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990화 (939/1,000)

00990    104. 제국의 길  =========================================================================

매년 세자가 주최하는 전국 규모의 소설 창작 대회가 올가을에도 열렸다. 초, 중, 고, 일반으로 나눠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중편이나 단편소설을 쓰게 해서 장원과 급제 약간 명을 뽑았다.

고산국에서 소설 창작 대회는 소설가들에게 최고의 등용문으로 수많은 국내외 소설가 지망생들, 혹은 기존 작가들이 참가했다. 당선작들을 엮어 책으로 내면 TV가 없는 시대라 최소 백만 권 판매를 보장했고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돼 국내외에서 판매됐다.

세자 주도로 꾸준히 문학과 음악을 지원해서 드디어 음악은 이탈리아보다, 문학은 잉글랜드보다 낫다는 평판을 얻었다. 극작가 셰익스피어 한 사람의 역할이 이렇게 컸다.

“올해 주제는 ‘가난’이더구나. 세자가 정했더냐?”

“예, 아바마마. 지나치게 정치적인 주제겠지만 그래도 소설가들이 똑똑해서 잘 다룰 거라 믿습니다. 백성들도 이런 주제의 글을 읽으면 생각할 게 많을 겁니다.”

“그래. 한 번쯤 이런 주제를 다룰 때가 됐지.”

지금까지 희망이나 사랑, 모험 같은 건설적인 주제가 일반적이었지만 부정적인 주제에서 건설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괜찮았다. 결론까지 지독히 부정적인 이야기라 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소설은 고산국이 아닌 다른 나라가 이야기의 배경일 것이므로.

이민호는 18세기부터 유럽 작가들이 쓴 이른바 명작들을 떠올렸다. 주인공이 교육수준은 높은데 눈높이와 달리 찢어지게 가난해 범죄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소설들이 꽤 있었다. 가난하고 무식해도 인성은 착한 사람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허우적대는 소설도 몇 편 기억했다.

부조리한 환경을 극복하려면 낡은 체제를 뒤엎는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그런 소설들의 일반적인 주제였다. 겉으로는 인간성이니 신의 사랑이니 그럴 듯한 주제를 내세워도 달라질 건 없었다. 내용 중에서 혁명을 선동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혁명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자아낼 줄 아는 소설들이었다.

“결선 심사에 저도 참석했는데 올해 들어 괜찮은 작품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역시 비극이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는 모양입니다.”

“제목이 기억나는 소설이 있어?”

“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미제라블>, <탁류>, <상처받은 사람들>, <쇼생크 탈출> 같은 중편 작품들은 진정한 이 시대의 수작입니다. 저도 읽고 나서 정신 바짝 차리고 공무를 수행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다만 대부분이 외국 배경이라서 아쉽습니다.”

익숙한 제목이 많은 것은 전문 표절작가 이민호가 필명으로 그 작품들을 투고했기 때문이었다. 장편인 원작을 중단편으로 압축하느라 고생을 심하게 했다. 나중에 전문 작가들과 공저 계약을 통해 장편 분량으로 다시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 소설 주인공들이 처한 지독히 불행한 환경과 운명은 신의 시험이나 벌이 아니라 피지배자들에게만 혹독한 사회체제 때문이다. 폴란드 왕자가 궁정 예산을 몇 배나 많이 받게 됐으면서도 농노들을 눈곱만큼이라도 생각해줬겠느냐?”

“의외로 국내를 배경으로 한 소설도 좀 있습니다. 어느 소설에서는 기본 소득이 적어서 백성들이 충분히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알아보니까 일하지 않고 일자리를 찾을 생각도 없는 사람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그 인간은 지금처럼 가끔 소설이나 쓰면서 예술가 지원금이나 받아먹고 살면 되겠네.”

물론 절대적인 빈부 개념보다는 상대적인 부의 불평등, 빈부격차가 사람이 불행한지 판단하는 데 더 결정적인 기준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농민 대부분이 가난한 사회인 조선에서는 약을 못 구해 자기 살이나 피를 병든 부모에게 먹이는 <삼강행실도> 내용이 효자로 칭찬받았다.

백성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사대부가 그나마 많은 조선에서도 피지배자인 농민과 노비들은 체제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의문을 품었던 허균이나 서자들은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나이 든 백성들은 아직도 조선에서 살 때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선에서의 옛날이 가난하지만 따뜻했던 시절로 미화되는 모양입니다. 고산국은 개인이나 소가족 위주라서 아쉬워하는 것 같습니다.”

“내버려 둬.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고, 거기에 남의 몽둥이가 박히던 시절이 그립겠지.”

