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84화 (833/1,000)

00884  97. 1620년, 한 시대의 마감  =========================================================================

1620년은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많았던 해였다. 잉글랜드 전역에 짙은 안개가 끼고 템스 강이 얼어붙었다. 슈투트가르트 인근 바일 데어 슈타트에서는 개구리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스코틀랜드 전 지역에 13일 동안 폭설이 내렸고, 특히 남부 에스크데일에서는 폭설과 함께 한파가 몰아쳐 양떼 2만 마리 중에서 겨우 35마리만 살아남았을 정도였다. 그 여파로 스코틀랜드에서 대대적인 마녀 사냥이 전개됐다.

북미 북부, 현대의 캐나다 지역이 너무 추워져서 북미 원주민 부족들을 남쪽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사냥과 농업을 병행하는 원주민들에게 사냥터를 확보해주지 못할 경우 생업을 목축으로 전환시키는 교육을 실시했다. 몇몇 부족은 말을 타고 들소 떼를 쫓는 생활을 선택했다.

아시아 툰드라와 북부 삼림 지대에서도 여러 부족의 거주지를 남쪽으로 이주시키는 사업을 추진했다. 모피 생산이 일시적으로 줄어들었지만 모직물과 다른 직물로 순조롭게 수요량을 대체했다.

10월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몰다비아 연합군이 투토라와 프루트 강 인근에서 오스만 제국과 크림한국, 왈라키아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73세인 대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는 퇴각하는 군대의 후미를 지키면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폴란드 셰임으로부터 예산과 병력을 지원받지 못했으니 패전은 대 헤트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었다.

“주키에프스키라면 재산이나 가문의 도움이 전혀 없이 오직 전공만으로 대 헤트만에 오른 사람 아냐?”

“비록 폴란드가 우호국은 아니지만 그 분은 훌륭한 장군이에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재상까지 역임했던 폴란드의 실질적인 2인자가 국가의 지원 없이 외롭게 싸우다가 이런 감동적인 최후를 맞이했어. 과연 사나이야. 사관학교 전쟁사 교재에 이 이야기를 꼭 넣어야겠어. 고등학교 세계사나 국어책에도 이 이야기를 조금 각색해서 넣을까?”

“셰임의 귀족들이 제대로 악역을 맡겠군요.”

평생 국가에 충성하던 무관이 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중에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아 최후를 맞이하는 사건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그래서 더더욱 유명해지는데, 상대국이나 다른 제3국에서도 그 사건을 크게 부풀리기 위해 노력한다.

유명한 무관이 죽도록 내팽개치거나 남송의 악비처럼 모함으로 사형시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짓은 그 국가에게 몹시 수치스러운 일로 오래도록 남는다. 그런 영웅을 다른 나라에서 애써 띄워주는 것은 자국에 그런 일이 없도록 경계하고, 그 나라 백성들에게서 애국심을 낮추는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총독부가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을 띄우고 선조 임금을 깎아내린 이른바 애국소설들을 괜히 허용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지식인들이 애국명장 이순신을 찬양하도록, 심지어 일간신문에 연재하도록 총독부가 내버려둔 것은 이순신과 선조를 대비시켜 조선은 지킬 가치가 없는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고 조선 지도층의 문제 자체에는 공감하더라도 총독부의 의도를 파악해두고 있어야 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주인님.”

먼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 결과를 보고한 정보국장 미카가 이민호의 주의를 환기했다. 이민호는 오스만과 폴란드의 전쟁이 혹시 루스 차르국이나 토르구트 족의 영토로 불똥이 튈 수 있는지 미카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오스만과 폴란드가 토르구트 족의 힘을 두려워해서 국경이 불안해질 일은 없을 거예요. 다만 대 헤트만의 미망인께서 남편의 시신을 반환하고 아들의 몸값을 지불해 포로에서 석방하는 협상을 중재해달라고 차르에게 청원했어요. 차르는 주인님께 부탁했고요.”

“그런 문제를 왜 나한테 넘기지?”

미카가 멀뚱멀뚱 이민호를 바라봤다. 이민호는 귀찮은 일은 질색이었으나 해야 할 일이라면 피하지 않았다. 현재 주키에프스키의 시신은 목이 잘린 채 이스탄불의 황궁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말을 해야 알아듣지.”

“주인님은 오스만 제국 황제에게 유일하게 발언권을 가진 외국 군주이시잖아요. 오스만 제국 영토를 둘러싼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 베네치아, 이집트, 아부다비, 오만이 전부 주인님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니까요.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국경이 우호적인 국가와 맞닿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어요.”

“그런가?”

“그게 아니더라도 예전에 이스탄불에서 반란 진압을 도와주신 일로 후계자인 황제들의 후견인을 맡을 권리가 주인님에게 있어요.”

“그때 황제가 괜히 해본 소리였지.”

