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65 103. 명나라의 혼란 =========================================================================
1630년 1월, 고산국 본토에서는 범죄자 소탕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백성들은 지금까지 항상 그랬듯이 임금님이 곧 해외 원정을 떠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바깥에 나가기 전에 먼저 집안을 정리해놓는 것이 제대로 된 일의 순서였기 때문이다.
“항복하라!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창고에서 나와라!”
완전 무장한 고중 시 경찰들이 창고를 포위하고 있었고, 경찰 간부가 확성기를 통해 범죄 집단 구성원들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그러나 어둠이 짙게 깔린 부둣가 창고건물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범죄자들이 지하 땅굴을 통해 이미 다 도주했나 의심스러운 순간이었다.
“경찰특공대 바로 진입시켜.”
“예! 즉시 지령을 내리겠습니다.”
고중 항에 정박 중인 순양함에서 이민호와 세자가 쌍안경을 들고 진압현장 상황을 지켜봤다. 경찰 지휘부가 통째로 이 순양함의 항해함교에 들어와 있었다. 출입문과 창고 건물 앞뒤에서 섬광이 터진 직후 굉음이 순양함 함교까지 울렸다.
본토의 주요 도시를 고북, 고중, 고남으로 이름을 대충 지은 것 때문에 지금도 백성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을 참고했을 뿐이었다. 대북, 대중, 대남의 중국 발음은 괜찮고 한국식 한자 발음은 격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민호가 지은 여러 도시들의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작명에 소질이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행히 자식들의 이름은 그 어머니인 후궁들이나 아이들의 할아버지인 이응화가 대신 지어줬다.
- 콰쾅! 쾅!
“출입문과 제1, 제2 진입로 폭파 확인. 최루탄 일제 투척! 진입 5초 전, 4초, 3초.”
- 퍼벙! 펑!
“2초, 1초. 진입!”
범죄자들이 집중 방어중인 출입문은 강력한 폭발과 함께 이미 날아갔다. 사전에 폭탄을 설치해 개척한 진입로 두 곳과 지붕을 통해 방탄복과 방독면으로 완전 무장한 경찰특공대가 일제히 창고 안으로 진입했다. 진입 직전에 최루탄 수십 발을 투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땅! 따당! 땅! 땅! 땅!
컴컴한 창고 건물 안에서 총성이 요란히 울렸다. 그 사이 고중 항 선착장에 정박한 명나라 범선 20여 척에도 경찰특공대가 돌입했다. 자루가 길거나 짧은 대도를 들고 저항하는 선원들이 총탄을 맞고 픽픽 쓰러졌다. 투명한 경찰방패를 앞세우고 갑판을 장악한 경찰특공대가 선실로 침투했다.
“선원으로 근무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먹고 사는데 저들은 왜 위험한 해적이나 범죄 집단에 가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고 손해를 안 보는 것 같거든.”
경찰 간부에게 대답해준 다음 이민호가 범죄 집단 시바지(十八芝)의 조직도를 훑어보았다. 총두령 이단(李旦)을 필두로 부두령 시대선(施大瑄), 그 밑에 반독립적인 18명 두령들의 조직과 각자 분담한 업무, 활동 지역 등이 세분돼 있었다. 시바지는 명나라 남해안과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 해적과 밀수, 인신 매매업에 종사하는 대규모 범죄 조직이었다.
강력한 치안을 자랑하는 본토 고중 시에는 이런 범죄 집단이 쉽사리 자리 잡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가끔 두목들이 회합을 갖는 장소로 고산국 본토의 항구를 이용하곤 했다. 조직에 침투한 경찰이 몇 년 새 중견 간부로 승진해서 드디어 오늘에서야 일망타진할 수 있게 됐다.
“국왕전하! 저들을 사살하는 것이 좀 아깝습니다. 군에 징집해서 파푸아 섬 같은 곳의 위험한 임무에 투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런 범죄자들이 용감히 싸울 수 있을 것 같은가?”
험악한 표정과 말투로 일반인들을 위협하는 범죄자들이 전쟁터에서 제대로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같은 편 동료들에게 겁을 줘서 용감하다고 흔히 오해하기 쉽지만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적에게는 당장 겁쟁이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2차 진주성 전투 직전에 한양 저잣거리에서 힘깨나 쓰는 건달들 천여 명을 모아 북쪽 성벽에 배치했더니, 왜군을 보고 겁에 질려 우르르 도망친 탓에 진주성이 함락됐다. 부하들을 핍박하고 상관에게 대들고 전투 직전에 술에 취하고 정찰을 전혀 안 하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무작정 후퇴하는 어느 유명한 조선 수군 장수 같은 인간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긴 했다. 물론 보급품이 아까워서라도 그런 부대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단은 뭐하는 놈인가? 지금은 줄었다지만 휘하 해적이 한때 10만을 넘겼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예, 전하. 국초부터 마카오와 구주를 오가며 해적질과 밀무역을 하던 놈입니다. 그 외에도 명나라 조정과 유착관계가 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투자금과 뇌물 명목으로 돈을 받아 유럽 상인들의 등을 치고 다녔습니다.”
