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83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
“공주님들은 준비됐어요, 주인님. 알현실로 가주세요.”
“다들 얼굴 표정 풀라고 했지?”
호위대장 선영이 조선 왕세자와 고산국 공주들이 선보는 자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렸다. 세자에게 기별을 보낸 다음, 먼저 가서 공주들에게 한 마디 해주기 위해 이민호가 일어났다.
“물론이에요. 하지만 조선국 세자에게 후궁으로 시집가는 거라면 다들 싫어하는 게 당연해요. 공주마마들은 외국으로 나가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갖고 계세요. 기대하지는 마세요.”
“기대는 무슨? 나도 어떤 공주든 조선에 보내고 싶지 않아. 조선에 가면 고생할 게 뻔한데, 딸 팔아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이첨이 제의를 한 뒤에 고산국 예조 판서와 함께 현실적인 논의를 했었다. 조선 왕세자 이지와 세자빈이 1611년 가례 이후 1614년에 원자를 낳았는데 다섯 달 갓 지나서 죽고 말았다. 문제는 그 후에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리고 1618년에 동궁의 소훈 두 명을 새로 들였는데도 현주를 하나 낳았을 뿐 아직 왕손을 생산했다는 소식이 없었다. 씨도 밭도 문제라고 봐야 했다.
예조 판서는 만에 하나 고산국 출신 공주에게서 난 왕자가 조선의 왕위를 잇더라도 고산국에 정치적으로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조선의 대신들이 고산국과의 문제에서 특히 철저히 조선 국왕을 견제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민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고산국의 국력에 비해 조선에 너무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이 대신들과 언관들 사이에 있어요.”
“응? 왕세자가 외국 국왕에게 인사하러 조선을 떠났는데도? 이런 경우는 조선 건국 초에 양녕대군이 남경에 간 이후 처음이야.”
조선국 세자가 명나라 초기 황도였던 남경에 가서 황제가 여는 조회에 참가한 것, 즉 조현(朝見)한 것은 영락 5년에서 6년, 1407년에서 1408년이었다. 이때 세자는 아직 양녕대군이었고, 당시 황제가 입고 있던 홍포를 벗어주고 따로 관복 한 벌을 내려주어 예우 면에서 명나라 친왕들이나 그들의 세자에게 대한 것보다 훨씬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실록에서 찾아보면 조선 초기에 조현을 하러 세자를 명나라 황도로 보내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세조 임금의 왕세자가 출발 직전 병으로 죽거나 하필 황제가 남방을 순행하느라 황도를 비우는 등 이런 저런 다양한 이유로 취소됐다. 조선에서는 명나라에서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음력 새해 첫 날에 여는 조회인 정조(正朝)에 조현하는 것을 극력 피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조현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건 조현이고 지금은 소훈 간택, 선보는 일이라 다르잖아요.”
“명목상 속국이 아니니까 그런 핑계를 댄 거지. 조선에서는 고산국에 세자를 보내 조현하고 왕족들을 인질로 보내서 자존심이 상했다고 아주 난리가 났을 걸?”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다음 대 국왕이 될 세자는 외교에서 현 국왕의 대리인 역할을 맡는다. 당나라가 조공국 왕족들을 불러 모아 황실에서 숙위하도록 한다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국왕이 안 된다면 세자라도 입조하라고 강력히 요구한 이유였다. 세자가 외국에 입조한다면 바로 그곳이 종주국이었다.
