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64 96. 1619년 사르후 전투 =========================================================================
“도련님! 목표가 완전히 가려서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본진도 곧 모래바람에 휩쓸립니다!”
“포든 총이든 지향 사격 실시해! 어서!”
잔뜩 당황한 감불에게 지시한 다음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선영이 팔을 붙잡았다. 생각해보니 장갑차 바깥으로 나가봤자 이민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열린 쪽문 틈으로 강력한 바람이 차내에 들이닥치면서 무수히 많은 모래알이 손잡이를 잡은 손을 아프도록 때렸다. 이민호가 힘겹게 쪽문을 닫았고, 선영이 얼른 문을 잠가버렸다.
- 두두두두두~
- 콰쾅! 뚜루루루룩~
모래바람에 가린 북쪽에서는 수만 기병이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남쪽에서는 천지가 까맣게 뒤덮인 가운데 총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조선군과 명군은 어떡하지?”
“주인님의 안전과 본진의 무사가 우선이에요.”
고마운 말이었지만 이민호는 동로군 전체 병사들의 목숨을 책임진 총지휘관이었다. 얼른 잠망경으로 주변을 살폈으나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서 초조함에 답답함이 더해졌다.
그 순간 갑자기 총성이 한꺼번에 울렸다. 모래바람에 가려 목표를 찾지 못한 조선군 포수들이 총구를 수평으로 든 채 일제히 사격하면서 낸 소리였다. 바람결에 좌영장 김응하가 내지르는 고함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검은 모래바람에 의해 목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총병에게 불리하고 기병에게 유리하긴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화승총을 장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총구 안에 추진용 화약을 넣기도 힘들지만 화약접시에 담은 점화용 화약이 바람에 모조리 날아갔다. 기술적 문제로 조선 조총의 화약접시 덮개는 완전히 밀폐되지 못했다. 그리고 바람이 너무 세서 포수가 간신히 장전을 마치고 후금 기병을 향해 조총을 쏘기 직전에 화승이 꺼져버리기도 했다.
실제 역사에서 검은 모래바람은 심하 전투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요인이었다. 실록에서 하필 후금 기병이 돌격할 때 모래바람이 분 것을 안타까워하듯이, 청나라 기록에서도 마침 조선군 진영으로 돌격하는 순간에 모래바람이 불어준 덕택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하필 중요한 순간에 이게 뭐야! 모래바람 따위 적당히 전투가 끝난 다음에 몰려오든지.”
“주인님 저기 혹시. 아! 아니에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신선과 비슷한 국신을 믿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나 여진, 몽골족은 하늘을 경외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선영은 후금의 국신이 중요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신통력을 발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뜻을 말로 전하려다가 말았다. 이민호도 대충 눈치를 챘지만 언급을 회피했다.
“시야를 가리는 검은 모래바람은 지나갔어. 이제 강풍뿐이야. 바람이 가라앉으면 적의 기병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나 잠망경으로 바깥을 살피던 이민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진 기병들이 진지 안쪽에 위치한 창병인 조선 살수들에게 일제히 화살을 날린 다음 허술해진 장창의 숲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한 바람을 타고 날아간 화살은 위력이 훨씬 강해진 듯했다.
포수들의 조총은 강풍 때문에 여전히 무력했지만 조선군 사수들은 열심히 활을 쏘았다. 그러나 선두에서 달려오는 후금 기병들이 나무방패를 들고 있었다. 조선 각궁은 후금 기병들이 입은 두정갑을 충분히 관통할 수 있었지만 허술한 나무방패에는 막히고 말았다. 말 가슴에만 두른 마갑도 화살로부터 말이 치명상을 입는 것을 잠시라도 막아주었다.
“감불! 조선군이 위험하다! 후금 기병에게 휩쓸리겠어!”
“명군도 위기입니다. 우리 본진의 코앞에도 후금 기병이 최소 2만이 넘습니다! 조선과 명군에게 1개 대대씩 지원하고 정면의 적을 해치운 다음 우방군을 본격적으로 지원해주겠습니다!”
“그렇게 해.”
사령관 감불과 지휘부 요원들도 정신이 없을 텐데 굳이 무선통신으로 지시한 것은 조선군과 명군이 같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물론 아군의 희생을 최소로 줄이고 싶었다.