“예. 쉬쉬하던 이야기를 저도 들었습니다. 조선의 농촌마을 성인식 때 남자들 사이에 위계를 잡기 위한 목적입니다만, 지나친 건 사실입니다.”

성인식이 더러운 건 유독 일본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철저히 지배를 당하는 반면 조선에서는 남자들도 당했다. 그리고 재수 없으면 성인남자인 선비도 길 가다가 못된 자들에게 걸려 구강성교를 강요당했다.

이민호는 단호하게 ‘가난한 시절의 행복’ 신화를 부정했다. 고산국으로 이주한 조선 빈민들의 과거는 거의 다 비슷했다. 백이면 백 빚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땅에서 떠밀려난 자들이었다. 날품팔이로, 유민으로, 화전민으로 정처 없이 떠돈 주제에 조선에서 행복했을 리가 없었다.

어느 시대건 지역이건 남을 업신여기려는 인간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마음 놓고 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도둑질을 할 우려가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조선에서 매일 같이 험한 꼴을 당할 때마다 참담했을 텐데 그 기억은 이미 희미해진 모양이었다. 추억은 미화되어 남지만 결코 진실은 아니었다.

“어쨌든 방금 세자가 말한 제목들은 장원으로 뽑지 말도록 해라.”

“예. 역시 아바마마께서 쓰셨군요. 전혀 다른 작품들인데도 문장이나 상황 묘사에서 어렴풋이 공통점이 느껴졌습니다.”

“이젠 놀라지도 않네? 피한다고 피했는데 걸린 모양이구나.”

고산국에서 소설이든 노래든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일단 이민호를 의심부터 하고 봐야 했다. 그래서 이민호도 장르의 발전과 동떨어진 작품은 세자가 즉위한 다음 발표하라고 완성된 원고나 악보를 금고에 넣어두었다.

이민호가 미래에서 끌어다 쓴 재즈곡 <아름다운 세상>, 원제 도 금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아직 건국 초기라서 나라의 미래를 무작정 낙관적이고 희망적으로만 묘사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자가 즉위하고 나서, 언제일지 몰라도 정치적 논쟁으로 시끄러울 때 이 노래를 세상에 풀도록 했다. 노래 가사처럼 아기들이 예쁜 것만 보고 자랄 수 있도록 세상을 만드는 것은 어른들의 의무였기에, 부끄러워 다툼을 그칠 것으로 기대했다. 물론 정치인은 상식적인 인간들이 아니라서 신경도 안 쓰겠지만 지지자들이 등을 돌린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아바마마! 최근 출산율이 점차 떨어지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10년 전까지는 여성 1인당 평생 6, 7명을 출산했으나 지금은 여성들의 추정 출산율이 평균 4.8명으로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면 후손을 많이 보려는 것이 모든 생물의 속성 아닙니까?”

“피임약을 금하긴 했지만 자식 숫자는 부모가 어떻게든 조절할 수 있다. 외국에서 가난한 자들이 왜 아이를 많이 낳겠느냐? 배란기를 피하는 피임법을 몰라서? 욕망에 충실해서?”

물론 고산국에서 출생한 아이들은 대부분 성인이 된다. 의료 수준이 낮고 영양 상태가 나쁜 다른 나라에서는 겨우 2, 3명 정도만 성인으로 무사히 성장했다. 부인들이 거의 매년 아기를 낳아도 인구가 균형을 이루는 이유였다.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자신의 노후를 보살펴줄 성공한 자식을 만들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도박이지.”

출산과 육아는 가난하든 부유하든 부모에게 심대한 고통과 경제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자식을 줄줄이 낳는 것은 연금보험과 비슷하게 노후를 대비한다는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부유한 자들은 노후 걱정이 없으므로 아이를 적게 낳으려는 경향이 커진다.

그 예외로 현대 한국에서는 자녀 양육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서 낳고 싶어도 못 낳는다. 청년들은 취직하기 어렵고 간신히 취직하더라도 미래가 불안해 섣불리 결혼을 결정하지 못한다. 이민호도 전생에서 비정규직이라 수입이 적은 데다 일이 워낙 바빠서 결혼을 하지 못했고 연애도 대학 다닐 때 아주 잠깐만 했었다.

과거 기억은 이민호가 고산국을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어가는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 이민호가 국왕으로서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고 말버릇처럼 되뇌지만 실제 고산국 건국으로 인한 최대의 수혜자는 백성들이 아니라 바로 이민호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인구 증가를 위해 백성들을 가난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본 소득만 폐지해도 백성들 절반이 끼니 걱정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많아 생활비가 많이 드는데다가 젖먹이가 딸린 여자는 밖에 일을 나가기 어려우니까요.”