이런 이유로 왕세자가 한성을 출발하기 직전까지 이에 반대하는 상소가 조선 전국에서 빗발쳤다고 한다. 마포로 향하는 왕세자 행렬을 가로막고 눈물로 호소하는 선비들도 있었다. 분명 후궁을 데려오기 위해 떠나는 외국행차인데도 왕세자가 움직이는 것 자체가 국치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조선 왕세자와 고산국 공주들을 선보게 하면서 고산국에서 얻을 것은 다 얻어냈다. 왕세자를 고산국에 오게 하고 조선 국왕에게 위협적인 왕족들을 인질 비슷하게 데려오게 했다. 조선의 현안인 문묘 종사 문제에서도 집권당인 대북파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조선의 정치적 안정은 고산국의 국익이므로 조선에서 왕권이 교체되지 않도록 내정간섭을 한 셈이었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도 항상 현실적인 결론을 내리려고 노력하는 현 조선 국왕과 조정에서는 이민호가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먹었다. 왕세자가 고산국까지 와서 공주를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 비록 수치스럽다고 해도 조선이 실제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인질처럼 보이지만 왕족들을 요즘 번성하는 외국에서 교육시킨다는 것은 명분도 있고 조선의 왕권 안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두 나라 사이에 힘의 차이가 많이 나기에 조선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번 혼사가 이루어진다면 서로 수치로 여길지도 모르겠군.”
“아직은 조선 양반들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여요.”
고산국과 조선에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번 일로 어느 쪽이 더 수치스러운지 배틀을 붙여보고 싶었다. 고산국 공주가 조선 왕세자의 후궁으로 간다는 이야기에 불만을 터뜨리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고산국 일부에서 제안하는 대로 세자빈을 이혼시키고 고산국 공주를 정식 세자빈으로 들이는 문제를 이민호는 생각도 안 해봤다. 현재 세자빈은 매우 훌륭하고 씩씩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세자빈 밀양 박 씨는 반정 이후 위리안치된 곳에서 세자와 함께 땅굴을 파서 도주하려다가 붙잡힌 지 사흘 만에 자결했다. 현주를 낳은 소훈 외에 소훈 허 씨는 허균의 딸로서 일반 사대부의 규수와 다른 합리적인 교육을 이미 충분히 받았다. 동궁의 환경 자체가 고산국 공주에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바마마! 강제로 선을 보이는 법이 어디 있어요?”
“쯧쯧! 어쩌다 이 꼴이 됐니? 너희들 벌써 스물다섯 살이다. 이제부터 약속을 지켜라.”
1594년부터 자식들이 태어나서 이듬해와 그 다음해에 피크를 이뤘다. 선보는 자리에 모인 공주 30명 중에 스물다섯 살에 이른 공주들이 스물한 명이나 되었다.
왕자들은 궁성 밖에서 신붓감을 잘만 데려오는데 공주들은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인 후궁들에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몰라도 배우자 선택에 매우 신중한 탓이었다.
“공주들아! 내가 항상 말했듯이 결코 강요하지는 않겠다. 평생 함께 살 배우자는 너희들이 직접 선택하도록 해라. 그리고 웬만하면 할아버지 말씀을 좀 들어.”
“아바마마! 할바마마는 상대방의 지위를 너무 중시하시는 것 같아요. 신분제가 유지되는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높은 지위에 이르면 이미 나이가 너무 많잖아요.”
“너희들 나이에 쓸 만한 젊은 남자들은 이미 다른 여자들이 채가서 남아있지 않아. 더 늦기 전에 후처 자리라도 알아보라니까?”
“너무해요!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에요. 한 번 골라볼까 요리조리 살피는 중에 사내들이 참지 못하고 장가가더라고요. 사실 눈에 차는 남자도 별로 없어요.”
“아비인 내가 너무 잘 나서 비교돼?”
“에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깔깔!”
이때 호위가 문을 열고 들어와 오늘의 주인공, 조선국 세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잠시 후 왕세자가 알현실에 들어오자마자 공주들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꺄악! 왕세자 저하께서 너무 잘 생기셨어요!”
강제로 선을 보게 돼서 시무룩했던 공주들과 외국 왕세자를 구경하러 나온 조금 더 어린 공주들의 미모가 갑자기 화사하게 피어났다. 이민호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으음! 저 걸음걸이는. 세자라 해서 책벌레나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었구나. 합격일세.”
