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85 104. 제국의 길 =========================================================================
1632년 4월 19일 폴란드 국왕 시기스문드 바사, 폴란드어로 지그문트 3세 바사가 서거했다. 그래서 고산국 예조 판서를 중심으로 조문 사절단을 구성해 바르샤바에 파견했다.
한 달 후에 돌아온 예조 판서로부터 앞으로 선거로 뽑힐 예정인 새 폴란드 국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폴란드는 국왕 부재 상태였다.
“물론 지금도 선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귀족들과 몇 가지 이견만 조정되면 부왕에 이어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로서 폴란드 국왕에 선출될 것이 확실합니다. 국왕으로서 잘하려는 의욕과 능력은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종교 문제에서는 꽤나 사고가 경직돼 있습니다.”
“하필 종교 문제라니. 그것 참 큰일이로군. 예판이 직접 그 사람과 대화를 해봤겠지?”
부왕 시기스문드도 종교 문제 때문에 국내외에서 갖가지 사고를 치고 다녔다. 실제 역사에서 1609년 브와디스와프가 어린 왕자 시절 모스크바에서 차르로 선출되고 나서, 시기스문드가 직접 차르가 되려 하자 루스 차르국 보야르들이 반란을 일으켜 부자를 추방시킨 일이 있었다. 시기스문드가 러시아 정교를 믿는 보야르들을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시키려 한다는 의심을 샀기 때문이다.
폴란드 내부에서 빈발하는 반란도 마찬가지였다. 귀족 영지에서 일으키는 종교탄압 문제도 심각한데, 우크라이나에 산재한 국왕 직영지에서는 더욱 심하게 탄압했다. 자포로제 코사크나 우크라이나 주민들도 경제적인 불만을 쌓아두었다가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예, 전하. 지능이 낮은 편은 아닌데 당연히 알아야 할 것도 모르는 척,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합니다. 뭔가 음모를 꾸미기 좋아하고, 국익과 종교를 위해서는 거짓말과 살인을 비롯한 모든 범죄행위가 정당화된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남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든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조금 걱정되는군. 광신도가 종교를 핑계로 나쁜 짓을 하는 건 이슬람권뿐만이 아니야.”
폴란드에서 귀족의 권한이 강하다지만 국왕의 권한을 무시할 바는 아니었다. 특히 시기스문드 국왕이 스웨덴의 왕위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바람에 스웨덴과 수십 년째 갈등을 일으켰다.
시기스문드가 스웨덴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면 스웨덴 왕좌에서 끌어내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폴란드 국가 입장에서는 거의 다 집어삼켰던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을 국왕의 광신 때문에 게워낸 셈이었다. 만약 재위 기간이 더 길었다면 우크라이나도 종교 문제 때문에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었다.
후계자 브와디스와프도 종교 문제에서는 시기스문드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국왕으로 뽑은 폴란드 귀족들은 이익이 있기 때문에 지지표를 던졌지, 국익을 위한 투표행위는 아니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조문단이 귀국선을 타기 직전, 국왕전하의 우크라이나 출신 후궁마마들의 가족이 남아있는 마을을 특별히 보호해주겠다면서 상세한 위치를 물었습니다. 물론 저는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확실히 녹음을 해두었습니다.”
“뭐? 내 우크라이나 후궁들의 출신 마을 말이지?”
“예, 전하. 폴란드의 국왕이 될 브와디스와프는 전하의 후궁마마 가족들이 사는 마을을 이미 대부분 파악하고 있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덴마크에서 비행기로 바꿔 타고 급거 귀국했습니다.”
“미카! 근처에 있는 우크라이나 후궁 몇 명만 불러와!”
이민호가 상황을 빠르게 설명한 다음 우크라이나 후궁들의 의견을 물었다. 일하다 불려온 후궁 다섯 중 셋이 설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미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었다.
“주인님! 부모님과 동생, 조카들을 제발 살려주세요!”
이들은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살다가 코사크나 타타르, 또는 정체 모를 해적들에게 납치돼 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 궁정에 후궁으로 바쳐질 예정이었다가 우연히 고산국에 상납됐다.
그래서 이들은 돈을 받고 딸을 노예로 판 부모와 연이 끊기다시피 한 갈라티아 궁녀들과 달리 꾸준히 가족들과 편지를 왕래했다. 매달 받는 봉록 대부분을 집으로 부쳐 가족들이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도 했다. 가족들이 지금은 소규모 지주로서 잘 살고 있다고 들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과 같은지 설명을 해봐.”
