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44 102. 30년 전쟁 =========================================================================
“전하! 대명 요천순덕지성지신(尭天舜徳至聖至神), 흠차총독 동창관기판사 장석신사 내부공용고 상선감인무 사례감병필 총독남해자 제독보화등전 완오 위공(欽差總督東廠官旗辦事掌惜薪司內府供用庫尙膳監印務司禮監秉筆總督南海子提督保和等殿完吾魏公)께서 입시이옵니다!”
“어마어마한 관명이군. 근데 그게 누구야?”
예정되지 않은 알현 신청에 이민호가 묻자 비서관이 대답했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이 들어간 칭호인데 주인공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명나라 환관 위충현입니다.”
“아! 사례감병필이라 했지. 들라 하라.”
음력 정월 초하루를 며칠 앞두고 명나라의 권신 위충현이 왕도를 방문했다. 고북과 북경의 거리를 감안하면 오가는 데 반년 이상 걸렸겠지만 이제는 명나라 환관이나 관료들이 고산국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해 아주 쉽게 왕복했다.
명나라 환관들이 왕도에 수시로 들락거리며 고산국 물건을 대량으로 사 가면서, 혹시나 경쟁이 될까봐 고산국과 명나라 사이의 공무역과 사무역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충현이 전혀 다른 문제로 방문했다.
“버러지 충현이 감히 고산국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국왕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요즘 듣자 하니 너는 구천 구백세라며? 네 놈이 나보다 높아?”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국내용입니다, 국내용.”
위충현은 당금 황제 천계제가 황손으로서 고산국 왕도에 머물렀을 때부터 모셔서 이민호도 자주 봤었다. 그리고 위충현이 명나라에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자라 해도, 정당성이 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환관에게 존대를 해줄 이유가 없었다. 둘만 있을 때는 황제에게도 말을 낮췄던 이민호였다.
그러나 위충현은 대명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환관들의 수장이었으며, 명나라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자였다. 이민호가 위충현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것과 상관없이 일 자체는 도와주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이민호는 어차피 외부인이기에 천계제와 위충현이 명나라를 말아먹지 못하도록 말리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주상아 공주에게 미안하지만 남아도는 식량을 지원하는 외에 명나라를 돕지 않기로 결정했다. 만약 황제의 칙명이 떨어진다 해도 철저히 이익을 챙기며 행동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뭔가 구해달라고 왔겠지?”
“예, 전하. 번번이 신세를 지게 돼서 송구하옵니다. 신년 하례 진상품으로 고려주(高麗珠)를 황상께 바치고 싶습니다.”
“고려주라면 조선에서 나는 진주 말인가? 조선 국왕에게 직접 부탁하지 그래?”
“제가 따로 알아봤습니다. 조선 국왕이나 관료들은 조선에서 진주가 나는지도 모릅니다.”
담수 진주 양식을 하는 여진 지역과 달리 이 시대 조선에서는 진주 양식을 하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진주를 캐는 어부나 해녀도 없었다. 그런데도 조선에서 난 진주가 꾸준히 명나라로 흘러들어갔고, 현지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듣자 하니 홍합이나 피조개를 먹다가 진주를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더군. 이미 삶아버려서 광택이 떨어지겠지만.”
“지금 황실에 있는 어주는 겨우 일곱 돈짜리인데, 그보다 큰 진주가 있다면 이번 정조 때 황상께 진상하고 싶습니다. 국왕전하께서 구해주신다면 제가 반드시 은혜를 갚겠사옵니다.”
황제는 일곱 돈, 황후는 6돈 4푼짜리 진주를 갖고 있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진주가 악몽을 억제하는 보물로 잘 알려져 있었고, 8푼 이상부터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실제 역사에서 청나라 건륭제 때 황후가 잃어버린 진주가 호위군졸의 집에서 발견된 문제로 인해 계황후 오라나랍씨가 폐위된 사건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다른 곳도 아닌 유독 조선에서 난 진주를 최고로 쳤고, 고관대작들이 모자 장식물로 값비싼 고려주를 달았다. 이민호는 중국인들이 희고 광택이 은은한 진주를 좋아한다고 판단했다. 반면에 조선인들은 <열하일기> 구외이문 편에 따르면 붉은 기운이 도는 일본산 진주를 선호했다고 한다.
“일곱 돈보다 큰 진주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그것이 고려주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어. 여기 이런 것 말이야. 커다랗고 빛이 아주 영롱하지 않아? 분홍색 진주와 흑진주도 있어. 전복에서 난 푸르스름한 진주는 어떤가?”
