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91 98. 전란의 시대 =========================================================================
1622년 새해가 밝았다. 점점 추워지는 세상은 온통 전쟁 중이거나 전쟁 준비로 날을 새고 있었다.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1621년에 창립된 다음, 병력 2천 명을 모집해 포르투갈령 브라질에 대한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네덜란드와 에스파냐 사이에 체결된 12년 기간의 휴전 조약이 종료된 다음 전쟁 준비를 하면서 세운 것이 서인도 회사였기에 예견된 전쟁이었다.
해마다 규모를 키워온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21년에 실론을 점령한 다음 1622년 초부터 무굴 제국 영토가 아닌 인도 남부에 대한 공세를 추진했다. 공동의 경쟁자를 두고 잉글랜드와 협조 중인 네덜란드는 남미와 아프리카 서해안, 인도 등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 위주로 공격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1602년부터 1663년까지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이 이어졌고, 영국이 어부지리를 얻었다.
네덜란드는 스웨덴 남서부에 고텐부르크, 스웨덴어로 예테보리 시를 건설했다. 예테보리는 덴마크가 장악한 외레순 해협 북쪽에 위치해, 스웨덴이 북해와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스웨덴이 같은 곳에 도시 건설을 시도할 때마다 덴마크가 파괴했으나, 스웨덴 대신 네덜란드가 도시를 건설하자 사정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외교관들이 오가는 사이 도심 주변에 성벽이 둘러쳐지며 도시가 완성됐다.
“집단 난투극이나 폭행이 아니라 집단 결투를 경기처럼 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저들이 며칠 전에 저희들에게 보내온 도전장을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소인이 찍힌 우표가 봉투에 붙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이민호가 재판정에 출석했다. 판사들이 법과 양심, 판례에 따라 쉽게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사건은 이렇게 이민호가 직접 판결을 내렸다. 이번에는 사고뭉치 청년들이 20여 명이나 피고석에 앉아 있었다.
개인끼리 다투다가 단순 폭행을 저지르면 최고 형량이 징역 3년 이하에 불과하지만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행이나 패싸움은 사회적 범죄로서 5년 이상의 중형에 해당했다. 범죄단체를 조직할 경우 10년 이상의 징역, 수괴는 최고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년들은 폭행한 것이 아니라 결투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피해자들도 결투라고 인정했다. 다만 재판관들이 결투의 요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투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사 보고서를 보니 주민을 위협하거나 상인들에게서 금품을 뜯은 적은 없군. 그래도 규칙대로 시청 경기장이나 체육관에서 의료진을 대기시켜두고 결투를 하지 그랬나?”
“일대일로 결투할 것이 아니라서 시청 경기장에서 거절했습니다. 집단전은 비겁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집단 싸움을 목격한 주민들이 당연히 신고하겠지. 흠!”
유럽 국가들이 개인들끼리의 결투를 인정하지 않고 벌을 내려도 흔히 결투가 벌어지는 것과 반대로, 고산국에서는 권투와 남권, 태껸과 수박 등 격투기 규칙을 빌어 합법적으로 개인과 개인이 결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순수하게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결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법으로 인정한 일대일 결투가 아닌 집단 결투라는 점에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싸웠습니다. 코피 터진 놈이 셋 나왔을 뿐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경기를 즉시 그쳤습니다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저희들을 체포했습니다.”
“그 동안 한두 번 싸운 게 아니었군. 혹시 집단으로 싸우는 자들이 많나?”
청년들이 움찔했다. 다른 지역 싸움패들까지 피해를 입을까 봐 걱정한 것 같았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것도 어전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면 큰일이 날 수 있기에 순순히 불었다.
“예, 전하. 지역마다 동호회가 구성돼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원정 경기를 하거나 도전을 받아들입니다. 물론 경기가 끝나면 단체로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하고 치료를 받습니다.”
“규칙은? 운동 경기로 인정할 만큼 규칙이 표준화가 돼 있나?”
“아직은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매번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규칙을 정합니다.”
