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73 96. 1619년 사르후 전투 =========================================================================
“첫 번째 꿈에서는 제가 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센 바람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서 있는 것입니다. 의아하게 여기는 중에 갑자기 폭풍에 불어와 저는 그 사람 앞으로 밀려났습니다.”
“흐음! 과연 철학자의 꿈이야. 남작은 폭풍에도 꿋꿋한 그 사람이 부러웠겠지?”
“그, 그렇습니다, 전하. 어찌 아십니까?”
“그거야 자네가 철학자니까. 자네는 그 사람과 꿈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민호는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같은 것을 먼저 떠올렸으나 정신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이 시대에는 아직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데카르트에게서 이민호의 생각과 다른 대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철학자라 해도 데카르트가 살아왔던 환경, 특히 종교의 역할을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아마도 인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제가 알았던 지식들이 진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됐습니다.”
“아아! 역시 데카르트 남작은 위대한 철학자야! 기독교도가 아닌 내 입장에서 그 사람은 진리 그 자체겠지. 폭풍 같은 외부의 변화나 자극에 끄떡없는 것이 당연해.”
“제 생각과 같습니다, 전하.”
“남작은 모든 사물과 사상, 그리고 자연현상을, 그 동안 진리로 알려진 것들까지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보게. 회의론이라고 지칭해야겠군. 참! 사관들은 이 대화를 기록하고 있겠지? 남작! 다른 꿈도 어서 이야기해보게.”
데카르트의 꿈 이야기를 들으며 이민호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꼈다. 근대 철학이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되는 아주 중요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무려 모든 것을 회의한다는 회의론의 시작점이 되는 꿈이었다. 바로 여기서 출발해서 모든 것을 회의한 다음에 비로소 ‘나는 사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가 나온다.
국왕의 옥음을 기록해야 할 사관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열심히 펜과 만년필을 놀렸다. 속기사는 소음이 적은 속기용 타자기 자판을 손가락에 영혼을 싣지 않은 채 그저 기계적으로 두들겼다.
“두 번째 꿈에서는 제가 그 폭풍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폭풍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니까 전혀 두렵지 않고 또한 그 폭풍도 저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더군요.”
“간지 폭풍, 아! 아닐세. 그 꿈에도 큰 의미가 있는 것 같군. 이 세상의 진실에 한 걸음 더 접근한 것을 축하하네.”
태풍이나 화산 폭발 같은 자연 현상의 원인을 모르는 자들은 그저 하늘이 내린 벌로 알고 두려움에 떨지만 그 원리를 알고 나면 두렵지 않은 것과 같았다. 이민호는 그렇게 해석했다.
물론 자연의 힘은 거대하고 지진과 화산 폭발 같으면 예측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으나 세계 곳곳에 측후소를 설치하고 인원을 파견한 것은 그런 자연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대 다른 나라에 없는 기상학과 지질학은 세상의 진리에 한 걸음 가까이 가는 학문이기도 했다.
“과연 국왕전하이십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세 번째 꿈에서는 탁자에 사전과 책이 있었습니다. 책이 펼쳐진 면에 ‘나는 어떤 삶은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시를 보여주었습니다. 대충 의미를 해석하자면 인간의 지식과 학문의 참과 거짓이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시였습니다만 잠에서 깨고 나서 나머지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역시 단순한 꿈이 아니라 환영일 것 같군 그래. 만약 열성적인 신도가 그런 꿈을 꾸었다면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떠들어대다가 자칫 이단으로 몰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주제 넘는 말씀이지만 성령이 임하여 제게 새로운 철학의 일부를 맛보기로 보여준 것 같다는 상상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계시가 제게 나타날 리가 없기에 그런 참람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몇 년 동안 진리를 찾고자 고민해서, 아마도 모든 사람의 몸에 내재하는 신성한 분신의 근원적 계시가 아주 잠시 꿈을 통해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시 노력하는 자가 얻는 법이야. 남작이 그 동안 진리를 찾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만해.”
