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94 104. 제국의 길 =========================================================================
크리스티나에게 선물로 준 망아지가 있는 마구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크리스티나 앞에 웬 16세쯤 된 소년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궁내부 관리들과 시녀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이민호가 그의 정체를 물었다.
“제 이름은 성이 없이 그저 구스타브 구스타브손입니다, 전하.”
“구스타브 국왕의 아들 구스타브로군. 만나서 반갑다.”
이민호가 손을 내밀자 구스타브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맞잡았다. 악수 하나만으로도 궁내부 관리들이 질투의 시선을 쏟아냈다. 귀족 가문의 시녀들은 구스타브에 대한 평가를 단숨에 여러 등급 올렸는지 이민호와 구스타브의 행동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주시했다.
구스타브라는 소년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의 유일한 아들이면서 서자였다. 나중에 크리스티나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아 정식 귀족으로 승작하며, 바사 왕조의 방계 가문인 바사보르그 가문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1637년 북독일 오스나뷔릭 주교령의 수장이 되고, 1647년 핀란드 남서쪽 니쉬타브의 백작이 되는 구스타브는 현재 귀족도 아닌 일개 군인 신분이었다.
“영광입니다, 전하.”
“친구의 아들인데 처음 보는군. 구스타브가 보물을 숨기고 있었어.”
“저는 그저 하찮은 서자일 뿐입니다, 전하.”
유럽 기독교 문화권에서 서자는 사생아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이 시대 유럽에서 사생아는 채무자와 함께 해군에 강제 징집되거나 감옥에 갇힐 정도로 흉악한 범죄자와 동격이었다.
게다가 그의 모친 마르가레타 슬로츠는 궁정에 거주하는 정식 미스트레스가 아니라 구스타브 국왕의 아들을 낳고 나서도 다른 남자들과 재혼을 몇 번이나 거듭한 여자였다. 이 여자는 국왕이 면세 특권을 준 사실을 몰랐던 촌장을 하인을 시켜 두들겨 패서 죽음으로 내몰았으나 벌을 받지 않았다.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 탓에 구스타브가 이 여자를 만나주지 않았지만, 아들에게 법적으로 인지(認知)를 해줬으므로 구스타브 구스타브손은 국왕의 자식임이 확실했다.
“국왕전하! 구스타브 구스타브손은 한낱 군인으로서 기사도 아닌 주제에 감히 국왕의 기사가 되고 싶다고 크리스티나 국왕께 청원을 했습니다. 당장 이 자를 쫓아내겠습니다.”
“이보게. 지금 나하고 대화중이잖은가?”
“죄, 죄송합니다, 전하!”
궁내부 관리들을 뿌리치고 구스타브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크리스티나가 유일한 동기간인 구스타브의 손을 꼭 잡고 졸졸 따라왔다.
서자가 왕위 계승을 할 수도 있는 동양과 달리, 일부일처제가 완전히 고착된 유럽에서 서자는 왕족이나 귀족의 상속권에서 확실하게 벗어난 열외 혈족이었다. 성인에 가까운 오빠인 구스타브가 있는데도 크리스티나의 왕권에 도전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게 된 만남이었다.
“전하! 고산국에는 적서 차별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물론이지. 구스타브 자네도 고산국으로 이민을 오면 어떻겠나? 고산국은 전쟁 난민과 종교 난민처럼 신분 난민에게도 이민의 문호가 활짝 열려 있다네.”
조선에서 고산국으로 서얼이나 중인 이하가 주로 이주하듯이, 유럽에서도 귀족과 상인의 서자들이 고산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흔했다. 아무리 나라가 지옥 같더라도 언제 어디서건 특권층은 여전히 살기 좋았고, 이 시대 이민은 하층민들이 생존할 기회를 얻기 위한 필사적인 선택이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는 크리스티나 국왕의 반쪽자리 오빠로서 이 분을 지켜드려야 합니다. 섭정들과 왕비마마에게 핍박을 받는 어리신 국왕폐하께 제가 잠시나마 정신적 위안이라도 드리고 싶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엘레오노라 왕비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있더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요한 지기스문트의 딸인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일반적인 어머니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평소에도 딸의 양육에 무관심했으며 국왕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는 크리스티나를 감금시키기도 했다.
크리스티나가 왕비와 같은 마차에 타고 있을 때 어머니와 딸로서 거의 교감을 나누지 않았던 것을 이민호는 기억했다. 엘레오노라 왕비가 이민호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것은 섹시한 미망인으로서의 매력을 어필한 것뿐이었다는 사실에 몹시 소름이 끼쳤다.
