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30화 (879/1,000)

00930  101. 1624년  =========================================================================

“일자리가 어째서 중요한지 세자는 잘 알고 있겠지?”

“예, 아바마마. 백성 개개인에게 직업은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의 방편이며, 국가 입장에서 적정한 일자리 숫자는 국가경제 선순환을 위한 첫 번째 고리이옵니다.”

굳이 노동과 직업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맹자와 순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일자리의 질과 숫자, 적정한 경제적 보상 유무가 국가 차원의 관심사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모름지기 직업이라면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보다는 한 개인에게 자아실현의 방편이 되는 편이 훨씬 바람직했다.

현대 미국이 금융정책 중에서 핵심인 이자율을 결정할 때 두 가지 지표를 최우선적으로 참고한다. 일자리 수 변동과 부동산 가격 등락이 바로 그것이며, 이 두 가지가 다른 여러 가지 지표들을 대표하는 경제의 알파이며 오메가였다. 그러나 왕토사상을 내세운 고산국에서는 소수 별장 외에 부동산 투자가 불가능하므로 부동산 경기는 큰 의미가 없는 지표였다.

“세자가 잘 대답해주었다. 백성들이 직업을 가져야 소비를 많이 하고, 그럼으로써 전체 경제를 발전시키지. 대신들은 들으시오! 대신들이 좋은 의견을 제시해주면 좋겠지만, 국가의 발전 방향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이니 만큼 국왕인 내 의견을 먼저 밝혀야겠소.”

고산국은 건국 초기부터 내내 심각한 인구 부족에 시달렸다. 새로 획득한 영토도 시베리아와 호주, 북미 등 죄다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라 인구 증가와 이민 유입을 중요한 국정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인력을 절약하기 위해 국가적 노력을 기울였고, 도로와 저수지를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건설과 함께 농기계와 각종 건설 장비 제작을 위해 노력했다. 결국 고산국 농부는 농기계를 이용해 다른 나라 농부 100명의 역할을 감당했다.

현재 고산국은 인구와 경제규모가 성장 일로에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일자리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영토가 크게 확장된 현재, 새 영토를 개발하는 것만으로도 노동력 수요가 큰 편이었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기온 하강에 대비해 잉여 농산물을 넘치도록 비축하고 있기에 특별한 기술이 없는 자라면 요즘에도 여전히 인기 직종인 농민을 해도 괜찮았다. 물론 고산국의 농민은 고소득 직종인 동시에 농기계 조작 등 여러 가지를 많이 알아야 하는 전문 직업군이었다.

그런데 최근 사회에 진출한 젊은이들이 교사와 공무원, 공기업 직원 등 비교적 편하고 안정적인 양질의 직장을 얻을 가능성이 줄어든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마치 학창시절 내내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도 졸업 이후 마음에 드는 직장을 얻기 어려운 21세기 한국 청년들의 현실과 조금 비슷했다.

그리고 고산국 청년들에게도 힘든 육체노동을 기피하는 풍조가 분명히 있었다. 현대 호주에서 20대 중반에 연봉이 1억 원 이상이더라도 광부를 하지 않으려 하니 유독 고산국 청년들만 배가 불렀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현대 유럽의 경우에도 교사나 공무원보다는 광부 등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의 수입이 높았다.

“제도를 당장 바꾸지 않더라도 인구가 늘면서 앞으로도 경제가 꾸준히 성장할 것이오. 단,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체제 안정을 위해서는 소비 주체가 가난하지 않아야 한다오. 만약 일자리가 줄어들면 실업자뿐만 아니라 직업을 가진 자의 실질 임금도 줄어들 우려가 있소.”

혜영과 세자를 비롯해 대신들이 이민호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사관들이 타자기 치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IMF 사태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겪은 이민호는 후기 산업사회의 저성장 현상이나 일시적인 마이너스 경제성장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국가 경제가 꾸준히 성장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계속 가난해지면, 즉 구매력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면 그 끝에 경제 공황이 온다. 이것은 당장 대부분 사람들에게 불행일 뿐만 아니라 기존 체제의 존속 여부를 의심케 만든다. 통치자라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일이었다. 일자리가 부족해지면서 전체적인 임금 수준이 하락할 것을 걱정한 이민호는 정책의 목표가 단순한 일자리 증가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알다시피 기본 소득은 백성들이 직업이 없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되 풍족한 소비를 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수준으로 꾸준히 조정해 왔소. 이런 제도 하에서는 가족 중에 누군가는 싫든 좋든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의 대가인 임금이 상품 구매력이 된다오.”

“노동자는 소비자를 겸하므로 노동자의 임금 수준이 높아지는 쪽이 전체 국가경제 성장에 유리하겠군요.”

“그렇다, 세자여. 화폐금융 정책을 조정하는 것보다는 임금 인상에 기반을 둔 경제성장이 훨씬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다.”

