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72 104. 제국의 길 =========================================================================
네덜란드에게 있어서 이민호는 강력한 자금줄이며 정치적 후원자라는 중요한 위치였다. 이민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대주주이며, 두 회사가 각각 동아시아와 남미 대륙에서 활발히 영업활동을 하도록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암스테르담에 설립된 여러 상업은행의 대주주이기도 했고, 네덜란드 선적을 가진 선박들 중에서 최대의 소유주였다. 그 전부터 네덜란드 경제를 지탱하던 유대인들의 자본도 이민호의 금력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물론 배당을 통한 자본 해외 유출과, 이번 브라질 공격을 막은 데에서 보듯이 외세 개입이라는 단점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단점을 합하면 이민호의 존재로 인해 네덜란드가 크게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다.
“서로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오.”
“고산국 국왕전하의 신뢰와 지원을 바탕으로 여러 주들이 계속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내정에 신경을 끄고 오직 전쟁에만 매달린 마우리츠와 달리 헨드릭은 외교와 경제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이번 셰토검보쉬뿐만 아니라 동부 전선 여러 곳에서 승리한 네덜란드가 조만간 완전한 독립을 쟁취할 것 같았다.
“잘 해보시오. 1만 5천 척에 달하는 네덜란드 무역선들이 전쟁에 동원되기보다는 상품 수송에 진력하는 편이 내게도 이익이오.”
“고산국에 돛이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상선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생각보다 적은 것 같습니다.”
“그렇소. 동력선이 빠르고 크기야 하지만 그래도 선원이 필요해서 말이오. 앞으로도 해운 분야는 계속 네덜란드와 덴마크에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소.”
“네덜란드의 선주와 선원들에게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잉글랜드 크롬웰의 항해조례 때문에 영란전쟁이 일어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운은 네덜란드에게 아주 중요한 산업이었다. 덕택에 조선 산업도 규모를 꾸준히 키울 수 있었고, 이는 해군력의 성장으로 나타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산국의 거대한 상선들이 대서양의 일감을 독차지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지금도 여전히 네덜란드와 덴마크 범선들이 대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것은 해양산업과 무역에 종사하는 모든 유럽인들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 동안 북미 대륙에도 고산국 인구가 충분히 늘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서양 해운의 절반 이상을 유럽 국가들에 맡기는 것은 선원 수급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호는 해군과 선원들에게 좀 더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억지로 백성들을 바다로 내몰아서 그 부인들을 외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태평양 쪽은 류큐 선원들이 아주 잘해주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류큐국은 무거운 인두세를 내게 하거나 왕명으로 집합명령을 내려 늦게 온 자들을 참살하는 등 비정한 인구 축소정책이 지속됐다. 그러나 새나하 동쪽의 평원은 이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고, 성인 남자 절반을 선원으로 바다에 내보내고도 여유가 있었다. 해운을 맡은 류큐인들 덕택에 고산국은 해군과 해병대로 해양인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국왕전하! 아일랜드와 이집트 백성들이 고산국의 속국으로 들어가길 청원한다고 들었습니다. 해상운송에서 핵심 지역에 위치한 두 나라를 속국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고산국에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해운에 강점이 있는 네덜란드도 그 덕을 보게 됩니다만.”
“카! 역시 오라녜공은 바다를 중시하는 네덜란드 사람이시오. 이집트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도 아일랜드는 모르고 넘어가기 쉽다오. 고산국에서 일방적으로 에이레 공화국을 지원하는 이유를 국내의 고위 관료들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오.”
현대의 나토(NATO)는 북대서양 조약기구라는 군사동맹이다. 이름만 보면 북대서양을 접한 국가들의 동맹체라는 뜻이며, 설립 목적은 동유럽에 위치한 공산국가들의 침공을 막아 서유럽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방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그 실체는 이름 그대로 북대서양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기구였다. 이는 미국이 냉전시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여전히 대규모 군대를 서유럽 국가들에 파견하고, 소련 해체 후에는 구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을 무차별적으로 나토에 가입시킨 것으로 확인된다. 미국의 방위선을 북미 동해안이 아니라 유럽으로 확장한 개념인 것이다.