오스만 제국과는 원래 인연이 없었고 동맹국인 에스파냐의 적국인데도 이상하게 국초부터 고산국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아체 문제로 외교적인 물꼬를 텄고 수에즈 운하를 개통하는 과정에서 이집트를 넘겨받고 예멘에서 이맘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같은 편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스탄불의 반란을 진압해준 일에서 가장 큰 신뢰를 얻은 것 같았다.

“흠. 이번 삼촌과 조카의 황위 계승 분쟁에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폐위된 삼촌이 살아남았지요.”

“오스만 제국에서는 내가 황제가 아니라 황실 전체를 보호하는 입장이 됐구나. 제멋대로 생각하라지.”

“대 헤트만의 미망인을 도와주실 건가요?”

“불쌍한 사람이니까 국적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도와주도록 해.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의 영지인 조브크바는 우크라이나 북서부에 위치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석권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를 기준으로 보면 남서부에 치우친 곳이었다.

폴란드인들은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 족의 배후에 도사린 대국 고산국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폴란드 귀족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다가 한 번 호되게 당한 일이 과장해서 소문 난 탓도 있었다. 이번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절단이 오가는 과정에서 폴란드인들이 고산국에 조금이라도 우호적으로 변하길 원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의 곡창이에요. 우크라이나가 계속 전쟁에 휘말리면 곡물 생산이 줄어들어 유럽에서 곡물가가 크게 오를 수 있어요.”

“돈 벌자고 우크라이나를 전쟁터로 만들 수는 없지. 기상 이변은 전 세계적이고 장기적인 현상이라서 더 이상 기상 이변이라 부를 수도 없어. 기후 변화에 전 인류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지도 몰라.”

“다른 군주들이라면 이 기회에 우크라이나를 얻자고 달려들 텐데 역시 주인님은 다르세요.”

“듣고 보니 폴란드나 오스만에서도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겠군. 그럴 의향이 없다고 전달해줘.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에도 서쪽으로 확장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해.”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는 현재 영토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루스 차르국은 내부 개혁으로, 토르구트는 목초지와 농경지를 개간하는 일만으로도 바빴다. 딱히 외부로 힘을 투사할 때가 아니었다.

루스 차르국이나 토르구트에게 이미 힘이 축적됐다 해도 동유럽의 사정은 확장하기에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오스만 제국이 아직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다.

“꽤액! 잉글랜드에서 잠수함을 발명했다고?”

“진정하세요. 큰 문제는 아니에요.”

지금까지 유럽에서 들어온 소식 중에 이민호에게 이렇게 큰 충격을 안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왕궁이 떠나가라 크게 소리를 질러 미카가 더 놀랄 지경이었다.

잉글랜드 왕립해군에 고용된 네덜란드 과학자 코넬리우스 드레벨이 세계 최초의 항해 가능한 잠수함을 만들어서 템스 강에 띄웠다. 선체의 대부분을 물에 잠기게 하고 물속에서 노를 저어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잠수함은 웨스트민스터와 그리니치 사이를 몇 차례 왕복했고, 그것을 런던 시민 수천 명이 몰려와 구경했다. 국왕 제임스 1세는 직접 잠수함에 타서 세계 최초로 물 밑 여행을 한 군주로 공식 기록에 남았다. 물론 이민호가 먼저 제대로 만든 잠수함에 탑승했으나 이것은 국가기밀이라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험 항해 직후 드레벨은 노 추진 방식이 너무 약하고 느리다고 판단했는지, 잠수함의 동력으로 사용할 기관을 수출해달라고 고산국에 요청했다. 성능 자체는 별 것 아니었지만 잠수함이 실제 제작됐다는 사실이 이민호를 아주 기겁하게 만들었다.

“고산국의 기술을 훔쳐서 설계한 것은 아니겠지?”

“언론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1578년에 잉글랜드 수학자 윌리엄 본이 설계한 잠수함을 그대로 만든 것뿐이에요. 부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선체는 나무와 가죽으로 돼 있어요. 넓은 바다에 나갈 수 없을 테니 크게 염려할 것은 못 돼요.”

고산국 정보국과 해군에서는 이미 잉글랜드 잠수함에 대한 특성 파악을 끝냈다. 고산국 함대가 템스 강 깊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위험할 일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사실 이차대전 때까지 잠수함은 ‘가능 잠수함’, 즉 항해는 수상으로 하면서 공격이나 회피를 위해 일시적으로 잠수가 가능한 선박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잠수함은 핵잠수함이나 수중 항해 위주로 잠수 시간을 크게 늘린 디젤 잠수함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일차대전과 이차대전 때 활약해 영국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간 독일 잠수함의 위력을 생각하면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었다.

“물속에 숨어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체로 위협이 돼. 관측을 피해 접근해서 우리 군함에 폭탄을 설치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자체 추진력이 부족해서 물살에 밀려가는 식으로 움직였대요. 바다에서는 활동할 수 없어요.”

“우리 해군 함정이 템스 강 안으로 들어간다면 잠수함의 위협에 노출될 수도 있겠어.”

