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889화 (838/1,000)

00889  98. 전란의 시대  =========================================================================

유럽에서는 여전히 전쟁을 하거나, 전쟁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보헤미아에서 시작된 30년 전쟁은 모라비아로 옮아가 노비 지친 전투, 독일어로 노이티차인 전투가 벌어졌다. 보헤미아 신교도 군대가 가톨릭 군을 쉽게 격파했으나 트란실바니아 대공 가보르 베틀렌과 병력을 합치기 위해 모라비아를 포기하고 슬로바키아로 이동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3세가 군대를 보내 위그노들의 거점인 몽토방을 포위했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렀다. 2만 5천에 달하는 국왕군 병력이 꾸준히 소모돼서 자칫 국왕군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몽토방의 성벽이 리사 심슨의 머리처럼 생겨서 이민호가 피식 웃었다.

오스만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서부 코틴에서 큰 전투를 진행하고 있었다.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 족에서 이 전쟁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이민호가 참전하지 말라고 제지했다.

“로마 제국의 상황, 무스타파 1세 폐하께서 입정하십니다.”

유럽 왕실의 시종장처럼 남자 호위가 무게 추 붙은 홀을 바닥에 내리쳤다. 터번을 쓴 외국 관리들이 보물 상자를 짊어진 채 줄줄이 들어오고, 이어서 30대 초반의 비쩍 마른 남자가 알현실에 들어섰다. 2년 전에 조카에게 제위를 빼앗긴 오스만 제국 전 황제 무스타파 1세였다.

“어서 오시오, 상황.”

“로마 제국 황실의 후견인이신 고산국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궁정에서 일어난 변란은 안타깝게 되었소.”

“비록 제가 권좌에서 밀려났어도 국왕전하께서 개입하지 않으신 덕에 더욱 신뢰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섭섭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스만 제국 황제 오스만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상대로 친정을 하기 위해 이스탄불을 떠나면서 상황 무스타파 1세를 고산국으로 보냈다. 이미 힘을 잃은 상황에게 실권은 없더라도 반란세력에게 쿠데타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상황이 병 치료를 위해 고산국을 방문했다.

“상황은 과연 대범한 분이시오.”

“그 이야기는 그만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에잇! 생각만 해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무스타파 1세가 호종하던 관리의 터번에 갑자기 두 손을 뻗었다. 관리는 두 손으로 터번을 잡고 버티려 했으나 무스타파 1세가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터번에서 아주 잠시 손을 떼었고, 바로 그 순간 무스타파 1세가 신하의 터번을 벗겨서 멀리 집어던졌다. 신하가 떼굴떼굴 굴러가는 터번을 주우려고 달려갔다.

“아! 후련하다!”

“고산국 국왕전하! 부디 상황 폐하를 불쌍히 여겨 병을 치료해주십시오!”

오스만 제국의 의사 두 명이 엎드려 이민호에게 빌었다. 의학이 발달한 고산국에 외국 황족이나 귀족들이 방문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신병은 고산국에서도 쉽게 접근하기 힘든 병이었다.

“상황! 병이 고쳐지지 않더라도 오스만 제국의 궁정보다는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오.”

“그럼 좋겠습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수호자라고 들었는데 아직 한참 젊으십니다.”

“과인이 아주 어렸을 때 왕위에 올라서 그렇게 됐소.”

오스만 제국 관리들이 보물 상자의 뚜껑을 차례로 열었다. 금과 보석이 가득한 상자에서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세상일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상황에게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별장 하나를 내주고 의사들이 100년 동안 진료를 해주더라도 그 비용의 열 배가 넘었다. 상황이라는 정치적인 부담을 대신 맡아주는 대가였다.

“국왕전하! 여긴 암살자가 못 들어오겠죠?”

“물론이오. 고산국 군대가 상황을 지켜줄 테니 안심하시오.”

