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78 104. 제국의 길 =========================================================================
기차를 타고 바이칼 남단 역에서 내린 이민호가 장갑차에 올랐다. 울란바토르와 가까워지며 한여름의 초원이 내뿜는 싱그러운 풀냄새에 취할 것 같았다. 하얀 양떼가 평화로이 노니는 곳이었고, 오래 전 정복자와 패배자들의 말발굽이 찍힌 곳이었다.
기병사단과 함께 행군하는 길은 쾌적한 편이었다. 동맹군 모든 병력이 고산국 참모본부의 엄밀한 시간과 위치 통제를 받아 이동하기에 병력이 뒤섞이는 혼란상은 단 한 번도 연출하지 않았다. 장갑차 단차장석에 오른 이민호의 시야 멀리 기병들이 초원을 가득 메우며 움직이고 있었다. 정찰기가 수시로 아군 진영 위를 지나 날아갔다.
“공동주택을 적나라하게 성곽으로 삼아버렸군.”
멀리서 본 울란바토르는 몇 안 되는 석조건물과 수많은 게르가 고산국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층 공동주택, 현대 한국의 아파트로 빙 둘러싸인 도시였다. 이곳이 고양시 일산도 아닌데 공동주택들이 도시의 방어선 역할을 겸했다.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수비대와 몽골인 협력자들이 어떻게 막아냈는지 이해할 만했다.
“전하! 이곳 울란바토르를 보고서야 아리수 강변 공동주택들이 왜 길과 강을 마주보는 식으로 방향을 잡았는지, 대부분 공동주택의 통로가 어째서 계단식이 아닌 복도식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국초부터 도시의 모든 건물들이 방어 작전을 염두에 두고 배치됐다는 사실에 저는 그저 전율할 수밖에 없습니다.”
“험! 뭐 그렇지.”
같은 장갑차에 탄 참모본부장의 감탄을 들으며 이민호가 장갑차 내부를 살폈다. 호위들이 이민호와 보낼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참모본부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참모본부의 수장 명칭이 참모총장이 되지 못하는 것은 참모본부가 아직 순수한 참모조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참모본부에 군령권이 전혀 없었으나 이번 연합작전에 한해 참모본부장에게 전체 지휘를 맡겼다.
“공동주택이 12층이면 총 13단으로 구성된 성벽인 셈입니다. 철근콘크리트라 일반 성곽보다 단단하고 훨씬 높은 밀도의 화망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혹시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아니. 나는 아냐. 그런데 전체 부대 지휘를 참모본부장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하하!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얼른 지휘장갑차로 돌아가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전하.”
호위들이 새치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참모본부장이 뒤늦게 발견했다. 마침 장갑차가 지정된 야영장에 도착했기에 참모본부장이 후다닥 장갑차에서 내렸다.
참모본부장 김현수 대장은 열여섯 살에 조선 해동상단에서 고용한 간수군부터 시작해 대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산국 왕도의 사관학교에 진학해 정식 장교로 임관한 다음, 육군대학과 국방대학원까지 차례로 이수했다.
그는 매 학교 졸업 성적은 뒤에서 세는 것이 훨씬 빨랐으나 기발한 전술과 적의 움직임에 재빨리 대응함으로써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요구 중에서 실현 가능성이 높은 순서대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전투 없이 원주민들을 우호 세력으로 돌려놓았다. 이민호가 원하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원주민들의 소요를 진정시켰기에 결국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몽골에서는 참모본부장이 최고지휘관이야. 본부장이 지시한 대로 좋은 시간을 보내볼까?”
“수라 먼저 드세요, 전하.”
이민호가 호위 지혜에게 손을 뻗는 순간 후방 쪽문이 열리며 수라가 들어왔다. 그러나 참 간소한 수랏상이었다. 식판에 밥과 국, 3찬이 일반 병사들에게 배식하는 것과 똑같이 놓여 있었다.
