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53화 (802/1,000)

00853  95. 전쟁의 서막 1618년  =========================================================================

장의위원회가 조직되고 장의위원장은 대원군 이응화가 맡았다. 이민호의 가문은 4대째 독자로 이어진 집안이었지만 이응화는 가장답게 문중의 대소사를 해결할 능력과 경험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이응화는 가장 먼저 이순신의 본가가 있는 아산에 연락해 가족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조선에서 급히 거친 베를 수입해서 상복을 마련하고 정신이 없는 이순신과 이면을 대신해 문상객을 접대했다. 이순신 모친의 장례는 이 시대 조선 사대부의 장례 관습에 따라 3월장으로 결정됐다.

“비올레타. 미안하지만 상복은 흰색이오. 이번에는 조선식 장례로 진행하기로 했으니 따라주시오.”

“어머나! 몰랐어요. 바로 갈아입을게요.”

장례에 왕실 식구들도 대거 참가했다. 다만 후궁들이 여러 지역 출신이고 건국 이래 장례식을 몇 번 치러보지 못해서 곳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고산국은 젊은 사람들이 세우고 아직 새파랗게 젊은 국가라서 죽은 사람이 아직 드물었기 때문이다.

고산국에서 상복은 흰색이나 검은색 중에서 택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모친은 인생의 긴 기간을 조선에서 살았고, 아산 이순신 가문의 선산에 매장하기로 해서 조선식으로 거행하기로 했다.

조선에서 상복은 흰색이므로, 평상복으로 흰색을 의식적으로 기피하는 경향과, 멋으로 흰색을 입으려는 경향이 충돌했다. 뜻밖에 한민족이 전통적으로 백의민족이라는 근거는 <삼국지 동이전> 부여편의 부여 복제에 관련된 기록밖에 없었다. 현대까지 남은 삼국시대 외교관 그림이나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한 인물들은 죄다 컬러풀한 옷을 입고 고구려 옷 중에는 심지어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현대적 패션도 눈에 띈다. 조선 후기 풍속화를 보면 흰색 옷이 자주 등장하지만 색이 들어간 옷을 입는 경우가 더 흔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은 가난하고 염색기술이 없어서 흰 옷을 입는다고 날조했다. 그러나 조선 왕조 내내, 영조 때에도 흰색 옷의 착용을 금지하는 교지를 반포한 것은 신분제 강화와 사치를 금하기 위해서라는 명백한 목적이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원나라 황제와 고관대작들은 물론 모든 몽골 백성들이 신년 축제 때 ‘능력만 있으면’ 흰 옷을 입는다고 서술했다. 전근대에 흰 옷은 표백 과정 때문에 제작 단가가 오히려 더 비싼 편이었다.

순조 8년인 1808년 1월 10일 실록 기사에, 충무공의 상 때 통영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이것이 유전되어 지금도 여자들이 치마도 흰색을 입는다는 전 통제사 이당의 발언이 실려 있다. 통영 백성들이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느냐고 묻는 순조 임금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지만, 충무공과 통영 백성들이 입는 흰옷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듯하다.

“국왕. 방금 조선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산 본가에서는 장지와 빈소를 비롯해 대부인 마님을 모실 준비가 끝났다고 하네. 비석도 준비했네. 앞면에 새길 문구는 작성이 끝났고 뒷면에 새길 문구는 문장이 뛰어난 내 친우에게 부탁했네. 글씨 쓸 사람은 조선에 가서 찾아보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운구는 언제 합니까?”

“총함장님께 여쭤보니 사흘 후가 좋겠다더군.”

“장의위원장으로서 노고가 많으십니다. 아버지.”

“존경하는 분인데 이런 일이라도 도와드려야지.”

이응화가 실질적인 상주 노릇을 하며 모든 장례 절차를 주도했다. 이순신 모친의 시신을 아산에 운구할 배도 온통 희게 칠하는 작업을 마쳤다.

“헌데 국왕은 왕도에 남는 게 좋겠네.”