“폴란드 국왕이나 헤트만이 전쟁을 하고 싶으면 보통 코사크를 시켜서 오스만이나 타타르 지역을 약탈해요. 한 번은 타타르를 매수해서 폴란드를 쳤다는 소문도 돌았어요. 거꾸로 오스만이 전쟁을 하고 싶으면 타타르를 시켜서 폴란드를 치거나 코사크를 매수해서 오스만을 치게 해요. 폴란드 국왕이 될 사람이 타타르를 동원해 저희 부모님 마을을 약탈해서 고산국이 오스만을 치게 하려는 음모일 거여요.”
“이 기회에 너희 가족들의 재산도 빼앗고 말이지.”
부자로 소문난 고산국 국왕의 후궁 가족이 어느 마을에 산다는 정보를 흘리기만 해도 당장 말 타고 나설 코사크나 타타르가 몇 만이었다. 폴란드 국왕은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이런 음모를 꾸민 것 같았다. 어느 모로 보나 위험한 자였다.
“전하! 마마님들 말씀처럼 폴란드 국왕 후보는 결코 직접 손을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자포로제 코사크나 타타르의 손을 빌리고 브와디스와프는 입을 닦겠지. 오스만을 범인으로 몰아가겠지만 누가 믿겠어?”
‘개새끼’라는 욕이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약탈하길 좋아하는 코사크나 타타르들이 종주국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서 우크라이나 남부는 음모를 꾸미기 딱 좋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의지만 있다면, 고산국에서 음모를 꾸미기에도 좋은 땅이었다.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조용한 외교적 수단만으로 마마님들의 가족들을 보호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우린 어쩔 수 없이 무조건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가족들만 빼오든,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든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브와디스와프는 아직 실제 움직임 없이 고산국의 반응을 떠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어떻게 반응하든 브와디스와프가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해 오판할 우려가 있었다.
“저희들 때문에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주인님. 저희가 가족들을 왕도로 불렀었지만 고향에 사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아니! 이건 정치적인 일이니 너희들이 아니라 내 책임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 때문에 너희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겠다. 최선을 다해 구출해보겠지만, 이미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흑흑!”
“미카! 주 폴란드 대사관에 전보를 보내서 브와디스와프에게 전하도록 해.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 가치가 없다’고. 아니다!”
현대 국가에는 당연히 통용되는 말이겠지만 이 시대에는 전혀 합당한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왕이나 귀족들은 국익보다 자기 이익을 우선 챙기니까 실감을 못할 것 같았다.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왕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보내. 훨씬 유럽식 계약 관계 같구먼. 사돈 집안들이 농노가 아니니까 먹혀들겠지.”
“예! 주인님.”
미카가 전보문을 작성해 비서에게 건넸고, 비서는 바로 뛰쳐나갔다. 예조판서가 깜짝 놀라 이민호에게 물었다.
“전하! 설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을 제거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이 정도 협박이면 알아들을 거야. 그리고 이 기회에 최소한 우크라이나를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독립시킬 수는 있어. 왕이 내 후궁의 친정을 약탈하도록 유도했다면 명분은 충분하잖아?”
대사관을 통한 협박은 잘 먹혀든 것 같았다. 바로 그날 바르샤바에서 기마 전령이 떠서 남동쪽 가도로 달려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음모를 실현하기 위해 먼저 떠난 자를 따라잡기 위한 전령이었다.
동시에 우랄산맥 남쪽 투먼 공항에서 정찰기를 띄워 우크라이나 후궁들의 가족들이 사는 마을 몇 곳을 촬영했다. 다행히 화재나 약탈이 일어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직 영공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정찰기가 아무 나라나 들어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동시에 참모본부에서 유사시에 대비한 우크라이나 점령 계획을 세웠다. 고산국의 영향권 내에 든 초원지대 기병 30만을 토르구트에 모은 다음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방어에 나선 폴란드 군을 제1 기병사단으로 격파하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북해로 진입한 고산국 함대가 해병원정군을 상륙시키는 작전도 세웠다. 직승기에 탑승한 강습대대를 바르샤바로 보내 폴란드 국왕과 귀족들을 모조리 생포 혹은 사살하는 계획은 이 시대에 비현실적으로 보였지만 고산국이라서 가능했다.
“폴란드가 강대국이라서 주변국들이나 피지배 민족들에 대한 횡포가 너무 심해요.”
“그래. 폴란드는 앞으로 얼마 못 갈 거야.”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폴란드가 제대로 망하려면 프로이센, 제정러시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폴란드 영토를 삼분하는 18세기 말까지 기다려야 했다. 폴란드가 분할되어 세 나라로 흡수될 때 폴란드 귀족들은 특권을 보장받았기에 침략국에 재빨리 순응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는 더 빨리 이탈해서 1649년 코사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서 세운 코사크 헤트만국의 영토가 된다. 이 영토는 1667년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폴란드가 나눠가지고, 동쪽은 1764년 자치권이 회수돼 결국 러시아에 흡수된다.
