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31 92. 1613년 =========================================================================
“의사록으로 인해 국가반역죄나 국왕모독죄에 대한 증거는 충분히 나왔소. 그러나 아일랜드 여학생들을 모욕한 건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는구먼. 재판장! 저들이 좋아하는 조선 방식으로 심리를 진행하시오.”
“명을 받드옵니다, 전하.”
이번 사건 처리를 앞두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이민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고산국은 왕정 국가이며, 법치주의에 근거한 근대국가가 아직 아니었다. 조선과 명나라에서 시행하는 모든 심리방법이 법 논리상 고산국에서도 적용될 수 있었다. 이민호는 그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법정에 형틀이 마련되고 형리들이 등장했다. 형리들은 복장도 특별히 조선 의금부의 나장이나 사령들이 걸치는 바둑판 모양의 옷을 입고 높다란 고깔모자를 머리에 쓰고 나왔다. 이들의 등장만으로 피고들이 겁에 질렸다.
“이, 이건 무엇이옵니까, 전하?”
“피고들이 좋아하는 조선식 심리 방법이야.”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들은 양반들입니다!”
“양반이니까 주리를 틀지. 더 이상 들을 것 없다. 본 심문에 들어가기 전에 형리는 주리를 일단 한 번 틀어라!”
“주리를 틀랍신다!”
형리로 분장한 법원 경비들이 피고의 양 다리를 의자에 묶은 뒤 다리 사이에 굵고 긴 막대기 두 개를 집어넣었다. 이 붉은 막대기에 힘을 줘서 정강이를 양쪽으로 비트는 고문이 바로 주리 틀기였다.
“아아아악~”
첫 번째로 주리 틀기를 당한 피고가 바로 기절했다. 시의원이 나이가 많고 평생 일을 안 해봐서 몸이나 정신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분명 양반집 출신이긴 한데 과거 공부는 안 하고 젊었을 적 한때 시전에서 주먹질로 행세하던 인간이었다.
이것은 형을 집행하는 자들의 경험부족에서 나온 사고였다. 법원 경비들이 말로만 듣고 그림을 통해 설명을 들었을 뿐 실제로 사람을 상대로 주리를 틀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몰라도 힘을 과다하게 주는 바람에 정강이뼈가 부러져 살 밖으로 삐져나왔다.
이민호가 얼른 비올레타의 눈을 가렸으나 이미 봤는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포카혼타스는 그런 이민호의 행동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포카혼타스를 맞아들인다면 이번 일이 아주 오래 갈 것 같았으나, 이민호는 확실한 내 여자부터 챙기자는 주의였다.
“전하! 저 피고는 치료를 한 다음 심리를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재판장. 다음 피고를 심문하시오.”
다시 말하지만 주리 틀기는 형벌이 아니라 심리 방법일 뿐이었다. 재판이 끝나면 형벌을 따로 받아야 하니 피고 입장에서는 무조건 손해였다. 첫 번째 피고가 실려 나가고 두 번째로 형틀에 묶인 자가 주리를 틀기도 전에 비명부터 질렀다.
“했습니다, 했어요! 최 의원이 서양 처자들을 도깨비라고 놀리고 저희들이 맞장구쳤습니다. 제발 그만하십시오!”
“그대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조선식 심리 방법인데 왜 기겁을 하는지 모르겠군. 시의원은 지금도 아일랜드 여학생들이 도깨비 같다고 생각하나?”
“저희들하고 생긴 게 다르지 않습니까? 가난한 나라에서 이민 온 이상하게 생긴 처자들을 장난삼아 조금 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쯧쯧! 어린이가 남의 용모를 놀리더라도 어른들이 나무라고 말려야 하는데, 어른이란 자들이 이 모양이니 이 나라가 참으로 걱정이로다.”
유럽인들의 용모가 자기들과 다르다고 놀림감으로 삼는 분위기가 용인된다면, 동남아시아 출신이나 아프리카 흑인들도 대놓고 멸시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차별한다면 직업이나 재산, 출신지역이나 용모 등 온갖 이유로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멸시할 수 있었다.
국민통합을 지향해야 하는 국왕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현대 미국처럼 속마음이야 어떨지 몰라도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자가 법의 심판을 받거나, 사법기관에서 모르고 넘어가더라도 주변에서 무식한 자라는 나쁜 평판을 받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했다.