“과찬이십니다, 전하.”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이민호가 철학적 소양은 부족하지만 과학과 수학 지식은 풍부한 편이라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데카르트는 기하학과 대수학을 통합하고, 철학적 방법론에 수학을 도입하겠다고 고했다. 모든 학문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통합하려는 것도 데카르트의 계획에 들어있었다.
“이 세상과 사회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추구하는 남작에게 경의를 표하네.”
“과찬이십니다, 전하.”
“그럼 좀 더 현실적인 문제를 논하세. 우리 백성들에게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의 목적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게.”
이민호가 진지하게 말하자 데카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데카르트는 이민호의 말을 진심으로 여기지 않았다.
“설마 모든 백성들을 철학자로 만들려 하십니까?”
“고차원적 고민은 남작 같은 철학자가 해야지.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고 인생의 목표를 결정할 수 있도록 참고가 되는 책을 써달라는 뜻일세.”
이 시기에는 기독교도인 데카르트의 이원론보다는 차라리 조선의 이기이원론이나 이기일원론이 더 발전된 사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런 방법론이 철학자나 성리학자들에게는 이 세상의 진리를 관통하는 유효한 시각일지라도, 대부분 백성들의 생활과는 전혀 동떨어진 고담준론에 불과했다. 그래서 고산국에는 <방법론 서설> 같은 엄밀한 학문적 책이 아니라 철학개론이나 철학 입문 같은 개설서가 더 절실히 필요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하온데 백성들에게 철학을 가르쳐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백성들을 고분고분한 노예로 만드는 일에 철학 교육이 방해가 될까봐서 그래? 백성들도 사람일세. 세상의 진리를 알 자격이 있어.”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이민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 시기 유럽에서 철학은 왕과 귀족의 학문이라서 일반 백성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아니, 백성들이 철학을 배워서 똑똑해지면 통치하기 곤란했다.
“백성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면, 아니 철학을 배울 기회를 주면 다들 알아서 생각하겠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니 혹시 인생이 기대보다 못하더라도 후회나 아쉬움이 없을 거야.”
“그래서 꿈에 관한 노래를, 인생의 목적을 주제로 한 노래를 두 곡이나 직접 지으셨군요.”
“그런 셈일세. 이번에는 나의 목표, 그러니까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에 대해 조언해주게.”
“예, 전하. 극소수 일부 귀족과 부자, 아니면 노동의욕이 전혀 없는 빈자나 환자를 제외한 중간 계층을 기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잠깐! 중간 계층을 중산층이라고 하면 재산 개념이 들어가서 의미가 달라지려나?”
마르크스주의 이후 현대 사회학에서 무산자로서 노동을 제공하면 프롤레타리아, 자본과 토지 등 생산수단을 소유하면 부르주아지다. 각각 군대 보낼 아들밖에 재산이 없는 자와 성 안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용어였다. 영세 자영업자처럼 생산수단을 보유하면서도 직접 노동을 하면 쁘띠 부르주아지로 간주된다.
중세 이후 이 시기에는 부르주아지가 중산층으로 간주됐으나 혁명시대 이후 귀족층이 축소되면서 현대에는 자본가 계급으로 성장했다. 노동조합의 성장 등으로 인해 노동자 계층의 권익이 확대되면서 상층 프롤레타리아가 중산층으로 성장한다. 중산층은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 계층이면서도 자본가 계층과 유사한 사회인식과 문화를 가진다.
“중간 계층을 중산층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일정 재산을 이미 보유한 계층이 아니라 높은 확률로 그 재산을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이 기준이 돼야 할 것입니다. 고산국에서 기술자나 의사가 경제적으로 풍족히 살 수 있다 해도 갓 면허를 딴 젊은이가 처음부터 그 재산을 보유한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지.”
“중간 계층은 경제적으로 전문직, 안정적인 수입, 훌륭한 주택을 보유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토지와 대부분 주택이 국가에 속한 고산국에서 주택은 빼야겠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졸업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고 사물과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력을 갖춰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 외국어 구사 능력도 중요합니다. 그 외에 사회적 활동, 한 가지 이상의 악기 연주와 운동, 남들이 못하는 특이한 요리 등 남들에게 인정받는 문화를 즐길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필요할 것입니다.”