중국 사서에는 사르후 전투의 일부를 구성하는 부차 전투, 조선 기록에는 심하 전투, 혹은 심하 부동 전투가 비슷하지만 다른 조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남북 5km, 동서 2km밖에 안 되는 부차 벌판에 양쪽 합해서 10만이 넘는 군세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좁은 지역에 바글바글한 것 같지만 서울의 인구밀도는 이곳보다 1.6배나 높았다.
- 뚜루루루룩~ 뚜루루루룩~
전면에 대열을 이루어 배치된 장갑차 상면에서 사수들이 기관총을 시원하게 연사했다. 허연 연기 너머로 후금 기병들이 끊임없이 몰려왔다가 그대로 쓰러져갔다. 쓰러진 말이 비명을 지르고 총탄에 맞은 후금 기병들이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시간이 갈수록 말과 기병의 사체가 방어선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장갑차 차체 전면, 차량 안에서도 기관총 총구 끝만 내밀고 사격할 수 있었다. 장갑차 사이에 배치된 보병을 제외하더라도 장갑차 연대의 화력은 충분히 강했다.
- 타타탕!
장갑차 기관총 사수들이 탄띠를 교환하는 아주 잠깐의 시간에 운 좋게 보병들의 사격을 피해서 진지로 뛰어든 기병들이 있었다. 그러나 운 좋은 후금 기병들은 진지 앞에 파놓은 얕은 해자에 말 다리가 걸려 땅에 처박히거나 해자를 간신히 뛰어넘었어도 결국 윤형 철조망에 걸려 쓰러졌다. 쓰러진 후금 기병을 향해 아군 보병들이 총탄을 마음껏 선사했다.
- 쿵!
“이게 무슨 소리야?”
“후금 기병이 기병창으로 장갑차 전면을 찔렀어요.”
강력한 적을 상대한다는 각오를 다진 후금 기병은 창날이 장갑차에 닿는 순간에도 끝까지 창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기병창이 부러진 직후 말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충격을 온몸으로 받은 기병은 공중에 붕 떠서 포물선을 그리며 장갑차에 부딪친 다음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기계화 보병들이 그 용감한 기병을 사살했다.
이민호가 잠망경을 돌려 조선군의 상황을 살폈다. 조선군 우영이 주둔한 진지에는 이미 후금 기병들로 가득 찼고, 좌영에도 후금 기병이 조선군보다 훨씬 더 많았다. 후금 기병들이 말 위에서 짧은 칼을 마구 내려치면서 조선군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 타타탕!
조선군을 지원하라고 보낸 보병 1개 대대는 먼저 본진에 가까운 조선군 우영을 구원했다. 보병들이 3열로 맞춰 연발 사격을 가해 후금 기병 수백 명을 한꺼번에 낙마시켰다.
후금 기병들이 보병 연대를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으나 갑작스럽게 쏟아진 유탄 사격에 놀라 전진이 멈췄다. 정지한 기병은 보병들에게 단순한 표적에 불과했다.
“도련님! 좌우로 먼저 보낸 1개 대대에 이어 보병 연대를 통째로 지원 보내겠습니다!”
“그래! 어서 도와줘.”
통신을 끊고 전면을 슬쩍 봤더니 후금 기병들이 여전히 밀집한 채로 본진을 향해 돌격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모래바람이 지나가 관측이 가능해진 순간부터 기병 돌격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야포와 기관총이 끊임없이 불길을 내뿜었고, 이는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했다.
“아군에도 희생자가 꽤 생겼구나.”
“적군의 피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요.”
주변을 둘러봤더니 목이나 옆구리에 화살이 꽂힌 채 엎드려 있는 보병들 몇이 눈에 띄었다. 철모와 방탄복이 가려주지 못한 부위에 화살을 맞으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고개를 앞으로 돌린 순간, 방어선에 접근한 후금 기병들이 장갑차를 향해 뭔가를 집어던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곧 이어진 기관총과 보병 소총의 사격에 쓰러졌지만, 그 뭔가는 계속해서 날아왔다.
- 퍼엉!
“앗!”
전면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좁은 관측창을 통해 장갑차 안으로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기관총 사수의 좌석에 깔린 방석에 불을 붙였다. 시커먼 연기가 피어나고 매캐한 냄새가 장갑차 안을 가득 채웠다.
“어서 불을 꺼!”
- 치익~
이민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선영이 소화기를 들이대고 소화액을 뿜어냈다. 불길에 놀라 펄쩍펄쩍 뛰던 사수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여자답게 행동하는 기관총 사수는 여진족 호위 신분이었다.