이것은 이민호의 개인 경험에서 비롯된 생각이지만 현대 국제경제에서 이론적인 기반이 있는 주장이었다. 임금 등 가계소득을 올려서 경제성장을 달성하려는 소득주도 성장론은 2008년 국제 금융 위기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그 전에 재정긴축과 감세 등을 내세운 신자유주의 정책이나, 금융위기 이후 여러 나라 정부에서 추진한 금리 인하와 양적 완화 정책이 경제회복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으로 평가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 ILO가 2012년에 발표한 임금주도 성장론 보고서가 국제 경제학계의 주목을 받은 이후, 2014년 9월에는 OECD와 세계은행, ILO가 공동으로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과 일본, 독일 등 선진국 정부들이 비슷한 시기에 차례로 최저임금을 인상한 것도 소득주도 성장론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오나 전하!”

“알고 있소, 총리.”

혜영이 한숨을 내쉬는 것은 평균 임금을 올릴 경우 현재 금 보유량만으로는 화폐유통량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 보유량이 고산국의 경제성장을 꾸준히 제한하고 있었지만 인플레이션 발생을 억제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면도 있었다.

고산국의 기준 통화인 10원에 함유된 순금이 거의 10그램인 반면 1원에는 순금이 액면가 가치의 10분의 1인 겨우 0.1그램만 함유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화폐 사용자들은 1원의 가치를 액면가 그대로 인정했다. 10원의 존재로 인한 착각에 더해 주전권을 가진 고산국 왕실에 대한 신뢰 덕택에 이런 현상의 지속이 가능했다.

영국 같으면 1파운드에 해당하는 페니의 양이 시대에 따라 변동했다. 명나라의 경우 금속의 무게로 돈의 가치가 달라지기에 정부가 주전권을 가질 필요가 없는 대신 구리돈이나 철전의 가치가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반면에 고산국에서는 1원 이하 액면가 주화들의 가치가 100분의 1 단위로 명시돼 있기에 상대적 통화가치가 하락하는 법이 없었다. 미국에서 센트가 달러의 100분의 1 가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는 고액권인 10원보다는, 그리고 귀금속 주화의 형태를 유지하는 1원보다는 그 이하 가치의 주화들이 더 많이 통용됐다. 금화에 함유된 순금의 양과 고산국 왕실이 보유한 금의 양을 더한 액수보다 훨씬 많은 돈이 시장에 유통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시 화폐 수량의 부족 현상, 즉 금 보유량의 한계가 잊을 만할 때마다 찾아온다는 것이 여전히 문제로 남았다.

“세자에게 이어서 말하겠다. 노동자와 반대로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들은 임금이 낮을수록 기업 경영에 유리할 것이다. 노동자는 아국의 백성이고 기업가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양쪽의 이익 충돌을 조정하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다.”

“전하! 노동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아국 정부는 관료들을 고용한 기업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 철도와 전력회사 등 다양한 국영사업체를 운영하므로 정부가 국내에서 가장 큰 기업이며 가장 큰 고용주입니다.”

“그렇소, 호판.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소. 현재보다 고용을 늘리고 임금을 올리면 당연히 화폐가 부족할 것이오. 그러나 금 보유량이 적어 더 이상 금화를 발행할 수가 없소.”

“안타깝게도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호조에서 50원 이상 고액권으로 금화가 아닌 지폐를 발행하는 문제를 연구해보시오.”

“허억!”

회의 참석자들이 경악해서 잠시 말을 잃었다. 호조판서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이민호에게 진언했다.

“전하! 지폐 도입은 언젠가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시기상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내재가치가 적은 지폐는 시장에서 통용되지 않을 것이며, 국가에서 통용을 강제할 경우 물가가 폭등할 가능성이 큽니다. 원나라가 망한 이유입니다.”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지 않소? 고액권 지폐는 주로 기업 간 고액 거래, 또는 정부 간 거래에서 이용할 것이오. 외국과의 무역에서 사용하지 않을 테고, 지폐 사용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오.”

지폐 발행 처음 단계부터 금 태환권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금 추세로 경기가 확장한다면 조만간 국가의 금 보유량으로 화폐 유통량을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금 50그램에 해당하는 50원부터 실질적인 신용화폐가 되는 셈이었다.

실제 근현대 역사에서 미국과 유럽 국가 혹은 중앙은행, 또는 민간은행들이 지폐에 금 태환 권리를 부여했으나 발권기관의 금 보유량보다 화폐 발행량이 몇 배나 많았다. 태환권을 금으로 교환해서 지급할 능력이 없는 정부나 은행이 국민과 외국의 자국 화폐 보유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꼴이었다.

“제한적인 용도라면 지폐 유통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충분한 연구를 거친 다음 보고하겠습니다.”

이로써 일자리 증가와 임금 상승을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가 끝났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전제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농업이 기계화된 아국은 갈수록 농업인구 비중이 줄어들 것이오. 광공업은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하겠지만 인구증가율보다 생산성 향상이 더 빠르게 진행되므로 언젠가 고용이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소. 지금도 여러 기업에서 자동화 공정을 개발 중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생산 공장이 분업화, 기계화되면서 인력 수요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동화 기계를 때려 부술 수는 없지 않겠소? 기본적인 농수산업과 공업, 건설업을 빼면 결국 나머지 일자리는 유통이나 판매, 금융 쪽에서 만들 수밖에 없소.”

