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35 93. 1614년 =========================================================================
루스 차르국의 차르 표도르가 또 고산국 왕궁을 방문했다. 차르가 처음, 그리고 두 번째로 찾아왔을 때는 그래도 외교 격식에 맞게 성대한 환영행사를 거행했지만, 그 뒤로도 하도 자주 찾아오다보니 지금은 오든지 말든지 예조에서는 신경도 안 썼다. 이민호만 몹시 신경이 쓰였다.
“저 녀석! 우리 왕궁에 아예 눌러 앉아 사는군.”
“여름휴가래요. 차르가 너무 자주 찾아온다고 화내지는 마세요.”
“저놈은 겨울 휴가, 봄 휴가 때도 왔소. 일국의 군주 주제에 뭔 놈의 휴가가 그리 많은지.”
“차르가 올 때마다 전하께서 민감해지시는 것 같아요.”
“마르그레타는 비올레타의 딸이지만 내 딸이기도 하오. 딸 가진 애비로서 당연한 방어 본능이오. 쳇! 루스 차르국에 반란이나 나버려라! 폴란드는 뭐하나? 차르가 없는 동안 어서 루스 차르국을 공격하지 않고.”
이민호는 궁성 3층 국왕 집무실 창가에 선 채로 안절부절못했다. 창문에서 내려다보이는 정원의 긴 의자에 앉은 마르그레타와 차르 표도르가 서로 활짝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딸과 예비 사위의 모습을 너무나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우리 마르그레타가 너무 예뻐 보이지 않나요?”
“흥! 애비한테는 저런 예쁜 미소를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이민호와 마르그레타가 만나기만 하면 정책 토론하기 바빴으니 웃을 일도 없었다. 다만 서로의 능력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가지게 됐다.
자랑은 아니지만 마르그레타는 당장 북미의 시 하나 정도는 맡겨도 될 만큼 행정의 전문가로 성장했다. 정치와 행정에 대한 본인의 흥미와 노력도 있었지만, 비올레타와 혜영이 키우고 이민호가 단련시킨 셈이었다.
이민호는 솔직히 마르그레타를 먼 나라로 보내는 것이 아까웠고, 국내에 남아 능력을 활용해주길 바랐다. 왕자나 공주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은 마음과 별개로, 마르그레타는 이미 완성된 행정가였다.
그러나 고산국에는 마르그레타를 훨씬 능가하는 뛰어난 행정가들이 많았고, 다른 왕자나 공주들의 능력이 뒤떨어진다고 단정하기 어려웠다. 다만 마르그레타를 제외한 다른 2세들은 왕실 분위기 때문에 정치와 행정 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을 자제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아주 건전하게 교제하고 있어요. 그러니 전하께서는 쌍안경으로 그만 감시하세요.”
“험! 뭐, 혹시나 하고 말이요. 우리 마르그레타에게 손이라도 대는 순간 차르의 손모가지를 뎅겅!”
“젊은이들이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알았소.”
그러나 둘은 단순한 젊은이들도 아니고 차르와 공주의 신분이었다. 둘이 잘 되고 안 되고에 따라 두 나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루스 차르국의 보야르들과 일반 민중들은 강대국인 고산국과 국혼이 맺어지길 염원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스웨덴이 아직도 루스 차르국의 영토를 노리고 코사크들이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어려운 상황에서 고산국이 든든한 우방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산국 본토에서는 전혀 아니었지만 모스크바에서 보기에 고산국은 바로 동쪽으로 영토를 접한 이웃나라였다. 동쪽 국경 지역에서 고산국과 전쟁이 나나 했더니 기근 내내 엄청난 양의 식량을 보내줘 루스인들을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도 했다. 고산국에서 개입하지 않았다면 역사에 대기근으로 기록될 뻔한 기간이었다.
가짜 드미트리의 반란과 루스 영토를 노리는 폴란드의 공격도 단숨에 제압했다. 이리저리 루스인들을 도와준 일이 많아 고산국 사람들이 몽골인과 비슷하게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이 신뢰하게 됐다. 고산국 철도 기관사나 역무원이 지나가면 루스인들이 털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우리 마르그레타를 울리기만 해봐라.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루스인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노예로......”
“전하!”
마르그레타와 차르 표도르가 결혼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왕국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궁궐을 지키는 병사들도 표도르를 외국의 군주가 아닌 부마로 따스하게 대해줬다. 이민호 혼자서만 발을 동동 굴렀으나 아버지의 질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흠! 그냥 상상만 해봤소.”
“나무 궤짝 안에 든 것은 총인가요? 사위에게 줄 선물인가 보죠?”
