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73 104. 제국의 길 =========================================================================
새 에스파냐 대사가 신임장을 교부하기 위해 알현을 신청했다. 대사는 펠리페 4세의 총신 올리바레스 백작-공작의 천거를 받아 고산국으로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민호는 대사가 돈이나 밝힐 줄 알고 쉽게 봤는데, 뜻밖에 에스파냐 왕실에 제법 충직한 귀족이었다.
“신교도 국가의 행사라 참가하지 않았습니다만, 핀란드 국왕의 대관식과 연회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고산국에 속한 새 나라의 건국을 경하 드립니다.”
“고맙소. 신성로마제국 황제폐하께서도 대관식에 참가해서 자리를 빛내주셨다오.”
“아일랜드와 베네치아가 조만간 고산국의 속국이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두 지역에 공을 들인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에스파냐는 아일랜드가 독립하기 전에 무기를 수시로 보내 잉글랜드와 싸우는 아일랜드 독립군을 도왔다. 그리고 종종 병력을 보내 잉글랜드와 직접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에이레 공화국이 독립한 뒤 에스파냐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에스파냐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이 일이 진행이 안 될 것 같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하. 감히 어느 나라가 고산국의 행사에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다만 두 지역이 왜 유럽의 강대국 에스파냐가 아닌 멀리 떨어진 고산국에 의탁했느냐는 겁니다. 그저 궁금해서 드린 질문입니다.”
“대사는 두 나라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소. 나라가 아닌 지역이라 하지 않았소?”
외교관이 말 한 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법이거늘, 대사는 이민호가 들어도 트집이 잡힐 말만 골라서 했다. 유럽 최강대국인 에스파냐의 귀족들이 에이레 공화국을 반란에 성공한 식민지 하층민들 정도로,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흔한 도시국가의 하나 정도로 인식했기에 저런 말이 나왔다고 이민호는 판단한다.
“제가 실언을 범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굳이 대사를 설득할 필요는 없겠지만 남미 마푸체 족과 테우엘체 족이 떠오르는구려. 예전에는 에스파냐와 죽도록 싸우다가 지금 고산국의 지배 아래에서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소.”
“백 년 동안 마푸체 족과 싸우느라 에스파냐 군대만 2만 이상, 우호 종족 전사들까지 합하면 10만 이상이 전사했습니다. 기약 없는 전쟁에 소모된 군자금의 양은 말도 못합니다. 오죽하면 마푸체 족의 반란을 제2의 네덜란드 전선이라 부르겠습니까?”
“그들을 제압하느라 전쟁에 들인 비용의 절반만이라도 그들에게 선물로 보내지 그랬소? 마푸체 족은 의외로 계산이 정확한 종족이더군요. 마푸체 족이 힘든 광산 일을 자발적으로 해주는 덕택에 우리는 손쉽게 안데스 산맥에서 금과 구리를 무한정 캐내고 있다오.”
대사가 몹시 부럽다는 표정을 지어서 이민호는 무척 고소하게 생각했다. 마푸체 여러 지역에서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예산은 금광과 동광에서 매년 산출하는 광물의 값에 반도 미치지 못했다. 구리 가격을 아주 낮게 책정했을 때의 기준이었다.
구리는 철 다음으로 산업 발전에 중요하며, 산출지와 생산 규모가 제한돼 있는 광물이다. 총리 혜영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으나 대규모 노천 동광이 개발된 이후 주름살이 하나 줄어든 것을 이민호가 확인했다.
그리고 구두쇠로 소문난 총리 혜영이 이민호가 뭐라 하기도 전에 안데스 주변 지역 원주민들에게 마음껏 퍼줬다. 노천 동광 덕택에 고산국의 모든 도시와 마을의 수도관을 녹이 슬지 않는 비싼 동관으로 교체할 수 있게 됐다.
“아일랜드, 이제 에이레 공화국도 마찬가지요. 우리는 그 나라에 에스파냐처럼 무기와 식량만 보낸 게 아니오. 그 동안 황무지를 밭으로 개간해주고 새로운 종자와 농법을 전해서 그들이 일해서 먹고 살게 해주었소. 지금은 오히려 에이레 공화국에서 남는 밀과 양을 잉글랜드에 수출하고 있소.”
“부유한 고산국이나 가능한 이야깁니다.”
“장기간 투자라는 점에서 맞는 말이오. 그러나 에이레 공화국에서 빚을 다 갚을 날이 그리 멀지 않았소.”
“전하! 빚이라 하셨습니까? 클랜 수장이 긁적거린 채권이 회수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여러 클랜과 지역에서 무기와 식량 값을 매년 나눠서 받아내고 있소. 에스파냐에 진 채무는 이미 다 갚았다고 들었는데 말이오.”
