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67화 (916/1,000)

00967  103. 명나라의 혼란  =========================================================================

밀라노에서 사육제 기간이 끝나기도 전부터 흑사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기 증상은 말라리아와 비슷하게 고열과 두통을 동반했으나, 검게 변색된 피부와 그 밑으로 썩어 들어가는 모습으로 인해 흑사병으로 확진됐다.

격리 검역소에 갑작스레 환자가 넘쳐났다. 며칠 후 잠복기가 지나고 사망자가 폭증하면서 상황은 더욱 확실해졌다. 매일 아침마다 죽은 자들이 수레 여러 대에 가득 실려 공동묘지로 향했다. 길거리에 시체들이 나뒹굴었으나 자발적으로 나서서 치우려는 자들은 없었다.

며칠 조용하다 싶은 집은 가족 전체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한 집이었다. 이런 집은 곧 총독의 병사들에 의해 불타올랐다. 사육제는 중단되고 시민들은 성당으로 몰려가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했다.

그러나 고산국이 국초부터 의학 발전을 다른 나라들과 공유했기에, 검은 옷에 부리 가면을 쓴 닥터 쉬나벨이 환자의 집을 방문한다는 소문은 돌지 않았다. 대신 위생장갑과 복면을 쓴 밀라노의 의료인들이 환자를 돌봤다. 밀라노 총독 코르도바는 뒤늦게 성문을 차단해 안팎으로 시민과 병사들의 출입을 막았다.

“다른 종류의 흑사병은 아직도 전염 경로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발병사례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가래톳 흑사병은 전적으로 벼룩에 의해 전파됩니다.”

“그렇다면 이번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흑사병이 사람 사이에 전염되지 않는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베네치아와 베로나에서 활동하는 우리 의료진, 그리고 밀라노 의사들이 흑사병 환자들을 조사한 결과 예외 없이 가래톳 흑사병임을 확인됐습니다. 사람 간에 전염될 염려가 없으므로 쥐와 벼룩을 구제할 수 있다면 우리 의료진이 적극 활동해도 크게 위험하지 않습니다.”

전염병관리국에서 파견된 의사가 이민호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베로나와 베네치아에서도 흑사병 환자가 발생했으나 고산국 의료진이 적극 활동하면서 병의 확산을 조기에 차단했다고 한다. 의료진 말을 들어보면 의사보다 고양이들이 더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

흑사병이 유행해 도시민들이 떼죽음 당하면 그 소문이 멀리, 그리고 오래도록 퍼져 역사에 남는다. 그러나 흑사병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사례는 유명해질 수가 없었다.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일로 괜히 호들갑 떤 사건에 불과했다.

실제 역사에서 이탈리아 흑사병 대유행기인 1630년에 베로나 시민 54,000명 중에서 33,000명이 죽고 베네치아 당시 인구 14만에서 4만 6천이 죽었다. 그러나 베로나와 베네치아에서 고산국 의료진이 활약해 희생자가 겨우 100명 이내로 끝났어도, 잘했다고 칭찬해준 사람은 이민호가 유일했다.

심지어 자기들도 모르게 죽음의 위기를 넘긴 베네치아와 베로나 시민들은 의료진에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갑자기 도시에 늘어난 고양이들 때문에 밤에 시끄럽다고 불편을 호소했다. 피렌체와 교황령 볼로냐, 밀라노의 남쪽 항구도시 제노바에서는 시민들에게 괜한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고산국 의료진을 추방하는 논의를 진행했다. 고산국 의료진은 이런 불편한 시선 속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문제는 밀라노요.”

“그렇습니다, 전하. 유럽 귀족들, 특히 신성로마제국 고위 귀족들이 아국에 질투가 심해 우리 의료진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어렵습니다.”

밀라노 총독 코르도바가 고산국 의료진의 입경을 여전히 반대해서 문제였다. 그 사이 밀라노에서는 ‘흑사병을 퍼뜨린 자’라는 죄목으로 세 명이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다. 쥐의 사체를 사람 통행이 잦은 곳으로 옮기거나 우물에서 의심스런 행동을 한 자들이라는데, 흔히 유대인이 그런 의심을 받았다.

“저놈들 하는 꼴을 보니 여차 하면 우리가 감염원으로 몰릴 뻔했소. 스위스 용병들이 휴가 가는 길에서 밀라노를 제외시켰소.”

“잘하신 조처였습니다. 총독이 밀라노에 대한 우리 의료진의 진입을 통제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밀라노 주변을 차단해 확산을 막는 수밖에 없습니다.”

밀라노 시민 13만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으나 도시 밖으로 탈출할 수도 없었다. 밀라노에서 운 좋게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다른 모든 지역에서 밀라노와 통하는 길에 병력을 배치해 통행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총독 코르도바는 밀라노 시민 3만여 명이 죽어간 시점에서야 고산국에 의료 지원을 요청했다. 제노바에서 대기 중인 의료진이 즉시 밀라노에 진입해 항생제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예방대책을 강구했다. 흑사병 전염의 주범으로 고양이가 지목돼 밀라노 시민들이 다 죽여 버렸기 때문에 고양이를 활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시 전체에 쥐약을 놓아 쥐를 구제했다.