“해적치곤 훌륭하군.”
실제 역사에서 이단은 거대한 해적단의 두목으로서 그가 죽은 다음 정지룡, 정성공 부자가 조직을 물려받았다. 정지룡은 처음에 이단의 밑에서 통역으로 출세했고, 형제들을 모아 기반을 다졌다. 명말청초에 동아시아의 바다와 대만은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의 것이었다.
이 시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네덜란드, 그리고 잉글랜드 상인들은 이단이라면 치를 떨었다. 이단은 한두 번 사기 치고 끝나는 게 아니라 특유의 애매모호함을 앞세워 몇 년 동안 꾸준히 유럽 상인들을 뜯어먹었기 때문이다.
특히 잉글랜드 상인 조직은 남경 인근에 잉글랜드 전용 항구를 마련해주겠다는 이단의 사탕발림에 속아 큰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잉글랜드 상인들은 결국 명나라 무역에서 떨어져 나간 다음 열대 해삼을 모아 광동에 파는 영세 상인으로 전락한다. 향료 제도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 압도당해 학살당하고 추방당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산국 덕택에 잉글랜드 상인들도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평화롭고 안전하게 무역에 종사할 수 있었다. 물론 잉글랜드 상인들의 장기인 해적질은 꿈도 못 꿨다.
“참! 그런 놈이 우리 본토의 주인을 자처했다며?”
“예. 건국 전에 이단 휘하의 밀무역선들이 마카오와 일본을 오갈 때 고남 항구와 팽호도에 중간 기착지를 건설해서 이용했다고 합니다.”
“아! 국초에 쓸어버렸던 바로 그놈들이었군.”
현재 이민호와 이단은 세계구급 강대국의 국왕과 해적단 두목으로 운명이 크게 갈렸다. 건국 초기 한때에는 이단의 세력이 압도적이었으나 이제는 일방적으로 토벌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전하! 진압 작전이 끝났습니다. 사살 327명, 생포 206명입니다. 두목 이단과 주요 간부들의 사체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해적선으로 사용된 사선 24척을 노획했습니다. 경찰특공대의 피해는 경상 2명입니다.”
“수고했네. 정리해서 보고하게.”
별로 크지도 않은 창고 건물에 해적 고위층과 호위병들이 2백여 명이나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끝까지 저항하다 죽었다. 나머지 해적들은 배에서 사살되거나 붙잡혔다.
오늘은 시바지에 대한 전면적인 토벌작전의 시작에 불과했다. 해군과 해병대가 동원돼 명나라 해안지역과 동남아시아 섬들에 숨은 해적 잔당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들어갔다. 간신히 살아남아 재판에 회부되면 해적에 가담한 지 1년 미만인 자라도 기본 형량이 최소 10년부터 시작했다. 오랜만에 탄광이 북적거렸다.
토벌작전이 시작된 시점에 3만으로 추산됐던 시바지 해적집단 중에서 2만 이상이 작전 종료 시에 사살되거나 붙잡혔다. 그렇지 않아도 이민호 때문에 원래 역사보다 규모가 훨씬 작아졌으나, 이마저도 완전 소멸하고 말았다.
“아바마마. 이번 해적 토벌작전은 단지 해적 토벌에 국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도 눈치가 빨라졌구나. 그래.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니?”
경찰 간부들이 고중 항에 내린 다음 순양함은 왕도 고북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세자가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라 가르쳐주기로 했다.
“해적은 국초부터 꾸준히 토벌해왔습니다. 그러나 시바지는 해적집단이기도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아국에 큰 도움이 되는 상인집단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해적질을 한 증거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토벌을 자제해왔습니다.”
“맞아. 시바지 덕택에 그 동안 다른 중소 해적집단들의 씨를 말릴 수 있었지. 범죄자들은 자기 영역 내에 다른 범죄자들을 남겨두지 않거든.”
“그 동안 내버려뒀던 대규모 해적-상인 집단을 오늘에서야 궤멸시킨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 네 생각부터 말해봐라.”
그러나 세자가 대답 대신 주변을 살폈다. 함교에서는 함장을 비롯한 해군 장병들이 근무하고 있어서 대화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알현실로 옮겨 세자와 탁자에 앉아 대화했다.
“해적이든 상인이든 기본적으로 배라는 유통수단을 가진 집단입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이들을 제압해 명나라의 해상 유통을 장악하실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맞다. 명나라가 언제 무너질지 몰라도 오늘 우리는 중요한 제어수단 하나를 장악하게 됐다. 사실 장악은 그 전부터 했었고, 해적단을 진압한 오늘부터서야 비로소 독점하게 됐다는 차이점이 중요하다. 중국이 대륙이라지만, 그리고 운하를 이용해 남북의 물류를 감당한다지만 역사의 전환점에서는 뜻밖에 해상 운송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거든.”
