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71화 (920/1,000)

00971    104. 제국의 길  =========================================================================

“토지분배를 해야 한다고요? 귀족과 지주로서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신료들의 충심을 국왕으로서 기쁘게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핀란드에 분배할 토지나 있소? 그깟 중소지주와 자작농들이 소유한 손바닥만 한 농지를 똑같이 분배했다간 어떻게 되겠소? 지주와 자작농, 소작농들이 똑같이 굶어죽고 말 것이오.”

이민호가 민정과 함께 석천의 목소리에 이끌려 핀란드 귀족과 지주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옥좌에 앉은 석천 옆에 쿨리키 왕비가 요대에 기병도를 차고 기병용 권총 세 개를 가슴띠에 매단 채 우뚝 서 있었다. 뒤에는 스위스 용병들이 할버드를 들고 한 줄로 쭉 늘어서 있었다.

석천과 지주들이 자기들 입장에서 반대로 말하는 것 같다고 민정이 이민호에게 속삭였다. 자기 이익보다는 일단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핀란드는 모든 구성원들의 힘을 모으는 건국 초기의 빛나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물론 앞으로 핀란드가 잘될지 여부는 고산국의 도움이 아니라 전적으로 핀란드라는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달렸다.

“하오나 전하! 핀란드는 토지가 척박하고 비좁습니다. 드넓은 옥토가 펼쳐진 고산국 농촌과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농지의 생산성을 높여야 합니다.”

“나는 기존 자작농의 토지는 건드리지 않고 숲을 개간해, 개간 작업에 참가한 소작농과 빈농들에게 농지를 나눠줄 계획이오. 자작농들도 북유럽 기준으로 경작지가 협소하니 개간 토지를 더 분배받아야 할 듯하오. 결국 모든 농민들이 개간 작업에 참가해야 한다는 뜻이오.”

핀란드 개발 계획은 현지 사정을 충분히 파악한 다음 고산국 정부에서 이미 준비해놓았다. 국왕 석천과 왕비 쿨리키는 핀란드 백성들을 국토개발 사업에 총동원하는 일에 전념했다. 오랜 압제와 폭정의 세월 후에 처음으로 독립해서 그런지 핀란드 백성들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오나 국왕전하! 고산국의 부왕께서는 당신께 ‘핀란드의 숲을 잘 가꾸라, 거기서 핀란드 백성들이 먹을 것이 나올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부왕께서는 동시에 ‘국토를 잘 이용해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라.’고 하셨소. 핀란드에 인구가 적으니 숲을 어느 정도 개간해 경작지와 초지로 활용하고, 나머지 숲도 장기간에 걸쳐 경제성이 높은 수종으로 바꿔 나가기로 했소. 물론 그 사이에도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킬 기반을 준비해야 하오.”

핀란드 귀족과 지주들은 새파랗게 젊은 국왕에게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웠다. 석천이 그 잘 나가는 고산국에서 배출한 뛰어난 인재이며 핀란드 발전을 위해 충분히 준비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석천이 핀란드 국왕에 지원한 다른 똑똑한 고산국 왕자들 수십 명을 제치고 최종 선출됐다는 과장된 소문 덕택에 기본적인 능력을 인정받고 국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현재 핀란드의 사정이 하도 열악해 내국인보다는 오히려 외국 출신 국왕이 좋은 점수를 받았다.

“주인님께서 정말로 그런 좋은 말을 해주셨나요?”

“그냥 여러 가지 좋은 말만 골라서 해본 소리지 뭐. 마치 성직자들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토론하는 것 같아 낯 뜨겁군. 자기들끼리 토론하라 하고 우리는 자리를 비켜주자고.”

민정과 대화하던 이민호가 석천, 쿨리키와 눈이 마주쳤다. 벌떡 일어나려는 석천을 제지하고 이민호와 민정이 손만 흔들면서 나왔다.

이민호가 지나가는 길에 핀란드 귀족과 지주들이 바닥에 엎드려 감사를 표했다. 그 사이에도 핀란드 국왕이 참가한 토론이 계속됐다.

“전하! 핀란드의 농민들은 고산국의 선진 농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이 새 농법에 적응할 때까지 짧은 기간이라도 협동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동안 고산국에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농법과 소유 방식을 시험했소. 다양한 지역에서 40년이 넘는 시험 결과 협동농장은 개별 소유 농장보다 생산성이 12분의 1도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소. 넓은 협동농장보다 차라리 그 농장 구성원들이 소유한 집 뒷마당 텃밭의 생산성이 훨씬 높다오.”