이민호가 보석함을 열어 유럽 국가에 판매하는 진주 견본을 보여주었다. 해남도에서 양식하는 진주 외에는 대부분 자연산 진주였지만 어업국의 꾸준한 기술 개발로 표백과 열처리, 염색 과정을 거쳐 더 높은 가치를 받게 됐다. 그러나 진주들을 자세히 살펴본 위충현이 고개를 저었다.
“크긴 한데 빛깔이 은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복 진주는 반구형이라 반지에나 어울리겠습니다. 역시 고려주가 최고입니다.”
“아! 저번에 울릉도에서 채집한 것이 있지?”
이민호가 시녀를 시켜 진주를 가져오게 했다. 조선에서 조차 중인 울릉도와 독도에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이 가지 않는 바람에 조개가 크게 자랄 수 있었고, 어업지도선이 시험 조업을 할 때 가끔 조개에서 큼지막한 진주가 나왔다.
울릉도와 독도에서 난 진주들은 축구공 크기인 ‘알라의 진주’보다는 훨씬 작지만 대신에 완벽한 구형을 이루고 있었다. 위충현의 턱이 덜컥 내려갔고, 시녀들이 무게를 잰 다음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으아! 자그마치 석 냥 닷 돈짜리 진주입니다! 어주보다 다섯 배나 큽니다.”
“이봐! 진상품으로는 이것보다 훨씬 크고 빛도 영롱한 남양 진주가 낫지 않겠어? 보다시피 열대 바다에서 자란 진주라서 꽤 커. 유럽에서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리고 있어.”
북미의 강줄기에서 숱하게 발견되는 담수 진주와 남미 바닷가에 조개껍질과 함께 굴러다니는 진주도 다 모아서 왕궁 보물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국제 시세가 폭락할까 두려워 한꺼번에 시장에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손님 앞에서 진주가 흔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화려함이 지나치면 경박해진다고 들었습니다. 이보다는 은은한 광택이 특징인 고려주야말로 진정한 보물이며 황제폐하의 진주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그래? 알아서 해.”
위충현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가장 큰 진주 두 개를 골라 비단 천에 감쌌다. 황제 외에 황귀비 임 씨에게도 진상할 모양이었다. 장황후는 황장자를 조산한 다음 곧 죽었고, 천계제는 나중에 따로 계황후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아니면 두 번째 진주를 위충현의 애인이며 천계제의 유모인 객 씨에게 선물할지도 몰랐다. 명나라 황궁에서는 환관과 궁녀가 짝을 지어 대식자(對食者)라 하여 유사 부부생활을 영위했다. 유모는 정식 궁녀가 아니지만 궁녀 대우를 받았고, 객 씨의 남편이 궐 밖에 따로 살고 있었다.
유모 객 씨는 황실의 일원이 아닌 여자임에도 특이하게 명나라에서 아예 대놓고 권력을 휘둘렀다. 장황후와 황장자의 조산으로 인한 사망을 배후 조종한 외에도 후궁들을 가둬 굶겨 죽였다는 혐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보답으로 국왕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제가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허! 네가 황제야? 아무리 실권을 가졌더라도 신하라면 항상 겸손할 줄 알아야 오래 사는 법이야.”
“하하! 예.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전하.”
이민호에게 꾸중을 들었음에도 위충현은 히죽히죽 웃으며 절을 한 다음에 돌아갔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인 황제를 기분 좋게 하는 일에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 환관들이었다. 이로 인해 충신보다 더한 권력을 얻겠지만 이민호는 주인에 대한 환관들의 충정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들은 주인의 적법한 상속자에게 이빨을 드러내기도 해서 문제였다.
가격은 따로 논의하지 않았으나 황제 진상품인 만큼 넉넉히 쳐줄 것으로 믿었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이민호는 복건성 차밭을 지킬 간수군 정원을 두 배로 늘려주길 원했으나, 위충현은 아예 명나라 군사들을 차밭에 배치해주었다.
그리고 황제가 정사에서 아예 손을 떼었다는 정보국의 보고가 사실임이 이번 일로 재확인됐다. 이민호는 실제 역사에서 천계제가 못 배워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고 목수일로 소일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원래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판단에 힘이 실렸다.
