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57 103. 명나라의 혼란 =========================================================================
1627년에 이어 1628년에도 명나라 북부에 큰 가뭄이 들었다. 오래도록 가혹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해 희망을 주었으나 황제가 선정을 베풀어 살아남게 되는 것보다는 당장 굶어죽는 것이 빠를 것 같았다.
민란 초기에 굶주린 농민들이 부잣집을 습격해 식량을 탈취하고 지방 관리들과 소소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섬서와 감숙을 중심으로 화북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로 봉기했다.
이때 왕가윤을 비롯해 왕대량, 장존맹 등이 각지에서 반란세력을 이끌었다. 농민반란군 중에서 왕가윤의 세력이 가장 독보적이었고, 지난해에 감숙성에서 봉기군을 이끌었던 고영상 등이 합류할 즈음 세력은 이미 3, 4만에 이르렀다.
명나라 조정이 처음에는 반란세력이 항복하면 식량을 주어 원적지로 돌려보내는 초무책을 사용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어차피 굶어죽을 상황에 변화가 없다고 봤기에 전혀 효과가 없었다. 진압에 나선 지방 관군이 연속해서 무너지고 명나라 조정에서 대규모 진압군을 조직해 파견하려는 순간 여진족이 만리장성을 넘었다.
그러나 대동과 선부에 주둔하던 명나라의 대군이 급히 출동했을 때 여진족은 마을 몇 개를 노략질한 다음 몽골 초원으로 이미 돌아간 뒤였다. 덕택에 농민반란군은 봉기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기병과 병참부대를 증강하는 등 조직력을 강화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심지어 농민반란군이 외교까지 하는 꼴을 보게 되었다.
“제가 만약 고위 관료 입장이라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국은 이미 종말을 향해 줄기차게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민과 빈민을 긍휼히 여기시는 고산국 국왕전하시라면 이 기회에 현명한 선택을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고산국도 명나라의 농민반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왕가윤 밑에서 일군을 지휘하는 나여제가 왕도를 찾아온 것이다. 왕가윤이 이끄는 농민반군에서 활약하는 간부 혹은 휘하 장수로 나여제 외에도 장헌충, 마수례 등이 있었다.
“황상폐하를 배신하는 것은 제후국의 군주가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만약 내가 너희들을 돕는다면 내게 어떤 이득이 생길까?”
“전하께 강남을 떼어드리겠습니다.”
“지금 강남에서는 농민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주상아 공주가 가난한 농민들을 어루만진 강남을 어떻게 남편인 내가 정벌하란 말이냐?”
“그래서 전하께서 더더욱 쉽게 강남을 정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강북을, 전하께서는 강남을 얻어 각자 황제를 칭하고 천년만년 떵떵거리고 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쯧쯧!”
농민반란군 지도자들이 전부 다 권력욕의 화신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들 나름대로 철학이 있고 미래의 희망을 제시할 수 있었기에 수많은 농민반란군들을 지속적으로 이끄는 게 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어떻게 보면 나여제가 이민호에게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당근을 제시한 셈이었다. 복건과 광동에 대한 이민호의 꾸준한 관심은 누가 보더라도, 심지어 명나라 황실과 조정에서도 영토적 야심을 의심케 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명나라 영토를 획득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명나라가 몰락하는 상황을 이용해 이득을 취할지언정 세력의 지속 여부가 불분명한 이들과 함께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너의 세 치 혀 놀림으로 나를 능멸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모양이구나. 과도한 자신감은 때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법이다. 동창의 관인들을 들라하라.”
“대명 동창 장형천호 입시요!”
날카롭게 생긴 명나라 환관들이 대전에 등장했다. 수염이 나지 않은 자들을 본 나여제가 흠칫 놀랐다가 고개를 뻣뻣이 세웠다.
“국왕전하의 배포가 이 정도 뿐인 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꺼져!”
푸른 관복을 입고 수춘도(繡春刀)라는 쌍도를 패용한 환관들이 나여제를 꽁꽁 묶었다. 그 사이 천호가 이민호에게 정중히 절을 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만, 전하 덕택에 역적 수괴들 중의 하나를 잡게 됐습니다. 과연 국왕전하께서는 천조의 충신이십니다.”
“어서 반란을 진압해서 고가 걱정 안 하게 해주면 좋겠네.”
