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65 96. 1619년 사르후 전투 =========================================================================
“후금 기병 1만여 기가 우모령을 돌파했어요! 고개 양쪽 고지대에서 퍼붓는 총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쳐서 우리 본진의 후미를 향해 달려오고 있어요. 10분 이내에 도착해요!”
후방 관측창을 통해 후방을 파악한 선영이 보고했다. 원정군 후방에는 야전병원 외에도 각종 보급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연료 집하장도 건설돼 있었다. 후금 기병이 본진에 돌입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
고산국 원정군 예하 부대 전체가 교전 중인 사실을 파악한 이민호가 잠시 허둥거렸다. 모래바람 때문에 단박에 무너진 조선군과 명군을 지원하느라 전투 초기부터 예비 병력을 모조리 소진한 탓이었다.
“후방을 막으려 해도 여기서 뺄 병력이 없는데? 이거 큰일이야.”
“수송부대가 있잖아요? 기관총을 탑재한 장갑차가 30대나 돼요.”
“그래! 본진에 도착한 장갑차들을 후방에 집결시켜. 그런데 수송대를 지휘할 장교가 있나?”
수송대나 보급대는 압록강 너머 창성부 관아에 거점을 두고 본진에 수송용 장갑차를 보내 연료와 군량 등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재 본진에 있는 장갑차들을 운용하는 병력 중에서 최고 계급은 중위 정도에 불과했다. 이들이 비록 간부라지만 전투 경험도 거의 없었고, 보급 차량을 전투부대로 지휘할 역량도 당연히 부족했다.
“주인님! 제가 보급대를 지휘할게요. 주인님의 옥체를 위험에 빠뜨린 제 죄를 속죄할 기회를 주세요.”
“이봐, 선희! 그 실수는 이미 잊어버렸다. 그런데 너 지휘관 자격 있어?”
“장갑차 조종수 외에도 보병과 기계화보병 전투지휘관 자격을 땄어요.”
선 자 돌림 여진 호위들은 어렸을 때부터 체력 훈련과 군사 교육을 매우 충실히 받은 편이었다. 그래서 여자로서 그 어렵다는 보병부대 지휘관 기장을 선 자 돌림 호위들 대부분이 따냈다. 이민호가 탄 지휘장갑차에서 조종수를 맡은 선희는 내친 김에 기계화보병 지휘 기장도 땄다고 했다.
“고선희 소령! 보급대를 장악해서 후방에서 돌진해오는 후금 기병을 막아라. 필요하다면 주변 병력을 징발할 권한을 주마. 있어봤자 공병대와 취사대, 군악대 정도겠지만 무기는 갖췄을 것이다.”
“예! 전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선희는 말투부터 후궁 겸 호위가 아닌 지휘관으로 변했다. 선희가 쪽문을 열고 장갑차에서 나갔다.
비록 아군 진영이라 해도 총성이 울리고 화살이 날아오는 전쟁터에서 여자 혼자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그러나 선희는 땅바닥에 빽빽이 박힌 화살을 밟으며 씩씩하게 후방으로 달려갔다. 선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주인님. 괜찮겠어요? 선희는 일반적인 군인이 아니잖아요.”
“뭐가? 아! 만약 선희가 전사한다면 나는 자기 여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멍청한 놈이 되겠지. 하지만 후궁이 총리든 회사 사장이든 장교든 다들 자기 역할을 하는 것뿐이야.”
“놀고먹는 후궁은 하나도 없어요.”
“나는 후궁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 군주가 맞아. 혹시 선영이는 놀고먹고 싶어? 그 동안 호위대장으로서 충분히 봉사했으니까 원한다면 그렇게 해.”
“그럴 리가요!”
후궁들은 자기 업무에 자부심이 강했다. 한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쌓고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후궁들에게 무능함이 깃들 틈이 없었다.
멀리서 보니 장갑차에서 내린 선희가 수송용 장갑차들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후방으로부터 후금 기병 집단이 접근하는 동안 허둥지둥하던 수송대 병력은 선희의 지휘를 받아들였다. 수송대는 그 즉시 수송 장갑차들을 일렬로 세운 다음 기관총 사격 준비를 갖췄다.
조선군 우영을 점령했던 후금 기병은 고산국 보병 연대와 조선국 중군으로부터 협공을 받아 내쫓겼다. 우영을 탈환한 두 부대는 즉시 좌영 쪽으로 진군했다.