무스타파 1세는 메흐메드 3세의 아들로서 아흐메드 1세의 한 살 어린 동생이었다. 아흐메드 1세가 13살에 황제로 즉위한 1603년은 오스만 제국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고도 형제들을 죽이지 않게 된 기념비적인 연도였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무스타파 1세가 황제로 즉위하고서도 조카들을 죽일 수 없었다. 그러나 거꾸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스타파 1세는 조카 오스만 2세에게 제위를 찬탈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위를 빼앗기고도 무스타파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무스타파를 정신병자 황제라는 별명이 붙게 만든 정신병이었다. 그에게서 제위를 찬탈한 오스만 2세의 별명은 어린놈이었다.

“그럼 안심하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걱정되오? 오스만 2세가 그대를 노리는 것 같지는 않소만.”

“물론입니다. 저야 미친놈이니까 현재 황제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황제의 신하들이 저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제위를 찬탈당한 자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자들은 항상 있으니까요. 앗!”

- 짤그랑!

무스타파 1세가 알현실의 실내 장식품 중에서 물고기 조각에 금화를 집어던졌다. 남의 수염 잡아 늘이기, 남의 터번을 빼앗아 던지기, 물고기에게 금화를 던지기 등이 무스타파 1세의 대표적인 병증이었다.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이해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드시지요. 온천과 낚시를 즐기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십시오.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흐메드 1세가 황제로 즉위하고서도 형제인 무스타파 1세를 살려줬지만, 곱게 살려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배다른 동생인 무스타파 1세를 새장 같은 우리에 몇 년 동안 가둬놓았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무스타파 1세는 결국 심각한 강박 증세를 나타내는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다.

“제국에서 대군을 동원했는데도 예니체리의 군기가 엉망이라 시간만 질질 끄는 모양입니다. 제국군이 작년에 폴란드의 대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의 군대를 격파했다지만 대 헤트만이 폴란드 셰임의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자금과 병력을 지원한다면 결코 쉽지 않은 원정이 될 것입니다. 전쟁은 재상에게 맡기고 황제는 먼저 이스탄불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병력을 12만이나 동원했다는데 설마 황제가 위기에 빠지겠습니까? 그런데 상황께서는 권좌보다는 오히려 조카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시는군요.”

“저 같은 미친놈보다는 조카 놈이 황제를 하는 편이 제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와 시파히를 대거 동원한 외에도 왈라키아, 몰다비아, 크림한국과 부자크 노가이의 군세를 총동원해 12만 대군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 중이었다. 이 전쟁은 황제 오스만 2세의 친정으로 진행됐고 대재상 오릴리 후세인 파샤도 참전했다.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대 헤트만 얀 카롤 초드키에비츠의 지휘 하에 등록 코사크들을 총동원했으며 셰임에서 병력과 지원을 대거 지원해주었다. 왕실에서는 브와디스와프 바사 왕자가 참전했다. 양측이 20만 가까이 병력을 동원해 이 시기 최대 규모의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부자크 노가이는 이 시기에 흑해 북쪽 오데사 주변인 부자크 또는 부드자크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크림한국과 오스만 제국의 보호령이었다. ‘피 묻은 칼’이라는 별명이 붙은 칸 테미르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몰다비아를 지독하리만큼 자주 침공한 자였다. 1620년의 튜토라 전투 승리 이후 오스만 제국의 흑해 북서쪽 해안지방인 실리스트라 대총독령의 대총독으로 임명됐다.

“사실은 오스만 제국에서 고산국에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아서 의아하게 여기고 있소.”

“고산국은 외국 영토에 욕심 부리지 않고 전쟁에서 항상 중립을 지킨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뢰하는 것이지요. 지난번 폴란드 대 헤트만의 미망인을 도와준 일로 제국과 폴란드는 물론 동유럽의 여러 영주들에게서 호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전쟁을 하면서 포로 문제로 곤란한 일이 생기면 중재를 부탁하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강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중립을 유지하는, 그런 중재자가 있다면 안심하고 전쟁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고산국 때문에 전쟁을 한다는 뜻이오?”

“하하하! 농담입니다.”

무스타파 1세가 비록 정신병자 황제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지만 국제정세를 보는 눈을 매우 객관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상황이 다시 제국 관리들의 터번으로 관심을 돌리기에 서둘러 접견을 끝냈다.

“자제들은 어떻게 느꼈느냐?”