“평균 4.8명이라면 아직까지는 괜찮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언젠가 재앙이 될 거라는 예상도 있지 않느냐? 앞으로도 꾸준히 출산율이 줄어들 테니 그 예상이 헛소리인 이유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사회가 발달할수록 자연스럽게 저출산, 저성장 사회가 될 줄 알고 있기에 이민호는 여유를 부렸다. 건국 초반에 여덟, 아홉까지 낳도록 격려한 것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사실 좀 무리였다. 여자들이 공동 육아에 나서주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 불행한 어린 시절만을 기억했을 것이다.

“어서 인구 3억을 넘기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기본적인 인구밀도가 돼서 전체적인 국가 운영이 안정될 것 같습니다.”

“네가 재위하는 동안 충분히 달성할 거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남미와 북미, 여진 땅과 호주만으로도 20억은 가뿐히 부양하고도 남는다. 이민호가 충분한 영토와 산업기반을 마련함으로써 후대의 인구 정책에 여유를 남겨주었다.

“요즘 시간당 가장 많이 받는 직종이 뭐지? 여전히 탄광 광부인가?”

“요즘은 쓰레기 분류, 좋은 말로 자원재활용 사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탄광 광부보다 근무 시간은 절반, 일당은 탄부들과 똑같이 남들의 두 배 이상을 받습니다만 항상 인원이 모자랍니다.”

고산국의 교육과 행정이 제대로 체계가 잡히고 나서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전문 사무직이 부족한 것이지, 일자리 자체가 적은 건 아니었다. 특히 현대의 3D 업종이라 할 만한 쓰레기장, 자원재활용 사업은 일할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힘든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임금을 많이 줘도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니 걱정된다. 인도에서 달리트를 이주시킬까?”

“절대 안 됩니다. 불가촉천민인 그들이 이주해오면 기존 재생 산업 종사자들의 사회적 평판을 크게 떨어뜨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더러운 일이라도 우리 백성들이 직접 해야 합니다. 외국에서 하층민들을 유인해 그 사회의 가장 비천한 일을 떠맡겼다는 비난을 나중에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맞다. 그럼 할 수 없지. 고용증대 효과가 없더라도 봉급이나 좀 더 올려줘.”

카스트 네 계급에서 천민층인 수드라에 속하지도 못하는 불가촉천민이 달리트였다. 그 달리트에 속하는 80여 개 자티 중에서도 최하층이 화장실이나 쓰레기에 관련된 직업이었다.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누군가는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 쓰레기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명예를 준다고 해도 인정해줄 사람 하나 없으니 경제적 보상이라도 확실히 해줘야 했다.

8월 하순에 네덜란드 오라녜공이 두 달 간의 포위 끝에 마스트리히트를 점령하고 9월 초 프랑스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독일에서는 스웨덴 국왕군이 발렌슈타인의 제국군에게 패했으나 결정적인 전투는 아니었고 등등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 동안 엄청난 파란이 일었던 폴란드 국왕 선거가 이민호가 후보를 사양한 뒤부터 다시 순조롭게 진행됐다. 단독 후보로 나선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가 차기 국왕으로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익집단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가 없어서 귀족들과 공약을 조정할 게 워낙 많았다. 결국 등극 동의서인 Pacta conventa, 사실상 국왕의 선심 공약이 아직 절반도 확정되지 않아 대관식이 계속 미뤄졌다.

광신적인 가톨릭 신앙에도 불구하고 브와디스와프는 오직 국왕에 등극하기 위해 그리스 정교와 동방정교에 대한 관용을 베풀 것을 문서로 확실히 보장했다. 그리고 국왕의 재산으로 폴란드 북부 도시 푸츠크를 요새화하고 해군을 위한 군항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 외에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군사학교를 세우고, 함대를 증강하고, 육군을 증강하지 않고, 외국인 용병에게 장교 계급을 주는 것을 금하고, 선전포고와 평화조약 체결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브와디스와프가 앞으로 결혼할 때는 상원의 허가를 받기로 했다.

또한 폴란드 국왕의 수입원인 화폐를 주조하면서 생긴 이익을 국왕 개인 계정이 아닌 왕실 계정으로 돌리겠다고 브와디스와프가 귀족들에게 약속했다. 고산국 예조에서 파견한 판무관이 폴란드 의원들을 배후조종해 코사크들이 요구한 등록 코사크를 위한 자금 증액 요청을 기각시켰다.