크리스티나의 어머니에 비해 배 다른 서자 오빠에 불과한 구스타브는 차라리 훨씬 인간적이었다. 궁내부 관리와 시녀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왕비에게 무시를 당하고도 크리스티나를 지키겠다는 구스타브의 신념은 확고한 듯했다. 구스타브의 손을 꼭 쥔 크리스티나의 작은 손을 보면 어머니보다는 배 다른 오빠가 훨씬 가까운 가족이었고, 또한 16세에 불과한 소년이었지만 여왕의 보호자로서 더욱 믿음직했다.
“구스타브 구스타브손은 무릎을 꿇어라.”
이민호가 호위에게서 건네받은 보검을 뽑아들었다.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고 궁내부 관리들이 놀라서 몰려오는 사이, 기사 서임식을 처음으로 구경하게 된 크리스티나의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왔다. 이민호가 쑥스러워서 평소 자주 하지 않던 기사 서임식을 마구간에서 하게 됐다.
“고산국 국왕의 권한으로 스웨덴 크리스티나 국왕의 신민 구스타브 구스타브손에게 고산국 기사 자격을 내리겠다. 그대는 귀족 가문을 창설할 권리가 있다. 작위는 고산국 카나타 백작을 하사할 테니 고산국과 스웨덴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
“영광입니다, 국왕전하. 하지만 저는 스웨덴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무릎을 꿇은 구스타브가 엄숙한 표정으로 사양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이미 모든 상황을 이해하면서 보검의 검면으로 구스타브의 양 어깨를 두들겼다.
고산국에서 카나타는 현대의 핼리팩스 지역을 넘어 북미 대륙 북동부, 현대의 캐나다 동부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이었다. 땅 넓이로만 따지면 독일보다 넓다는 스웨덴의 네 배가 넘었다. 물론 고산국에서 귀족 작위는 명예직에 불과했지만, 어디 가서 신분 때문에 다른 귀족에게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됐다.
“구스타브 구스타브손 아프(af) 카나타 백작에게 스웨덴 국왕 크리스티나가 교육을 받는 기간 동안 피교육자인 국왕과 교육자들을 보호하는 호위기사로 일할 것을 명한다. 재정 및 인력 지원은 스웨덴 주재 고산국 대사관에서 받도록.”
“화, 황공하옵니다, 전하.”
이민호가 귀족 작위를 내린 이유를 구스타브가 이해하고 눈물을 쏟았다. 이민호가 스웨덴의 정치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구스타브 국왕의 유언장에 의해 유일하게 크리스티나의 교육 환경만큼은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다. 바로 그 교육의 현장에서 구스타브가 여동생 국왕에게 정신적 안정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아저씨! 저한테 보검을 잠시만 빌려주세요.”
“왜? 구스타브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게? 안 됐지만 지금 크리스티나에게는 불가능하단다. 그리고 넌 이 검을 들지도 못해.”
스웨덴은 귀족원에서 귀족 업무를 총괄했고, 기존 귀족들의 입김이 신규 귀족의 승작 문제에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현재 스웨덴 국왕의 모든 권한은 섭정들에게 가 있었다. 고산국처럼 국왕 개인이 아무 때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히잉!”
“열여섯 살이 되려면 아직 10년이나 남았다. 그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해서 훌륭한 국왕이 되어라.”
이민호가 크리스티나 여왕의 미래에 대해 아는 유일한 것은, 데카르트를 스웨덴에 초빙해서 새벽 5시에 철학 강의를 받는 바람에 그가 폐렴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앞으로 데카르트가 크리스티나의 교육과정 전반을 책임지겠지만, 절대로 겨울에 스웨덴을 방문하지 못하게 만들 계획이었다.
“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할게요.”
“안 돼! 교수들에게도 개인 생활이 있어. 크리스티나도 아침 9시 전, 오후 5시 후에는 쉬거나 뛰어 놀아라.”
섭정들과 왕비가 합의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민호는 별 기대도 않고 그들을 만났다.
이민호와 크리스티나 뒤에 구스타브가 따라붙자 섭정들이 잠시 눈을 빛내다 말았고, 엘레오노라 왕비는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구스타브가 스웨덴 국왕의 신민으로서 고산국 기사와 백작 작위를 받았다고 설명하자 축하를 해주고 넘어갔다.
