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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877화 (826/1,000)

00877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

사르후 전투 승첩에 대한 포상이 5월에 이루어졌다. 전공과 논공행상에 관한 잡음이 전혀 없었는데도 전투가 끝나고도 일 년 넘게 지나서야 겨우 시행된 포상이었다. 경략 양호와 총병 유정, 조선의 도원수 강홍립과 좌영장 김응하도 큰 포상을 받았다.

누르하치와 후금의 여러 패륵들은 참수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들에게 저택 하나를 내어주고 연금을 시키는 가벼운 처벌에 머물렀다.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면서도 끝까지 대명 천자의 충성스런 신하를 자칭하고 막판에 항복한 것이 처벌 수위에 영향을 끼쳤다.

“계복은 심양후, 감불은 영원백, 감동은 허투알라의 영주인 성경백이 됐다. 다들 황상의 첩지를 받아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투인 것 같습니다.”

계복이 툴툴거리면서도 임명장을 펼쳐서 읽어봤다. 상금으로 은 몇 만 냥을 받지 않았다면 오히려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계복 등은 상금을 국고에 반납하려 했으나, 말년에 노후 자금으로 쓰라고 이민호가 권했다.

“관작이 쓸모없다니 무슨 소리야? 왕이나 최소한 공후백이 되어야 총병 여럿을 거느리는 제독이 될 수 있어. 앞으로 명군과 협동작전을 할 때 지휘권 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이야.”

“지휘권 때문에 도련님이 일일이 원정에 나설 필요가 없어지겠군요.”

“흠! 흠! 고마운 일이지.”

계복과 감동, 감불에게 원정군 지휘권은 물론 명나라 현지 병력 지휘권까지 쥐어줘서 지금보다 더 혹독하게 부려먹을 수 있게 됐다는 뜻이었다. 감동과 감불이 한숨을 내쉬고 계복이 대학원을 운운했으나 이민호 앞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런데 도련님에게는 북원왕의 왕호가 내려졌네요. 고산국 영향력 내에 들어온 몽골 부족이 절반도 안 될 텐데요?”

“몽골족이 만리장성을 넘어서 약탈할 때마다 병력을 이끌고 와서 진압하라는 소리 같다. 그것도 공짜로.”

“천자께서 공짜는 참 좋아해요. 도련님은 가만히 있으실 겁니까?”

“가만히 있지 않으면? 여기 북원왕의 영토를 봐라.”

이민호가 지도를 내밀었다. 동해국으로 넘긴 후금의 영토 말고도 현재 몽골족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이 북원왕(北元王) 관할로 표시됐다. 명나라나 고산국이 차지하거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오이라트 부의 영토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칙적으로 만리장성 북쪽과 서쪽에 위치한 세상의 모든 땅이 북원왕에게 속했다.

“명목뿐인 영토 지도 아닙니까?”

“그 명목이란 게 결정적일 수가 있지. 명나라 입장에서야 몽골족 영토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겠지만, 앞으로 명나라는 장성 너머의 일에 간섭하지 못하게 됐다.”

“그럴 능력도 없는데요 뭐.”

“앞일은 모르는 법이다.”

물론 이 지도를 근거로 오스만 제국이나 페르시아에게 영토 전체를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명나라 주변국들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 지도는 명나라와 체결한 영토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명나라는 그들의 소원대로 장성 이남에서 안전만 확보하면 불만이 없었다.

“몽골로 도주한 홍타이지가 할하 몽골 일부를 휘하에 두었다고 합니다. 세력을 점점 확대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보호 아래에 들어온 부족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신경 쓸 것 없어. 오이라트와 연결되면 조금 골치 아프긴 하겠군.”

홍타이지는 만리장성 가까운 동몽골 지역에서 일단 생존에 성공한 듯했다. 그리고 누르하치와 형제들이 북경에 연금돼 있어서 함부로 장성을 넘으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럴 군사력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명나라 황제가 누르하치와 후금의 패륵들을 처형하지 않은 이유였다. 앞으로 몇 년 간은 이런 교착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존 카버라는 잉글랜드 출신 상인이며, 종교적 박해를 피해 현재 네덜란드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저희 잉글랜드 청교도들이 북미에 정착해도 되는지 여쭙고자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나 포춘호, 페이션스호와 피어호가 아니라 고산국 여객선을 탔다. 그리고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 정착지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일부 대표자들이 먼저 고산국 왕도에 도착했다.