그 사이 중증 환자 5천 명이 더 죽었지만 더 이상 밀라노에서 흑사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게 됐다. 실제 역사에서 밀라노에서만 총 6만 명이 흑사병으로 죽었으나, 총독과 시민들 입장에서는 환자 5천 명이 더 죽은 일로 인해 고산국 의료진에 대한 불신이 만연했다. 몇몇 고산국 의사와 간호사들이 밀라노 시민들에게 구타와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고산국 의료진이 조기에 활동한 베네치아와 입경을 금지한 밀라노에서 환자 및 희생자 발생 수를 비교해보면 논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흑사병에 공포를 느낀 밀라노 시민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고, 고산국을 시기하는 귀족들이 고산국에 부정적인 여론을 부채질했다. 다 그런 것이다.

“다른 이탈리아 시민들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베네치아는 이번 일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외부의 평가를 떠나서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은 수없이 많은 생명을 구했지 않습니까? 의료인이 된 보람을 생생하게 느꼈을 여러분께 축하드립니다.”

오랜 파견 기간이 끝난 후 귀국한 의료진에게 이민호가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이민호는 내심 의료진들이 약간 부럽기도 했다. 용기와 봉사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점에서 군인들이 세운 전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 베네치아는 이번 흑사병 유행에서 인구 절반을 잃고 상업과 정치지도력이 급격히 쇠퇴한다. 그러나 유행 초기에 고산국 의료진을 받아들인 덕에 겨우 100명 정도의 희생자를 내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의료진 덕분이 아닌 행운이라고 여긴 시민들이 더 많았지만, 오히려 이게 더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밀라노 파견 의료진 일부가 아직 귀국하지 않았소? 숫자가 좀 비는 것 같구려.”

“예, 전하. 밀라노에서 함께 일하던 줄리아 성녀님을 따라 의료진 31명이 만토바로 향했습니다.”

단장의 대답을 들은 이민호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전쟁이 지속되는 만토바에서 수녀들과 의료진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만토바에서 제국군으로 활동하는 거의 4만에 달하는 독일인 용병, 란츠크네히트 때문에 조만간 큰 사고가 날 것만 같아 몹시 불안했다.

그러나 신념에 따라 행동한 수녀와 의료진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작년부터 이들이 이민호의 지시를 거스를지 모른다고 예상하기도 했고, 이제는 아예 포기했다.

“만토바에 의약품과 장비 지원을 지속적으로 해주시오. 조정에서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해 양쪽 군대에서 수녀들과 의료진의 안전을 보장해주도록 타진해보겠소.”

“예! 전하! 감사합니다!”

단장이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간 차원에서 만토바에 의료진을 추가 파견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막는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앞으로 희생자가 생기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주인님. 막대한 예산과 의료진의 희생을 감수하며 이탈리아 도시들을 도와줘야 했는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많아요. 현지 평가도 곱지만은 않아요.”

“그렇소, 총리. 예방 잘했다고 칭찬 듣는 경우는 없소. 그러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은 다음에 도착해서 명의 소리를 들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총리 혜영에게는 일단 이렇게 이유를 댔다. 그러나 전염병이 도는 외국에서 자체 방역이 어렵다면 선진국에서 의료진을 파견하는 것이 현대 문명국의 의무 중 하나였다. 물론 이 시대에 그렇게 말해서는 납득시키기 어려울 것 같아 설명을 대폭 생략했다.

중세부터 근세까지 흑사병이 유행한 도시는 예외 없이 무역이 활발한 도시였다. 작년 새원산처럼 고산국 주요 도시들이 언제든 흑사병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국가방위 방법 중 하나인 선제적 예방전쟁처럼, 아예 외국 발병지에서 전염병 확산을 막는 것이 자국의 공중보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현대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하는 에볼라 바이러스도 이와 비슷한 경우였다. 자칫 자국에까지 전염될 수 있으므로 선진국 의료진이 콩고나 수단, 자이르에 가서 인명피해를 무릅쓰고 에볼라 바이러스의 확산방지에 노력했다.

“밀라노에서 발생한 감염환자 중 겨우 5천을 구했을 뿐이에요.”

“5천이라는 생명은 이미 충분히 많은 숫자요. 그러나 나는 의료진이 20만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고 평가하고 있소.”

이 시기에 도시에서 흑사병이 번지면 평균적으로 절반 정도가 죽는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피해를 최소화한 베네치아와 베로나뿐만 아니라 흑사병이 아예 퍼지지 않은 교황령 볼로냐, 나폴리,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들의 인구를 감안하면 이번에 고산국 의료진이 구한 생명이 그 이상으로 계산될 수도 있었다. 위에 언급한 도시들은 실제로 1630년 전후로 흑사병이 창궐해 큰 인명피해를 낸 도시들이다.

