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82화 (831/1,000)

00882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

“조선국 국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예조판서 이 모가 고산국 국왕전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조선국과 고산국이 왕통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한 협력을 제안합니다.”

“흠.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하오.”

이민호는 이이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확실히 하기 위해 물어봤다. 알현식에 배석한 고산국 예조 판서와 호위들은 가능성 없는 이야기라 판단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조선국 세자저하는 이미 가례를 올렸습니다만, 세자께서 연치가 아직 20대 초반으로 미령하시어 동궁의 소훈을 들일 여지가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니 고산국의 옹주마마 한 분과 가례를 맺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옹주가 아니라 공주라오.”

“정식 혼례를 올리신 왕비전하 외의 모든 분들은 후궁이시고, 그 따님은 옹주마마이십니다. 전하께서 옹주마마님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알겠으나 외교에서는 법규에 맞는 호칭을 사용해야 합니다.”

“뻑큐!”

“예. 법규를 지키셔야 합니다.”

지난 수십 년 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고산국과 국혼을 맺자고 졸랐어도 선택권을 혼인할 당사자들에게 맡겼기에 거의 성사된 적이 없었다. 동남아 인종에 비해 왕자와 공주들이 체구가 워낙 큰 데다, 공주들도 웬만하면 생활이 편리한 고산국에 남으려 했기에 국혼을 맺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조선도 마찬가지라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어쨌거나 조선과 국혼, 음. 국혼은 아니지만 조선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으면 서로 불편해질 것 같아 별로 반갑지 않은 제안이오. 내 사랑하는 딸을 다른 나라 국왕의 후궁으로 보내는 것도 마뜩치 않소.”

“왕실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니 성장 과정에서 호사를 누린 권리에 따르는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산국 옹주마마님들이 저희 세자저하를 좋아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뭐, 그럼 직접 만나보게 해서, 마음에 들면 조선의 왕세자에게 시집가라고 해야겠소.”

이민호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차르에게 시집간 마르그레타처럼 조선이라는 국가를 발전시키고 싶어 하는 공주가 있을지도 몰랐다.

조금 걱정됐지만, 고산국에 위협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 조선이 적당히 발전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조선은 조금 더 특별하지만, 고산국의 협력국가라는 점에서 브루나이나 류큐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희망자인 옹주마마님들을 한성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후보가 여러 명이니 세자가 고북으로 오면 안 되겠소?”

“조선과 고산국은 동등한 국가입니다. 하오나 동궁의 소훈을 간택할 때 세자가 직접 움직인 전례가 없습니다.”

“조선에서 세자빈을 간택할 때도 그건 마찬가지요. 그리고 공주들이 신랑감을 살피기 위해 우르르 외국으로 몰려가는 것도 이상할 것 같기 때문이오. 고산국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직접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조선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봐야겠지만, 일단 예조 판서는 다음에 조선국 세자와 함께 고북에 다시 오기로 했다. 이민호는 광해군의 왕권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해서 공주를 조선 세자에게, 그것도 후궁으로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선보는 것 자체를 반대하기도 어려워 조선에서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알현을 마친 이이첨과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이이첨이 이국적인 식사를 원하는 것 같아 왕실 조리장이 이 시대에는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도 않은 유럽식 코스요리를 준비했다. 백포도주와 고기, 적포도주와 생선이 차례로 식탁에 놓였다.

“배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자주 갔었습니다만, 명나라에는 음식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고 재료나 조리법이 기발한 것이 많았습니다. 식사 전에 먼저 향채를 씹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몇 달이나 몇 년씩 발효시켜 깊은 맛이 우러나는 장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음식을 더 좋아합니다.”

“문화권마다 식사 예법이나 식문화가 다르지요. 육고기는 적포도주와 함께, 생선은 백포도주와 함께 드셔야 할 것이오. 반대로 들면 입맛을 떨어뜨리기 십상이라고 들었소.”

“오! 고기와 적포도주를 함께 하니 맛의 조합이 환상적으로 좋군요. 생선에 백포도주를 곁들여도 맛이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말리지 않을 테니 시도해보시오.”

이민호는 자신이 없어 차마 시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를 해야 발전이 있는 법이었다. 비록 시도 자체가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고, 희생자는 지옥을 경험하겠지만.