이민호는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길 바랐으나, 폴란드와 코사크, 타타르의 세력이 강한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명나라 농민반란군에는 신분이 하락한 전직 관료나 지식인 계층이 도움을 줬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소작농과 농노들만 있을 뿐 독립운동을 주도할 세력이 없었다.
“주도세력을 만들 수 있긴 한데.”
“저희 아들이요? 생긴 게 달라서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요.”
“우리 애들은 코사크하고 더 비슷하겠다.”
이민호는 우크라이나를 독립시켜도 우크라이나 사람들만으로 자체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한지 의심스러웠다. 오래도록 외세의 지배를 받았어도 자체적인 교육과 지방행정 기구를 갖추고 있는 이집트가 차라리 상황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괜히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우크라이나를 독립시켰다가 주변 강대국들인 오스트리아나 오스만 제국, 아니면 루스 차르국에게 좋은 일만 시켜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 동안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경제적 착취에 더해 종교적 탄압까지 한다면 더 두고 보기 어려웠다.
“내정간섭이라고 폴란드에서 비난하지 않을까요?”
“옛날 키에프 공국이나, 갈리치아를 수복한다고 볼 수도 있지. 폴란드가 외부로부터 간섭을 받고 싶지 않으면 내정을 잘했었어야지.”
이민호는 우크라이나 후궁들의 가족이 약탈당하도록 눈을 질끈 감고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순간만 넘겼으면 폴란드에 압박을 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지만, 정치를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넘긴 것 같은데, 당분간은 더 지켜보자. 변수가 워낙 많으니까 우크라이나에게 기회가 올 거야.”
“독립이라니, 꿈만 같아요. 제가 늙어죽기 전에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아마도.”
괜히 우크라이나 후궁들에게 기대만 잔뜩 부풀리게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분위기를 만들 준비는 해두었다.
일단 흑해 연안을 통해 에스파냐에서 제조한 머스킷을 대량으로 풀었다. 우크라이나 농노들이 머스킷을 살 수는 없겠지만, 자유민 코사크들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폴란드 국왕 후보에 대한 감시와 재정적 압박에 들어갔다. 브와디스와프를 국왕 후보에서 탈락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가 제멋대로 행동할 가능성은 낮췄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이민호에게 폴란드 국왕 선거에 출마하라는 제안이 일부 귀족들로부터 들어왔지만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몇 달 동안 브와디스와프를 쉽게 국왕으로 옹립하지 않는 것을 보면, 폴란드 귀족들이 이민호를 단념한 것 같지는 않았다.
무굴제국 황제 샤자한은 지난해 1631년 6월 17일에 사망한 뭄타즈 마할을 위한 영묘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고산국에 운남에서 나는 대리석을 수송해줄 것과 아라비아 건축양식에 정통한 건축 기술자들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민호는 타지마할 사진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별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이 시대 무굴제국 사람들에게 대규모 건축 자체가 큰 고통이겠지만, 전체 인류의 문화유산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일단 타지마할 건축을 도울 기본적인 자세는 돼 있었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 속에, 그리고 답답해진 가슴 속에 뭔가 께름칙한 사건이 떠올랐다. 전생에서 공대 출신이었기에 더욱 강렬한 인상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무굴제국 황제가 보낸 사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민호가 물었다.
“건설을 도와준다고 칩시다. 완공된 다음 황제가 기술자들을 어떻게 할 것 같소?”
“아마도 손목을 자르도록 명하시겠지요.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게 말입니다. 황제폐하께서 그토록 황후마마를 사랑하셨다는 증표입니다.”
“그래서 내 나라 기술자들의 손목을 잘라도 따르라고? 미친놈들! 샤자한은 아내의 무덤을 완공한 직후에 제위를 잃고 제국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오. 저주가 아니라 예상이오.”
물론 국력을 기울여 타지마할을 건설했기 때문에 무굴제국이 당장 무너졌다는 소리는 역사왜곡에 지나친 과장이었다. 하지만 타지마할을 비롯한 숱한 건축과 토목사업이 제국의 위상과 재정에 큰 타격을 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샤자한은 노년에 후계전쟁에서 승리한 셋째아들에 의해 결국 유폐된다.
“제국이라 칭하는 나라들이 어찌 하나 같이 이 모양일까? 아프리카 제국이 가장 인간적이다. 므부투가 그립다.”
이민호는 서거한 므부투 황제를 위해 바쳐진 석조물 아래에 붙은 청동부조를 떠올렸다. 초대 황제의 일생을 시기별로 나눠 묘사한 부조들 중 하나는 임진왜란이 배경이었다. 므부투가 전령으로 활동할 때 군복을 입은 이민호와 함께 등장하는데, 모닥불에 자유롭게 둘러앉아서 편하게 대화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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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국왕 선거에 출마할까요? ㅋㅋ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