에스파냐가 아일랜드에 식량과 무기를 지원하고 받은 형식상의 채권은 당시 기준으로 휴지나 다름없었다. 아일랜드가 독립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그 채권을 100분의 1 이하 가격으로 팔아치웠고, 고산국에서 아주 싸게 사들인 다음 에이레 공화국으로부터 변제를 받았다.
“만약 빚을 받아내지 못했다 해도 고산국에 손해는 아니었소. 아일랜드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잉글랜드를 아일랜드에 붙잡아두었으니 말이오. 에스파냐에게도 큰 이익이었소.”
“그건 그렇습니다, 전하. 그 사이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잉글랜드가 파병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황무지가 태반인 아일랜드를 속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이익이랄 게 있겠습니까?”
“요즘 아일랜드에 가본 적이 없는 모양이구려. 아일랜드의 황무지는 대부분이 옥토로 변했소. 그렇다고 아일랜드 주민에게서 세금을 받을 것도 아니니 별 의미가 없소. 받아도 푼돈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전하께서 아일랜드에서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에이레 공화국의 영토에 군항과 공항을 건설하기로 했소. 이제부터 북대서양의 서쪽 절반이 아니라, 북대서양 전체가 우리 고산국의 것이 됐소. 물론 모든 나라에 항해의 자유를 보장할 테니 에스파냐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소.”
북대서양 항로는 해류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시계 방향으로 일정한 코스를 유지한다. 에스파냐 선박의 항로도 아일랜드 앞바다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에스파냐는 고산국에 남미와 북미 영토를 다 팔았기 때문에 예전과 달리 북대서양 항로에 큰 이익이 달려있지 않았다.
“그렇군요. 대서양은 그 전부터 고산국의 바다였습니다만 이번에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다만 아일랜드에서 감시하는 고산국의 눈길이 유럽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에스파냐로선 무척 다행입니다.”
“고산국이 직접 유럽에 병력을 보내 전쟁을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오. 전에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에 통보했듯이 덴마크의 경우는 극히 예외에 해당했소.”
“장구한 세월이 소요되는 계획을 끝내 성공시킨 국왕전하의 책략과 관대함에 실로 감탄했습니다. 에스파냐는 부유할 때에도 외국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반성해봤자 이미 늦었습니다.”
“당장의 국익도 중요하겠지만, 제국은 제국으로서 다른 나라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이 많소. 다른 나라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가기만 해서야 어찌 그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뺏을 수 있겠소?”
수십 년 동안 고산국이 걸핏하면 외국에 퍼주고 만만해 보였기에 이제 와서 속국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나라들이 많아졌다. 만약 구두쇠 혜영이 외교를 담당했다면 에스파냐와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혜영은 똑똑하기에 외교를 맡아도 잘할 것이라고 이민호는 믿었다.
결국 고산국은 전쟁을 피함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영토를 얻었다. 그 영토가 반드시 직할령이나 속국일 필요는 없었고, 그저 자그마한 항구와 공항으로 족했다. 군항과 그 소재지 국가는 서로의 안전을 지켜주는 역할을 맡으면 충분했다.
“그럼 전하께서는 어째서 로마에 스위스 용병을 1개 연대나 주둔시킨 겁니까? 가톨릭이 국교도 아닌 고산국에서 주둔 비용 절반을 분담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에스파냐에서는 로마교황청에 얼마든지 정치적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압력은 상관없소. 다만 다른 강대국이 로마를 침략해 약탈하거나, 에스파냐에서 교황청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요.”
“그 정도라면 저희가 예상한 대로입니다만.”
“또 있소. 이탈리아 반도 중앙에 고산국의 군항이 생겼지만 아무도 반대할 생각을 못했지 않소? 그것만으로도 이익이 차고도 넘치오.”
“맙소사!”
실제 역사에서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 하나를 얻기 위해 수 세기 동안 러시아가 흘린 피와 땀을 생각해보면 항구 하나의 무게는 지극히 무거울 수 있다. 고산국이 성지순례와 스위스 용병 주둔을 명분으로 로마 서쪽 항구를 얻은 것은 러시아에 비해 거저먹기였다. 지중해 중앙의, 그것도 로마교황청 가까운 곳에 항구를 건설해 로마를 접수하다시피 했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항구는 로마 중심을 흐르는 테베레 강 하구에 건설돼 있었고, 군함과 수송선을 포함해 일 년에 겨우 열 척 정도만 번갈아 정박하는 소규모였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고산국에서 로마의 바닷가에 건설한 군항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고도 그 의미를 모른 채 넘어갔다.
“전하! 고산국은 오랫동안 우리 에스파냐의 친구였고 앞으로도 친구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물론이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에스파냐는 고산국의 첫째가는 우호국으로 남을 것이오. 물론 관계국이나 속국들은 빼고 말이오.”
