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05화 (854/1,000)

00905  99. 한성 사변  =========================================================================

“요즘 명나라에서 반란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새 황제가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이 좀 살 만한가 봐? 고산국에서 공부했으니 기본은 하겠지.”

“설마요. 그 반대에요.”

주상아 공주가 이민호에게 정보국장을 만나보라고 애원해서 미카를 만났다. 새 황제가 얄미워서 명나라에 대한 관심을 끊었던 이민호가 오랜만에 보고서를 살폈다. 그 사이 미카는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농민이나 상인이나 할 것 없이 직종별 평균 수입이 전체적으로 줄어들었잖아? 이 정도 수입으로 먹고 살 수 있나?”

“예전에는 먹고 살기 어려운 정도였다면 지금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한계 상황이에요. 주인님. 상황과 만력제 때 주로 어느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당연히 먹고 살기 힘든 지역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겠지.”

대답을 해놓고도 자신이 없었다. 이민호가 직접 친정을 하거나 지휘관을 보내 반란을 진압한 곳은 의외로 중국의 전통적인 곡창지대거나 상업이 활성화된 해안 지방이었다. 유일한 예외로 양응룡의 난은 파주를 비롯해 묘족이 다수 거주하는 사천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상식과 반대에요. 절강이나 안휘 등 적당히 부유했던 지역에서 점점 살기 어려워지니까 반란이 일어났던 거여요. 항주와 소주에서 일어난 직공들의 난처럼 말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수시로 굶어죽는 가난한 농촌지역에서는 오히려 반란이 잘 안 일어나요. 아예 고향을 등지고 유민이 되고 말죠.”

“농민들이 희망을 아예 접었다는 건가? 그럼 황제는 뭘 하는 거야?”

“고산국에서 공부한 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어요.”

“응? 그런데 왜?”

“다만 선정을 베푼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서 반란을 일으킬 꿈도 못 꾸게 만들었어요.”

사람들은 생활이 점점 나빠지면 불만을 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을 정도로 한계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기 밥벌이 외의 외부 상황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된다. 외침보다 반란을 두려워하는 군주가 국내의 반란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아주 쉬운 방법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이기도 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잘 살게 만드는 것은 어렵더라도 못 살게 만드는 방법은 아주 쉬웠다. 세금을 쭉쭉 올려 백성들을 한계상황으로 내몰면 된다. 관리들의 부패를 적당히 눈감아주면 더욱 쉬워진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불황에도 버틸 만한 재산이 있는 지배층 중에서도 평생 배운 지식을 갖춘 일부, 즉 양심적 지식인들이 반발한다. 정상적인 군주라면 이들을 힘이 아닌 논리로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백성들을 마냥 도탄에 빠뜨릴 수만은 없게 된다.

“잠깐! 현 황제가 우리 왕도에 있을 때 탐독한 <로마사 논고>는 로마 공화정을 찬양한 책이 아닌가? 거의 외우다시피 하던데.”

“<로마사 논고>의 저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저자이기도 해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긴 하지만 오직 좋은 목적에 한하는데, 책을 감동 깊게 읽은 권력자들은 흔히 그 형용사를 생략해요.”

<군주론>을 읽으면 마키아벨리가 전제군주제 옹호자로 비쳐지고 <로마사 논고>만 읽으면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시대 변화에 맞는 합당한 정치체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말년에는 확실한 공화주의자였다.

“끙! 이해하겠어. 하지만 그럼 향사 층에서 환관이나 탐관오리를 내치라고 상소를 올리지 않나?”

“상류층의 지지기반은 오히려 강화됐어요. 토지 소유 면적에 따라 부과하던 일조편법을 지주가 아닌 소작 농민들이 납부하도록 했거든요. 명나라 지주들의 수입이 늘어 고산국에서 생산하는 사치품의 수출이 크게 늘었어요. 단기간에는 명나라 내수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조만간 한계에 부닥칠 거여요.”

낙수효과 운운하면서 법인세를 감면하는 대신 갖가지 상품에 부과되는 간접세를 올려 세수 부족을 메운 대한민국 정부가 이민호의 뇌리에 떠올랐다. 넘쳐나는 영업이익을 해외에 투자하거나 사내 유보금으로 쌓아두고 국내에 투자하지 않는 기업 환경에서는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논리가 붕괴됐다는 사실을 정책 담당자나 언론 관계자들이 다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변명으로 활용할 뿐이었다.

