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31 101. 1624년 =========================================================================
회의가 끝나고 이민호와 혜영, 세자 개똥이와 세자빈, 그리고 정보국장 미카가 따로 모였다. 공적인 회의석상에서 논의하기 어려운 일은 이렇게 왕실 가족회의를 통해 공감하거나 결정했다.
한 가족이 권력의 핵심이랄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이민호 혼자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업무가 분산된 덕택에 국왕인 이민호가 과로나 독단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앞으로 세자와 세자빈이 할 일이 많다. 호조를 지휘해서 지폐를 만들고 공조에서 진행하는 새 도시 건설계획을 감독해라.”
“예, 아바마마. 하온데 지폐는 위조하기 어렵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만, 요즘에는 웬만한 동네 인쇄소에서도 정밀 인쇄를 할 수 있습니다. 지폐 위조를 막을 좋은 방법이 당장 떠오르지 않습니다.”
세자가 걱정스런 표정인데도 이민호와 혜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세자는 문제가 생긴 이후에 허둥지둥 대응하는 타입이 아니라 정책을 실시하기 전에 문제점이나 애로사항을 예상해 미리 대처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유독 세자만 날 때부터 행정가가 아니라 고산국에서는 일반 학생들도 이렇게 교육을 받았다.
말로는 원칙을 지키기 쉽지만, 현대 국가에서도 실제 정책 결정이나 집행 과정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탁상행정이나 윗사람의 밀어붙이기식 정책 집행 과정이 흔히 이루어진다. 고산국도 이상향이 아닌 만큼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실수가 많았지만 잘못된 점을 파악했을 때 일찍 교정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들과 달랐다.
“50원이면 매우 큰돈이니 제작비를 좀 더 들일만하다. 지폐는 기본적으로 인쇄를 해야겠지만, 반드시 인쇄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지폐라고 칭하지만 종이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도 필히 벗어나야 한다.”
“아! 종이가 아닌 더 좋은 소재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폐의 주재료와 전혀 다른 것을 지폐에 붙일 수도 있겠습니다.”
현대 국가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지폐는 종이가 아니라 면과 아마를 섞어서 만들어진다. 특히 달러화는 면 75퍼센트, 실크가 혼합된 아마 25퍼센트로 제작한다. 제작비는 소재 가격 변동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략 10센트 이하다.
“그렇지. 지폐 일부를 반투명하게 해서 불빛에 비쳐보면 숨어있는 그림이 나오게 하거나, 작은 자석을 두 군데에 붙여서 계수기를 통해 자동으로 위폐를 감별하는 방법을 연구하도록 해봐라.”
“아바마마의 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녀석! 영혼 없는 표정으로 뻔한 아부하지 말고.”
지폐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복제하기 어렵도록 복잡한 도안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위조를 어렵게 만드는 여러 가지 장치를 가하더라도 50원 지폐 제작비는 1원의 100분의 1에 불과한 1전 정도 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돈뭉치를 물에 적시면 약간씩 훼손돼야 하고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바스러져야 한다. 물론 지폐는 당연히 불에 타야 한다. 지폐가 종이로 만들었다고 사람들이 착각하도록 겉면에 글씨가 잘 써져야 할 것이다. 세자빈은 그 이유를 알겠느냐?”
“말씀을 듣고 무척 당혹스럽습니다만, 아바마마께서 하명하시니 다른 방향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백성들이나 외국에서는 지전이나 지폐를 이름 그대로 종이로 만든 돈이라고 생각할 테니 그런 성질을 갖는 게 당연합니다. 물에 잠기거나 땅이나 벽 속에 파묻힌 지폐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져야 하고,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지폐도 정부에서 지속적인 통제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세자빈이다.”
과학이 발달한 21세기에도 세계 모든 나라의 지폐는 찢기고 불에 타고 물에 불리면 점차 원형을 잃는다. 미국의 연방 인쇄국이나 기타 국가들의 조폐국은 절대로 방수 성능이 뛰어난 재질을 사용하지 않고, 내화잉크로 지폐를 인쇄하지도 않는다.
현대 미국 지폐는 액면가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6개월에서 89개월의 수명을 갖는다. 브라질 10헤알, 미국 20달러, 영국 20파운드, 스위스 20프랑 등 주요국 대표 화폐들의 수명은 대략 24개월로 일치한다. 한국 지폐의 유통수명은 천원권은 40개월, 만원권은 100개월로 예전에 비해 꽤 늘어났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지폐를 강화 플라스틱이나 얇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지 않는다. 지폐가 유통 중에 훼손, 혹은 소실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예외적으로 호주를 비롯해 몇몇 나라에서는 폴리머 재질로 일명 플라스틱 지폐를 제조한다.
그러므로 선진국들이 한국에 비해 지폐 제작 능력이 부족해서 유통수명을 100개월로 늘리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리고 지폐의 유통수명이 짧은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매년 지폐 제작비가 꾸준히 들고 훼손된 지폐를 교환하는 비용이 들더라도 어쩔 수 없다. 언젠가 정밀한 위조지폐가 만들어져 유통될 경우에 대비해 여차 하면 지폐 도안을 바꿔서 발행할 수 있어야 한다.”