인종차별이 노골적으로 행해진 결과 소수인종이 주도하는 반란이 일어나는 꼴을 이민호는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특히 많은 북미 동해안 지역에서는 인종차별 문제에 더더욱 유의해야 했다.
“전하! 피고들이 사전에 입을 맞췄을지도 모르니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피고들 사이에 형평을 맞추도록 한 번씩 주리를 틀겠습니다.”
“현명하고 공정한 판단이오. 그렇게 하시오, 재판장.”
다시 법정에 비명이 이어지고, 심장이 약한 방청객들은 몸서리를 치면서 법정에서 나가버렸다. 전쟁터에서 숱한 죽음을 봐왔던 이민호에게도 몹시 불편한 자리였다. 그렇다고 국왕이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비올레타와 포카혼타스만 먼저 내보냈다.
밖에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뒤늦게 법정에 들어온 방청객들도 비명소리에 움찔하다가 웬만하면 나가버렸다. 법정 분위기가 뒤숭숭해지자 재판장이 지시해서 법원 경비가 방청객들의 출입을 막았다.
변호사는 이런 재판이 조선이나 명나라에서나 있다고 생각했었는지 피고들이 고문을 받는 동안 사고가 마비돼버렸다. 덕택에 재판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검사는 구형하시오.”
“예, 재판장님. 혐의 사실은 피해자들의 증언과 피고들의 자백에 의해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문제는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이 고산국 북미 대륙 동해안, 새강릉 시와 주변 지역에서 2할 정도의 인구 비율을 차지한다는 점입니다. 며칠 전 시의회 앞에서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들이 집단으로 시위한 것으로 미루어 이들이 무장 봉기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한 이 소식을 듣고 아일랜드 본국에서 독립군이 북미를 침공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다른 형법을 적용하기 위해 검사가 이 사건으로 인한 파장이 큼을 낱낱이 밝혔다. 특히 북미 동해안 지역에는 노동력이 몹시 부족한 편인데 고산국에 대한 아일랜드나 유럽인들의 인상이 나빠져 이민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런 요소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번 일을 기화로 고산국 전체에 인종차별 의식이 뿌리 내릴 수 없도록 검사는 매우 강하게 나왔다.
“알았소. 검사는 형량만 청구하시오.”
“피고 5인에게 형법 제412조 5항 내란 유도죄와 동법 제413조 4항 외환 유인죄를 적용해 사형을 청구합니다.”
말 한 마디 잘못한 것치고는 매우 높은 형량이었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렸으나 살벌한 심문 과정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다들 예상하고 있어서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국왕인 이민호가 직접 재판에 참가했으니 국사범 재판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재판장과 배석 판사 두 명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각자 판결문을 작성했다. 판사들 사이에 소수 의견이 있는 모양이지만 판결 자체에 영향은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외환 유인죄의 법리적 해석에서 의견 차가 생겼다고 한다.
“전하. 저희 판사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수고하셨소. 이대로 판결을 내리시오.”
판결 결과를 바꿀 수도 있고 국왕의 권한으로 나중에 감형을 해줄 수도 있었으나 이민호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재판장이 판결문을 들고 좌석에 앉았다.
“피고 5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특별 법정이라 재심은 없다.”
재판장이 나무망치를 두들겼다. 이로써 아일랜드 출신 여학생들을 도깨비라고 놀리던 시의원 5인에 대한 재판은 끝났다.
피고들이 모조리 병원에 실려 가는 바람에 예상치 못하게 궐석 재판이 되었다. 그런데 피고들이 재판을 받거나 병원에 수감되는 동안 그들을 찾아오는 가족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평소 이웃과 가족들에게 어떤 짓을 해왔는지 알만했다.
“놀랐습니다, 전하. 고산국의 법률이 추상같습니다.”
“대추장이 이해하게나. 여러 인종이 함께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이 있을 수 있네. 만약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면 내게 고하게나.”
“별 것 아닌 일에 국왕전하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아닐세! 아주 중요한 일일세.”
그리고 이번에는 야만인 운운했던 피고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피고 둘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었다. 그러나 한 명은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의외로 무덤덤했다.
“겁나지 않나?”