“조건이 까다로워. 하지만 경제자본뿐만 아니라 사회자본과 문화자본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로군. 그런데 외국어는 좀 아닌 것 같아. 고산국 학생들이 중고등학교 때 조금씩 배우기는 하는데 인사말 수준에 그치거든.”
“외국어는 다른 세상을 보게 해주는 눈입니다. 외국어는 인간에게 사고의 지평을 넓혀줄 뿐만 아니라 사고에 객관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외국어 구사 능력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교양인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능력입니다.”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사하는 조선족은 교양인이고, 10년 넘게 영어를 배웠지만 외국인을 만나면 굳어버리는 한국 대학생은 교양인이 아니라는 논리가 아니었다. 데카르트는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이므로 예외라고 설명했다.
“그런 목적이라면 조선말과 비슷한 언어가 아니라 근연관계가 없는 언어가 좋겠군. 아랍어나 스와힐리어, 라틴어 같은 언어 말일세.”
“언어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만, 배울 때는 자세히 배우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 백성들이 운동은 좋아해도 공부하길 싫어해서 가능할지 모르겠군. 중산층이 아니라 귀족 교양인에게 필요한 것 같아.”
“어떻게든 결정하시고 가능하면 백성들에게 외국어 학습을 권하십시오. 그리고 제가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다가 고조선이라는 국가에서 홍익인간 이념을 내세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국뿐만 아니라 전체 인류에 봉사한다는 훌륭한 이념입니다. 전하께서도 비슷한 국정지표를 선정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이민호는 새~ 시대 새~ 나라나 정의사회 구현 같은 1980년대 국정지표를 언뜻 떠올렸다. 정통 보수주의자에게도 혐오감을 심어주는 군사독재 정권 주제에 국정지표만 그럴 듯했다.
참고로 2010년 전후에는 선진일류국가라는 비전 아래 섬기는 정부, 활기찬 시장경제, 능동적 복지, 인재대국, 성숙한 세계국가를 국정 지표로 내세웠다. 그 다음 정권의 국정지표는 희망의 새 시대였으며 국정기조라는 이름으로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구축을 강조했다.
“국정지표가 실제와 무관한 허황된 구호에 그칠 것 같아서 걱정이네. 그런 걸 정하더라도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고 정부 내에서만 교육시켜야겠어.”
“그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하온데 전하께서는 국초부터 국시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애 많이 낳기를 강조하셨습니다만, 인구가 불어나고 있는 이제부터는 국가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목표를 명확히 정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고산국의 천년대계를 세우는 일입니다.”
“역시 사나이의...... 아니네.”
사나이의 로망은 세계 정복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으나 급히 주워 삼켰다. 이 시대에 압도적인 과학 기술을 동원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스린다는 것은 정복하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잘해도 욕먹고 귀찮아질 일을 시도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원하는 게 많아 쉽게 선택할 수 없을 것 같네. 남작이 적당한 국정지표를 골라서 건의해주게.”
“제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남작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지. 중요한 결정을 남작에게 미루고 나는 잔소리만 하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걱정 말게. 나보다 남작이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
“지금까지 제가 생각한 것이 있긴 합니다만.”
“어서 말해보게.”
데카르트가 부끄러운지 쭈뼛거렸다. 그러나 제대로 된 철학자가 국가 운영의 목적을 정해준다면 좋을 것 같았다.
“인간의 존엄입니다.”
“뭐? 인간의 존엄이라니, 몹시 무겁군. 그건 국가의 최종 목표야. 흐음! 남작이 고민을 많이 했겠군.”
르네상스 이후 신이 아닌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화 <엑스칼리버>에서는 브리타니아에 기독교가 전래됨으로써 신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의 시대가 왔다고 마법사 멀린이 한탄한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이 인간에게만 모든 것을 거느릴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5세기 레오 대교황은 인간 실체의 존엄에 대해 논하고 전통 미사통상문에 이 개념이 포함됐다.
기독교와 불교, 유교가 성립될 당시 그 이전 시대에 비해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했기에 세상에 널리 퍼진 고등 종교가 될 수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석가모니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존귀하다는 뜻이었다.
