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83 104. 제국의 길 =========================================================================
후금이 멸망하고 만리장성 방어선이 안정되자 명나라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농민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삼변총독 홍승주와 북직예 순무 원숭환이 대군을 이끌고 농민반란군을 서쪽으로 밀어붙였다.
전임 삼변총독 양학은 군사를 동원한 토벌보다는 회유를 통해 농민반란군을 해산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변초변무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양학이 파면된 다음 임명된 홍승주는 반란군이 항복하더라도 처형해버리는 극단적인 토벌을 휘하 부대들에 강제했다.
이제부터 항복해도 목숨을 구할 수 없는 진짜 전쟁이 시작됐다. 필사적인 대규모 싸움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관군에 비해 병력조차 적은 농민반란군은 결국 산서로 밀려났다. 연수동로부총병 조문조가 농민반란군의 수령 왕가윤의 본군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워 총병관으로 승차했다. 농민반란군 잔여 병력은 일단 왕자용이 통솔했다.
“이번에는 농민반란이 진압된 것 같지만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기상이변으로 섬서 지방 쌀값이 폭등해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니 조만간 또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상이변이 지속되는 동안 매년 쌀 백만 섬 정도를 섬서에 싸게 공급할 수 있다면 반란은 금방 가라앉을 겁니다.”
“세자 말이 맞다. 하지만 한참 내륙지방인 섬서까지 쌀을 수송하는 비용이 쌀 가격의 몇 배나 든다. 섬서 지역 곡가가 폭등했다지만 수송비를 빼면 미곡 상인들에게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
“아바마마. 명나라 중기에 군량을 장성의 군영에 공급할 때처럼 상인들에게 섬서로 미곡 수송을 맡기고 그 대신 소금 전매권을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세자에 이어 세자빈이 의견을 냈다. 세자빈이 업무에 익숙해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세자의 내조자로서 바람직한 변화였다.
“그렇긴 한데, 소금 전매권에 큰 이권이 달려 있어서 반란 해소에 활용할 수 없을 것 같구나. 명나라 조정의 고관들과 상인들이 손에 들어온 이권을 포기할 것 같으냐? 그들에게 백성들의 목숨이나 국가의 운명 같은 것은 돈 앞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단다.”
“지금 명나라가 부패 탓에 멸망한 역대 중원 왕조들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관료의 부패와 상인 집단의 이기심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명나라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분명히 맞는 말인데, 부패가 만연한 명나라에서는 현실성이 없는 말이었다. 이익 앞에서 정론이 통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이 고착되면 머지않아 그 나라는 멸망의 길을 달리게 된다.
고산국이 도와준다 하더라도 명나라의 목숨을 간신히 연장해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존심 강한 명나라 조정에서는 식량 공급과 자금 대여 등을 제시한 고산국의 도움을 거부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래서 참모본부에서는 그 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12월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폼페이의 멸망으로 유명한 이 화산은 13세기의 분화를 끝으로 잠잠했다가 이번에 모처럼 폭발했다. 이번 분화가 본격적인 활동기의 서막을 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희생자는 1,50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분화 사흘 전부터 우리 지진연구소로부터 경고를 받은 나폴리 부왕청에서 화산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피난하라고 권고했습니다만, 권고 정도로는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용암류에 휩쓸려 마을 몇 개가 사라졌고 희생자 대부분이 그 마을 주민입니다.”
“그래도 5만 명이나 되는 인근 주민들이 분화 직전까지 피난을 떠나서 다행이오. 구호작업은 순조롭게 돼 가오?”
지난번에 산안드레아스 단층의 실태를 조사했던 지진연구소장이 참담한 표정으로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베수비오 화산이 1631년 분화했을 때 원래 역사에서는 3,360명이 사망했다. 희생자를 절반으로 줄인 것만으로도 지진연구소가 큰 역할을 한 셈이었다.
“나폴리에서 병력과 일꾼들을 급파해서 용암류에 고립된 마을 주민들을 구조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폴리에 파견된 우리 병원선에 부상자 다수를 수용해 의료진들이 진료에 임하고 있습니다. 해군 보급함이 이재민들에게 식량과 식수를 배급하고 있습니다.”
“큰일을 하고 있구려. 이번에 많은 사람을 살렸으니 앞으로 지진연구소가 내린 경보를 국가기관이나 주민들이 신뢰할 것이오.”