그러나 명나라 말기의 농민반란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은 아직 농민반란군에 가담도 하지 않은 20대 초반이었고, 실제 역사에서 그가 장년에 들어서서야 명나라가 멸망한다.
이민호는 명나라 역졸 출신이라고 기억하는 이자성을 찾으려고 몇 년간 노력했다. 그러나 이자성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명이기에 정보국 인원을 다수 동원하고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뭐, 우리나라만 평화로우면 됐지.”
느지막한 오후에 성벽에 올랐다. 왕궁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거대한 동상들이 둘러싼 분수대를 중심으로 너른 길이 세 방향으로 뻗쳐 있고, 관광객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느긋하게 길을 걸었다. 인도에 비해 비좁은 편도 4차선 자전거 도로를 가득 메우며 항공기 소재인 두랄루민으로 뼈대를 제작한 자전거들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웅대한 과학박물관과 문화회관이 주작대로 동쪽과 서쪽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자연사, 군사, 천문, 물리 등으로 분류된 과학박물관 전시관은 아직 절반도 채우지 못했고 최근 전시물은 백화점 전기제품 전시장의 것들과 다를 바 없었다. 문화회관은 5천 석 규모의 공연장과 중소 극장 몇 개, 시청각강의실을 비롯한 교육시설을 보유했다. 박물관과 문화회관에 병아리 같은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이 줄지어 입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민호의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다음이 관청가로서, 조선의 육조 거리와 비슷하게 총리부와 추밀원, 각 부서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외교공관 거리는 다시 그 다음으로, 여러 문화권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지은 대사관 건물들이 아시아와 유럽-아프리카가 동서로 나뉘어 3열 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아이누와 토르구트 등 속국들은 왕도에 자체 연락사무소를 두었다.
광장을 겸한 주작대로가 끝난 남쪽 시가지에도 변화가 많았다. 번화가에는 제한고도 12층을 꽉 채운 고층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차도에는 승합차와 승용차들이 물결을 이뤘다. 3년 넘게 공사가 진행된 지하철이 개통한 이래 교통 혼잡이 줄어들까 기대했지만 그 사이 인구가 늘어나 오히려 더 붐볐다. 북미로 이주하는 인구가 적었더라면 매우 혼잡한 도시가 됐을 것이다.
좀 더 멀리 산언덕 아래에는 새로 지은 공동주택 고층건물들이 위용을 자랑했다. 건국 초기에 지은 3층 연립주택이 낡고 내부설계 방식이 뒤떨어져 그냥 밀어버리고 다시 지은 곳이었다. 요즘은 침실보다 거실과 주방이 가족생활의 중심으로 바뀌고 지하주차장 공간에 대한 거주민들의 요구가 커진 탓이었다. 교외 단독주택의 외양은 좀 더 다양해지고 그 사이 정원수도 높이 자랐다.
고산국 본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 중에 가장 연장자 집단이 아직 30대 중반이었다. 영양 상태가 좋은 고산국 여성들은 아직 한참 더 출산을 할 수 있었다. 젊어도 너무 젊은 고산국에서는 인구가 대폭발 중이었고, 조만간 올 2차 출산유행기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세자! 세자빈!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
“아바마마!”
북미주의 주도 겸 겨울궁전 소재지인 새순천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세자 부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세자 부부는 새순천 신시가지의 기반공사와 바다까지 통하는 운하, 지하철, 궁전 건설을 감독하다 돌아왔다.
북미주는 파나마 운하와 그 이북의 모든 지역을 포괄했다. 해안 지역과 내륙 미시시피 강 유역, 멕시코 등 온 천지에서 개발과 건설로 시끄러운 곳이었다. 멕시코 편입과 본토 및 유럽에서 이민자가 대량 유입돼 지금은 북미주가 고산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확보한 주가 됐다.
왕도 천도 문제는 여전히 미뤄놓았다. 명나라 영토에 욕심을 내는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조만간 적극 개입할 경우 가까이 있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여름궁전은 필리핀 북부 고원 바기오와 바이칼 호반에 있었는데 건주 여진의 불온한 움직임 때문에 바이칼 호반 여름궁전은 당분간 비워두기로 했다.
“특히 세자빈이 더운 곳에서 넷째를 낳느라 정말 고생했다.”