“오오! 그렇습니까?”

농법을 비롯해 국가운영 전반을 놓고 토론한다면 핀란드 귀족이나 지주들은 결코 석천을 이길 수 없었다. 토론 위주 교육은 고산국에서 전반적으로 실시되는 교육방법이었고 특히 왕실 저녁 식사 때의 토론은 유명 학자들을 초빙해 현대 대학원 수준은 됐기 때문이다. 토론 주제를 미리 공지하기 때문에 왕자와 공주들이 준비를 많이 했다.

그리고 석천은 핀란드 귀족과 지주들이 갖지 못한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를 갖고 토론에 임하고 있었다. 고산국의 다양한 풍토에서 40년이 넘도록 축적된, 지극히 과학적인 농법을 따라올 나라는 이 세상에 따로 없었다.

“정말 그런가요, 주인님?”

“당연하지. 인간의 욕망을 뭐로 보는 거야? 여진족이나 함경도 사냥꾼들이 집단으로 사냥을 할 때도 똑같이 배분하는 제도는 못 봤잖아?”

겨울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냥에 나설 때도 사냥감을 똑같이 나눠받는 법이 없었다. 사냥감에 첫 번째 창을 적중시킨 자는 어느 부위를 받고 치명상을 입힌 자는 어느 부위를 받고 하는 등등의 규칙은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지역마다 실시됐다. 신석기시대 여자들이 함께 산에 올라 열매와 나물을 딸 때도 분배 자체를 할 이유가 없다.

구소련에서 협동농장은 금방 망했고, 공동생산 균등분배라는 이상적인 원칙의 유지는 이스라엘 공동농장 키부즈에서나 가능했다. 그러나 키부즈에서도 생산성이 떨어져 팔레스타인 주민을 고용하거나, 21세기에 들어서서는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와 일을 시켰다. 이렇게 인간 세상에서 경제적 동기란 생산성 향상의 강력한 동력이며, 게으름을 피울 이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반드시 게을러진다.

“하긴, 도시 노동자들은 설렁설렁 일하는데 농민들은 참 죽어라 열심히 일하더라고요. 자기 농장에서 일한 만큼 돈을 버니까요. 아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많이 버니까요.”

“고산국 농민들의 다수는 조선에 남은 농민들과 혈통적으로 동일한 사람들이야.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에게 게으르고 굼뜨다고 욕먹던 바로 그 사람들이지. 유럽에서 게으른 하층민 취급 받던 모리스코나 아일랜드 사람들도 고산국 농민이 되면 죽어라 열심히 일해.”

“열심히 일할 이유가 있으니까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군요. 석천이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열심히 일할 이유를 만들어줄 거여요. 백성들이 부유해지는 와중에 나라도 부강해지겠죠.”

명나라나 조선에서 자작농을 육성하려는 정책이 비단 민생안정이나 군정(軍丁) 확보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자작농의 생산성이 소작농이나 노예들의 집단농장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지배층에서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지배층이 대지주로 성장하면서 자작농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소작농에 대한 착취가 심해지면서 유민이 늘어난다. 명나라는 나라 전체가 무너질 때가 온 것이 아니라, 무너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에 반해 조선은 고산국으로 하층민 인구가 꾸준히 유출돼 명나라처럼 큰 위기를 맞지 않았다.

“주인님. 시베리아 철도 방어 작전 보고서가 왔어요. 보고서는 제가 검토했으니 요약본을 보세요.”

“어. 건주 여진 놈들도 참 열심히 하는구나. 명나라를 통해 화승총도 좀 구했네? 기병 돌격 중에 쓸 수는 없겠지만.”

핀란드 국왕 대관식에 참가할 고산국 왕실 일행이 철도를 통해 핀란드로 간다는 정보를 두 달 전부터 여진 지역에 흘렸다. 실제로 이민호가 동해여진 곰나루 항에 나타나 기차에 타는 것이 대중에게 노출됐다. 그러나 이민호와 왕실 식구들은 40km도 지나지 않아 비행기로 바꿔 타고 헬싱키로 날아갔다.