“죽이려면 죽이십시오. 저는 여러 인종을 다스려야 하는 국왕전하의 고충을 이해하겠습니다.”
“알아줘서 고맙군. 너희들을 살리자고 나라를 분열시킬 수는 없어. 일반 시민이라면 곤장 몇 대 치는 것으로 끝났을 거야. 하지만 너희들은 국록을 먹는 시의원이다. 나라를 위해 죽어라.”
사고를 친 시의원 몇 명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큰 사건이 아니었다. 의사록에 기록된 국왕 이민호를 모독한 것만으로도 이들은 죽고도 벌이 모자랐다.
그러나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림으로써 백성들이 함부로 인종차별이나 모욕을 하지 않게 되는 효과를 이민호는 기대했다. 사실 시의원들은 얄밉긴 하지만 재수 없게 과도한 형량을 받은 희생양들에 불과했다.
“안타깝게도 고산국에 와서 국가를 위해 봉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피고들의 신상 기록을 읽어보았다.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너희들이 스스로 걷어찼어. 먼저 교육을 받아야 남을 가르칠 수 있는데 너희들은 그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남들 위에 군림하려고만 했다. 횡포를 부려도 적당히 부려야지. 너희들은 나라에 폐만 끼쳤다.”
“그럼 시의회는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수단 아닙니까?”
“의원 역할을 잘 수행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시의회는 처음부터 너희 같은 인간들을 잡기 위한 개미지옥으로 설계됐어. 부나방처럼 잘들 빠지더군.”
“잔인하십니다, 전하.”
“조선처럼 전혀 책임지는 것 없이 특권만 누리려했던 너희들의 오만이 너희들을 망쳤다.”
결국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던 시의원 세 명도 사형을 언도받았다. 여덟 명에 대한 형 집행은 바로 다음 날 공개 참수형으로 진행됐다.
포우하탄 원주민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조용히 구경하다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사형수의 시체에 대한 모독 행위는 없었다. 이 시기에 조선을 비롯한 대부분 나라에서는 성문에 참수된 머리를 거는 일은 흔했고 잉글랜드에서는 사형수들을 철창에 넣어 썩어서 백골이 드러날 때까지 런던교 등에 전시했다.
“대추장. 어디를 가든 저런 인간들은 꼭 있어. 그러니 불쾌하더라도 내 얼굴을 봐서 이해하게.”
“불쾌하더라도 전하의 얼굴을 보겠습니다.”
“뭐?”
“농담입니다. 조선말이 늘면서 말장난만 늘고 있습니다.”
“대추장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야. 포우하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어?”
원주민들은 아일랜드 이주민들처럼 항의 시위를 하지 않았다. 새강릉 주변 지역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진 원주민들 입장에서 의외로 자제력을 보인 셈이었다. 그러나 포우하탄 부족연맹들 사이에서 아일랜드 이주민들보다 훨씬 더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었다고 한다.
“만약 이번에 전하께서 재빨리 처리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지 저도 모릅니다. 고산국과 한 번 전투를 벌인 다음 여의치 않으면 중앙초원으로 이주하자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그곳도 개발 중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계속 쫓겨나고 밀려나다가 어느 산비탈 아래에서 포우하탄 부족연맹이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미안하지만 포우하탄 부족연맹을 독립시켜줄 수는 없어. 북미의 어느 곳이든, 어느 인종이든 마찬가지야. 북미가 한 나라가 돼야 제대로 힘을 발휘할 걸세.”
실제 역사에서 대추장 와훈수나콕은 백인들이 정착하도록 도와줬다가 배신당하고 몇 차례 싸우기도 했으나, 고산국과는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다. 이민호 입장에서도 포우하탄 부족연맹과 좋은 관계가 이어지도록 노력한 대추장을 고맙게 여겼다.
“유럽과 중동 지역을 돌아본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만 저희 포우하탄 사람들을 대해준다면 앞으로도 큰 불만은 없을 것입니다.”
“이해해줘서 고맙네.”
“그런데 포카혼타스는 언제 데려가실 겁니까?”
역시나 이번 대화도 기승전 포카혼타스로 끝났다. 차르 그놈처럼 대추장도 몹시 집요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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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끝났습니다.
이제 종교나 조선 출신 양반 이야기는 안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