“형법을 개정해 위조지폐를 제작하거나 알고도 사용한 자에게 중형을 내려야 합니다.”
“그렇다, 세자. 어떻게 보면 지폐는 앞으로 국가의 약한 고리로 작용할 수도 있다. 세자를 비롯해 후대 국왕들이 반드시 화폐발행권을 장악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위조지폐에 대해서는 국력을 기울여 제작과 유통을 막아야 할 것이다.”
수표와 어음을 사용하지 않는 고산국에서 고액권 지폐는 정부 부처간, 혹은 기업간 거래에서 유용한 거래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민간에도 고액권 지폐가 흘러들어가겠지만 유통수명을 짧게 만들어 적당한 기간 내에 중앙은행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참고로 미국에서 1934년에 발행된 10만 달러짜리 지폐는 주로 은행간 거래에 사용됐다.
“미카! 정보국에서 할 일이 늘었다.”
“예, 주인님. 위조지폐 수사를 담당할 부서를 비밀리에 창설하고 위폐 제작이 가능한 기술자들의 동정을 정기적으로 살피겠습니다. 그러나 중앙은행이나 호조에 이 업무를 공개적으로 담당할 부서를 따로 만들어주십시오.”
정밀인쇄 기술을 가진 장인이 장기간 실종 중이거나 납치됐다면 위조지폐 제작에 연루되거나 강제로 제작에 참가한 것으로 봐도 좋았다. 이 경우 경찰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수사능력을 동원해 초기에 위폐범 조직을 검거해야 한다.
“음. 그게 좋겠어. 호조에 공개적인 조직을 만들 테니 인원을 비롯해 정보국에서 업무를 통제하라. 그래도 국외 수사권은 정보국에 있으니까, 외국 정부 혹은 민간에서 아국 위조지폐를 제작할 경우 즉시 대응하도록 해. 위폐 사범은 국가반역죄에 준한다. 외교적인 갈등이 문제가 아니야.”
“어명을 받드옵니다.”
이민호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전쟁도 감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카와 혜영, 세자 부부가 이민호의 결심을 눈치 채고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국고에 금이 충분했다면 지폐를 발행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조와 협의하면서 세자가 반드시 명심할 게 있다.”
“하명해주소서, 아바마마.”
“새 도시에 주민을 이주시킬 때 조선의 사민(徙民) 정책처럼 강제로 옮기면 안 된다. 일자리나 사업적 이익 등 뭔가 유인이 있어야 한다.”
고산국에서 거주이전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보다는 훨씬 이주가 자유로웠다. 만약 새 도시가 자립 능력을 갖지 못한다면 짧은 시간에 유령도시로 전락할 우려가 있었다.
“물론입니다, 아바마마. 그래서 교통 여건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도시의 입지를 파악해 저마다 상업도시, 교육도시 등 도시의 고유 기능을 갖추도록 역할을 분배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이다. 의식주에서 전국 어디서나 의식은 비슷하니 특히 주거생활의 편리함을 강조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요즘 승강기가 많이 보급됐는데 공동주택의 층수 제한을 기존의 5층에서 10층이나 12층으로 풀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개인주택의 면적도 넓혀주고 말이야.”
“그게 좋겠습니다. 그 동안 공동주택의 저층은 도난이나 홍수에 대비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옥상이 아니라 저층을 거주민들의 공유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고층 건물이 12층으로 제한됐던 것은 흔히 서양 사람들이 13이라는 숫자를 싫어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순수 벽돌로 지은 건물이 경험상 붕괴하지 않는 최고층이 12층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산국에서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 더 고층 건물을 지을 수도 있지만 효율이 낮아 그 이상 높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건물 관련 정책을 변경할 때는 항상 화재나 건물 붕괴 등 사고에 대비해야 했다.
“대충 방 서너 개, 거실 같은 공동 생활공간을 널찍이.”
“방이 네 개라면 식구가 많을 테니 욕실이 두 개면 좋겠사옵니다, 아바마마.”
“세자빈의 말이 옳다. 그럼 욕실 하나는 큰 방 안에 배치하도록 하지.”
12층짜리 공동주택의 내부 구조는 한국의 중대형 아파트를 많이 참조했다. 그리고 지하 1층을 주차장으로, 지상 1층은 갖가지 가게와 사무실, 2층은 수영장 등 건강관리 시설을 들이기로 했다.
다섯 사람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논의했다. 이민호는 한국에 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혜영과 세자 부부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호조와 공조에 관련된 일이 많다. 세자가 이 부서들을 직접 움직여야 할 것이다.”
“어명을 내세우면 문제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들이 내가 아닌 세자의 생각인 것처럼 주도하도록 해라. 실무부서에서 반발이 있더라도 세자가 직접 설득해나가도록. 그럼 나중에 즉위한 다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 유일하게 부러운 것이 군신 간에 서로 설득하는 과정이다. 아국 조정에서는 신료들이 내 의견에 반대할 생각을 아예 못해서 문제다.”