조선군 좌영이 무너지면서 후금 기병들에 의해 곳곳에서 고립됐던 조선군들을 스위스 창병들이 구해냈다. 조선군 삼수병과 달리 빽빽하게 밀집한 스위스 창병들은 기다란 장창으로 위협해 후금 기병들을 방진에서 물러나게 한 다음 단발총을 쏘아 끊임없이 낙마시켰다.
후금 기병들이 활을 쏴도 스위스 용병들이 새로 갖춰 입은 단단한 갑옷에 대부분이 막혔다. 후금 기병들에게는 고슴도치처럼 창날을 세운 스위스 장창방진을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좌영장은 살아있는 것 같군.”
“다행이에요. 명군 진영도 거의 탈환했어요.”
실제 역사에서 좌영장 김응하는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전사하고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명나라로부터 추궁을 받을까 두려워한 조선에서는 ‘황제를 위해 전사한’ 김응하 추숭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명나라 황제도 김응하에게 요동백을 추증하고 유가족에게 은을 하사하는 방법으로 조선을 계속 명나라의 영향권에 묶어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스위스 용병들이 늦지 않게 도착하면서 후금 기병들이 김응하를 내버려두며 물러섰다. 고산국 보병 연대와 조선 중군이 접근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는지 후금 기병들은 서쪽 산과 북쪽을 향해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유 총병이 살아있을까 모르겠어.”
“명군 장수들은 무위가 뛰어나서 쉽게 전사하지 않을 거여요.”
명군 장수들은 무관 출신일 경우 아무리 겁쟁이라도 무위 하나는 대단했다. 실제 역사에서 1597년 남원성과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 부총병 양원은 왜군들이 겹겹이 포위했으나 무쌍난무를 연출하며 끝내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명군 진영을 구원하는 작전에 투입된 고산국 보병 연대는 중대별로 3열을 지어 움직이며 소총을 연속 발사했다. 진형 자체는 근대 유럽 보병의 라인 배틀을 닮은 것 같지만 사용하는 무기와 전술이 전혀 달랐다. 양 어깨에 교차해서 탄입대를 두른 보병들은 후금 기병들을 향해 끊임없이 총탄과 유탄을 퍼부었다.
- 뚜다다다다다~
“뒤에서도 시작했군.”
기병 일만 기가 떼를 지어 언덕길을 내려오는 것만으로 스펙터클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 기병 집단을 언덕길 아래에서 가로막은 것은 수송 임무에 투입됐던 장갑차 30량에 불과했다. 무장이라곤 차량탑재 기관총과 운전석에서 쏘는 소총 2정씩밖에 없었지만 끊임없이 화력을 퍼부을 수 있었다.
선희는 지휘관으로서 보유한 전력을 최대한 운용할 줄 알았다. 장갑차 30량 중에서 절반인 15량에 탑재된 기관총만 발사하도록 명했다. 이것만으로도 언덕길을 막기에 충분했다.
사격하던 기관총에서 실탄이 떨어지자 재장전하는 동안 나머지 15량에 교대로 사격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에 좁은 언덕길 아래에 말과 기병의 사체로 이뤄진 거대한 벽이 생겼다.
- 타탕! 탕!
언덕 위에서 스위스 용병 1개 대대가 장창을 앞세워 퇴로를 차단한 다음 총탄을 퍼부었다. 좌우 측면 산에서 나타난 구르카 용병들도 앞뒤로 갇힌 후금 기병들에게 총탄을 날렸다. 포병연대에서 1개 대대가 포구를 돌려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후금 기병들에게 불벼락을 선사했다.
“후방은 됐고, 전방의 공격력도 무뎌지고 있군.”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작전대로지, 뭐. 제1, 제2 보병사단 전진.”
이민호가 명령하자 선영이 씩 웃으며 송화기를 잡았다. 후금의 주력을 거의 섬멸하다시피 했으나 본격적인 작전은 오히려 지금부터였다.
이번 전투에서 후금 팔기 전체에 더해 몽골족 기병들까지 참전한 것 같았다. 북동쪽 강 건너에서 2만, 후방에서 2만으로 추산되고 정면에서는 못해도 5만 정도가 돌격해왔기 때문이다. 역시나 두정갑이나 수은갑을 갖춰 입은 후금 기병과 확연히 다른 유목민 복장이 다수가 발견됐다.
“최고사령부에서 어명을 하달한다. 제1, 제2 보병사단은 주둔지에서 나와 북쪽을 향해 전진하라. 작전 목표는 적 패잔병 추격이 아닌 허투알라 점령이다.”
선영이 통신기에 대고 예하 2개 사단에 다음 작전을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진지에서 나온 장갑차들이 선두에 서서 전진했다.