“안타깝지만 그래야겠지요.”

이민호는 몹시 씁쓸했다. 몇 년 전에 제주목사 이경록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조선에 가지 못했다. 국왕이 명목상 신하 부친이나 모친의 장례에 참가하기 위해 왕도를 비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산국도 건국한 지 30년이나 되면서 드문 편이지만 초기 이민자들 일부가 수명을 마쳤다. 인간이란 항상 젊게 살 수는 없으니 고산국 백성들도 이제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의 죽음에 대비해야 할 때였다. 장수촌이나 납골당, 공동묘지를 준비하는 것도 이 단계에 국가가 할 일이었다.

며칠 후 아리수 항구로 몰려든 백성들의 애도 속에서 이순신이 모친의 시신을 운구하며 본가로 돌아갔다. 항공대장 이면도 석 달 동안 휴가를 받아 같은 배를 타고 아산으로 떠났다. 해군과 항공대의 지휘부가 일시적으로 텅 비어서 임시 체제로 돌아가야 했다.

그 다음 날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이민호가 선영과 몇몇 호위들만 거느리고 아리수 강변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 양력으로 2월 말인데도 벌써 봄이 오는지 바람이 훈훈한 편이었다.

“울적하세요, 주인님? 대부인 마님께서 장수하시고 병도 없이 편하게 돌아가신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세요.”

“그렇긴 해도 하필 중요할 때에 총함장님이 현역에서 벗어나셨어.”

“조선처럼 고산국에도 기복 제도가 있잖아요. 급하면 어명을 내려 관직에 복귀시키지 그러세요?”

“그거야 희망자에 한해서 적용하는 편이 나을 거야.”

효가 강조되는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도 모든 양반들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은 아니었다. 3년의 시묘살이를 다 마치면 조정에서 상을 내려줄 정도로 이 시대에도 제대로 삼년상을 이행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만큼 고통스런 일이었다. 이순신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묘살이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민호는 걱정이 많았다.

“주인님! 저기 물수리에요!”

“오오!”

날개를 활짝 편 물수리가 발톱을 바짝 세운 두 발을 앞으로 쭉 뻗은 채 수면으로 파고들었다. 커다랗게 물보라가 일고 나서 잠시 물속에 가만히 있던 물수리가 어느 순간 날개를 퍼덕였다. 물을 털며 하늘에 떠오른 물수리의 발에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걸려 있었다.

따뜻한 남쪽에서 겨울을 보내고 곧 북쪽으로 날아갈 물수리가 오랜 여행에 대비해 부지런히 사냥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커다란 둥지에 아기 새들이 어미 새를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멋지다.”

“저쪽에 사진사들 몰려있는 곳을 보세요.”

갈대밭에서 황토색이나 누런 위장복을 걸친 사진사 수십 명이 물수리의 동작을 사진기에 담고 있었다. 하나 가격이 몇 십 원이나 하는 망원 경통을 단 최고급 사진기 수십 대가 튼튼한 삼각대에 얹힌 채 쭉 늘어서 있었다.

“직업적인 사진작가들일까?”

“설마요. 주인님께서 백성들에게 남는 시간에 취미를 가지라고 꾸준히 교지를 내리셨잖아요. 주말에 자연을 벗 삼아 돌아다니면서 기록을 남기기에 사진만큼 좋은 취미도 드물 거여요.”

“그래? 좋긴 한데 아주 비싼 취미일 것 같다.”

갈릴레오의 지도를 받아 광학연구소에서 개발한 경통 교환식 사진기가 비싼 값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주로 망원렌즈인 경통도 원가의 수십 배를 소비자 가격으로 정했는데도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사진기와 렌즈는 잘 만들었는데 현대와 같은 디지털 저장방식이 아닌 필름을 인화하는 사진기였다. 천연색 사진 필름을 개발해 생산한 것도 채 몇 년 되지 않았다.

“사진기가 아주 좋습니다. 경통이 굉장히 길군요.”