“젖먹이 주제에 벌써부터 예쁜 짓하는데 정말 미치겠습니다.”
세자가 새로 태어난 군주(郡主)를 품에 안고 헤벌쭉 웃었다. 이민호가 안아보겠다고 두 손을 내밀었지만 세자가 몸을 돌려 막았다.
“세자! 할애비도 한 번 안아보자.”
“싫습니다. 어마마마가 뭐라 하지 않으면 안 돌려주실 거잖아요.”
결국 이민호는 군주의 친할머니기도 한 혜영의 감독 하에 갓난아이를 잠깐 안아볼 수 있었다. 세자 부부의 2남 2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으니 앞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할 아기였다.
“내가 니 할아비다. 어이쿠! 방긋 웃는 게 정말 예쁘다. 이름을 뭐로 지었느냐?”
“일단 아명으로 작은이라고 지었습니다.”
“세자 너도 나처럼 이름을 대충 짓는구나. 나쁜 버릇이다.”
“설마 아바마마만큼이나 하겠습니까?”
조선에서 양반이나 양인, 천민을 가리지 않고 여자들 중에 소근(小斤)으로 표기된 이름이 흔하다. 예를 들어 관비 소근가이는 관청 계집종 작은 개라는 뜻이다. 소근소사(小斤召史)는 자근조이로 읽으며,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이는 여성의 신분과 혼인 상태, 배우자의 생사 여부에 따라 달리 붙는 호칭이 아니라 그저 흔한 이름이다.
“그래. 새순천은 어떻더냐?”
“겨울에는 선선하고 눈이 거의 안 내리는데 여름에는 아주 불지옥입니다. 지열냉난방을 이용해 건물 안에서는 괜찮습니다만 바깥에서는 계속 차 안에만 머물면서 냉방기를 최대로 틀어놓아야 합니다.”
북미주의 지리적 중심이며 미시시피 유역이 아닌 해안 가까운 곳으로 주도를 정하려다 보니 다른 적당한 곳을 고르기 어려웠다. 처음에 주도로 내정했던 새진주는 비가 너무 많이 왔고 홍수도 잦았다. 텍사스 내륙 지역은 덥고 토네이도가 자주 발생해 시가지가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멕시코 지역은 고원이라 개발하기에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주도를 새순천으로 정했는데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경제활동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최고 기온 32도가 넘는 날이 일 년에 100일 이상이었다. 습도도 무지막지하게 높아 조선의 대구나 왕도 고북은 새순천에 비해 쾌적한 곳이었다.
지열냉난방은 깊은 땅속 지하수가 계절별 온도변화가 적은 점을 이용해 냉방과 난방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펌프를 가동시키는데 전기가 들지만 냉난방 효율이 매우 높고 실외기에서 뜨거운 바람을 배출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혹시 회오리바람이 자주 발생하더냐?”
“10년 이상 기후를 관측했고 카랑카와 족 노인들에게 물어봤는데 둘 다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묘하게 회오리바람 발생지역에서 살짝 벗어난 모양입니다. 다만 천둥폭풍이 가끔 지나가서 문젭니다만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새순천은 온대가 아닌 아열대 기후에 가까워 토네이도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북미 중동부에 지은 집들도 기초를 단단히 다진 철근콘크리트 중심이라 소설 <오즈의 마법사>처럼 집이 토네이도에 휩쓸려갈 위험이 적었다. 그러나 자동차와 기차를 날려버리는 강력한 토네이도가 가끔 발생하기에 방송을 이용한 경보체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카랑카와 족은 나에게 구운 불가사리를 먹으라고 줬었지.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북미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새순천 항구 쪽에 카랑카와 족이 경영하는 불가사리 전문 요리점이 생겼답니다.”
“한 번쯤 먹어볼 만하지만 단골손님은 절대 안 생길 거다.”
카랑카와 족에는 키가 2미터 넘는 사람들이 우글우글해서 남미 테우엘체 족과 농구경기를 시키고 싶어졌다. 그러나 정작 카랑카와 족은 농구와 배구처럼 큰 키가 유리한 구기종목에는 재미를 들이지 못했다. 자동차나 말보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들의 긴 다리를 감안해 특별 규격의 자전거를 생산해 보내주었다.