반대로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와 일본, 대만, 필리핀, 호주로 구성된다. 한국은 일본이라는 GOP를 보호하기 위한 전방기지 GP 개념이며, 그래서 이차대전 이후 미국이 일본과 한국을 집중 지원했다. 20세기 후반 일본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구조적인 무역역조는 그래서 전략적인 측면이 강했다.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20세기 전반에 일본이 조선과 만주, 요동반도, 산동반도, 남경 주변 해안지대, 그리고 대만을 공략했던 것은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1차 방위선’ 개념이었다. ‘2차 방위선’은 석유와 희토류를 획득할 버마, 인도네시아, 파푸아 뉴기니와 남태평양의 섬들에 미친다. 외국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미친 계획이었다.
국가의 전략적 방어선 구축을 위해 일본은 외국을 침략함으로써 실패했고, 미국은 우호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성공했다. 미국은 일본처럼 외국 영토를 침략해 복속하는 대신, 무역역조를 감수하거나 군사력을 지원함으로써 대가를 지불하는 수단을 활용했다.
“역시 그렇습니다. 국왕전하께서 처음에 아이슬란드를 손에 넣고 지금은 포르투갈의 독립을 심정적으로 응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네덜란드 같은 소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거대한 전략의 완성입니다.”
“오라녜공은 내 동업자와 다름없으니 장기 계획을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렇소. 심정적 응원에 불과하오만 포르투갈이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는 편이 낫소. 그래서 포르투갈령 브라질을 침공하지 말아달라고 서인도회사를 통해 오라녜공에게 요청한 것이오.”
“그렇다면 혹시 모로코와 카나리아 제도도 고산국에서 장악할 예정이십니까?”
“아니오. 해적에게 협조하는 항구들을 좀 두들겨주면 알아서 협조하겠지요. 나는 침략자가 아니라서 협조자를 얻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오.”
20세기 미국처럼 고산국도 굳이 외국을 침공해서 영토를 새로 확보할 필요가 없었다. 적당한 당근을 제시하면 알아서 방어선에 참가할 나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료로, 혹은 싸게 외국에 식량과 의료지원을 하는 것도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고려해 신중히 결정했다. 거대한 성장을 이룬 아프리카 왕국에 수송선 말고 정식 해군이 없는 이유도 같았다. 이민호는 휴머니스트나 퍼주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 현대 미국 같은 부드러우면서도 냉혹한, 세련된 제국주의자였던 셈이다.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식민지를 착취하지 않겠지만, 국익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이집트와 에이레 공화국을 조만간 속국으로 받아들이시겠군요. 포르투갈이 독립한 다음에는 긴밀한 관계를 맺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베네치아 공화국은 어떻게 결정하실 예정이십니까?”
“오라녜공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묻는구려. 루스 차르국이 흑해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허락했소. 이제 이해가 가시겠소?”
“아하! 우크라이나가 목표가 아니었군요. 그렇다면 베네치아를 통해 유럽 내륙 국가들과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고, 크레타 섬을 통해 지중해를 제패하시겠습니다. 물론 고산국이 직접 침공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강대국들은 알아서 군사행동을 자제할 것 같습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내해로 만드는 전략에 이어, 고산국에 도전할 만한 강대국 주위에 보급 거점 겸 교두보를 마련하는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조만간 루스 차르국과 베네치아의 압력에 직면할 것이다. 페르시아는 남쪽으로 두바이와 아라비아 반도 동부 지역,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이 고산국 영향권 내에 들어오면서 토르구트에게 진격로가 완전히 노출됐다. 토르구트를 정식 속국이 아닌 부용국으로 활용하는 이유였다.