“400밀리 망원 경통에 2배 확장기 한 개를 달았소. 대략 열여섯 배로 당겨서 찍는다오.”

머리에 빵모자를 쓴 40대 초반의 남자가 이민호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퉁명스럽게, 그러나 자랑스럽게 대꾸했다. 망원 경통을 올린 삼각대가 두 개에 어깨에 멘 사진기가 한 개, 그리고 가방에도 사진기와 경통 몇 개가 더 들어 있었다. 사진기와 경통만 해도 사람 몸무게 가까이 나갔다.

“감광지는 흑백이요, 천연색이오? 아무래도 천연색이 낫지요?”

“무슨 말씀을! 예술을 하려면 당연히 흑백이지요. 천연색 사진은 천박해서 예술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진사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새로운 제품이나 신기술이 시장에 진입할 때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소비자들의 심리적인 저항을 넘어서야 하는 단계가 남았다. 물론 사진은 흑백이든 천연색이든 그림 작가들에게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다.

인터넷에 연재하든 말든 상관없이 컴퓨터로 글쓰기가 일반화된 2000년 전후에 보수적인 문학계에서는 거부감이 극심했다. 문학이란 자고로 원고지에 만년필로 또박또박 써야 예술혼이 실린다는 원로 작가의 푸념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들에게 원고지나 만년필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타자기를 두들기거나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해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대문호들은 이들 기준으로는 작가도 아니었다.

“불만이 있으신 것 같아요.”

“고지식한 인간들을 위해 망원 경통 가격을 올려.”

잠시 고민하던 이민호가 내뱉었다가 곧 취소했다. 지금도 사진 관련 장비를 판매하면서 지나친 폭리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과 음악 감상 등 단순한 취미로 배우는 데는 비용이 얼마 들지 않았으나 본격적인 취미로 삼을 때는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식으로 가격구조가 짜여졌다. 보병용 양산형 흉갑과 기사용 갑옷의 가격차가 천양지차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약간 높은 성능을 얻기 위해 몇 배를 더 지출해야 하는 것은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였다.

“저기 웬 배가 들어오고 있다. 항구로 구경 가자.”

아리수 항으로 접근하는 배는 규모로 봐서 유럽을 왕복하는 상선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배가 일반 상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역시나, 현측 문이 열리더니 소떼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수송 책임자인 예조의 젊은 관리가 이민호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전하! 하찮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저를 이렇게 마중 나오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허! 국가의 미래를 책임 질 아기와 어린이들에게 영양을 공급할 소들이 오는데 내 어찌 왕궁에 편하게 앉아 있겠는가? 스위스 산골짝에 들어가기 전에는 구하기 어렵다는 소를 용케도 구했군 그래.”

우연히 항구에 구경 나왔던 이민호가 뻔뻔하게 대답하면서 예조 관리를 감동시켰다. 처음에는 스위스에서 생산하는 고급스런 치즈 때문이었다. 고산국 본토나 북미 낙농가에서 생산한 치즈는 스위스나 독일 치즈 장인을 초빙해 만들게 해도 스위스 치즈의 맛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젖소라고 다 같은 젖소가 아니었고, 우유의 맛과 영양이 제각각이었다. 홀스타인종 젖소는 우유 생산량이 많은 대신 맛이 떨어지고 고형분이 적어 치즈 생산에 덜 적합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홀스타인종 얼룩소 말고 다른 품종의 소를 들여오라는 어지를 내린 적이 있었다.

“유럽에서 키우는 젖소는 얼룩소나 얼룩소와의 잡종이 대부분이라 누렁소 순종을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소문을 듣고 프랑스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잉글랜드 국왕 소유의 섬에서 누렁소 순종 몇 십 마리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수고가 많았네. 검역 절차 후에 축산연구소에 인계하게.”

“예, 전하.”

이 시대 유럽에서 키우는 젖소 품종 중 홀스타인 외에 저지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저지 섬에서 난다 해서 저지종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홀스타인이 개량되기 전 유럽 전역에 걸쳐 사육되던 고유 품종이었다.