“3차 산업에서 그 많은 고용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 각국의 분야별 GDP 구성비를 살펴보면 사우디아라비아, 알제리, 앙골라 등은 공업국가로 분류되고, 선진국들은 죄다 서비스 산업이 강세다. 농업인구가 많은 개발도상국이더라도 1차 산업의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적고, 고도산업화 사회에서는 3차 산업의 비중이 가장 크다는 뜻이다.

국가 경제규모가 충분히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출주도형 산업구조를 유지하는 현대 한국 같은 예외도 있지만, 어느 나라든 국내 경제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일본의 경우 전형적인 내수 위주의 산업구조이며, 석유와 희토류 같은 일부 원자재를 수입할 외환을 약간의 무역흑자를 통해 확보하면 충분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어떤 이는 안정적인 내수를 위해 인구가 1억이 넘어야 한다고 하지만 근거가 없는 주장이었다. 캐나다, 호주, 스페인 등 한국보다 인구가 적으면서도 한국보다 더 큰 내수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내수경제 규모가 한국보다 2.5배 이상인 영국, 독일, 프랑스도 인구 1억에 한참 못 미친다. 이런 국가들에서 내수경제의 대부분은 교과서 삽화에 나오는 농장이나 공장이 아니라 3차 산업이 차지한다.

“아바마마 말씀대로 백성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어차피 자영업으로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오나 기존 업체에 비해 자본과 경험이 적을 테니 경쟁이 심화될수록 청년 자영업자들의 파산 가능성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3차 산업에 종사한다 해서 반드시 자영업자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영업자에게 고용되어 일 할 수도 있으니까. 피고용인의 비중은 고용주의 열 배 정도가 좋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남을 부리는 고용주가 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능력만 있다면 고용주가 좋겠지. 성공한다면 큰 과실을 맛 볼 수 있겠지만 실패할 경우 경제적 책임 대부분을 고용주가 져야 할 것이다.”

피고용인이라 해서 최저 임금도 못 받는 편의점 알바를 연상할 필요는 없었다. 대규모 로펌에 소속된 판검사 출신 변호사나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도 3차 산업의 피고용인이었다.

“그리고 총리! 앞으로 고용 확장을 위해 도시계획의 효율성을 저하시키겠소.”

“휴우! 그렇게 하세요, 전하. 그렇지 않아도 인구의 과도한 도시 집중이 문제가 되고 있으니까요.”

3차 산업 육성을 논하다가 뜬금없이 도시계획 이야기를 꺼내자 역시나 혜영이 단번에 알아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참석자들에게 이민호가 간단히 설명했다.

“지금까지 대규모 거점 도시 중심으로 도시 건설을 제한했다면, 앞으로는 소규모 도시를 많이 세울 것이오.”

“전하! 그렇게 되면... 아! 같은 인구라도 분산할 경우에 공무원과 교사, 경찰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해질 것 같습니다.”

서울의 동 한두 개 인구가 농촌지역 군 인구와 맞먹는다. 그러나 주민자체센터와 군청의 규모는 몇 배나 차이 난다.

일반적으로 인구가 밀집할수록 행정효율이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그 반대를 지향하기로 했다. 새로 편입된 영토를 충분히 개발할 때까지는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도 이 결정에 크게 작용했다.

“공공분야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오. 반면에 민간분야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일자리가 생길 것이오.”

“젊은이들은 도시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만, 인구를 분산한다면 내륙 개발이 가속화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대도시가 살기 편하겠지만, 대도시 공장에서 원치 않는 단순 노동을 하는 것보다는 소도시에서 원하던 직장을 구해 이주할 가능성이 높았다. 일개 행정단위가 독자적인 경제구조를 갖추려면 필요한 일자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일자리만을 위한 인구 분산이 아니오. 북미나 호주처럼 지금까지 해안에 위치한 몇몇 대도시를 중심으로 광대한 지역을 개발했다면, 이제부터는 행정구역을 나눠서 본격적인 내륙 개발을 시작할 것이오. 본토든 북미든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숫자의 도시를 건설하면 될 것이오.”

교통의 요지나 상업도시, 군사도시 등을 제외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도시 발전의 과정은 군청소재지, 즉 군의 행정 중심지인 읍이 도시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군과 읍에서 발전한 시가 경쟁하다가 다시 통합되기도 한다.

“그 동안 도로와 철도 외의 대규모 토목사업은 가급적 뒤로 미뤄두었소. 해안지방 개발이 어느 정도 완성됐으니 이제부터 내륙지방 개발을 시작합시다. 그 과정에서 일자리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오.”

이민호는 19세기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이나 고 웨스트, 포티 나인(49) 등을 떠올렸다. 현대 국가 같으면 일자리를 늘리는 방법으로 꿈도 못 꿀 일이었고 신도시 개발도 기껏 베드타운 건설에 그쳤다. 하지만 북미와 호주를 비롯해 유휴지가 많은 고산국에서는 선택지에 여유가 넘쳤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올립니다. ㅠ.ㅜ 일도 많고 탈도 많았네요.

연재 중단하고 도망가거나 완성 전에 다른 글을 쓸 일은 없을 겁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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