“본부장! 토르구트 기병이 우크라이나에 진입했다지?”

“예. 지도판 쪽으로 오십시오, 전하. 노가이 칸국의 여러 집단과 크림 칸국의 영역을 지나 남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습니다. 토르구트가 타타르들의 영역을 지나는 동안 다들 아주 얌전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사흘 전 폴란드 야전 헤트만의 부사령관 일행과 합류했습니다.”

참모본부에 갔더니 상황판과 우크라이나의 미니어처를 만들어놓고 참모본부장이 토르구트 기병들의 현재 위치를 보고했다. 그들이 지나온 행로가 표시돼 있었는데 거의 직선으로 달렸다.

“살고 싶으면 얌전해야겠지.”

“토르구트가 이전한 직후에 주변을 적당히 쓸어버렸잖습니까? 그 일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각인됐나 봅니다.”

노가이 칸국과 크림 칸국은 동유럽 평원에서 기마 타타르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토르구트는 몽골 초원에서 한때 강력한 유목 제국을 세웠던 오이라트의 주요 세력 중 하나였다. 양쪽을 붙여보니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토르구트가 이 시대 초원 기병들 중 최고는 아니었다. 옛날 몽골 초원의 패권을 두고 싸우다 칭기즈칸에게 패배한 투르크 계열 부족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또한 동몽골이나 여진 부족들보다 기마민족으로서의 전통도 약한 편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토르구트, 즉 칼미크는 제정 러시아의 부용민족으로 전쟁에 동원되다가 결국 중가르 분지를 향해 전 부족민이 탈출한다. 모스크바와 남부 국경지대를 약탈하던 여러 타타르 세력들을 아주 간단히 때려잡은 칼미크였지만, 시간이 흘러 보병의 화약무기가 강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운명을 면할 수 없었다.

“자포로제 코사크들의 반응은? 그들이 설마 야전 헤트만 부사령관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았겠지?”

“당연합니다. 서로의 힘을 시험해보려고 어제 기병 3천 대 3천으로 붙었습니다.”

야전 헤트만 대리인이 자기 명령에 따르지 않고 같은 편끼리 싸웠다고 코사크에게 제재를 가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우열을 가리기 위해 일단 싸워보는 것이 초원의 법이었다.

“결과는 뻔하겠지만 자세히 설명해봐.”

“예, 전하. 토르구트에 비해 코사크는 기마술도 딸리고 마상사격, 마상창술도 비교가 안 됩니다. 채 5분도 못 버티고 코사크들이 도주했는데 10분 이내에 다 따라잡혀서 말을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소문이 퍼지면 다시 도전할 코사크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코사크들을 다 죽이지 않아 다행이야.”

“죽일 필요성을 아예 못 느꼈다고 합니다.”

전과가 어땠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아주 일방적인 승부가 났다. 코사크들이 보통 말을 타고 다니지만 사실 기병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부족했다. 기마 추격자로 악명이 높은 이들은 폴란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장창 뒤끝을 땅에 박고 버티다가 윙드 후사르의 기마돌격에 휩쓸려가는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코사크가 후사르를 상대로 말에 탄 채 싸우느니 차라리 보병으로 싸우고 말 정도였다는 뜻이다.

어쨌든 코사크를 상대로 토르구트의 우위가 확인된 뒤부터는 다시 도전해올 이유가 없었다. 기병 겨우 3천이 우크라이나 전체를 힘으로 지배하게 됐고, 이들 토르구트 기병은 이민호를 고용주로 모시고 있었다.

“잘 됐어. 3개월마다 확실히 교대시켜줘. 당분간 폴란드와 독일만 들여다보면 되겠군. 네덜란드 독립전쟁이나 프랑스 내전, 시암과 캄보디아는 알아서 싸우든 말든 하라고 해.”

“예, 전하. 그런데 독일에서 스웨덴이 계속 승리하면서 식량 수송 작전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독일 내 육로 수송이 신교도 영주들의 협조를 받아 좀 더 원활해진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도 식량이 못 들어가는 곳이 더 많아.”

굶어 죽어가는 독일 난민들을 북미로 이주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내륙까지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시 알더라도 해안이나 강변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다 굶어죽거나 남의 식량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파푸아 식인종들이 그렇게 속을 썩여도 마을을 화끈하게 박살내지 못하는 이유가 독일인들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는 확실히 파푸아 원주민들이 독일인보다 훨씬 안전하고 더 행복한 것 같았다. 고산국의 지배 아래에 있는 동안에는 최소한 굶어죽을 염려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마치려면 천회를 좀 넘기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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