“상황에 따라서는 잉글랜드를 칠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상황에 따라서지.”

고산국의 지원으로 아일랜드 독립운동이 순조롭게 성공을 거두나 했더니, 최근에 스코틀랜드인들이 아일랜드 북부에 대거 이주하면서 다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혼전을 거듭하게 됐다.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를 겸했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고산국과 아일랜드 사람들을 위해서는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는 게 좋은데요. 물론 잉글랜드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간접적인 지원으로는 이제 한계야. 아무래도 직접 군대를 파병하거나 외교적 협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먼저 외교로 풀어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는 팔츠 선제후의 장인이었다. 보헤미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꾹 참았지만 잉글랜드도 결국 30년 전쟁에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바로 이때가 외교나 군사에서 우위를 점할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11월 8일에 프라하 인근 빌라 호라에서 벌어진 전투가 가톨릭의 승리로 끝났다. 보헤미아와 황제군 및 가톨릭 연합에서 각각 3만씩 동원한 대규모 전투인 흰 산 전투는 단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이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독일 안할트 공 크리스티안이 지휘했다가 패해 포로로 붙잡혔다. 황제군은 부쿼이 백작 롱구에발의 카렐 보나벤투라가, 가톨릭 연맹군은 나중에 틸리 백작이 되는 요한 체르클라에스가 지휘했다. 특히 총병과 창병들을 에스파냐의 테르시오처럼 조직하고 훈련시킨 요한이 결정적인 전공을 세웠다.

프라하가 점령되면서 보헤미아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이후 300년 동안 보헤미아, 즉 체코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아직은 고산국과 상관이 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나 황제군과 가톨릭 군대가 독일 남부 프로테스탄트 영주의 영지를 침공하고, 이에 반응해서 덴마크와 스웨덴이 줄줄이 참전하면 고산국도 끌려들어갈 여지가 있었다.

“고산국도 추워졌어.”

“아무리 따뜻하다지만 명색이 12월말, 겨울이에요.”

이민호는 호위대장 선영과 함께 왕궁 후원을 산책했다. 왕도 고북 시가 북쪽에 치우쳐서 본토 중에서는 유달리 시원한 곳이기는 하지만 요즘은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그때 나무그늘 사이에서 누런 것이 갑자기 튀어나와 이민호에게 달려들었다. 선영이 권총을 뽑았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너 참 오랜만이구나.”

“캬웅~”

20년 전 예루살렘에서 얻은 카라칼을 만났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가 무성한 후원의 진짜 주인은 이민호나 갈라티아 궁녀들이 아닌 카라칼이었다.

“두들겨달라고?”

이민호와 카라칼이 만날 때마다 하는 인사로서, 카라칼이 엉덩이를 이민호 방향으로 들이대고 앉았다. 이민호는 커다란 카라칼의 엉덩이를 두 손을 교대로 사용해 큰 소리가 나도록 세게 두들겨주었다.

카라칼이 눈을 감고 감각을 즐기다가, 가끔 앙칼진 소리를 지르며 발톱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두들겨달라는 의사표시였다. 엉덩이 때리기를 잠깐씩 멈출 때마다 카라칼이 두 발로 바닥을 빠르게 긁었다.

“어머머! 주인님께 후궁 한 분이 더 계셨군요.”

호위대장 선영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애완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궁디 팡팡이라 부르는 이 행위는 애완 고양이 암컷, 가끔은 수컷에게 해주는 성적인 의미가 포함된 행동이 맞았다.

“응? 누렁이도 내명부 공식 직첩을 받은 것을 몰랐어?”

“엑? 어느 후궁마마의 아명이 아니었어요?”

“주인을 민영으로 보통 알고 있겠지만 이놈한테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서 말이야.”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고산국에 바치는 공물 중에서 공작새나 극락조 등 화려한 깃을 가진 새들을 후원에 풀어놓았다가 카라칼이 모조리 잡아먹었다. 이제는 후원에 새를 들여놓지 않았다.

카라칼은 수컷을 만나 새끼를 가질 기회를 평생 갖지 못했다. 가끔 발정기에 왕궁 바깥에 며칠씩 나가 노는 것 같았으나 들고양이들은 카라칼에 비해 너무 작았다. 제법 큰 삵도 카라칼에게 물려 죽을까 봐 접근하지도 못했다.

다음 날 카라칼이 후원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20년이나 살았으니 카라칼의 자연 수명을 넘기고도 남았다. 양지 바른 곳에 카라칼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고양이과 동물이 다 그렇듯 카라칼은 이민호와 민영의 애완동물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 살다 갔다.

한 달 후에 교황 바오로 5세가 선종했다. 교황이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바오로 5세의 재위기간 내내 고산국과 관계가 악화됐기에 카라칼의 죽음에서 느낀 감흥만큼도 느끼지 못했다. 조문 겸 새 교황의 즉위 축하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했다.

============================ 작품 후기 ============================

1620년이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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