“종교적 박해를 받는 자라면 누구든 고산국에 이민을 올 수 있다. 다른 이들은 누구인가?”

“예! 전하! 저는 윌리엄 브래드퍼드이며 이 분은 설교자 윌리엄 브루스터입니다.”

만약 청교도들이 원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잉글랜드의 버지니아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면 이들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인 제임스 1세의 충성스런 신하라고 자기들을 소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미가 고산국 소유로 선언된 다음이라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아일랜드가 제임스 1세의 영토라고 언급할 경우 암암리에 아일랜드를 지원하는 고산국에 밉보일 게 뻔했다.

“설교자라. 개신교에서 성직자는 아니지만 다른 종교의 성직자에 해당하겠군. 어찌 됐든 고산국 왕궁을 방문한 모든 이를 환영한다. 그런데 청교도는 개신교의 한 분파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청교도는 루터파나 칼뱅파,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를 가리지 않고 보다 순수한 복음주의를 강조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그렇군.”

“그리고 저희들은 그런 청교도들 중에서도 특히 잉글랜드 국교회의 개혁에 실망한 이후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추구하는 분리주의자들입니다. 고산국이 종교와 정치가 분리돼 있다는 말을 듣고 오게 됐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와서 북미에 정착한 사람들은 여러 부류로 나뉘었다. 청교도, 청교도 중에서도 특히 분리주의자들, 메이플라워호 선원, 이렇게 셋이었다.

북미에 처음 도착한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한 사람들은 승객 102명과 선원 25에서 30명 정도였으나 승객의 절반 정도가 추위와 괴혈병으로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메이플라워호는 자유의사에 따라 정착하기로 결정한 선원 5명을 남겨두고 다음 해 4월에 잉글랜드로 돌아간다.

“종교 이야기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그대들은 암스테르담이나 레이던에서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왜 이주를 결심했나?”

“네덜란드는 몹시, 지나치게 자유로운 곳입니다. 저희 청교도들 중 다수가 상공인들이라 잉글랜드에 있을 때보다 생활이 나아졌으나 조만간 네덜란드에 문화적으로 동화될 것 같다는 우려를 하게 됐습니다. 저희들의 종교와 문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청교도, 특히 분리주의자들 중에 상공인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일정 비율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네덜란드에서 농지를 구하지 못해 곤궁한 삶을 살았고, 동료들이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들의 불만도 이주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여러 부류의 청교도들을 종교와 경제 양면에서 만족시키려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아닌, 새로운 땅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가장 적당한 정착지는 신대륙에서도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정확히는 적당히 가까운 곳에서 군사적 보호를 받으면서도 정치와 종교 등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할 만한 외딴 곳이었다.

“고산국에서는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주고 있으니 아무쪼록 신앙을 지키면서 다른 종교 신자들과 다투지 말도록 하게나. 그대들이 다른 문화를 존중한다면 그대들만의 문화도 마땅히 존중받을 걸세. 원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훌륭한 문화는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즉시 네덜란드로 돌아가서 나머지 사람들을 데려와 북미에 정착하도록 하겠습니다. 중간에 동료들이 기다리는 잉글랜드 플리머스에 들려야 합니다만, 편지를 보내 네덜란드나 아일랜드로 건너가라고 하겠습니다.”

청교도, 역사적 명칭으로 필그림 파더스는 미국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아니었다. 비록 미국에 추수감사절을 최초로 도입했다 해도 청교도의 거주지는 몇 세대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지나친 종교적 엄숙함이 문제였다.

현대 미국에서는 종교적 엄숙함을 싫어하면서도 조상들이 순수하게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로 건너왔다고 자랑하는 셈이었다. 일부 이주민들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경제적 기회를 얻기 위해 북미로 이민을 떠났다.