지진 예보라는 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선진국 연구소들이 오랜 기간 충분한 데이터를 쌓아 두고도 변수가 워낙 많아 예측이 틀리기 십상이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은 경우였으나, 예보 자체가 없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흑사병 희생자를 비교해본 에스파냐와 다른 이탈리아 도시 귀족들이 우리 고산국 의사와 과학자의 발언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일이오. 이와 같은 재난이 계속될지도 모르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비하는 것이 어떻겠소? 소장의 의견을 듣고 싶소.”
“저희 연구소에서 세계적으로 분화 규모가 크고 거주지에 가까운 화산 16개를 선정해 놓았습니다. 과연 전하의 교시대로 이 화산들이 판 경계선에 집중적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록 외국이라 해도 화산 근처에 지진연구소 분소를 두어 꾸준히 감시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이오. 예조와 함께 추진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태평양 연안과 섬 곳곳에 지진해일 관측소를 세우면 어떻겠소? 전파 통신으로 연락해서 해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피난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오.”
“몹시 광대한 계획이십니다, 전하. 일단 연구원들을 충원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만 관측소를 세우고 운영할 예산이 걱정됩니다.”
소장이 보고한 16개 화산은 서태평양 연안에 다섯, 하와이와 동태평양 연안에 다섯, 나머지는 유럽과 아프리카에 있었다. 유엔에서 정한 ‘디케이드 화산’과 비슷한 리스트가 작성됐다. 다른 곳은 다 좋은데 아프리카에 지진연구소 분소를 세우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 백성이든 아니든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어찌 예산을 아끼고자 하겠소? 다만 아프리카 니라공고 화산에도 연구원들을 파견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풍토병이 우려되오. 혹시 그 지역 사람들을 교육시켜 연구원으로 쓸 방법이 없겠소?”
“국왕전하께서는 진정 성군이십니다.”
“갑자기 웬 아부요?”
“국왕전하께서 외국 백성과 아국 백성 모두를 살리는 길을 선택하셨으니 소신은 어명을 받들어 아프리카 사람을 교육시켜 배치하겠습니다.”
지진연구소 소장이 아프리카 왕국과 그 문제로 협의하는 중에 므부투 국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고산국 의대를 졸업한 왕실 주치의 말로는 국왕의 생명을 하루하루 연장하는 식의 치료가 점점 버거워진다고 했다.
1632년 정월, 세계 각지에서 온 신년 하례 사절단을 맞이한 왕도의 주작대로는 그 어느 해보다 북적거렸다. 특히 새로 고산국의 정식 속국으로 합류한 에이레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이집트는 가무단을 포함해 많은 사절을 보냈다.
고산국의 정식 속국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한 수마트라 섬의 아체 술탄국에서도 대규모 사절을 보냈다. 웬만한 나라는 속국이 되겠다고 해도 고산국에서 거절했지만, 아체 술탄국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관심을 끌어 술탄의 알현 신청을 받아들였다.
- 둥! 둥! 둥!
사절단의 방문은 왕도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돈 주고도 못 볼 구경거리이며 흥겨운 축제였다. 다양한 민속 복장을 입은 젊은 남녀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사절단을 접대하는 예조에서도 외국 사절단이 어설프게 한복이나 고산국 정장을 따라 입느니 차라리 전통 복장을 착용하라고 권했다.
에이레 공화국 사절단은 이미 고산국 백성이 된 아일랜드 사람들이 많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초록색을 기본으로 흰색과 금색 등으로 강조한 전통 복장은 이미 익숙해서, 남녀를 요정과 괴물 모양으로 꾸며 눈길을 끌었다.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켈트족이라서 배 나온 중년 남자들이 입는 체크무늬 치마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베네치아 사절단은 이탈리아를 기본으로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발칸 반도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복색을 자랑했다. 화사한 빛깔의 드레스에 화려한 실크 모자, 은색 가면과 염색한 깃털을 한 사절단이 지나가자 백성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에이레와 베네치아의 수도에 웅장한 총독부 건물을 세우고 있었다. 완공이 되면 기존 대사관 직원들 외에 수비대원들과 그 가족을 입주시킬 예정이었다.
속국이 된 두 나라 백성들이 고산국에 더욱 의지하겠지만 고산국 입장에서는 해군기지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 외에 실제로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외교와 국방, 무역 문제에서 더욱 긴밀히 협조하기로 했다. 오스만 제국을 위해 크레타 섬 동쪽에 해군 기지를 세우도록 내준 것 외에 두 나라를 속국으로 영입하기 위해서 들인 비용은 거의 없었다.