남경 이북 산동반도 주변 해역은 해저지형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해상운송업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 사선들이 운하를 통해 북경까지 올라갔다가 압록강 하구와 강화도를 지나 조선 남해안으로 갔을 정도였다. 이동 시간은 연 단위가 되고 운하 폭에 맞춰 작은 배만 동원했으니 왜선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현대 중국인들이 인터넷 토론에서, 명나라 남해안에서 활동하던 사선이 판옥선보다 크다고 발악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해전에 동원할 수 없었으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수군 총병 진린과 부총병 등자룡이 노량해전에서 조선 판옥선을 빌려 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렇습니다. 운하는 시간과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듭니다. 강남이나 강북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운하만 이용해서는 명나라 조정에서 즉각, 그리고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그래. 명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든 상관없지만 대륙을 제어할 힘을 우리가 미리 독점해놓는 게 중요하다. 내가 재위 중일지, 아니면 네가 즉위한 다음이 될지 모르겠지만 대륙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느니라.”
얼마 전 고산국 해군에 강상 전단이 조직됐다. 강상(江上) 전단은 연안 경비정이나 미 해군이 쓰던 강상 포함 같은 작은 동력선에 적당한 화력을 갖추고 내륙 강줄기나 운하에서 활동할 해군이었다. 임무의 핵심은 전투보다는 양자강과 황하를 오르내릴 수송선들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대륙의 운명을 어떻게 유도하실 계획이십니까? 참모본부에 엄중히 보관된 일급비밀 문서를 열람하긴 했지만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너도 봐서 알겠지만 몇 가지 계획을 갖고 있어도 우리가 전체 상황을 주도하는 계획은 없다. 명나라가 멸망할 경우 앞으로 중국인들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할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적극 개입했다가 욕먹을 필요는 없지 않겠니? 다만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는 있겠지. 해적 격멸이나 강상 전단을 조직한 일도 다 이를 위해서다. 혹시 너는 대륙의 황제를 꿈꾸고 있느냐?”
만약 세자가 조선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감히 상국을 범하는 일이 무엄하다고 여겼거나, 반대로 세계의 왕인 대륙의 황제가 되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산국 본토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자는 냉정했고, 이는 아쉬운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륙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고산국 평균으로 높이려면 고산국 본국의 성장이 훨씬 늦춰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장래에 점진적인 입헌 군주제로 이행한다면 대륙의 과다한 인구 때문에 정치가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을 정복한 역대 유목제국들처럼 중국에 흡수되는 것도 두렵지.”
“우리 고산국이라면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불편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5호 16국이나 당나라 등 무수히 많은 북방의 정복자들이 정체성을 잃고 사람의 바다에 흡수돼 사라졌다. 원나라는 북중국을 비워두고 남중국 사람들을 무시했지만 결국 잡아먹혔다. 고산국 때문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청나라도 힘없이 무너졌다.
“내가 결정할지, 네가 결정하게 될지 모르겠다만 대륙의 영토나 백성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까지 내가 유럽 영토에 욕심을 내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그렇습니다. 국가를 세우고 운영할 정도가 된다면 독립해서 존속하는 편이 낫습니다. 자기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일본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해상교통로를 위협하기에 혼슈는 군장시대로 돌려버리고 규슈와 시코쿠는 확고하게 장악해 버렸다. 비슷하게 건주 여진은 고산국에게 호되게 당한 다음 몽골 초원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루스 차르국이나 토르구트, 에이레 공화국 등은 고산국 덕택에 나라를 건사할 수 있게 됐다. 아프리카 흑인들도 노예가 되는 비참한 처지를 면할 수 있었다.
“다만 전란의 시기가 끝날 때쯤 국경선을 약간 조정할 필요가 있겠지. 독립하고 싶어 하는 몇몇 민족을 지원해줘야 할 것이다.”
“대륙이 안정된 다음에도 주변국을 침략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덩어리라면 너무 큽니다. 분리시킬 의향은 없으십니까?”
“나도 그게 고민이다. 다만 명나라 황족들은 결코 분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은 기억해둬라.”
“그들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아바마마.”
숭정제가 죽고 남명 정권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황자나 황족 여러 명이 각기 나라를 세웠다. 사실 황족이 직접 건국하기보다는 건국 세력에 의해 추대를 받거나 초빙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전대 황제의 피가 진한 순서대로 서열이 지어짐으로써 한 나라로 합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대륙을 분리시키고자 한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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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해적 진압 다음 모로코 정벌이 이어질 예정이었는데 삭제하고 대중국 계획을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