음식끼리도 상성과 상극이 있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고 수박이나 배를 후식으로 먹으면 설사를 하고, 감과 꽃게를 함께 먹으면 자칫 식중독에 걸릴 수 있었다. 오징어와 우유는 최악의 조합이었다. 고산국은 음식 문화가 급격히 발달하는 중이라 그런 상성을 다 알지 못하고 아직 경험을 축적하는 단계였다.

“카! 대단합니다.”

“오! 생각보다 맛이 좋소?”

이이첨이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에 이민호까지 깜빡 속아 넘어가 하마터면 생선과 적포도주를 같이 먹을 뻔했다.

“그건 아닙니다. 이렇게 함께 들어보니 조리 과정에서 이미 비린내가 제거된 생선에서도 비린 맛을 극한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적포도주는 원래 매우 떫고 쓴 맛이었군요. 고기의 누린내를 잡으려면 마땅히 이런 맛이어야겠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번에 국혼을 추진하면서 말이오.”

“분부 내리십시오, 전하.”

“고산국과 조선은 특별한 관계에 있으니 조선의 젊은 왕족들을 잠시 몇 년씩 고산국에서 교육을 시키는 게 어떻겠소? 그들에게 유럽과 아프리카를 비롯해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소. 왕족들이 솔선수범하면 조선에서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질 것 아니겠소?”

“아하!”

“그 대상이 반드시 왕자일 필요는 없고, 군이나 세자의 사촌형제 혹은 20대 이하의 삼촌들이 적당할 것 같소.”

“신학문을 공부하고 외국을 돌아보려면 젊은 왕족들이 적당하겠지요.”

이민호가 말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이첨이 단박에 알아챈 것 같았다. 조선 입장에서도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왕족들을 역모죄로 몰아 직접 죽이느니 고산국에 인질로 보내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과 능창군은 반드시 고산국에 왔으면 좋겠소. 참! 능창군은 일찍 돌아가신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됐지요?”

“그렇습니다. 조선국 왕실의 번영을 위해 신경 써주신 데 대해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선조 임금의 다섯 번째 서자 정원군은 이복형제인 임해군과 순화군 못지않은 인간 말종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부터는 눈에 안 띄도록 조용히 지내왔다. 그런데 아들 능창군을 표적으로 삼아 역모죄로 고변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머무른다는 소문을 듣고 광해군이 그 집을 빼앗아 경덕궁 터로 삼기도 했다.

실제 역사에서 능창군은 역모죄로 체포돼 위리안치된 교동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실록에 남은 졸기를 보면 수장(守將)이 능창군을 찬 돌방에서 자게 하고 모래와 흙이 섞인 밥을 지어주는 등 능창군을 죽음으로 내몬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식으로 핍박을 받았으니 능양군이 인조반정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실제 역사보다 일찍 왕위에 오르고 정치지형도 달라졌기에 능창군을 쉽사리 역모죄로 엮어 죽일 수가 없었다. 이이첨은 이민호가 왕재인 능창군과 그의 형인 능양군을 요구하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렇게 해서 누구는 새장가를 드는 대신 다른 누구는 인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예판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역모 가능성이 있는 왕족들을 살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요.”

“물론입니다, 전하. 만약 무엄하게도 역도들이 일어난다면 현 주상전하를 대체할 왕족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왕실이 번창해야 하므로, 예전의 오스만 제국처럼 왕족들을 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고산국에서 번역 출간한 모든 책과 잡지가 기본적으로 조선에 들어간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고관대작들뿐만 아니라 일반 선비들도 멀리 유럽이나 중근동의 일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고산국 배를 타고 세계 여행을 하는 조선 선비들도 꽤 있었기에 조선은 더 이상 세계사에 까막눈이 아니었다.

“그 문제는 됐고, 문묘 종사 문제는 북인 측이 적당히 양보하는 게 어떻겠소? 왕권 강화를 위해 강경책을 쓰는 바람에 현재 대북은 집권파이면서도 소수파로 몰리고 있소.”

“휴우! 그게 문제입니다. 주상전하와 저희 대북파가 확실히 같은 편도 아니니까 더 불리합니다. 그 문제는 다른 선비님들과 의논해서 결정하겠습니다. 좋은 조언을 해주셔서 은혜가 망극하옵니다.”