스위스 용병을 장기간에 걸쳐 대량 고용하는 것도 프랑스와 독일 남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북부를 견제하기 위한 세계전략의 일부분이었다. 스위스가 이들 강대국들에게 군사적으로 큰 위협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고산국이 직접 병력을 파견할 경우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었다. 다양한 선택권을 준비해놓으면 나중에 편해진다는 것이 이민호의 평소 생각이었다.
“이런 개념이 유럽에 아직 없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나는 제국주의자가 아니오. 나는 앞으로도 다른 나라의 현재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할 것이오.”
“고산국 국왕전하는 과연 세계의 위대한 군주이십니다.”
전혀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려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혹시 몰라 드리는 말씀인데, 나는 협조자를 원하지 속국은 별로 원하지 않소. 책임을 지기 싫어서 말이오. 네덜란드처럼 당당히 독립국으로 우뚝 서는 것이 멋있지 않겠소? 강대국들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네덜란드 사람들이야말로 자긍심을 가질 만하오.”
“고산국 관료들의 업무가 과다하다고 들었습니다만, 과연 그러겠습니다. 속국이라면 신경 써서 지원해줘야 하는 부담도 있겠습니다.”
“그렇지요.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이 정도가 딱 적당할 것 같소. 우리 앞으로도 잘해 나갑시다.”
이민호는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와 동인도회사의 주식 절반 이상을 갖고 있었다. 상업은행들도 마찬가지였고, 여기에는 고산국의 왕실 자금 일부도 예치해 놓았다. 지금도 네덜란드에서 단물을 실컷 뽑아먹을 수 있는데 괜히 골치 아프게 국가 운영을 떠맡을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래서 네덜란드 여러 주 의회들이 고산국의 속국이 되는 논의를 하는 모양입니다. 수십 년째 지속됐던 전쟁도 바로 끝낼 수 있을 테니 과연 좋은 방안이 아니겠습니까?”
“어허! 에스파냐와의 관계 때문에 곤란하오.”
“제가 그 말씀을 여러 주 의회에 전하겠습니다. 독립을 완수한 다음 다시 의제로 올릴지도 모릅니다.”
“만약 속국이 된다면 네덜란드만 세금을 올릴 것이오.”
“상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위협입니다. 진심이셨군요.”
네덜란드의 주도 세력은 상인이었다. 이민호가 군함을 이끌고 갔을 때 알아봤듯이 발트해의 한자동맹 도시들처럼 네덜란드 역시 시장도 상인, 법관도 상인, 시의회 의원들도 대부분 상인들이었다. 그래서 반드시 종교 갈등 때문에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추진한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에스파냐 본국에서 네덜란드의 세금을 올린 뒤부터 본격적으로 저항에 나섰다.
만약 고산국이 네덜란드를 지켜주는 대신 세금을 현재보다 적게 받겠다고 하면 얼씨구나 좋다 할 자들이었다. 이민호는 그게 무서웠다.
늦은 밤이 되면서 연회는 오히려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무도회가 시작되면서 오늘 연회의 주인인 핀란드 국왕 석천과 쿨리키가 가장 먼저 춤을 추었다. 한 곡을 마치자 그 다음으로 이민호가 민정의 손을 잡고 중앙에 나섰다.
핀란드 왕궁에 울려 퍼지는 흥겨운 음악은 이민호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춘향전>을 원전으로 한 무도곡이었다. 판소리는 아직 조선에서 생기지도 않은 시기라서, 궁정악장에게 무도곡으로 작곡하라고 맡긴 <춘향가> 중의 한 소절을 핀란드 궁정악단이 연주했다. 각각 파트너의 허리를 잡고 돌던 이민호와 석천이 서로 마주보며 키득거렸다.
“술통에 든 미주는 천 사람의 고혈이며 상 위에 놓인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일세.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 또한 높도다.”
============================ 작품 후기 ============================
2편 함께 올렸습니다.
외교전과 국제정세를 묘사한 연회는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