“아바마마의 말씀이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당연합니다. 그리고 지폐 제작이든 새 도시 건설이든 매우 합리적인 정책이라 관료들을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나 제가 아바마마의 고견을 훔치는 것 같아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물론 후임자의 역량을 미리 키워주고 평가도 올려주는 것이 전임자의 책임이기도 했지만, 이민호는 더욱 크고 길게 봤다.
“고산국은 신생국이다. 태조 다음에 세종이나 성종이 가급적 빨리 나타나는 것이 국가적으로 좋다. 나라를 세우느라 내가 손에 피를 많이 묻혔다면 너는 문화적 업적을 더욱 많이 세워야 할 것이다. 재위 중에 인구가 많이 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깨가 무겁습니다.”
이민호가 미카와 눈을 마주쳤다. 일자리 마련을 위해 새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면서 수도 이전 문제가 본격적인 현안으로 떠올랐기에 미카가 즉시 대답했다.
“에스파냐에 준 빚이 작년에 비해 6천만 원이 늘어나 현재 약 5억 원이 있습니다. 에스파냐 국왕은 멕시코 매매계약 조건으로 모든 채무를 탕감하는 동시에 2억 원, 금 200톤을 더 받기를 원합니다. 물론 멕시코 은광 채굴권은 30년 기한을 잡으려 합니다. 협상단이 이틀 전에 마드리드에서 출발했습니다.”
“매도 호가가 많이 내려왔구먼. 땅 매매는 매도자 시장이지만 멕시코 땅이라면 매수 희망자가 전 세계를 통틀어 나 하나밖에 없지.”
“예. 그럼 올해에도 영토 매매협상을 결렬시키겠습니다.”
새 왕도의 위치를 북미 남부로 대략 정해놓고도 이민호는 여전히 여유를 부렸다.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에스파냐가 다시 국가 파산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핑계였고, 전쟁이 없었더라도 국왕과 총신들의 사치 때문에 에스파냐는 국가파산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경제와 양경제가 흔한 이 시대에, 특히 5소경제와 삼경제를 시행했던 한민족의 후예로서 수도의 숫자와 역할은 그리 중요한 의미가 없었다. 물론 중앙정부에 속한 관료들은 전 가족이 새로운 왕도로 이주해야 하는 문제를 안게 되겠지만, 백성들은 왕도 이전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안감이 적었다.
“아무리 유럽에서 국가와 영토가 국왕의 사유물이라지만 한도가 있는 법이야. 영토를 판다고 에스파냐 내부에서 반발은 없어?”
“특히 멕시코와 관련된 사업을 하는 고위 귀족들의 반발이 심합니다. 멕시코에 거주하는 에스파냐 하급 귀족들과 주민들은 해외에서 출생한 자식들의 신분하락 문제 때문에 오히려 영토 매매를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매매협상이 좀 더 길어지면 멕시코나 쿠바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이 조만간 매입해야겠군. 그런데 미카! 말투가 딱딱해.”
이민호가 일부러 지적하자 미카가 잠시 당황했다. 세자빈이 왕실회의에 참가하고부터 미카가 말투를 조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인님. 멕시코와 쿠바를 비롯한 중미 영토 매매대금의 적정선을 제시해주세요. 협상에 나설 예조 관료들에게 통보할게요.”
“채무는 2억 원 이상 남겨놔. 대신 멕시코의 값을 좀 더 쳐주든지. 그리고 베네수엘라 동쪽에 내주기로 한 땅도 협상에서 분명히 언급해.”
“에스파냐 국왕과 총신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거여요.”
“현금이 아니라 빚이 자기들의 목줄을 쥐는 줄도 모르고 좋아하겠지. 불쌍한 펠리페.”
에스파냐에 국가채무를 지우는 것은 고산국에 큰 힘이 될 수 있기에 현금보다 오히려 더 중요했다. 에스파냐가 우선권을 갖고 있던 북미와 남미에 이어 조만간 중미까지 이민호의 손아귀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주인님은 이미 세계 최고의 땅 부자세요. 제발 그만 사세요.”
“일단 국경선을 줄이기 위해 딱 멕시코까지만 사고 끝낼게.”
에스파냐에 부채를 남겨두면 이탈리아 반도의 에스파냐 영토를 살 기회가 생기겠지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혜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딱 한 잔만 더하겠다는 술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어요.”
“사실 나도 좀 두려워. 후대에 세계 정복을 하겠다는 미친놈들이 분명히 나올 거야.”
“나중에는 그게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어요.”
“나도 몰라. 그때 가면 다들 알아서 하겠지.”
지금은 곤란하더라도 세월이 좀 더 흐르면 고산국이 세계 정복을 할 힘을 갖고도 남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로 인류 전체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것에 이민호는 반대했고, 후대 국왕들이 볼 수 있도록 유지로 남겨 두었다. 유지가 먼 후대까지 지켜질지 알 수 없었다.
“회의 끝!”
중요한 문제가 아직 많이 남았지만 웬만하면 총리와 대신들이 합의해서 결정하도록 미뤘다. 국가지도자의 역할은 국가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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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스토리 진행속도를 올리고 싶지만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