“고산국 국왕전하의 제안 두 가지를 섭정단에서 검토했습니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선왕의 신하이며, 그래서 선왕의 유지를 이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일부러 무시하고 있겠지만, 그대들은 현 국왕 크리스티나의 신하라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이민호는 섭정들에게 선왕을 따라 순장하라고 농담으로라도 권할 수 없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따라 무덤에 묻히라고 윽박지르면 진짜로 자결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크리스티나가 명목상 스웨덴의 여왕, 혹은 국왕이었지만 성인이 되어 친정에 나설 때까지 국정에 관한 권한이 전혀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스웨덴의 야욕을 막아야 했다. 이민호가 가진 무기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 휘둘렀다.
“기한에 달한 채권을 모두 회수하겠소. 대출 연장은 없소.”
“국왕전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새로 개발된 스웨덴 광산들은 이제 막 본격적인 채광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광산 운영을 멈추면 막대한 손해가 발생하고 광부들은 직업을 잃습니다!”
섭정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고산국이 스웨덴에 경제적 압력을 가해도 섭정들이 독일에서의 전쟁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했다지만 뤼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현재 신성로마제국과 가톨릭동맹의 군사력이 와해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스웨덴이 조금만 더 군사적 성공을 거둔다면 최소한 독일 북부 전체가 스웨덴 영토가 될 것이다. 그런 기대를 섭정들이 접을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웠다.
“내가 독일 영토에 야심을 가졌다는 비난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소? 유럽의 귀족들이 우려하는 스웨덴에 대한 경제 지원을 그만 두겠소.”
“그래서 고산국에 핀란드를 넘겨드렸지 않습니까? 국왕전하께서는 부디 약속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전하!”
고산국이 독일에서 군사적 중립을 유지하면서 식량 공급과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굶어 죽을 뻔했던 농노들은 무척 고마워했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실과 귀족들은 신앙의 차이를 떠나 강대국인 고산국의 개입을 두려워하고 대의명분 뒤에 숨은 계략을 의심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저씨 화났어요?”
“내 얼굴에 표가 나니? 아니다. 앞으로도 전쟁이 계속될 것 같아 걱정될 뿐이란다.”
크리스티나가 이민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이민호는 스웨덴의 군주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저는 아빠를 빼앗아간 전쟁이 싫어요. 돌아가시기 전에도 전쟁터에서 사셨거든요. 하지만 스웨덴 신민들이 굶주리게 되는 것도 싫어요. 아저씨가 스웨덴을 도와주세요. 아빠 친구잖아요. 네?”
“그래. 크리스티나 네 말이 스웨덴을 구했다. 섭정들은 들으시오! 방금 내 말은 취소하겠소. 현 상태 그대로니 섭정들이 알아서 하시오.”
한 입으로 두 말한 이민호가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회의실을 나섰다. 일개 병사에서 스웨덴 여왕의 호위기사로 발탁된 구스타브가 망토를 펄럭이며 두 사람을 따랐다.
“고마워요, 아저씨.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아셨으면서 왜 섭정들을 위협하신 거여요? 국왕의 위엄에 손상이 갈 수 있잖아요?”
“크리스티나 네가 스웨덴의 군주라는 사실을 섭정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단다.”
스웨덴은 군주제 국가니까 섭정이 아니라 국왕이 주권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 폴란드라면 국왕이 아니라 귀족 의회가 주권자였고, 네덜란드는 상인들의 연합이 사실상 주권자였다.
이민호는 각기 그 나라가 처한 환경과 정치제도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고, 최대한 존중해주려 했다. 현실적인 요구 때문에 섭정 제도가 필요하더라도, 그 섭정들은 선왕이 아닌 현재 국왕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섭정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저는 어려서 능력이 없는 걸요?”
“지금은 상관없다. 그러나 친정을 하게 되고 나서 신하들을 제대로 다루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거다.”
이민호는 고산국 아이들에게 마음껏 뛰어놀라고 했지만 나라를 책임져야 할 군주에게는 다른 말이 나왔다. 등에 나라를 지고 살아야 할 군주는 어쩔 수 없었다.
“어린 네게 무거운 책임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하구나.”
“대신 제가 성인이 되면 멋진 남편감을 찾아주세요.”
“쿨럭! 물론이다.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네 마음에 들 때까지 후보자들을 찾아주마.”
크리스티나는 실제 역사처럼 독신으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 작은 여왕은 이민호의 며느리나 손자며느리로 아주 괜찮은 후보였지만, 딱히 혼사로 엮을 필요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배 다른 남매라는 점에서 막장 드라마 스토리가 마구 떠올랐습니다만... 자제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