비싼 밥 먹고 이런 짓을 뭐하러 하나 싶었지만 집단전 혹은 마을 간의 싸움은 어느 나라에나 유구한 전통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마을 단위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석전이 있는데 관아에서 말려도 주민들이 들어먹질 않았다. 머리 깨지는 것은 보통이고 심지어 사망자가 속출해도 한두 해 정도 자제할 뿐, 기회만 생기면 다시 치열하게 상대편 마을 사람들에게 짱돌을 집어던졌다.
공성전에서 방어하는 측의 투석은 화살 못지않은 매우 치명적인 공격방법이었다. 조선이나 일본 같으면 민간에 투석전을 장려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사거리가 긴 소총을 사용하는 고산국에서 집단화된 투석전은 거의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웃마을끼리 싸움이 나면 보통 축구 경기를 해서 감정을 풀지만, 이민호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알았다. 패싸움으로 오인되지 않도록 집단결투를 경기화해라. 일단 여러 지역에서 대표를 뽑아 전국 단위의 협회를 만들고 규칙을 통일한 다음 경기장 대관 문제를 시청과 협의해라. 이 일에 필요한 비용은 중앙 정부에 청구하도록. 조정에서는 법적 지원과 신문 및 잡지에 공고를 해주마. 됐느냐?”
“저, 이번 재판은 어떻게 됩니까?”
“이번 사건은 무죄로 판결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황공하오나 집단전의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나한테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하다니, 용기가 가상하구나. 콜로세움이나 떼싸움 중에서 선택해라. 표정이 다들 왜 그래? 그럼 한자로 집단 난투극이라고 불러라.”
“집단 난투극이라고 하겠습니다.”
청년들이 일제히 부복한 다음 히히덕대며 퇴정했다. 재판관들이 혀를 찼지만 무조건 억누른다고 능사가 아니었고 다른 대안도 없었다.
“전하! 웬만하면 축구나 권투 같은 운동경기로 공격 성향을 해소하라고 권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싸움은 야만적이면서도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활동이오. 젊은 사내들의 공격성을 이런 식으로 해소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고산국이 살기 편하다고 해서 게으르고 소심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오.”
“도시지역에서는 사냥을 대체할 만합니다. 그러나 상무정신을 고양한다고 하기에는 격이 낮아 보입니다.”
“선술집에서 단체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폭행죄로 징역형을 받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소.”
나중에 알아보니까 3인, 10인, 50인으로 경기 인원을 정한 다음 매주 집단 난투극을 벌인다고 한다. 섬멸전이나 깃발 빼앗기로 승부를 가리기 전에 투구와 사타구니 보호대, 정강이 받침을 착용하고 쓰러진 사람은 공격할 수 없는 규칙이 적용됐다.
집단 난투극은 전술에 따라 변수가 많아서 권투나 다른 개인 격투기보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다. 그래서 경기장이 유료 관중으로 항상 만원 사례였다. 다만 경기 출전자들의 안전을 고려해 그라운드 기술이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아바마마! 저희 부인께옵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뭔데? 네 어머니도 아직 설득하지 못했는데 무슨 문제야?”
처음에는 개똥이에게 ‘너도 애비처럼 마누라에게 잡혀 사느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서로의 체면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이민호는 개똥이가 왕이 되는 것을 며느리가 탐탁지 않게 여길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다.
“세자가 되면서부터 후궁을 너무 많이 거느리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입니다. 특히 세자익위사에 선발될 호위들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아국의 호위들은 근접 경호원 겸 수행비서 겸 내명부 후궁 역할을 담당한다. 어느 왕실에나 후궁들이 있는 것을 잘 알잖아?”
호위들의 실체는 경호원보다는 후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후궁들이 구중궁궐에 갇혀 지내지 않고 남편과 함께 돌아다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수행비서로서 정치와 행정에 어느 정도 참가할 수 있다는 점도 후궁 지원자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저도 남자인데 여자를 마다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헤헤! 하지만 마눌하님의 반발이 좀 심해서 말입니다.”