5월 30일 북경에서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정오 무렵 북경 시내 남서쪽 왕공창에서 대폭발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발생한 강력한 진동이 북경을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충격파가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사람들의 옷을 찢어발겨 알몸을 만들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거대한 나무 수십 그루가 뿌리째 뽑히고 무거운 돌사자가 궁궐의 높은 담을 넘어 날아갈 정도였다. 이 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부상을 입어 북경은 큰 혼란에 빠졌다.
건청궁에서 급히 교태전으로 도망가던 황제는 날아든 기왓장을 환관이 대신 맞아 죽는 바람에 간신히 살았으나, 너무 놀라서 드러누워 버렸다. 황제의 3남이며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젖먹이 황자 주자경은 경기가 들어 숨 막힐 듯 울다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래, 중령! 의료진과 구조대를 소집해서 급파하겠다. 그런데 왕공창이 화약을 만들거나 보관하는 곳인가?”
- 그게 미묘합니다, 전하. 왕공창에서 화약을 소량 제조하긴 하지만 원래 돈과 쌀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북경 주둔군 지휘관이 빠른 시간 안에 조사를 마치고 무전으로 이민호의 질문에 답했다. 제도 북경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대폭발 사건에서 가장 먼저 의심할 것은 반란이었으나, 지휘관의 판단은 부정적이었다.
“북경 주변에서 부대 이동이 감지되지 않았나?”
- 확인했으나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선부 총병이 북경 교외의 절에 놀러갔다가 호위병 7명과 함께 실종됐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금성 주변에 우리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화재는 심각한가?”
- 일부 지역에 화재가 발생했으나 곧 꺼졌습니다. 아! 폭발 진원지로 지목된 왕공창 말입니다. 왕공창과 주변 목조건물에 화재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 화약 폭발이 아니라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지진 같은 자연재해인지 폭발사고인지도 단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인해 천계제가 병석에 드러눕고 유일한 후계자가 사라지게 되었다.
8월 27일, 크리스티안 4세가 이끄는 덴마크군이 루터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군에 대패를 당했다는 소식이 고산국 왕궁에 전해졌다. 소집과 훈련을 반복했던 고산국 원정군이 드디어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
몇몇 전투 결과는 참관단이 촬영한 영상으로 참모본부 요원들과 함께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덴마크군을 붕괴시킨 루터 전투가 삼도 근왕군 6만 대군이 무너졌다는 용인전투와 비슷하다고 느낀 이민호가 혀를 찼다.
“쯧! 양쪽 다 똑같은 용병인데도 신교도 군대는 너무 약해. 이렇게 신교도 군대가 판판이 깨지니 가톨릭군에 신의 가호가 깃들었다고 하지.”
“테르시오가 지나치게 강한 것입니다, 도련님.”
대원수 계복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양측이 적당한 선에서 전쟁을 끝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는데, 이렇게 균형의 추가 한쪽으로 완벽히 무너지자 고산국이 덴마크를 도와주러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쾨벤하운에 병력을 상륙시킬 배를 구하려고 틸리 백작이 뤼벡을 방문해, 덴마크를 완전히 점령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30년 전쟁 내내 신교도 연맹이 가톨릭 동맹을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작년 봄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도 이번 루터 전투와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고 신교도 군대의 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났었다. 덴마크군이 고산국의 화기와 전술을 흉내 냈다지만, 전투에 나선 자들은 지금까지 패배했던 신교도 군대와 똑같은 신교도들이었다.
“쩝! 총에 맞아 무수히 쓰러지면서도 대열을 갖춰 뚜벅뚜벅 전진하는데 상대편 보병 입장에서 겁나지 않을 수가 없겠지.”
“테르시오는 아주 좋은 군대입니다. 훌륭한 군대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민호는 1980년대에 군에서 실시됐다는 충정훈련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부대를 둘로 나눠 시위대 역할을 맡은 군인들이 산개해서 돌을 던지고, 반대쪽에서 진압군 역할을 맡은 군인들이 곤봉만 들고 열을 맞춰 전진하는 훈련이었다. 돌을 던지면 던지는 대로 진압부대가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맞으면서 전진하면 같은 부대 병사들인데도 시위대를 맡은 병사들이 질려서 물러서기 마련이었다. 이것이 조직화된 집단의 위력이었다.