정면에서 돌격했던 5만에 달했던 후금 기병들 중에서 용감했던 자들은 이미 다 죽었다. 고산국 원정군 정면으로 돌격하지 못한 겁쟁이들은 장갑차들이 움직이자 일제히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들을 따라 날아간 포탄이 연속 터지면서 도주를 더욱 재촉했다.
“장갑차는 역시 승차감이 아주 나쁘군.”
“그럴 수밖에요.”
장륜형 장갑차의 바퀴가 아무리 크다 해도 겹겹이 쌓인 말과 후금 기병의 사체를 넘기는 무리였다. 결국 공병대 소속 밀차들이 사체들을 치우며 통로를 개척했다. 붉은 땅이 더 이상 피를 머금지 못해 피가 내를 이뤄 흐르고 있었다.
“기병 여단을 보내 추격하게 해.”
“예. 적의 매복을 주의하도록 지시할게요.”
선영이 그런 뜻을 포함한 지시를 전달해 기병 여단이 먼저 잔적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고산국 원정군의 작전 목표는 패잔병 소탕이나 퇴각하는 적에게 손실을 강요해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고산국 육군 소장 선영이 사단장들에게 지시했듯이 허투알라 점령이었다.
“적 기병 일부가 항복을 청했어요. 화려한 갑옷과 다양한 깃발로 봐서 후금의 고위 인사들 같아요. 8기의 깃발이 다 모였어요.”
“설마 누르하치가 항복한 것은 아니겠지?”
뜻밖에 밀차 앞을 가로막으며 항복을 요청한 자들은 후금 칸 누르하치와 몇몇 버일러들이었다. 어이없는 전개에 이민호가 어리둥절했다.
“저희들은 고산국 국왕전하께 항복하겠습니다. 수괴인 저를 천자께 끌고 가시고 나머지 전사들은 놓아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이런 말씀을 아뢰기 민망하오나 나머지 만주인들의 땅도 보존해주십시오.”
“칸! 미안하지만 우리 동로군은 황상의 칙명을 받들어 반드시 허투알라를 점령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후금과 칸에 대한 처분은 황상께서 결정하실 것이오.”
“흑흑흑!”
누르하치는 고개만 숙였지만 여러 팔기의 대장인 버일러들은 흐느끼거나 몇 명은 아예 땅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안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제의 명 때문이라기보다는, 후금이 위협적인 군사집단으로 조직이 완전히 개편됐기에 제거하기로 이민호가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후금은 그 동안 명나라의 북방에 꾸준히 위협을 가하며 명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이민호가 주로 누르하치의 아들이나 조카로 구성된 버일러들을 살폈다. 전투 전에 이민호에게 인사하러 왔던 20대 중후반 버일러가 보이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어디 있소?”
“아마 전사한 것 같습니다.”
“쯧쯧! 안 됐소.”
“국왕전하께서는 저희 금국의 패잔병들을 계속 추격하시겠습니까?”
“음. 칸의 아들 홍타이지와 오늘 전사한 여러 나라의 군사들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추격을 멈추고 여기서 숙영하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누르하치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나 홍타이지는 살아남은 후금 기병들을 이끌고 전장에서 탈출한 모양이었다. 누르하치는 아들의 도피를 돕기 위해 항복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어느새 바람이 잦아들었다. 이민호는 항공대를 불러 홍타이지를 비롯한 후금 잔당을 공격하게 하자는 선영의 건의를 거부했다. 기만민족에게 근거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허투알라를 탈환하는 것보다는 당분간 몽골족을 규합한 다음 힘을 키우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이민호는 예상했다. 철도 노선 일부를 파괴했던 에벤키 족이 어떤 꼴이 됐는지 아는 홍타이지는 시베리아 철도나 동해국 영토를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누르하치뿐만 아니라 팔기의 깃발이 최고의 전리품이 될 거야.”
“황제께 다 바칠 거죠?”
“저 깃발이 욕심나지만 황제에게 바쳐야 돈을 더 받을 수 있거든.”
이민호의 대답을 들은 선영이 유쾌하게 웃었다. 눈치가 빠른 선영이 홍타이지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 시간이면 감동이 고산국 보병 1개 사단과 동해국 여진 기병 3만을 이끌고 허투알라를 점령했겠지만, 홍타이지가 살아있다면 후금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부차 전투의 묘사가 규모에 비해 소략한 느낌이 듭니다만 축약해서 마치겠습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자책 교정을 위해 내일 연재는 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