그러나 현재 명나라에서는 낙수효과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농민들의 수입을 지주에게 이전시켜 가난해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역량을 줄이고 기득권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책 변경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농민 반란의 주체는 부유한 염상이나 지주, 지식인 계층이었다. 배고파서 반란을 일으키려 해도 반란군을 유지하려면 군대처럼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동림당이 양심적 지식인을 표방했어도 지주라는 신분의 한계는 못 벗어나는 것 같아.”

“부자들은 다 그래요.”

자본가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비판한 나치 선전상 괴펠스의 주장은 정당하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배가 부르면 그만 먹는 짐승과 달리 자본가들은 끝없이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낙수효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산층이나 하층민도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탐욕스럽기 마련이었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인간의 탐욕을 바탕으로 돌아가는 경제체제는 유독 자본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역사 그 자체였다.

고산국에서도 기본 소득에 만족해 취업하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농민과 어민 등 자영업자들은 최대한 수입을 많이 얻으려 노력했다. 고산국 정부에서는 남아도는 식량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데도 농민들은 그 비싼 농기계를 구입해서 수확량을 늘리려고 애쓰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명나라 농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굶어죽겠군.”

“그러지는 않겠죠. 조만간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될 거여요.”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

“알아요. 의용공주님도 주인님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계시다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다시 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공주에게 미움 받겠군.”

조금만 생각한다면 다들 아는 것을 이민호는 들킬까 봐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현재 명나라의 사정상, 황제가 바뀌거나 고산국에서 도와줘도 소용이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서 설득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국가든 기업이든 가계든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예외 없이 붕괴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알고 계셨잖아요. 명나라의 정책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기에 공주님도 포기한 것뿐이에요.”

“내가 기억력이 떨어져서 말이야. 미카는 머리 쓰는 게 많이 늘었어. 공부 많이 하나 봐?”

“경력이 쌓이면 자연히 알게 돼요.”

“덕택에 내가 많이 편해졌다. 그래서 우리가 명나라를 도와줄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황제는 꼴도 보기 싫지만 말이야.”

명나라가 어서 망하길 바라면서도 식량 지원을 해주는 것은 인도적인 목적이 전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명나라가 망할 때 그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기회를 활용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어찌 보면 현대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면서 고민하는 장면과 비슷했다. 북한이 가급적 빨리 자체 붕괴하길 바라고, 굶주린 주민들이 북한 정권을 뒤집어엎을 봉기를 일으키길 기대하므로 인도적인 식량 지원에 나서라는 유엔의 권유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들이 곤란할 때 대한민국에서 식량을 지원해주지 않거나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을 북한 주민들이 들먹이면 난감해진다. 어려울 때 식량과 유류를 지원해준 형제국 중국에게 유사시 북한 땅을 넘기겠다고 북한 주민들이 악다구니를 쓸 경우 참으로 곤란해진다.

“해가 갈수록 세곡으로 받은 곡식이 어마어마하게 쌓이고 있어요. 특히 북미와 호주는 더욱 심해서 수확한지 3년도 2년도 아닌 1년 반을 넘긴 곡식을 주정으로 변환하거나 가축 사료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 명나라 황제를 설득해서 식량을 지원해주되 곡가가 지나치게 낮아지지 않도록 물량을 조절해야 할 거야.”

지원해준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바로 그 문제가 걸렸다. 명나라 정부에게 주려면 무상으로 지원해도 되지만 저가에 민간에 판매할 경우 자칫 명나라의 농업기반이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기후 변화가 심해지는 이때 곡가가 낮아져 농지를 줄이면 명나라에 대기근이 발생할 수 있었다. 명나라 전체적으로 보면 식량이 부족하지 않은데도 유통망이 마비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은 사례를 복건성 등에서 숱하게 볼 수 있었다.

“공주님이 기뻐하실 거여요. 이미 왕 귀인이 준비 중이에요.”

“이왕이면 주상아 공주 이름으로 지원하도록 해.”

“주인님!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에요. 그럼 공주님과 주인님의 공동 명의로 지원할 게요.”

“쳇! 그렇게 해.”

잉여 식량을 명나라 조정에 무상 지원하는 문제는 그리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백성들을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딴 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황제의 생각에 정면으로 배치됐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동림당 소속 관료들과 후궁들이 황제를 설득해서 일단 식량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변경지대의 군량미로 엄청난 양을 비축하고 수만에 이르는 황족의 세미나 관가의 비용으로 사용하고도 남는 식량은 창고에 쌓아두어 일부러 썩히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굶주린 농민들이 분노했으나 관병들이 수시로 무력시위를 하는 바람에 반란은 꿈도 못 꿨다.