그래도 전투식량 봉지를 뜯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최고의 요리사, 조리사들이 도전했지만 건조식품을 맛있게 만드는 길은 아직도 요원했다.
“저번 라 로셸처럼 후금을 포위하고 전투식량만 먹게 하면 어떨까? 금방 항복하겠지?”
“몽골인들은 입맛이 전혀 달라서 모르겠어요.”
느끼한 고깃국, 상한 마유주도 잘만 먹는 몽골인들이었다. 유목민들이 양고기의 누린내를 좋아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입이 짧은 남프랑스 사람들과 비교하긴 곤란했다.
제1 기병사단의 전방을 기갑여단이 맡고, 좌우에 기보여단이 배치돼 전진을 시작했다. 기갑여단은 전차대대 2개에 기계화보병대대 1개, 기보여단은 전차대대 1개에 기보대대 2개로 구성됐다. 예하부대를 더 잘게 나눠 대대전투단을 구성할 수도 있었다. 기갑수색대는 크게 우회해 후금의 측면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정찰 직승기들이 남쪽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저 멀리 좌우에, 그리고 기병사단 대열 뒤쪽으로 수많은 기병들이 함께 달리고 있었다.
“이야! 20만이나 되는 기마대군을 이끌고 달리니 기분이 아주 근사하다.”
“주인님! 후금의 본거지까지 240km, 현재 진군 속도로 여섯 시간 남았어요. 기갑수색대가 적의 소규모 정찰대와 접촉해 전원 사살했어요.”
“많이 남았네.”
통신기를 맡은 호위가 보고하자 이민호가 하품을 하며 장갑차 내부로 들어갔다. 기계와 사람은 괜찮지만 말은 일정한 거리마다 쉬어줘야 한다. 그래서 소부대 기병이라면 몰라도 대규모 기마군단이 하루에 100km 이상 진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병사단과 나머지 동맹군 기병들은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남는 시간에 뭐하지? 흐흐.”
이민호가 느끼한 눈길로 장갑차 안에서 일하는 여자 호위들을 바라봤다. 세월이 흘러 최연소 호위의 나이가 어느덧 30대 후반에 달했으나 이민호가 보기에는 여전히 파릇파릇했다. 어젯밤에도 비좁은 장갑차 안에서 광란의 밤을 지새웠다.
호위들끼리 잽싸게 눈을 마주치더니 후방 쪽문을 잠갔고, 통신을 맡은 호위는 볼륨을 낮췄다. 이상하게 군대에서는 그저 시간만 나면 졸렸다. 특히 장갑차 안은 사람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울란바토르에 고산국의 동맹 20만 기마대군이 집결한 사실은 후금 본영에도 이미 알려졌다. 그러나 고산국 기병사단을 선봉으로 기마대군이 울란바토르를 출발했다는 사실은 아직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았다. 중간에 마주친 모든 후금과 몽골 척후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미친 듯이 말을 몰아 달리는 척후인지 전령인지 모를 후금 기병 바로 뒤를 고산국 전차 한 대가 속도를 내서 따라잡고 있었다. 이민호는 그 후금 기병을 응원했으나, 몇 초 후에 전차가 기어코 깔아뭉개고 말았다. 적의 본진에 가까워지면서 참모본부장이 전군에 사격 금지 명령을 내렸기에 전차장이 이렇게 대처했다.
“전방 언덕에 두정갑을 입은 후금 기병 20여 기. 참모본부에서는 적의 척후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전차소대가 조준 중입니다.”
“사격 중지! 금색과 흰색 갑옷을 확인하라고 해!”
언덕이라 불렀지만 하도 낮아서 타르박의 굴로 쓰일 만한 낮은 지대에 기병들이 서 있었다. 이민호가 쌍안경으로 전방을 살피는 중에 참모본부장과 통신이 오갔다.
“예! 참모본부에 전달했습니다. 아! 수은갑이라고 합니다.”
“홍타이지다. 생포해!”