“술탄께서는 말래카를 치지 말라는 내 권고에 아직도 뚱해 계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말씀처럼 조호르와 포르투갈이 연합했다면 아체의 강력한 함대와 전사들 대부분을 잃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서 감사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아체 술탄 이스칸다르 무다가 이민호에게 허리를 숙였다. 실제 역사에서는 1629년 아체 술탄국이 말래카를 공격했다가 포르투갈과 조호르 술탄국의 합공에 패해 함대 대부분을 잃었다. 포르투갈에서 센 아체군 전사자 숫자가 19,000에 달했다.
공식 명칭 아체 다루살람 왕국은 유럽과 아라비아, 인도에서 동남아시아로 들어오는 말래카 해협의 입구에 해당했기에 유럽 범선들의 침공이 잦았다. 포르투갈과 조호르 술탄국 등 주변 지역과의 경쟁이 버거워지면서, 아체 술탄국은 그 동안 명목상 상국으로 모셨던 오스만 제국보다는 직접 보호해줄 강대국으로 고산국을 선택했다.
“이스칸다르라는 이름처럼 알렉산더 대왕 같은 위대한 정복자께서 굳이 보호해달라고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오.”
“수마트라 섬 거의 전체가 아체에 복속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강대국들이 많아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겠습니다.”
수마트라 섬은 전통적으로 바다 건너 조호르 술탄국에게 강한 영향을 받는 지역이었다. 독립적인 술탄국이 산재해 있어서 공동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아체 술탄국에 하나씩 차례로 정복됐다.
술탄이라 해서 전권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지역을 복속하면서 세습 귀족 가문들에게 어느 정도 자치권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술탄의 권력보다 지방 권력이 강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문제는 술탄에게 아들이 없이 딸만 열넷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아체 술탄국이 30년 전보다 많이 발전했소. 그러니 굳이 고산국의 속국이 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동등한 입장에서 두 나라가 공수동맹을 체결하면 어떻겠소?”
“전하!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고산국의 속국이 되는데 돈이 드는 건 아니잖습니까? 고산국에서 속국으로부터 따로 세금이나 공물을 안 걷는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고, 사실임이 이미 확인됐습니다. 대신 고산국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참 합리적이시오.”
“사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고산국에서는 아체에서 생산되는 후추나 향료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후추 농법에서 개선점을 여러 가지 알려주고, 향료가 과잉 생산됐을 때는 새로운 판매처를 주선해주었습니다. 강력한 대포와 정밀한 화승총을 싸게 팔아주기도 했지요. 그런 점에서 고산국은 이상적인 상국입니다. 오죽하면 고산국의 속국이 되는 것이 특혜라 하겠습니까?”
고산국이 해치지 않아서 종주국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이민호는 2004년에 있었던 인도양 해일 사건이 기억나 반다아체를 비롯한 해안 곳곳에 긴급 피난소를 세워줄 생각을 했다. 방파제가 안전하겠지만, 높이 수십 미터짜리 방파제를 해안선을 따라 빈틈없이 세웠다간 어업에 의존하는 아체 술탄국의 경제가 붕괴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솔직하시니 좋소. 말래카 해협의 입구로서 아체 술탄국이 속국 역할을 충분히 해주길 기대하겠소. 아체 술탄국에서 안다만 제도의 원주민들을 보호해주시오.”
“정복하는 대신 보호라는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딸만 열넷이나 되고 후계자가 없습니다. 고산국 항공대장 이면 공을 제 양아들로 입양해 후계자로 삼으면 안 되겠습니까?”
“양아들 겸 후계자요? 이면 장군은 술탄보다 여섯 살 많은 걸로 알고 있소만.”
외국인들이 본 고산국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비행기가 떠오르면서 항공대장 이면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행글라이더를 타다가 다리가 부러지고, 시험 조종사로 나섰다가 비행기가 추락해 팔이 부러지고, 히말라야 산맥을 등정하다가 낙석에 맞아 머리가 깨진 이야기가 위인전에 자세히 실리기도 했다.
이면은 항공대 대장으로서 계급이 중장이었다. 비행을 계속하기 위해 승진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군 조직에서 꼼수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대신 주말만이라도 민간 항공기 조종사로서 하늘을 날 수 있게 이민호가 특별히 허용해줬다.