“예? 아버지! 도대체 뭘 보고요?”
종친부 대표로 나온 대원군 이응화까지 조선국 왕세자를 좋게 평가했다. 전통 무예인 수박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익히면 자연스레 걸음걸이가 달라지는데, 이를 통해 무예 수준을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남자의 상징이 잘려서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변하는 환관들과 반대로 수박을 깊이 수련한 자는 보폭이 넓어지고 발끝의 방향이 바깥을 향하고 어쩌고 부친이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민호는 수박을 기초만 배웠고 더욱이 무관 출신이 아니라서 잘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조선의 왕세자 이지라고 합니다.”
“꺄아아! 목소리도 너무 멋져요!”
공주들이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남성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여성 팬들을 보는 듯했다. 이민호는 여전히 이마에 손을 짚고 있었다.
“공주마마들께서 옷차림을 가볍게 입으셨군요. 고산국의 기후가 더우니 당연합니다만, 제 눈이 호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선에서 소훈이 되시면 한여름에도 치렁치렁한 궁중의상을 입으셔야 합니다. 고생하실 것 같아 제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나! 자상도 하셔라.”
왕세자 이지가 공주들에게서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나갔다. 공주들이 집단으로 왕세자에게 매혹된 것 같았다. 이민호는 공주 한 명 정도라면 용납하겠는데 혹시라도 서너 명이 왕세자의 후궁으로 가겠다고 나서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지경이 되었다.
“고산국 공주마마들은 학문이 높을 뿐만 아니라 기마와 궁시에도 능숙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국왕전하께 윤허를 받아 저하고 함께 가까운 곳으로 사냥을 가시는 게 어떨까요?”
“어머나! 저희들은 그런 것 잘 못해요. 연약한 아녀자가 어떻게 말을 타고 활을 쏘겠어요? 호호!”
“저런 가증스러운 것들! 여진 호위들한테 몇 년이나 배웠잖아!”
이민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주들의 예쁜 척과 여우 짓이 도를 넘었다. 옆에서 부친이 이민호의 반응을 살피면서 즐거워했다.
“국왕! 저 정도 용모와 말솜씨면 왕세자가 아니라도 우리 손녀 공주들의 배우자감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부족하죠. 이 세상에 딸을 데려갈 자격이 충분한 사윗감이란 존재할 수가 없어요.”
“큭큭! 분위기를 봐서 이만 포기하게나.”
이민호의 예상과 달리 세자와 공주들의 대담은 잘 진행되는 듯했다. 청춘남녀들이 만나서 서로 호의를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일이 이렇게 진행되니 이민호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어느새 만남의 시간이 끝나갔다. 공주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왕세자에게 몰려갔다. 설마 이 많은 공주들이 모조리 왕세자에게 시집가겠다고 나서지는 않겠지만, 이민호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자 저하! 오늘 무척이나 즐거웠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예? 그럼 혼사는요?”
“저 말고 다른 분께 여쭤보세요.”
“세자 저하는 좋은 분이시지만 저도 집을 떠나기 싫답니다. 너무 아쉬워요.”
이런 식으로 30명이나 되는 참가자들이 줄줄이 알현실을 떠났다. 왕세자가 낙담해 고개를 숙이고 이민호가 승리자의 미소를 짓는 사이, 마지막으로 딱 하나 남은 공주가 왕세자가 아니라 이민호에게 다가왔다.
“아바마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 뭐냐? 세자는 잠시 기다리게.”
알현실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공주와 대화를 나눴다. 여진 호위 겸 후궁의 딸인 공주는 스물한 살로 아직 결혼에 조급해 할 나이는 아니었다.
“제가 조선에 가겠습니다.”
“응? 지은이 네가 마지막으로 남아서 책임감을 느끼느냐? 싫으면 갈 필요 없다.”
키가 큰 이민호와 체력이 좋은 여진 호위 사이에서 태어났다 해도 자식들 체구가 모두 큰 것은 아니었다. 공주 지은은 이민호만 아는 어느 여가수처럼 아담해서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다.