알현실에는 고산국에서 유학 중인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의 귀족 자제들이 입시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인 만큼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으면서 대규모 친정을 직접 지휘하는 오스만 2세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자유롭게 제시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오스만의 침공에 전력을 다해 응전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국왕전하께 충성스런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에게 폴란드 공격을 명하신다면 단숨에 함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폴란드가 동유럽의 강대국이면서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에게 제1의 적국이긴 하지. 그리고 전쟁 중에 오스만 제국을 도와주는 셈이 되겠지만, 폴란드가 멸망한다면 다시 그 땅을 놓고 오스만 제국과 싸워야 할 것이다.”

“고산국이 오스만 제국과 싸운다면 당연히 이길 것입니다.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 베네치아, 오만 같은 해외 영토겠군요.”

국제정세에 밝은 이들도 아부다비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산국에서는 처음에 석유 대신 바이오연료를 생산했기에 외국인들은 석유라는 자원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쉬웠다.

고산국은 아부다비를 중심으로 주변 원유 산출 지대인 두바이와 카타르 등을 차근차근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산업이 발전할수록 석유의 중요성이 커질 것이기에, 북미나 브루나이에서 생산한 석유만으로 부족할 시기가 올 것으로 예상했다.

“내가 보기에는 예니체리가 문제를 일으킬 것 같다. 의견 있느냐?”

“맞습니다. 예니체리가 점점 이익집단화하면서 전력은 오히려 급감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오스만 2세 황제가 불만을 갖고 군제 개혁을 추진하려 들 것입니다. 당연히 예니체리들이 불만을 토로하며 개혁에 저항할지도 모릅니다.”

“외국군과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약한 군대가 국내문제에서는 이익을 독차지하려 하지. 황제가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군사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전하께서 오스만 제국의 상황을 받아들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겠습니다.”

“반드시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외국 유학생이나 학자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아. 고산국의 발전한 문명을 체험하면 고산국 자체에 호감을 갖기 쉬우니까. 이것이 가장 강력한 외교활동이다.”

이민호는 기회만 되면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의 귀족 자제들을 왕궁으로 불러서 국제적 안목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도 두 나라의 귀족 자제들을 자주 모이게 해서 친분을 다질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지금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오스만 제국이 강대국이라지만, 조만간 루스 차르국과 토르구트가 동유럽의 강국으로 떠오르리라 기대했다. 두 나라가 고산국의 속국은 아니라도 강력히 결합된 동맹 그 이상이었다.

“하온데 고산국 공주님들은 눈이 너무 높은 것 같습니다.”

“공주들이 외국으로 시집가기를 싫어해서 그렇지. 그래도 아버지나 오빠들이 방해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야? 열심히 꼬셔봐.”

생각 같아서는 공주들에게 접근하는 외국 귀족 자제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싶었다. 그러나 공주들 나이가 들어가면서 초조해진 이민호는 오히려 구혼자들을 응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공주들은 너무 잘 나서 시집가기 어려웠다.

“결혼 상대는 키 크고 잘 생긴데다가 무예가 출중하면서도 학식이 높고 백성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답니다. 아무리 고산국 공주님들이 훌륭한 신붓감이라지만 웬만한 남자는 거의 불가능한 조건입니다.”

“그래도 구혼자의 신분이나 재산을 안 보는 것만 해도 어디야? 열심히 준비해서 얼른 좀 데려가. 부탁이야.”

다른 후궁 소생들과 달리 여진 호위들 소생은 비슷한 유목부족인 토르구트 귀족 자제를 선호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혈통에 비해 선호하는 정도였지, 시집가기로 마음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바로 이것에 이민호의 고민이 있었고, 토르구트 귀족 자제들이 애를 태우는 이유였다.

토르구트 귀족들은 자식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나라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고산국 공주가 시집와도 편히 지낼 수 있는 수준’이 국가 발전의 목표가 되었다. 마르그레타나 지은 공주처럼 시집간 다음 직접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진취적인 공주는 무척 드문 편이었다. 여자는 배우자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어서 이민호도 이해하고 넘어갔다.

============================ 작품 후기 ============================

30년 전쟁 외에도 온갖 데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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