“녀석! 그럼 호위 선발과 교육에 며느리도 참가시키면 어떻겠느냐? 무슬림들이 그렇듯 첫째 부인의 권리를 행사한다면 불만이 줄어들 것이다.”
“그게 좋겠습니다. 어쩐지 사관학교 시절에 저를 안 받아들인다 했습니다. 이 문제를 예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며느리는 개똥이가 세자가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며느리가 똑똑해서 그런지 앞일을 제대로 내다보는 일이 많았다. 국가와 왕실을 위해 아주 좋은 능력이었다.
“후궁들을 거느리는 것은 군주의 특권이 아니라 의무다. 군주가 국가와 백성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안됐지만 배우자인 세자빈이나 왕비도 마음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설득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며늘아기 전공이 뭐지?”
“화학이라고 들었습니다. 집에 실험실이 있는데 주말에 가끔 펑 소리가 나면서 불길이 치솟습니다.”
외국인 유학생과 이민 1세대가 배울 수 없는 화학을 사관학교에서 전공했다면 맏며느리의 출신성분이 매우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가족 단위로 조선으로 귀국할 가능성이 적게나마 있는 양반 출신 이민자 자제들도 배울 수 없는 국가기밀에 가까운 학문이 바로 화학이었다. 이민호에게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세자빈이 되면 고산국의 최고 기밀인 무연화약 제조법을 가르쳐주겠다고 꼬드겨 봐. 화학도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 것이다.”
“국가기밀을 접하는 순간 왕실에 확실히 얽매이겠군요.”
“네 작은 어머니가 무연화약을 만드는 일을 관장하고 있잖니? 일이 너무 많아서 며늘아기가 그 일을 조금 일찍 이어받는 게 좋겠다. 대신 국외로 나갈 수 없다.”
“어느 작은 어머니 말씀이신지요?”
“아! 왕실에서도 비밀이었구나. 너한테만 알려줄 테니 비밀로 해라. 혜진이 이모 말이다.”
작은 어머니는 개똥이의 숙모가 아닌 이민호의 후궁을 뜻했다. 이모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인에게는 전혀 다른 가족 호칭이 왕실에서는 동일한 친족에게 사용됐다.
“세상에! 수십 년 동안 요리 개발과 전국의 백화점 운영을 맡으면서 화약도 만드셨습니까? 어쩐지 항상 피곤에 절어 계시는 모습이 보기 안타까웠습니다.”
“왕실 식구들이 그 정도 일은 다 하고 있다. 세자빈 혼자서 그 수많은 일을 감당 못한다. 일하다 보면 후궁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겠지.”
“아바마마! 이제 웬만한 사업체는 왕실 식구가 아니라 공무원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화약 제조 같은 일은 빼고 말씀입니다.”
“고산국과 다른 나라의 과학기술 격차가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하다. 언제든 관두고 외국에 이민갈 수 있는 공무원에게 맡기기 곤란한 분야가 많아. 당분간 왕실 식구들이 떠맡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아시아와 유럽 각국에서는 고산국의 기술을 베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비행기나 기차, 전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아예 포기하고 가장 큰 돈이 되는 옥 도자기를 복제하기 위해 특히 애썼다. 그러나 유럽의 국왕이나 귀족들이 유능한 기술자들을 왕궁에 가둬두고 채찍질로 독촉한다 해서 금방 복제할 만한 기술은 아니었다.
“당분간이라면 어느 정도 기간인지요? 조선이나 명나라에서 금방 따라올까 겁납니다.”
“원래는 300년 정도인데 그 동안 여러 가지 기술을 공개했으니 좀 더 단축시킬 수 있겠지.”
지금까지 이민호가 푼 기술은 원래라면 20세기 초반까지의 기술이었다. 이민호의 전공이라 할 전자기학과 유도무기 체계에 관련된 지식은 책으로 정리해 왕궁 깊은 곳에 숨겨 놓았다. 근대 과학이 발전 중인 유럽에서 어느 정도 따라오겠지만 이민호가 결심만 하면 언제든지 그 격차를 다시 벌릴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렇게 은근슬쩍 해를 넘깁니다.
좀 더 빠르게 진행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