“조선에서 세자빈이란 무척 불안한 자리다. 내 딸이 고생하는 꼴은 보기 싫다. 어떤 이유든 조선 세자가 고산국 왕궁에 온 것만으로도 이번 일의 정치적인 목적을 이미 충분히 달성했다.”
“나라와 아바마마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민호는 차분히 앉아 공주에게서 이유를 듣기로 했다. 공주 지은은 그림을 잘 그려서 만화가를 준비 중이며, 앞으로 캐릭터 산업을 이끌 인재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만약 공주 지은이 조선에 시집가서 만화를 그리지 못하게 된다면 그 재능이 아까웠다. 이민호는 혼인으로써 두 나라의 왕실이 맺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만화를 더 중시했다.
“조선의 세자빈 마마께서 원자를 낳으셨지만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언니들처럼 건강하니 제게 국모가 될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설마 권력욕 때문에 조선에 가겠다는 거냐?”
“아닙니다. 저는 아바마마의 소망을 읽었습니다. 정원군의 후손이 아닌 세자 저하를 왕위에 올리고, 그 분의 아들을 차차기 왕에 올려서 조선도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홍익인간의 이념이나, 아바마마께서 주창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널리 설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일을 왜 네가 맡아야 해?”
“조선 백성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코 공부하기 지겨워져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이민호는 공주 지은이 공부하기 싫어서 시집가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독자들과 제대로 공감하는 작품을 내는 만화가가 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며 공부하라고 다그쳤던 일이 이제 와서 후회가 됐다. 갑자기 지은이 도끼눈을 뜨고 이민호를 노려봤다.
“공부는 계속할 거여요!”
“흐음. 내 가슴이 아프지만, 네 각오가 그렇다면 가거라. 그보다 먼저 네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으렴.”
이민호가 한숨을 팍 내쉬었다. 공주 지은이 철이 없어서 그저 백마 탄 왕자에게 홀린 게 아니라서 더더욱 안타까웠다. 호위들은 딸의 소망을 들어주려는 편이라서 반대할 리도 없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세자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세자가 사람 자체는 괜찮다만, 반대 당파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봐 불안해서 그렇지.”
“제가 조선에 가면 그런 기도 자체를 포기할지도 몰라요. 물론 제가 아니라 아바마마 덕이겠지요.”
“지은아! 권력 지향주의자들을 상식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보통 인간이 못할 나쁜 짓을 일삼기 때문이다. 지은이 바로 네가 반정의 명분이 될지도 몰라.”
“반사회적 인격장애에 대처하는 방법은 충분히 배웠다고 자부해요. 그게 무서워서 언니 공주들이 더더욱 시집을 못 가는 것 아니겠어요?”
“내 잘못이 크다만, 그들은 항상 상상 이상이니까 안심하면 안 된다.”
방에서 나와 공주 지은을 세자에게 보냈다. 세자와 지은이 활짝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는 이민호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선영이 손수건을 꺼내 이민호의 얼굴을 토닥거렸다.
“이만 자리를 비우시죠?”
“나는 웬만해서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인데 눈물이 나오네.”
“지금까지 공주마마들이 시집갈 때마다 우셨어요.”
“쳇! 그랬어?”
집을 떠나 이민호에게 시집온 후궁들이 백 명이 넘었다. 후궁들의 부모들도 비슷한 감정의 폭발을 겪었을 거라 생각하니 불현듯 미안해졌다. 멀리서 시집온 후궁들에게 집에 다녀오라고 휴가라도 몇 달씩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세자가 움직인 것만으로도 조선에서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양보를 했습니다. 조선인들이 느꼈을 감정은 마치 병자호란 직후에 왕자들이 청나라에 인질로 간 것과 비슷합니다. 결혼은 주상아의 사례와 비교해보십시오.
결혼식은 생략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