4월 11일은 평범한 하루였다. 국무회의에서 각종 경기협회들의 상위 조직인 경기연맹을 구성하는 문제로 약간 골치가 아팠을 뿐이었다.

구기와 격투기, 빙상, 설상, 수상, 육상 경기연맹은 비교적 쉽게 구성했다. 입장료와 광고 수익, 정부 및 기업 후원금을 배분하는 문제와 경기 종류에 따라 어느 정도 도박을 허용할지 여부도 결정했다. 지방마다 경기장 건설 투자를 마친 지금은 직업적인 선수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마협회와 자동차경주협회, 귀뚜라미 경주도박협회를 한 연맹으로 엮기 어려워 경주 연맹은 일단 창설을 보류했다. 그리고 각종 경기연맹에 등록할 경기는 반드시 사람이 선수여야 한다는 규정을 추가하기로 했다. 투견은 예전부터 불법이었고 사람과 소가 아니라 소끼리 싸우는 투우도 정식 경기종목에서 배제됐다.

“연맹 소속 선수나 관계자들이 운영하는 조직인데 이번처럼 운영위원들을 정부에서 지명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야. 경기연맹이 정치적으로 독립돼 있으면서도 연맹 위원들의 비리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방법이 없을까?”

이민호는 빙상연맹이나 수영연맹, 축구협회 등이 자행한 온갖 뻘짓과 운동단체가 정치에 종속됐을 때 생기는 문제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쉽사리 판단하지 못하고 있을 때 개똥이가 제안했다.

“유럽의 신분제 삼부회처럼 심판, 지도자, 선수들이 각자 대표 몇 명씩을 뽑게 해서 협회와 연맹의 운영을 맡기면 어떻겠습니까? 장기적으로 입헌 민주주의에 대한 연습도 되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총리 직속 감사원이 정부기관들처럼 연맹들을 감사하고 연맹이 산하 협회들을 감독하면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오호! 좋은데? 위원이 임기 중에 뻘짓할 것에 대비해서 소환제를 끼워 넣자. 그런데 개똥이 너는 민주주의를 싫어하지 않았나?”

“로마사에서 본 것처럼 중우정치가 될 가능성 때문에 싫습니다만, 명나라처럼 폭군이나 암군이 연달아 즉위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민주정이 잘못 되면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니까 그나마 덜 억울하겠지요.”

“어휴! 반면교사가 바로 옆 나라에 있구나.”

이때 문이 살짝 열리고, 문 옆에 서 있던 남자 호위가 쪽지를 받아 이민호에게 정중히 바쳤다. 읽어 보니 조선 한성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이반이란 자가 역모를 고변했는데 고위 관료들이 믿지 않는다고?”

조선에도 러시아처럼 이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다. 미카가 인명록을 찾아 이이반이 왕실 종친이라고 보고했다.

원래 역사에서 인조반정이 벌어지기 전에 주요 반정 참가 인사들이 의심을 받아 외직을 수행했었다. 광해 임금도 나름대로 대비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산국 정보국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전혀 역모의 낌새를 차리지 못했다. 실제 역사와 달리 비밀 유지를 위해 역모 참가자들이 극히 소수에 국한됐다는 뜻이었다.

“서인들이 포섭할 만한 왕자들을 죄다 고산국에서 강제로 공부시키고 있는데도 누군가를 왕으로 추대했나 보군.”

“권력의 불나방이 된 자들은 누가 왕이 되든 상관없을 것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도련님.”

대원수 계복이 벌떡 일어나 이민호를 재촉했다. 역사상 인조반정인 이번 역모를 접하면서 고산국 국왕인 이민호가 서두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공주 지은이 그리는 만화, 아니 지은 공주와 외손자가 혹시나 잘못 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개통 이력이 있는 공기계를 사서 간신히 휴대폰을 개통했습니다. 주파수를 빌미로 법을 쌈싸먹는 통신사들의 횡포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샀던 휴대폰을 반품하는데 서류가 필요하다고 내일 또 오라네요.

이번 주말에 이사를 가야합니다. 하는데까지 해보겠지만 이번주에는 연재를 충실히 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미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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