“그런데 요즘 옛날에 비해 추워지지 않았나?”

“맞습니다, 전하. 북쪽에 가까운 나라일수록 농사를 크게 망쳤다고 합니다. 겨울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대들을 북미보다는 좀 더 따뜻한 남쪽으로 보낼까 하는데.”

이민호가 세계 지도를 펼쳐보면서 적당한 곳을 물색했다. 그러나 청교도 대표들은 몹시 당황했다.

“설마 남미로 저희들을 보낸단 말씀이십니까? 그쪽은 각종 전염병이 창궐해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남쪽에 남미만 있는 것이 아니야. 오! 여기가 좋겠군.”

세계 지도를 청교도 대표들에게 내밀었다. 이들이 처음 보는 거대한 섬, 혹은 대륙이 적도 아래에 놓여 있었다. 대표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호주라 해서 적도 이남에 위치한 대륙으로 가는 게 어떻겠나? 말라리아나 황열병이 생기지 않고 땅은 무한대로 있다네.”

“그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호주는 농업 인구도 부족하지만 상공인은 더욱 부족해서 곤란해 하던 참이라네. 분리주의자들인 그대들이라면 호주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거야.”

원래 역사에서 영국 정부는 호주를 개척할 지원자가 극히 부족해서 범죄자들을 강제로 보냈다. 고산국 본토에서 농업이민 위주로 호주에 보내긴 했으나 아무리 보내도 땅이 워낙 넓어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르지 않았다.

청교도들이 숫자가 많지는 않더라도 호주 개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랐다. 나중에 크롬웰에 의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긴 했으나 분리주의자가 아닌 순수 청교도는 이 시기에 거의 영국을 떠나지 않았다.

“기후변화나 정치 변화에 내몰리고 싶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저희들에게 아주 적당한 곳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 멉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농사짓기와 장사하기 좋은 지역을 골라 분리주의자들이 집단 거주할 수 있는 마을과 농장, 가축, 그리고 교회를 준비해주겠네. 아! 그곳에는 잉글랜드 국교회 신도가 단 한 명도 없다네.”

“그렇다면 아주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록 잉글랜드 국교회와 관련된 용어이긴 하지만 분리주의자라는 명칭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웠다. 그래서 앞으로 청교도라는 명칭만 사용하도록 했다.

“혹시 이주하는 도중에 아일랜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말일세.”

“네! 네! 전하.”

“자네들이 아일랜드나 잉글랜드가 아니라 네덜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게. 호주 북쪽 동인도제도에 사는 무슬림이나 힌두교도, 불교 신자, 자연 숭배자들을 만나더라도 그들의 종교를 모욕하지 말게나.”

“저희 청교도들은 기존 종파에 비해 소수자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다른 종교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이들이 호주 동남부에 정착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주었다. 멜버른 위치인 새부산은 어느 정도 개발이 완료됐기에 현대의 시드니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청교도 대표들도 이 지역에 정착하는 것에 동의했다.

“올해 안에 이주를 하면 좋겠습니다만, 호주까지 거리가 어마어마하게 먼 것 같습니다. 저희 청교도 대표들이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간다면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여자들 때문에 다음에는 어렵겠지만 이번에 그대들이 네덜란드로 빠르게 돌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을 권하겠네.”

“그렇다면 그 방법으로 부탁하겠습니다. 혹시 말보다 빠르게 달린다는 기차입니까?”

“아직 대륙을 철도로 연결하지 못했지만 더 좋은 교통수단이 있지.”

청교도 대표들을 비행기에 태워 네덜란드로 보냈다. 이민호가 직접 공항까지 배웅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안에서 꽤 큰 비명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탑승자 절반 정도가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으려 하겠지만, 호주가 워낙 멀고 땅도 넓어서 배보다는 비행기가 훨씬 좋은 운송수단이었다. 청교도들은 이민 초기부터 비행기에 익숙해져야 했다.

============================ 작품 후기 ============================

비행기가 개발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활용은 미미한 편입니다. 오버 테크놀로지라서 소설 묘사에서 잘 활용을 하지 않은 편입니다만 이제 본격적으로 사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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