섬서에서 왕가윤이 이끄는 농민반란군과 관군의 전투장면을 찍은 영상이 입수됐다. 이민호가 참모본부 요원들과 함께 영상을 감상했는데, 역시나 직접 봐야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다들 갑옷을 입어서 처음에는 이쪽이 관군인 줄 알았다.”

“관군 출신이 다수 가담하기도 했지만, 저들이 농민반란군의 핵심 정예이기 때문입니다. 후방 부대에서는 갑옷 착용 비율이 낮습니다.”

화약무기가 전장의 주도권을 쥐어가는 시대였지만 아직은 날붙이 냉병기의 사용이 더 많았다. 그래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갑옷을 착용하는 것이 바람직했고, 최대 300만을 동원하는 명나라의 군사제도 하에서는 민간인도 갑옷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이었다.

20세기 중일전쟁 때에도 일본군이 총검돌격을 유효한 전술로 활용하는 바람에 탄약 보급이 부족한 중국군이 항일대도라는 이름으로 칼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그러나 총이 주력무기가 되면서 칼을 보조무기로 사용하더라도 갑옷은 점차 사라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였다.

“농민반란군 주제에 진법 활용을 잘하네.”

“전직 관료와 지식인들이 반란군에 대거 가담했다고 합니다.”

그저 우르르 몰려다닐 줄만 알았던 농민반란군들이 뜻밖에 제법 진형을 갖춰 부대 간에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지식인들이 가담했다면, 여차 하면 농민반란군에서 국가 체계를 수립할 수도 있었다. 이래서 농민반란은 초기에 진압해야 하는데, 명나라 조정은 우물쭈물하다가 그 중요한 시기를 날려버렸다.

이에 반해 관군은 훈련이 부족한지 기동이 약간 어설픈 듯했다. 인원도, 장비도, 사기도, 전투의지도 전반적으로 부족했다.

“끝났군.”

관군의 진형 한쪽이 무너지면서 전투는 결국 농민반란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관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허겁지겁 도주하자 농민반란군 기병들이 멀리까지 추격해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섬서가 명나라 북부지방이라서 그런지 반란군에도 기병의 비율이 의외로 높았다.

조선군의 기병 비율은 함경도 같은 북방에서 3분의 2, 평균적으로 절반을 살짝 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의병도 기병 비율은 관군과 비슷하게 맞추려고 노력했고, 제주 목사에게 군마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장군이나 의병장이 탄 외에는 말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월봉과 군량보급에 문제가 많아서 관군이 이 지경이 됐습니다.”

“정예만 남기고 나머지 부대를 해산하면, 안 되겠지?”

“당연합니다. 해체된 부대의 병사들이 농민반란군에 대거 가담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월봉을 못 받는 병사들의 탈영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민호는 참모의 대답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명나라는 분명히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정규군이 반군으로 돌아설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답을 뻔히 아는 명나라 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전하! 황도 외곽의 수비를 맡은 우리 파견군을 귀국시켜 달라는 비공식 요청이 있었습니다. 주둔비 부담 때문입니다. 그 돈을 아껴서 반란진압에 나선 관군을 보강시키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습니다.”

“그 돈을 관군을 위해 쓰겠다고? 잘도 그러겠다.”

세금과 예산 집행이라는 국가운영체제가 무너진 명나라 입장에서, 황실 방위를 위해 북경 인근에 배치한 1개 대대의 고산국 육군 주둔비도 부담스러워 했다. 물론 그 자금이 관군에게 사용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고, 어디로 흘러갈지 이민호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민호는 자국 부담으로 북경 주둔군을 유지할까 하다가, 명나라의 멸망과정에 개입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황제나 환관들이 고산국과의 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고 있었지만 여기서 얻은 자금은 절대 국방비로 가지 않았다.

“교대 병력까지 합하면 거의 1개 보병연대 병력을 아끼겠군.”

“도련님. 명나라 문화와 해외 파병에 익숙해진 병력이라 해체하긴 너무 아깝습니다. 그 1개 연대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신속증원군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합니다.”

“남미에 있는 부대처럼 말이야? 그게 좋겠어. 계복 대원수가 알아서 편성해.”

북경 방어에서 빠지는 1개 대대, 실체는 1개 보병연대인 부대의 임무를 이참에 기동군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력 강화에 욕심 많은 계복에게 편성을 맡겼더니 보병연대를 해병원정여단 수준으로 강화해버렸다.

사단도 아닌 보병연대 휘하에 수색대대를 편성하는 것도 웃겼지만, 그 수색대대에 장갑차 중대뿐만 아니라 직승기 중대가 임시 배속도 아닌 기본 편제로 아예 예속돼 있었다. 이민호가 따졌지만 계복이 씩 웃는 바람에 넘어가기로 했다. 신속증원군 연대가 농민반란군 3만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계복의 주장에 이민호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종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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