“저런 놈에게 무슨 선물이요? 그저 루스 군대가 너무 약한 것 같아서 주변국들과 균형을 맞춰주려는 것뿐이오. 총 값은 받아낼 것이오.”
격발장치는 기존 화승총과 달라진 것은 없었으나 총알과 화약이 종이로 만든 약포 안에 담겨 일체화된 형식이었다. 이 시대에는 총을 수직으로 세우고 화약통 마개를 열어 총구 안쪽으로 화약을 흘려보내고 총알을 담아 꽂을대로 꾹꾹 누른 다음 화약접시에 점화약을 붓고 화승을 적당히 당긴 다음 조준해서 쏘는 형식이었다. 숙달된 사수도 1분에 3발 이상 쏠 수 없었다.
반면에 이 총은 약포라는 간단한 도구만으로 장전 시간을 대폭 줄여주는 몇 단계 앞서나간 새로운 방식이었다. 장전 절차가 줄어들어 전장에서 총병이 장전 순서를 헷갈려 불발되는 경우도 확 줄어들었다. 총열에 강선을 파서 사거리와 명중률도 향상됐으나 총의 위력 면에서는 기존 머스킷과 큰 차이가 없었다.
“저번에 우방국에 수출용으로 개발한다던 바로 그 총이군요. 사격 속도가 두 배나 빠르다죠? 그럼 단순한 계산으로도 병력을 두 배로 증강시켜주는 거나 다름없어요.”
“그렇지는 않소. 전쟁에서는 아무래도 병력이 많은 편이 유리할 것이오.”
17세기 전장에서 총을 주로 사용한다지만 사격 속도가 낮아 창과 검의 사용빈도가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이 경우 총의 성능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병력이 많은 편이 전술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서 승리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사격 속도가 충분히 높다면 총검을 꽂아 육박전이나 단병접전을 벌일 필요가 대폭 줄어든다. 기병 돌격에 대한 대응력도 훨씬 높아진다. 종이 약포의 활용은 그 경계선에 놓여 있었다. 격발장치만 더 개량된다면 참호전에서도 육박전을 벌일 필요가 없겠지만, 뇌관은 마지막 결정적인 장애였다.
그리고 같은 면적에 포진한 병력의 화력이 두 배로 늘어난다면 그 장점은 이루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 전술을 수정해야 할 정도의 큰 변화를 전장에 불러올 수도 있었다. 흔히 무시하기 쉽지만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병참에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도 대폭 줄일 수 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고산국 총과 총알을 분석했지만 복제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해요. 들으셨죠?”
“당연히 처음부터 예상했소. 기계공업과 금속공학, 화학 등 제반 학문이 충분히 높은 수준에 올라야 그나마 복제라도 가능할 것이오.”
“전하께서 처음부터 기밀로 분류한 분야군요.”
국력을 기울여 고산국 보병총을 복제하려던 몇몇 유럽 왕실이 재정적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독일 영지 중에서 몇 곳이 괜히 소리 없이 망한 것이 아니었다. 고산국 총기를 복제하려던 모든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대장장이가 대충 철판을 두들겨 총열을 만들거나 연금술사가 화약에 마법의 가루를 뿌린다 해서 고산국 보병총과 비슷한 성능의 총이 나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어느 곳에서는 시간을 들여 한 달에 하나 비율로 총열에 강선을 팠지만 제대로 된 총알과 결합되지 않은 강선은 낭비일 뿐이었다. 물론 강선으로 인해 사거리와 명중률이 향상돼 소수 저격병이 운영하고 있었으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일반 병사들에게 나눠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차르가 말하길, 올 가을에 식을 올리면 어떠냐고 하던데요.”
“안 돼!”
“마르그레타도 동의했어요.”
“휴우~”
이민호는 마르그레타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민호가 국왕이라지만 그 역시나 자식에게 절대 이길 수 없는 흔한 아버지일 뿐이었다.
“젊은 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았기에 덜하지만, 조선에서 뿌리 깊은 신분제도 아래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지 못한다. 그래서 조선에서 천한 직업으로 여기던 상인이나 청소부, 마부와 막일꾼 등에게 함부로 대하는 일이 흔하다.”
알콩달콩 연애중인 마르그레타와 차르 표도르를 불러 어려운 퀘스트를 내주었다. 마치 청춘남녀들의 애정을 방해하는 악당이 된 기분이었지만 이민호는 이것이 두 사람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 여겼다.