이 시대에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 지휘부가 언덕에 올라 지형을 살피고 적세를 관찰하는 일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유럽 근대 국가들의 인물화나, 외국의 침략을 물리친 전쟁을 소재로 한 현대 한국 민족화에서도 군주나 장군이 말을 탄 채 언덕에 서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후금과 그 협력 부족들에게는 매우 안타깝게도 상대가 하필 고산국 군대였다. 그리고 고산국 군에서는 강습대대를 운용하는 다양한 교리를 아직 국내외에 노출시키지 않았다.
- 두다다다다~
직승기 네 대가 언덕으로 날아올랐다. 탑재 기관총으로 호위병들을 쓸어버린 다음 직승기 두 대가 착륙해 강습보병들을 쏟아냈다.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못 차리는 후금 지휘부를 보병들이 포박한 다음 직승기에 강제로 태웠다. 뒤늦게 후금 기병 수백 기가 언덕으로 올라왔으나 직승기들이 다시 이륙한 직후였다.
운이 좋게, 혹은 당연하게 개전 초반에 적의 지휘부 전체를 생포했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다.
- 구궁~ 쿠웅~
언덕 너머에서 폭음이 연속됐다. 떼를 지어 날아온 폭격기들이 후금 본영에 폭탄을 줄줄이 투하하고 있었다. 이어서 포병여단에서 로켓탄을 연속 날리고 자주포가 불길을 뿜어냈다. 목표인 적의 위치는 정찰 직승기가 시시각각 확인해 통보해주고 있었다.
- 마침 적의 본군이 한 곳에 집결해 있다. 사방으로 포위해서 단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이번 원정은 이 전투 한 번으로 끝내겠다!
- 예! 총사령관님. 적이 자그마한 움직임만 보여도 즉각 화력으로 응징하겠습니다!
지휘부 통신망에서 참모본부장과 기병사단장이 나누는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전투에서 최고 사령관과 현장 지휘관으로 나선 김현수 대장과 기병 사단장이 놀라운 행운에 감격하고 있었다. 후금의 협력 부족들이 20km 거리에 좌군과 우군으로 따로 병영을 세우고 있었지만 이곳 본군과 동시에 폭격을 당하고 있었다.
선봉에 선 기갑여단을 따라 이민호가 탄 장갑차가 언덕을 넘었다. 드넓은 평원에 수많은 게르가 세워져 있었으나 일차로 폭격, 이차로 포격을 받아 절반 이상이 무너지거나 불타고 있었다.
개미떼처럼 많은 사람과 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기계화 보병 여단 둘이 좌우로 전개하고 있었다. 멀리 남쪽 후방은 전장을 크게 우회한 기갑수색대가 때맞춰 나타나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참모본부장이 기갑수색대에게 기동 계획을 정해준 것이었다.
- 콰쾅! 두두두두두~
그 후로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거의 5만에 달하는 후금 본군은 고산국 기병사단의 탈을 쓴 기갑부대에게 대적할 방법이 없었다. 기마병을 상대로는 포보다 기관총이 확실히 더 위력적이었다. 말을 탄 기병들이 말과 함께 우수수 쓰러졌다.
하늘에서는 폭격기에 이어 전투기들이 기총소사를 퍼부어 지상을 휩쓸었다. 후금과 몽골 기마병들이 수백 명씩 대오를 이뤄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전차와 장갑차에서 화력을 쏟아 부어 와해시켰다.
제1 기병사단에서는 말을 단 한 마리도 보유하지 않았고 동맹 기마군단은 100km 북쪽에 있었다. 그래서 현재 이 지역에서 말을 탄 놈들은 무조건 적이었다. 공중 공격에서 흔히 발생하는 오인공격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강습대대장에게 전달해. 적의 수괴들을 전장이 잘 보이는 높은 언덕에 꿇어앉히라고!”
“예! 주인님!”