“이 공의 가문은 유달리 장수하는 가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순신 총함장님의 연세가 많으시고 그분의 어머님께서도 몹시 장수하셨지요. 저는 단명하는 가문 출신이라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이면 항공대장은 고산국에서 매우 유능한 무관이라 아체에 넘길 수 없소. 이면 중장이 말라하야티 여제독의 딸과 결혼해 그 사이에 자식들이 있으니 그 중에 한 명을 술탄의 양아들로 삼으면 어떻겠소?”
“오! 이왕이면 여제독의 손녀를 후계자 술타나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녀의 남편으로 삼을 아들이 없으니 여제독의 손자를 주십시오.”
실제 역사에서 17세기 후반 아체 술탄국은 여자 술탄, 술타나들이 4명 연속 즉위했다. 지방 세습 귀족들이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모계 사회 습속을 반영한다는 설명도 있다. 세계적으로 드문 여자 제독이나 독립군 여자 사령관이 활동한 문명권이니 여술탄이라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자식은 주고받는 물건이 아니오. 그리고 여제독의 외손자라고 하지만 그들이 과연 술탄이 되려고 할지 모르겠소.”
“고산국에 비해 아체가 좁고 약하다 하나 그래도 술탄은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권력을 싫다 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술탄이 직접 만나보시오. 미리 충고하겠는데, 술탄이 후보자들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술탄 후계자로 영입하기 위해 설득을 해야 될 것이오. 갑이 아니라 을의 위치가 될 수도 있음을 꼭 기억하시오.”
“설마 그러겠습니까?”
이면의 아들들을 상대로 물정 모르고 갑질을 하던 술탄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게 됐다. 순수한 직업군인, 순수한 학자, 순수한 운동선수에게 술탄이라는 직위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었다.
술탄이 준비한 회심의 미끼, 부인을 네 명 혹은 그 이상 둘 수 있다는 사탕발림도 오히려 패착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아내가 네 명이라는 상상을 하는 순간 그저 귀찮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쩔 수 없게 됐습니다, 전하! 국왕전하의 왕자님 한 분을 제 양자 겸 후계자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유부남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꿩 대신 닭이오? 술탄은 아직도 급하지 않은 모양이구려.”
이민호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자식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왕궁 저녁 식사 시간에 술탄을 초빙했다. 술탄이 아체 술탄국이 얼마나 훌륭하며 아체군이 얼마나 강력한지 실컷 자랑하고 나서, 고산국 왕자들에게 술탄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브루나이 공주의 아들로서 무슬림인 왕자들도 아체를 무시했다.
나름대로 수마트라와 말래카 해역의 패자로 떠오른 아체 술탄국이지만 고산국에서 보기에는 그저 동남아 소국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600에서 800명을 태우는 거대한 범노선 다수로 이뤄진 대규모 함대, 페르시아 스타일의 정예 기병, 대포 2천 문과 훈련된 포병, 적을 공황으로 몰아넣는 코끼리 군단, 징집 보병군 다수를 보유했다고 설명해도 왕자들에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아무리 왕자들이 왕이 되고 싶다 해도 덥고 습한 열대우림 지역은 일단 피하고 보는 분위기였다. 이민호가 추운 곳을 싫어하는 반면 왕자들은 더운 곳을 끔찍이 싫어했다. 이집트 국왕으로 석영이 쉽게 정해진 이유는 후보자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하! 참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군주가 되길 싫어하는 왕자가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왕궁에 냉방기를 설치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시오.”
“아체에는 전기가 없지 않습니까?”
후계자를 구하지 못해 쓸쓸이 돌아가는 술탄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스칸다르 무다 술탄의 공주 타지 울-알람과, 전쟁에서 패한 남수마트라 파항의 술탄 아흐마드 샤 2세의 아들로서 인질로 온 이스칸다르 타니를 결혼시켜 대를 잇는다. 이스칸다르 타니 술탄이 짧은 치세를 마치고 죽자 공주 타지 울-알람이 여술탄으로 등극한다.
술탄 후계자를 구하지 못한 대신 해군 대위인 이면의 딸이 고산국 국적과 해군 군적을 유지한 채 아체의 함대 부제독으로 가기로 했다. 제독은 대장, 장군처럼 이 시대에 직급이 아닌 직책으로, 부제독은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 일부의 지휘권을 가진 해군 고위 장성이다.
이면의 딸은 외할머니인 아체 여제독 말라하야티의 후계자로 간 셈이었다. 한때 말라하야티 제독에게 도전했다가 해전에서 박살났던 잉글랜드, 네덜란드, 포르투갈의 선박들은 앞으로 아체 술탄국 근해를 지날 때마다 더욱 조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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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