“특히 물건을 사는 손님 입장에서 가게 주인이나 점원에게 위세를 부리는 등 불쾌하게 만드는 진상들도 많다. 백성들이 일하는 환경을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쾌적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행정가가 할 일이다.”
“그러니까 감정노동자들이 불쾌하지 않게 일하도록 정책을 세우라는 말씀이죠?”
“그렇다. 후후! 나나 너희 어머니들이 수십 년 동안 시도해서도 못해낸 일인데 너라고 할 수 있겠느냐?”
“자신 있어요. 해볼게요!”
그러나 이것은 구매자라는 유리한 지위를 이용한 횡포로서 아주 오랜 과거부터 있었고 현대 사회에서도 해결하기 난망한 일이었다. 괜히 행정처분이나 법을 강화해봤자 단기적인 효과에 그칠 뿐 손님과 점원 간에 갈등만 커질 소지가 있었다.
그리고 손님뿐만 아니라 가게 주인이나 점원이 진상일 수도 있었다. 진상 손님 때문에 점원이 일반 손님에게 불친절해진다는 것은 다만 핑계일 뿐이었다.
결과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마르그레타가 주도한 정책은 결국 실패했다. 진상 손님에 의한 갖가지 영업방해 행위는 이미 범죄로 규정돼 있었으나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언어폭력의 범주를 확대했을 뿐이었다. 법률과 행정처분이 강화되고 나서 시행기간이 짧다는 문제도 있었다.
“세월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거여요. 그 전에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나이 든 주민들이 의식 개선을 하도록 꾸준히 홍보해야 해요.”
“과연 50년쯤 후에는 나아질까? 미안하지만 나이나 조선의 사회제도에 익숙했던 자들이 문제라는 전제는 함정이었다.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안다는 말이 있지만, 의식은 넘칠 정도로 족한데도 예의를 모르는 자들이 있다.”
이민호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세상이 각박해져서 그렇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조선이나 다른 나라에 있었을 때보다 고산국에 와서 경제적으로 생활이 훨씬 풍족해졌고 여가 시간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교육을 받으면 조금 덜 무례해지겠죠. 백성들의 의식도 시간이 갈수록 차차 나아질 거여요.”
“원시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무례한 말을 하면 그 즉시 머리가 쪼개졌다. 파푸아 섬의 식인종 마을에서는 본능대로 난폭하게 행동하는 자일수록 더 일찍 이웃사람들의 뱃속에 들어가지. 치안이 안정되고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일수록 보복당할 걱정 없이 안심하고 타인에게 더 무례해질 수 있단다.”
이민호가 어느 소설가와 인류학자의 말을 인용해 반론을 제기했다. 식인종의 경우 파푸아 뉴기니 원주민들의 지능이 현대 영국인들보다 높은 이유로 제시한 사례였다.
상식과 달리 원시인들은 무례하지 않고 식인종들은 난폭하지 않았다. 이는 목숨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타인에게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고 자제하기 때문이다.
“교육과 상관없다는 뜻이군요. 하지만 순위가 뒤쳐질 뿐 전혀 상관없지는 않을 거여요. 이번 일을 명심할게요. 아바마마께서 해결 방법도 생각해놓으셨겠죠?”
“기회만 생기면 남에게 피해를 끼치려는 공격성향을 가진 자들이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어느 사회에든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을 추려서 다 쫓아낼 수도,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길 수도 없지 않겠니?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남을 공격하려는 자들이 거꾸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를 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시인이나 식인종이 될 수는 없지.”
“결국 다시 법과 교육으로 돌아왔군요.”
“행정이란 이렇게 어렵단다. 결국 정치의 영역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어.”
퀘스트는 실패했지만 마르그레타와 차르 표도르에게 충분한 교훈을 심어주었다. 이민호가 결혼을 허락하자 두 사람의 결혼 준비가 빠르게 진행됐다. 결혼식은 가을에 모스크바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우울해진 이민호를 위해 후궁들이 열심히 위로해주었다.
“기운 좀 차리세요. 이제 겨우 하나 보내면서 이러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세요?”
“으악! 앞으로 최소한 65번이나 이번과 같은 일을 겪어야 해?”
“67번요. 공주들 숫자도 몰라요? 다 합해서 68명이에요.”
혜영이 이민호에게 핀잔을 주었다. 임신 중인 후궁들도 있어서 시집보낼 공주의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었다. 마르그레타가 첫 딸이라 특별히 정을 더 많이 쏟긴 했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하나하나가 더없이 소중한 자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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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국 왕실 기준에 적합한 배우자감은 거의 없는 셈입니다. 다들 알아서 가야지요. 생활의 불편함 때문에 본국에 남을 공주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