처음 언덕에서 생포된 자들은 역시 후금의 한 홍타이지와 고위 장수인 패륵들이었다. 전투 초반에 이렇게 적의 핵심 지휘부만 쏙 뽑아서 무력화시키기도 어렵겠지만 전쟁문화의 극심한 차이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었다.
- 국왕전하께 보고합니다. 방금 폭격을 끝낸 적의 좌군과 우군에 포격 진행 중. 포격이 끝나면 강습대대 하나씩을 보내 하늘에서 적을 섬멸하겠습니다.
“잘했다, 본부장. 계속 몰아쳐!”
전투는 작전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적은 대응할 시간도, 대응할 무기도 없었다. 전차와 장갑차를 향해 무모하게 돌격하다가 속절없이 쓰러질 뿐이었다.
만약 후금과 협력 부족들이 초원에 넓게 흩어져 있었다면 제압하는 데 시간이 걸렸을 테고, 보급에 한계가 있는 고산국 원정군은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산국 동맹 기마대군이 울란바토르에 차곡차곡 집결하는 것을 알고 후금이 병력을 집결시킨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20만 기마대군을 겨우 5만에서 7만으로 치려는 후금 홍타이지의 용기가 가상했다.
물론 전술이나 사기 등의 다른 요인으로 인해 소수가 승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러나 기병이라고 다 똑같은 기병이 아니었다. 동맹군 20만 기병 중에서 토르구트와 루스 차르국 기병은 일부 근대화가 진행 중이었다.
이들은 활이 아니라 말에 탄 채로 권총도 아닌 머스킷을 쏠 수 있었다. 그 머스킷도 매치락, 화승식이 아니라 부싯돌로 화약을 점화하는 플린트락, 수발식 소총이었다. 본토 소속인 여진 기병은 단발총을 쏘아 화력 하나만큼은 압도적이었다.
고산국 기병사단까지 출동했으니 후금이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었고, 시간을 끌어 비길 가능성만 아주 적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후금이 병력을 집결해 대응하려다가 비길 기회마저 날려버렸다.
- 콰쾅! 두두두두두두!
전차와 장갑차들이 끝없이 포화를 퍼부었다. 후금의 본군을 포위한 채 전투가 지속되면서 대열 뒤로 빠지는 전투차량들이 생겼다. 이들을 향해 탄약차가 움직여 탄약 보급을 추진했다.
기계화 보병들은 장갑차에서 내리지 않고 승차 전투를 지속했다. 기관총이 전차에 4정, 장갑차에 3정이 기본 탑재돼 있어서 보병이 하차하지 않더라도 화력은 충분했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기마돌격을 감행하던 후금과 몽골의 기병들이 기관총에 맞아 연거푸 쓰러졌다.
“덴마크에서 제국군 보병을 상대할 때보다 긴장감이 아주 조금 더 높은 것 같아요. 후금과 몽골군은 기본이 기병이니까요.”
“그래.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당한다 해서 기병이 당장 없어질 것은 아니야. 우리 기병사단 몇 개도 거의 기병만으로 구성됐잖아?”
“그 부대들을 전쟁에 주력으로 투입할 건 아니잖아요. 마의와 마부들이 고생해서 번식시킨 천리마, 한혈마가 아까워요.”
호위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장갑차가 언덕에 도착했다. 후금 포로들은 오랜 세월 함께 싸웠던 수하들이 일방적인 전투 끝에 전멸하는 장면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가 후금의 한, 홍타이지인가?”
“저입니다, 고산국 국왕전하. 제가 그래도 한 나라의 군주인데 이렇게 포박하는 것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우리 병사들이 한의 얼굴을 몰라서 그랬나본데, 내가 정식으로 사과하지.”
이 시대 전쟁 관습에 맞게 홍타이지의 포박을 풀어주고 이민호가 직접 사과도 했다. 후금도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항복했을 때 밧줄로 묶지 않을 정도의 개념은 있었기에 이 정도 예우는 해주었다. 그러나 무기는 압수한 채 돌려주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2편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