대충 화합하라는 조언이 얼마나 먹힐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민호는 인조반정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반정 직후 극단적인 반동, 보수화가 진행되면 고산국과 조선의 관계에 먹구름이 내려앉을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민호가 괜히 명나라의 황위 계승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에서 황제의 보호자라는 지위를 굳건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조선에서 역모를 준비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려는 목적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조선에서 역모사건이 발생할 경우 적법한 국왕과 후계자를 지키기 위해 고산국이 군대를 출동시킬 수도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이 이민호가 조선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이번에 공주를 조선 세자의 후궁으로 보내는 문제도 마찬가지로 같은 정치적 목적이 개입됐다. 그러나 결혼은 당사자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혼이 성사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민호는 결혼이 성사되지 않기를 바랐다.

한 달 후에 조선국 세자가 왕도를 방문했다. 주작대로를 거침없이 지나가는 세자의 행차를 늙은이들은 길바닥에 엎드려 열렬하게 맞이했으나, 젊은이들은 서서 멀뚱멀뚱 구경했다. 고산국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에게 조선의 세자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남의 나라 왕족일 뿐이었다.

세자 이지는 1598년 12월 4생으로서, 양력으로는 12월 31일생이었다. 가례는 14세인 1611년에 이미 올렸다.

“고산국 국왕전하께 조선국 세자 이지와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 의안군의 아들 능원군, 신성군의 아들 능창군이 인사 올립니다.”

“오! 어서들 오너라. 세자와 능양군은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군주제에서 국왕이나 기타 군주의 호칭은 무조건 문단의 첫 단어로 나와야 한다. 문법상 문장의 중간에 나와야 할 경우에도 중간에 문단을 바꿔서라도 반드시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 20세기 초까지 동양 세계에 공통된 문법이었다. 여의치 않으면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도 흔했다. 왕세자 이지는 인사말을 하면서도 이런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능양군과 능원군, 능창군이 실제로는 정원군의 아들 삼형제였지만 차남과 삼남은 요절한 백부들의 양자로 들어가 법적으로는 각각 다른 군의 아들이 되었다. 왕세자 이지는 싱글벙글했으나 정원군의 아들 삼형제는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정원군 마마께서 섭섭하시겠구나.”

“조정에서도 반발하는 대신들이 꽤 많았습니다만, 왕실의 일원으로서 괜한 오해를 받아 불행해지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다행히 세자는 무척 현실적이구나.”

이민호는 이들의 할아버지인 선조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지닌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를 포괄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가장 큰 특징은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무책임하며 양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괴롭히는 해악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그리고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기본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유전적인 영향도 받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선조의 2세들 중에서 임해군과 순화군, 정원군은 물론 그 후대에도 살인행각을 벌인 능원군 등 비슷하게 양심이 없고 남을 도구로 삼거나 잔혹한 짓을 저지른 인물들이 다수 활동했다. 실록에서 국왕들의 언행을 살펴보면 광해군과 인조도 그런 성향이 꽤 있었다.

“고산국의 옹주님들은 모두 대단한 미인이며 재녀들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부디 재녀를 얻어서 조선 백성들에게 복이 되면 좋겠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대해봐. 서로 마음에 들어서 잘 되면 좋은 일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공주가 조선 왕세자의 후궁이 될 수도 있다는 현실 앞에서 이민호는 참담함을 느꼈다. 더 큰 문제는, 공주들 중에 누가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으로써 후궁 자리라도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피울 경우였다.

스물다섯 살 넘어서도 아직 시집 못간 공주들 전체와, 그 이하 나이이면서 자발적으로 후보로 참가한 공주들이 꽃단장을 한 채로 왕궁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숫자가 30명이나 돼서 이민호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전하! 고산국에는 옹주마마님들이 충분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저희 사촌 형제들에게도 선을 볼 기회를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건 안 돼. 고산국에서 교육받은 여자들은 남자의 입에 발린 거짓말에 안 넘어가거든.”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돼. 다만 조선국 국왕전하 및 예조판서와 약속한 것은 세자의 후궁 간택이다. 내가 세자 사촌들의 혼사까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어. 왕족 젊은이들은 특별히 준비한 교육을 받게 될 것이야.”

단호하게 거절한 다음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의심되는 정원군의 자식들을 특전대대 훈련소에 입소시켰다. 특전대대 교관들과 조교들이 신병들을 알아서 튼튼하게 교육시켜줄 것으로 믿었다.

============================ 작품 후기 ============================

다음에는 1대 30의 단체 미팅이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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