이민호가 그 지역을 처음 탐험했을 때부터 우호관계를 맺은 카랑카와 족은 새순천의 원주민 정찰대로 오래도록 활동하고 있었다. 이민호에게 그랬던 것처럼 외부인과 손님에게 친절해 어딜 가나 인기가 좋았다. 특히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목마를 태워줘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들은 바닷가와 숲을 오가는 생활상 탓에 숲을 가꾸는 일에도 조예가 깊어 새순천 신시가지 공원과 가로수 조경을 그들에게 맡겼다. 공원설계와 나무 이식은 시청 정원사가 하고 수종을 정하거나 묘목을 기르고 나무를 가꾸는 일은 카랑카와 족 원주민이 하는 식이었다.
“아바마마. 영토가 넓고 인구와 자원이 풍부한 북미로 천도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천도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겨울궁전을 먼저 짓는 게 아니냐? 때가 되면 새순천을 왕도 중의 하나로 승격시킬 것이다.”
그러나 현대 미국의 텍사스 휴스턴인 새순천은 태평양을 내해로 둔 고산국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라는 문제가 있었다. 북미 서해안이 수도로 더 적합하지만 아무래도 지진이 두려웠다.
“아국에서도 명나라와 원나라처럼 양경제나 다경제를 운영할 예정이십니까?”
“수도는 한 국가의 정치와 행정의 중심 도시다. 반드시 하나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 나라의 대표적인 도시는 필요한 법이다.”
왕정시대에는 왕이 있는 곳이 바로 왕궁이었으므로 수도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다. 현대 국가에서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헌법적, 법적 기관이지 부서 건물이나 국회의사당은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내국인과 외국인들이 그 나라의 대표적인 도시를 수도로 인지하기 마련이었다.
“그럼 어느 도시를 왕도로 결정하시겠습니까?”
“나는 모르겠다. 세자 네가 즉위하면 결정해라.”
“황공한 말씀이십니다, 아바마마. 조선 같으면 세자가 석고대죄 해야 할 일입니다.”
“널 놀리는 게 재미있어. 앞으로 9년만 꾹 참아라.”
국왕 자리를 물려주고 나서 박대당할까 아주 약간 걱정이었다. 세자에게 왕위가 아닌 제위를 물려줄 수 있을지는 아직 좀 더 가봐야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번에 명나라가 멸망하지 않더라도 형식적 조공관계를 그만 두고 두 나라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미 세계 속의 고산국이었다.
1628년 8월에 몇 가지 일이 있었다. 명나라 섬서에서는 여전히 농민반란이 위세를 떨쳤고 만리장성 주변에 포진한 관병은 건주여진의 침공을 우려해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진압군 지휘관을 선임하는 문제는 황제의 의심과 변덕 탓에 자꾸 연기됐다.
유럽에서도 계속 전쟁 중이었다. 슈트랄준트가 제국군의 포위공격을 막아낸 것은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원 덕택이었다. 그런데 지난 번 패배를 설욕하려는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독일 북동부 포메라니아에 병력을 이끌고 상륙했다. 발렌슈타인이 지휘하는 제국군은 슈트랄준트의 포위를 풀고 포메라니아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스웨덴의 전함 바사 호가 처녀항해 중에 옆으로 엎어져 침몰했다. 진수식에 초빙된 고산국 대사관 무관이 전복 위험을 수차례 경고했는데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무시했다가 결국 창피를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 무관의 권고로 다른 해군 함정들이 바사 호 주변에 있었기에 구조작업이 재빨리 진행될 수 있었다. 속으로 꺼림칙했던 이민호가 그 무관을 일 계급 특진시켰다.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가 왕자였을 때의 춤 선생, 버킹엄 공작 조지 빌러즈가 암살당한 사건도 같은 달에 있었다. 왕자에게 세세한 춤동작을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것은 미래 국왕의 움직임을 미리 자기 통제 하에 두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 버킹엄 공작이었다. 공작은 그 동안 국왕부부를 꾸준히 이간질했었다.
버킹엄 공작의 암살 이후 찰스 1세와 왕비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 잉글랜드 발음으로 헨리에타 마리아의 금슬이 좋아졌다. 이는 찰스 1세가 로마 가톨릭에 경도된 정책을 남발하고 장기적으로 반란이 일어나는 빌미 중 하나가 됐다.
============================ 작품 후기 ============================
덴마크 이야기가 조금 이어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