그러나 고산국의 관계국과 속국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산국 입장에서 본 중요한 나라 서열에서 에스파냐의 순위가 한참 뒤로 밀린 셈이었다. 결국 에스파냐 대사가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에스파냐는 고산국에 우호를 구걸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증거로 밀라노의 총독에게 명해 국왕전하께 사죄문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정치적 노림수로 고산국 의료진의 노고를 폄훼하긴 했지만, 남의 도움에 감사할 줄 모르는 금수만도 못한 짓이었습니다.”
“흑사병 치료는 순수 민간 의료단체의 주도로 이뤄진 일이오. 그러니 의료진에 보내는 감사의 편지로 족하오.”
“역시 관대하십니다. 앞으로 에스파냐가 고산국과 국왕전하를 모욕할 일은 절대 없을 것임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대사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역시 밀라노에서의 일은 에스파냐 중앙에서 총독을 조종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을 내세워 강대국의 군주를 함부로 모욕하다니, 국가에 해를 입히기로 작정한 귀족들이 역시 문제였다. 국왕 펠리페 4세 또한 문제가 많아 에스파냐 왕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맙소. 에스파냐는 고산국의 건국 초기부터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았소. 전쟁을 통해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도 넓은 영토를 확보한 것에는 우방국인 에스파냐의 양보가 큰 역할을 했소.”
“파산 직후라서 당시 에스파냐는 영토 할양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북미와 남미도 사실 제대로 된 에스파냐의 영토라고 하기 부끄러웠었지만 국왕전하께서는 모른 척하시면서 에스파냐가 부른 값을 그대로 치러주셨습니다. 영토 매매 건은 오히려 에스파냐가 국왕전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아니오. 그래도 나는 에스파냐가 도와준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며, 후계자들에게도 유훈으로 남겨 영원히 기록할 생각이오. 만약 앞으로 에스파냐에 어려운 시기가 돌아온다면 주저하지 말고 고산국에 도움을 청하도록 하시오. 고산국의 첫 우방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도움을 드릴 것이오.”
“감사, 감사합니다. 전하!”
이민호의 약속은 그냥 빈말로 하는 감사 인사가 아니라 사실 무서운 말이었다. 장래에 에스파냐가 프랑스나 잉글랜드로부터 침략을 당할 경우 개입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 혈통 단절에서 비롯될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이 그리 멀지 않았다. 에스파냐가 이민호의 약속을 이용해 국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날지는 그 지배층 귀족들이 활용하기에 달렸다.
지난 7월 만토바에서 신성로마제국 장교 요한 폰 알드링언 등이 곤자가 공작가의 보물을 약탈해 독일로 실어 날랐다. 그 후로도 전투가 지속돼 많은 군인들이 죽어갔다. 만토바 계승전쟁이 끝난 것은 10월 13일이었다.
10월 말, 왕도의 대성당에서 왕실 가족들이 참석한 장례 미사가 엄숙히 진행됐다. 수녀 겸 의사 줄리아는 만토바의 야전병원에서 마지막 환자가 퇴원한 직후 과로로 쓰러졌다가 이틀 후에 숨졌다. 유해는 줄리아와 고산국 의료진 덕택에 목숨을 구한 교전 양측의 군인들에 의해 로마로 옮겨졌다고 한다.
고산국 장례미사와 같은 날 로마에서 교황이 직접 집전하는 장례 미사가 열리고 줄리아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됐다. 평소 줄리아에게 도움을 받았던 로마의 빈민들, 주변 도시에서 치료받은 환자들, 만토바 계승 전쟁에 참가했던 여러 나라 군인들, 그리고 흑사병으로 인구가 대폭 줄어든 밀라노와 고산국 의료진 덕택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베네치아 시민들이 대거 참석해 성당 밖 광장을 가득 메우고도 넘쳤다. 장례 참석자들의 말에 따르면 줄리아는 가고 나서도 계속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왕도 대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는 도중 이민호는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이민호가 기대한 대로 고산국은 장래의 성인을 얻게 됐지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줄리아는 평생, 그리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행복했을 것이오. 그럼 됐소.”
이민호의 양녀 줄리아의 선종을 위로하는 대주교에게 이민호는 그렇게 대답했다. 말하는 중에 울컥했으나 줄리아를 위해 끝까지 말을 이었다.
줄리아의 유품 일부와 일기장이 왕도로 돌아온 것은 두 달 뒤였다. 이민호는 유품을 가져온, 그리고 만토바에 끝까지 남아 환자와 부상병들을 돌본 의료진을 한 사람씩 말없이 포옹했다. 모두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이를 악물었으나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은 끝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우방이며 최대 경쟁자인 에스파냐와는 이 정도로 정리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