“젖소가 좀 작지 않나요?”

“맞아. 그래서 우유 생산량도 적을 거야.”

저지종과 홀스타인종은 체중과 산유량이 25퍼센트 차이가 나고 사료는 저지종이 20퍼센트 덜 먹었다. 그래서 단순히 우유 생산량의 효율로 따지면 홀스타인종이 훨씬 나았다. 항온동물은 체중당 표면적 비율이 높을수록, 즉 체구가 작을수록 에너지 효율이 낮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우유 맛이 아예 차원이 다르고 저지종의 우유에 함유된 고형분이 많아 치즈 만들기에 훨씬 경제적이었다. 유단백질 함량과 구성 비율 등을 따진 우유 품질도 저지종 우유가 훨씬 좋았다.

“몇 년 전부터 웬만하면 산지에서 상품을 수입하는 정책을 취하고 계시잖아요? 어째서 소는 직접 도입하신 건가요?”

“우유는 유통기한이 짧잖아. 그리고 식품은 가급적 우리가 직접 키워서 먹는 게 좋아. 특히 우유는 아기들과 아이들이 먹을 거잖아.”

다행히 저지종 젖소는 더위에 강했다. 아열대에 속한 본토나 북미 남부, 혹은 호주의 기후가 생육에 적합한 편이었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홀스타인종 젖소만 키우도록 법적 규제를 받았다. 저지종 젖소가 들어온 것은 2010년, 그것도 처음에는 검역문제 때문에 소를 직접 들여온 것이 아니라 수정란을 수입해 국내 암소를 대리모로 삼아 출산시켰다.

“물론 산모의 젖이 충분하면 가장 좋겠지만 초산이라든가, 사정은 다양하니까 우유로 보충해야겠지.”

사람 아기에게 다른 포유류 종의 젖을 먹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특히 우유에 함유된 베타 케이신의 A1 변이체는 당뇨병, 심장질환, 정신분열증 등 인간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논쟁이 장기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런 의학적 논란을 잘 몰랐고, 엄마들 입장에서도 당장 아기들을 굶길 수 없으니 우유나 분유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잡곡이나 묵은 쌀이 많으니 사료 걱정은 없겠어요.”

“사료를 먹이다니 무슨 소리야? 365일 초지에 방목해서 키울 거야.”

유럽에서는 방목해서 소를 키워서 저지종 젖소에서 짜낸 우유 가격이 리터당 1유로 이하였다. 축사에 가둬두고 사료를 먹인 젖소에서 짠 우유는 생산원가가 높은 반면 맛은 떨어졌다. 포도주나 우유처럼, 고산국이 식량 부족 문제에서 벗어난 이후 식량 고급화 정책이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선영이가 좀 적어둬. 소시지에 돼지고기 외에 다른 고기, 특히 닭고기를 섞지 말 것. 특정 요리와 식품에 일반적인 주재료 외의 재료 사용을 금하거나, 사용할 경우 반드시 그 사실을 밝힐 것.”

“요즘 같은 봄철에는 닭고기가 조금 더 비싸지 않나요? 식품 원료를 달리 해서 얻을 이익이 없는데 설마 그런 짓을 하겠어요?”

“고기 종류에 따라 가격차가 생기면 그런 짓을 할 인간들이 있거든.”

선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수첩에 이민호의 지시사항을 열심히 적었다. 아주 예전에 이민호가 독신 생활을 하면서 마트에서 소시지를 살 때마다 재료를 일일이 확인하던 생각이 나서 이런 지시를 내렸다.

생산자 입장에서는 원가를 아주 조금 절감하는데 불과하더라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비싼 돈 내고 입맛 버리는 일이라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이민호는 최소한 고산국 영토 내에서는 가공식품을 안전하게 사먹을 수 있게 되길 바랐다.

============================ 작품 후기 ============================

이순신의 퇴장은 밸런스 패치가 맞습니다만, 은퇴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입니다. 오히려 늦었지요. 나중에 다시 등장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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