고산국 왕실 식구들이 기차에 탔다는 정보가 이민호를 노리고 있던 후금에 들어간 것이 확인됐다. 시베리아 철도 노선 20여 곳에 대한 후금과 남몽골 연합세력의 파괴공작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우 세 곳에서 성공했고, 이마저도 기차가 지나가기 전에 발견됐다.

그와 같은 시간에 후금과 몽골 기병 주력 2만이 울란바토르를 우회해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그러나 바이칼 수비대와 고산국에 협력하는 몽골 부족들의 연합군, 그리고 마지막에는 철도경비대가 기마대군의 전진을 막았다. 결국 후금과 남몽골 연합군은 몇 번이나 패한 다음 결국 남쪽으로 쫓겨났다.

후금 기병들은 남몽골로 돌아가는 내내 폭격을 당해 출발 당시보다 기병 숫자가 4분의 1 이하로 줄었다. 그러나 기병부대가 와해된 다음 분산해서 퇴각한 기병도 많아, 실제 사상자는 1만 정도에 불과했다. 이민호의 명령에 의해 항공대가 적극적으로 전투기와 폭격기를 동원해 추격에 나서지 않은 탓이었다.

“저들이 계속해서 주인님을 노리고 있어요.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후금을 멸망시키면 좋겠어요.”

“안심해. 내가 당할 리가 없으니까. 민정도 날 지켜주고 있잖아?”

“기병 세력을 남겨둔 것은 후금이 당분간 소멸되지 않길 주인님이 바라기 때문이겠죠?”

“그렇지 뭐. 하라는 만리장성 공략은 안 하고 말이야.”

이 시기에 후금도 나름대로 만리장성 공략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명군이 만리장성 후방에 50만씩 뭉쳐 있어서 웬만한 각오가 아니라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후금이 명나라 정규군을 만리장성에 묶어두고 있는 바람에 섬서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이 아직 와해되지 않을 수 있었다.

“서광계와 원숭환이 만리장성 남쪽에 대규모 둔전을 경영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내한성 볍씨를 준 바람에 명나라의 수명이 늘어나겠어요.”

“내버려 둬. 거긴 내한성 벼가 아니더라도 쌀농사가 가능한 지역이야.”

“후금과 명나라가 어서 같이 망해버리면 좋겠어요.”

“입 밖에 내뱉지는 마라.”

이민호가 민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곧 할머니가 될 민정이 마치 소녀 같은 눈빛으로 이민호와 함께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다가오려던 유럽 왕족, 귀족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오라녜 공! 반갑소.”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민정 왕비님도 아름다우십니다.”

이민호가 먼저 네덜란드 여러 주의 총독 프레데릭 헨드릭에게 인사하자 오라녜공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공식 명칭은 오라녜 공작 겸 홀란트, 젤란트, 유트레히트 등의 총독이었다. 네덜란드 남부 주들과 분리된 채 에스파냐와 독립전쟁 중이기 때문에 아직 통일된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탓이었다.

연회의 주인공인 석천과 쿨리키는 핀란드 귀족들과 지주들을 설득하느라 마치 대적을 맞이한 마법사와 호위 무사 같은 비장한 분위기였다. 그 사이 손님인 이민호와 민정이 연회의 중심에 서 있었다. 민정이 이민호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공작님이 제게 왕비님이라고 칭한 것은 고산국 왕실의 내분을 노릴 의도인가요? 아니면 정말 고산국 왕실 사정을 몰라서 저를 그렇게 부른 건가요?”

“그냥 민정이 듣기 좋으라고. 왜, 싫어?”

“저야 좋죠, 뭐. 핀란드 국왕의 모후라는 호칭보다 훨씬 좋아요. 호호! 오라녜 공, 감사해요.”

오라녜공 프레데릭 헨드릭은 전임 마우리츠의 배 다른 동생이었다. 그리고 오라녜공과 나이 차이가 심하게 나는 부인 아말리아는 네 번째 자식을 임신 중이라 대관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오라녜공이 다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셰토검보쉬 요새를 점령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범인은 상상도 못할 기발한 전술이었습니다.”

“오라녜공의 부하들도 쉽게 생각해낼 만한 전술이었소. 밖에 알리지 말아주시오.”

“그 전에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었을 겁니다. 전쟁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냅니다. 자금 부족으로 패퇴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 주를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고산국 국왕전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반드시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이어지는 내용이라 2편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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