔다. 그 전 날 여자 행정관들이 왜 슬픈 얼굴을 하는지 이민호는 몰랐는데, 그들이 배에서 내린 다음 가슴이 갑자기 몹시 아파졌다.
그러나 함대 운용에 정해진 계획이 있으니 다시 만나기로 하고 석별의 정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헤드비히 여왕도 레이캬비크에서 내리면서 장난스럽게 한 마디 던졌다.
“침울하신 것 같아요. 자주 오세요.”
“억지로 일정을 만들어서라도 금명간 다시 오겠소.”
“당연히 저를 만나려 오시는 거겠죠?”
헤드비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다 알고 놀리는 헤드비히에게 미안하면서도 얄미워졌다.
화산에서 뭉글뭉글 솟아오르는 하얀 연기를 뒤로 하고 함대는 푸른 파도를 헤치고 달렸다. 이때가 이민호에게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전하아~~”
별궁에 도착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괴성이 별궁 전체를 뒤흔들었다. 여진 호위들이 바짝 긴장하고 이민호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주인님! 큰일 났어요. 대추장 목소리에요.”
“어디 숨어야 하는 것 아냐? 도망가고 싶다.”
포우하탄 대추장이 여행하는 중에 포카혼타스와 함께 다리 건설을 결정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십년 넘게 모은 전 재산의 절반 이상을 한꺼번에 날리게 생긴 대추장이 화를 낼 법도 했다.
커다란 키의 대추장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성큼성큼 이민호에게 다가왔다. 호위들이 긴장한 채 가로막을 준비를 하는 순간 대추장이 소리를 질렀다.
“전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대추장! 진정하게. 그러니까 대추장이 다리를 만들지 말지 결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입안 단계의 건설계획이야 언제든 백지화될 수 있다네.”
대추장을 따라온 포카혼타스가 뒤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자기는 딸이라서 책임 문제에서 쏙 빠지고 이민호에게 모든 책임을 떠밀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반응이 대추장에게서 나왔다.
“예? 샛강에 다리를 놓기로 했다면서요? 그것 말고 새강릉 시의회 의원 놈들 말입니다.”
“그놈들이, 아니 그 사람이 뭘 어쨌기에 대추장이 그리 화를 내나?”
“저희 포우하탄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춤도 못 추고 노래도 못 부르는 가련한 인생들이 적반하장으로 저희들을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다니요! 저희들이 보기에는 그런 고집불통 노인네들보다는 농삿일하면서도 노래하는 고산국 농부들과 여러 명이 발소리를 딱딱 맞추는 춤을 추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훨씬 문화인입니다.”
“잠깐! 의회 놈들이 그랬단 말이지? 내 이놈들을 당장!”
호위들이 후다닥 움직여서 찬 물 두 잔을 가져왔다. 이민호와 대추장은 찬물을 단숨에 마신 다음 한 잔을 더 청했다. 잠시 진정을 하고 나서 차분히 대화를 가졌다.
“다리를 놓는 일은 괜찮다는 거야?”
“그럼요. 포우하탄 사람들이 편해진다면 당연히 만들어야지요.”
“재산 절반이 날아가는데도?”
“그게 제 돈입니까? 포우하탄 부족연맹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돈이죠. 여행 가거나 할 때 쓰려고 제 돈은 따로 관리합니다.”
공사를 확실히 구별한다는 점에서 포우하탄 대추장이 현대 정치가나 금융인, 기업가들보다 훨씬 나았다. 부도덕한 인간들이 손해는 사회화하고 이익은 사유화한다는 말이 2008년에 터진 국제적 금융위기 당시에 유행했었다.
“그런 말을 한 의원들의 이름을 알고 있나? 벌을 내리려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어야지.”
“저희 부족원들이 그 수염 난 놈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른 인종의 얼굴을 구별하기 어렵다지만 조선 출신과 북미 원주민들은 얼굴이 꽤나 닮았다. 쉽게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북미 원주민들이 문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기억력은 오히려 더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 중에 수염을 기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래부터 수염이 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수염을 지저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깎거나 뽑아버린다.
고산국 백성이라도 나이 많은 조선 출신, 혹은 양반가 후손임을 주장하는 자들만 주로 수염을 길렀다. 그래서 예전부터 북미 원주민들이 그들을 몹시 혐오하면서도 남의 문화를 비하하는 것은 실례라고 여겨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새강릉 시장이 헐레벌떡 별궁으로 뛰어 들어왔다. 새강릉을 개척한 전임 시장들은 진중해서 믿음직했는데 임기를 마치고 모두 중앙정부로 영전했다. 그런데 아직 젊은 신임 시장은 경험이 부족한 편이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시의회 앞에 모여서 거칠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도대체 무슨 짓들을 한 거야?”
“몇몇 만취한 시의회 의원들이 길거리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마침 하교하는 아일랜드 여학생들을 도깨비 같다고 놀렸답니다.”
시의회 의원에게 권한은 거의 없고 단순한 명예직에 가까운데도 감투를 쓰면 이렇게 기고만장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벌써 몇 차례에 걸쳐 추밀원과 시의회 의원들에 대한 숙정 작업을 진행했으나 틈만 나면 이런 인간들이 튀어 나왔다.
“나라를 분열시키려고 작정했군. 인종차별은 아주 예민하고 심각한 문제다. 관련자들을 전원 국사범으로 체포해!”
“이미 체포했으나 그 발언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합니다.”
“기억이 나도록 해주지.”
고산국은 아직 신생국이라 법률체계에서 미비한 부분은 경국대전을 준용했다. 그런데 조선의 경국대전에서 형법 부분은 대명률을 고스란히 가져와 처벌을 약간 완화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주리를 틀고 곤장을 치는 조선식 체벌이 고산국에도 그대로 존치했다. 보통은 야만적이라 해서 그런 체벌을 하지 않지만 국왕이나 법관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었다.
심지어 국사범 등 일부 사안에 따라서는 처벌이 아닌 심문 과정에서 고문을 가할 수도 있었다. 고산국도 엄밀한 기준으로는 아직 근대 국가에 불과했다.
============================ 작품 후기 ============================
추밀원과 시의회가 등장할 때마다 화를 내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번에는 곤장 좀 칠 테니까 차분히 넘어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벌써 오후네요. 추석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