“인간의 존엄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맞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외를 찾을 수 없군.”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독일 기본법에 영향을 받아 1962년 5차 헌법 개정에서 처음 도입됐다. 1949년에 제정된 독일 연방 기본법 제1조 1항에서 ‘인간의 존엄은 불가침이다. 이를 존중하고 또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이다’라고 규정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헌법 최고의 구성원리이자 헌법 개정의 한계를 이루며, 헌법 제37조 2항이 규정한 기본권 제한 입법의 한계로서의 성질을 가진다. 국가안전보장이나 질서 유지, 또는 공공복리 등 어떤 이유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법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인 자유와 평등, 여러 가지 인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자유와 평등, 권리에는 37조 2항의 규정에 따라 입법된 법률이나 국제법에 의해 여러 가지 예외가 적용 가능하며, 심지어 인간의 생명조차 정당방위가 인정받는 경우에 한해 존중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예외가 없다.
“헬레니즘 시대에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본성을 이성으로 자각하고, 이성의 본질은 자유이며, 또한 이성을 지닌 자는 평등하다고 논했습니다. 고산국의 모든 백성들이 이성을 지녀 자유롭고 평등하게 된다면 이들이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전면에 내세우면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왕정제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이 시대 기준으로 너무 빠르지 않을까? 고산국이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한다 해도 민주주의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아.”
민주주의 국가가 반드시 공화국일 필요는 없지만 입헌군주국보다는 공화국에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데카르트는 이민호가 후대를 고민하며 입헌군주제를 도입할 의향이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어보면서 권유했다.
“백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고 삶이 풍족한 고산국만이 가능합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해도, 그리고 상당 기간 왕정제를 유지하더라도 고산국의 최종적인 목표로서 국가가 추구하는 이상으로 설정하시면 됩니다.”
“이상적이군. 지나치게 이상적이야.”
“거부하셔도 됩니다.”
“아니야. 국정지표는 이를 위한 수단으로 삼고, 국가의 목표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존중하는 것으로 정해야겠어. 하지만 주권은 당분간 국왕에게 유보하는 것으로 하겠다.”
“국왕전하께서 고산국의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국가의 신성한 주권은 오직 전하께 속합니다.”
데카르트가 아부하듯이 말하자 이민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민호가 그 동안 고민한 모든 것에 대한 준엄한 질문이었다.
“나를 시험하지 말게. 내가 실수할까 두렵고 후세에 폭군이 나타날까 두려워. 언젠가는 주권을 백성들에게 나눠줄 수밖에 없겠지.”
“전하께서 오랫동안 대의제를 실험 중이신 것으로 압니다. 지금까지 충분히 보셨다시피 대의제는 문제가 많으므로 차라리 직접 민주정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후! 정책 결정을 앞두고 백성들이 고민하게 만들면 참 고소하겠어.”
그러나 당장 입헌군주정을 추진할 계획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고산국 백성들에게는 지금 이대로가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수명이 있기에 언제까지나 이민호가 왕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나 같은 후계자가 계속 나올 수는 없겠지.”
“전하 같은 분은 더 이상 안 계십니다. 교육으로 전하와 비슷한 국왕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남작은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군.”
철학자와 토론해봤자 공돌이가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다음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데카르트와의 알현을 마쳤다.
상황에 따라서는 국가의 유지보다 자유와 평등 같은 개념이 더 중요해질 수도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참가자들이나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을 프랑스 왕실이나 영국 입장에서 보면 반역자에 불과했지만 현대 기준으로 어느 쪽이 정의인지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이민호가 고민하는 이유였다. 왕정제를 유지하는 한 정의의 반대편이라는 불안감과 불쾌감이 끝없이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칫 국가를 분열시켜 커다란 비극을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에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 작품 후기 ============================
20kb 넘어도 올라가는군요. 몰랐습니다. ㅡ.ㅡ
철학이나 국정 지표, 국체와 정체 등은 대충 이 정도로 논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주인공이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이런 것이지 즉시 정체를 바꿀 수는 없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