“정신 차리고 앞을 봐! 그리고 계속 쏴!”
“미, 미안.”
“네 죄를 알지? 인가받지 않은 가연성 방석을 차내에 들임으로써 주인님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어.”
“잘못했어.”
“당장은 잊어버리고 계속 사격해!”
선영이 동료 호위를 윽박지르는 동안 이민호가 잽싸게 잠망경을 한 바퀴 돌렸다. 후금 기병들은 여전히 돌격해왔으나 언덕처럼 쌓인 동료와 말의 사체들 때문에 전진에 곤란을 겪었다.
아군 장갑차 상부와 전면에서는 끊임없이 기관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탄 장갑차 말고도 몇 대가 비슷한 화염병 공격을 받았으나 겨우 손바닥 넓이의 표면이 시커멓게 그을린 정도였다.
명군은 진지 안으로 돌입한 후금 기병과 치열하게 백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같이 땅을 밟은 채로 싸우면 무예를 수련한 명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겠지만 후금 기병들은 현란한 기마술이 뒷받침된 내려치기로 명군을 유린하고 있었다. 화력이 약한 명군을 위해 조선군에서 포수 400명을 지원해줬으나 모래바람 앞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아군 보병 연대가 명군 진영에 거의 접근했기에 잠망경을 서쪽으로 돌려 조선군의 동태를 다시 확인했다. 조선군 우영을 조선군 본진과 고산국 보병 연대가 구원하고 있었으나 거의 몰살 정도의 심각한 인명 피해가 난 것 같았다. 그리고 좌영이 위기에 빠졌는데도 우영을 먼저 구원하느라 당장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도련님! 스위스 2연대가 도착했습니다.”
“좋아.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감불로부터 연락을 받은 이민호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문 앞에서 선영이 팔짱을 끼고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이민호가 애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도련님! 안 됩니다. 장갑차 안에 계십시오. 차라리 제가 갈 테니 총지휘를 부탁합니다.”
“으윽. 그래.”
후방 우모령 고개 방어를 맡았던 스위스 용병 연대가 1개 대대를 남겨두고 응원하러 급히 내려왔다. 이민호는 이들을 조선군 우영을 초월해서 좌영을 구원하러 보냈다.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는 전투 현장을 직접 누벼야 긴장감이 높아질 텐데, 호위대장과 사령관의 강력한 제지를 받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 투타타타타탕!
각각 대대로 이뤄진 보병방진 둘이 창날의 숲을 앞세우고 전진했다. 앞 열은 수평으로, 뒷 열은 수직으로 세우고 중간 열들은 수직과 수평 중간의 일정 각도로 창을 세운 창병들이 뚜벅뚜벅 걸었다.
그 사이 방진 양 옆에 돌출된 총병들이 일제히 단발총을 사격했다. 실탄 장전에서 발사까지 보통 10초 정도 걸렸고, 이에 대응할 화기가 극도로 부족한 후금 기병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끼쳤다.
“좌영장은 아직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조선군 좌영 군사들은 후금 기병에게 돌파를 허용한 뒤 몇 조각으로 분산되어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금 기병들이 사방에서 말을 달리며 공격해서 생존자들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우군이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좌영장님은 저기 버드나무에 등을 기대고 계세요.”
“스위스 2연대든 보병 연대든 빨리 좀 가서 구해주지 말이야.”
좌영 지휘부가 붕괴되고 영장 김응하와 하인만 남아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응하가 워낙 활을 잘 쏴서 겨우 한 사람을 포위한 후금 기병 수백 명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활을 쏘는 김응하보다 화살을 대령하는 하인이 더 바빠 보였다.
“주인님! 후방으로 돌아간 후금군이 기리시탄 1연대와 2연대 사이를 강행 돌파했다고 해요! 병력은 약 1만! 우모령에서 스위스 용병 1개 대대가 막고 있지만 곧 뚫릴 거여요.”
“도대체 위기가 끝이 없이 이어지네. 감불에게 빨리 좌영을 구하고 후방을 막으라고 해!”
고산국 군대가 참전한 이상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고 지금은 조선군과 명군의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명군과 조선군은 이미 충분히 인적 손실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고산국 원정군 본진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전방에 충분한 숫자의 후금 기병들이 돌파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관총 탄약을 장갑차마다 충분히 비치해서 그나마 버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전투가 좀 더 이어지고 나서도 전쟁이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