이번 루터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만 대 2만으로 전투에 투입된 양측 병력은 비슷했다. 총기 보유 비율은 부유한 덴마크군이 훨씬 높아 절반에 달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총격과 포격을 묵묵히 맞으며 밀집방진이 전진할 때마다 덴마크군 보병 전열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때마다 덴마크 기병대가 나서서 테르시오의 전진을 차단했지만, 테르시오의 세 번째 전진과 동시에 가톨릭 동맹군 기병대가 덴마크 포병대로 돌진하면서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덴마크군이 흩어져 무작정 도주하는 과정에서 6천 명이 전사하고 2,500명이 포로로 잡힌 반면 가톨릭 동맹군은 겨우 200명이 죽거나 다쳤다. 피아 사상자 비율이 30대 1을 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덴마크군이 완전히 붕괴돼서, 가톨릭 동맹군의 덴마크 침공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잉글랜드에서 보내준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도주했는데,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배를 타고 고향으로 곱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난병으로 변한 스코틀랜드 용병들이 덴마크 곳곳에서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덴마크군이 완패하면서 유럽인들이 우릴 만만히 보게 됐다는 게 더 문제지.”
“동맹국을 구하는 동시에 우리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이 이번 원정의 목표라 하겠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 병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 그럴 가치도 없는 전쟁이니까.”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는데 작전의 중심을 두겠습니다, 도련님.”
덴마크는 고산국의 군제와 전술, 무기체계를 배우려고 노력해왔다. 고산국에서도 무기체계 지원을 제외한 교육과 훈련 등 모든 방면에서 덴마크를 적극 지원했다. 그런 덴마크군이 패배했으니 고산국의 힘이 얕보일 수 있었고, 이민호의 우려는 여기에 있었다. 전쟁을 해서 이기는 것보다 그 전에 강력함을 충분히 과시해서 싸우지 않는 편이 훨씬 좋았다.
덴마크군의 패전에서 얻은 교훈이 많았다. 새로운 군제와 전술보다는 그 지역에 적응한 군제와 전쟁 경험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산국 지휘부와 참모진 전원이 공감했다. 화력이 충분히 강하지 못한 이 시대에, 총기 숫자보다는 군율과 배짱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물론 일차대전 시기만 돼도 병사 개개인의 용기나 정신력은 큰 의미가 없었지만 최소한 이때만큼은 정신력도 승부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 병력은 집결했겠지? 덴마크가 완전히 점령되기 전에 구해줘야지 어쩌겠어. 덴마크 국왕에게서 하루에 여섯 번씩 전보가 날아오고 있어.”
“예. 해군과 항공대 일부가 아이슬란드에 사전 배치됐고 육군과 해병대가 내일부터 승선할 예정입니다. 도련님은 항공편을 이용해 새강릉에서 좌승함을 타시면 됩니다.”
또 전쟁터에 끌려가게 생겨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 해병사단이 테르시오하고 맞붙는다면 저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게 될 거야. 고산국군의 압도적인 우세를 전 유럽에 알리는 것은 좋은데 다른 나라들이 자칫 위협으로 받아들일까 두려워. 유럽 국가들이 뭉치지 않도록 외교력을 발휘해야겠어.”
“도련님! 설마 틸리 백작이 우리 앞에서 테르시오 같은 밀집 진형을 취하겠습니까? 상대에 따라 대응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 전술전략의 기본입니다. 저들은 우리의 무기체계와 전술을 명백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병전술에 대비하고 있나? 적 지휘관의 머리를 존중해주는 것은 좋은데, 전술전략은 금방 바뀌는 게 아니야. 저들은 덴마크군을 상대한 것과 똑같이 밀집해서 우리 군대의 총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올 거야. 그 전에 포병에 의해 산산 조각나겠지만.”
“설마요.”
일차대전 솜므 전투에서는 기관총이 발명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적 기관총 앞으로 병력을 내몰아 양측 합계 백만 이상을 몰살시켰다. 현대 미군은 새로운 전술을 고안하고 나서 이에 적합한 부대 편제로 바꾸는데 10년 넘게 걸린다. 합리적 사고와 유연한 대응이란 말을 실전에서 적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군의관 중에 정신의학 전공자가 많이 필요하겠어.”
“국립정신병원에서 지원자를 구해보겠습니다.”
치열한 전투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 아군 병사들에게 더 큰 심리적 충격을 주게 될 것 같아 걱정됐다. 그리고 후방 경계부대인 아군 보병연대가 난병으로 돌변한 스코틀랜드 용병들을 진압하면서 인명피해가 생길까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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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전 준비과정이 꽤나 복잡한데 중간 과정 다 생략하고 후딱 가서 한판 크게 벌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