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98 105. 대국의 길 =========================================================================
“공작이 직접 이단 심문소에 가겠다고?”
“그냥 종교 재판소라고 하십시오, 전하. 그들은 저의 적이 아닙니다. 제가 잘 설득해볼 테니 전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갈릴레오 공작이 작년에 발행한 천문학 책에서 지동설 부분을 로마교황청의 고지식한 성직자들이 문제 삼았다. 그래서 갈릴레오를 로마로 소환했는데, 이민호가 반대하는데도 갈릴레오는 로마행을 고집했다.
“고위 성직자들이나 갈릴레오 공작이나 고집이 세기로는 마찬가지야. 대화가 통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여러 가지 논거를 준비했습니다. 이 정도면 성직자들도 지동설을 수용할 겁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증명할 천체 모형을 만들고 사진과 도형 등 정말 다양하게 준비했다. 문맹이라도 당장 고개를 끄덕거릴 만하지만 상대는 평생 종교 공부를 했던 고위 성직자들이었다.
“과연 그럴까? 종교 경전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인 사람들한테는 지동설이 절대 통하지 않을 거야. 화형 당하면 어쩔 텐가?”
“고산국의 공작을 화형시킬 만큼 성직자들이 간이 붓지는 않았을 겁니다.”
“공작! 성직자들에게 항복한 다음 종교 재판소를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같은 소리를 하게 될 것 같은데?”
“하하! 제가 그 정도로 심약하지 않습니다. 국왕전하의 표현을 빌자면 그토록 찌질하지 않습니다.”
갈릴레오 공작이 이민호가 내준 특별기를 타고 로마로 향했다. 종교 재판소 밖에서 스위스 근위병들이 발을 맞춰 행진하는 소리가 특히 무겁게 느껴졌다고 한다. 괜히 장갑차가 굉음을 울리며 로마 시내를 달리기도 했다. 로마의 하늘에는 아침부터 비행기가 소음을 내며 날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기경과 신학자들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갈릴레오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들은 결국 갈릴레오가 주장한 태양중심설, 즉 지동설을 이단으로 선포하면서 나이와 건강을 감안해 평생 가택 연금을 선고했다. 설득에 실패한 갈릴레오는 기존 주장을 철회했으나, 로마교황청의 금서목록에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책에 이어 갈릴레오의 저작물들이 다수 오르게 됐다.
“갈릴레오 공작이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야.”
“사형을 각오하고 저 개인의 소신을 밀어붙일 수도 있었습니다만, 로마교황청과 고산국의 외교 관계를 감안해서 제 주장을 잠시 덮어두기로 했습니다.”
“큭큭! 충신 났네. 아! 심각한데 웃어서 미안하네.”
이민호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갈릴레오 자체가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 굳이 교황청과 충돌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청이 아무리 고산국에게서 군사적, 경제적 압력을 받는다 해도 이 시대에 유행한 문자주의 탓에 성경 글귀와 다른 갈릴레오의 저작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지동설을 인정하는 것은 성직자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민호도 종교 재판소에 형식상 압력을 가하긴 했지만, 목숨을 걸고 갈릴레오를 압박한 성직자들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 우려하신 바와 달리 저는 종교 재판소를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같은 소리는 안 했습니다.”
“그럼! 공작이 안 찌질해서 다행이야.”
갈릴레오가 돌아오기 전에 교황이 왕궁에 친서를 보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갈릴레오와 친분을 갖고 있었고, 또한 종교 재판소와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모든 천문학적 관측과 실험 결과 태양중심설이 맞는데도 추기경들이 괜히 고집을 피웠습니다. 지동설은 전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성직자들 입장에서는 성경무오설이 신도들에게 존중받아야 하는데 그들이라고 어쩌겠어? 대신 공작이 가택 연금을 받아들이는 한 가톨릭교회에서 파문하지 않기로 했네. 이건 교황 성하께서 보낸 친서라네. 읽어보게.”
“휴!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종교 재판소 성직자들이 종교 교리에 입각해 선고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우르바노 8세 교황은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 지위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종교 재판소에서 선고한 평생 가택연금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갈릴레오에게 선고될 뻔한 파문 조치를 교황이 철회해줬다.
덕택에 갈릴레오는 저택과 형식상의 영지 내에 위치한 성당과 천문대를 오가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다만 고산국 천문대장 격인 관상감의 직책에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이민호가 갈릴레오 공작의 연금과 연구비를 올려줘서 관상감 퇴직으로 인한 손해를 벌충해줬다.
“공작이 가톨릭교도라지만 이번 일로 교황청에 큰 부담을 줬어.”
“예. 저나 교황청이나 비신자들에게 영원히 놀림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방향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교황청이 그리 꽉 막힌 집단은 아닐세. 나중에 정상으로 되돌려줄 거야.”
“그렇게 된다면 기쁘겠습니다만, 아마도 제가 죽기 전에는 기대하기 어렵겠습니다.”
재판이 잘못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갈릴레오에게 사과한 것은 1992년의 일이었다. 갈릴레오 사후 350년이 지난 해였다.
홍콩의 봄은 왕도보다 따뜻해서 좋았다. 거대한 부두와 물류창고, 시멘트 공장 굴뚝에서 뿜어내는 허연 수증기가 20세기 후반의 한국 항구도시를 연상시켰다.
광저우의 외항 겸 고산국 아리수 항의 외항으로 건설한 홍콩은 나날이 발전해갔다. 홍콩은 물류 중계기지와 중개무역 기지 역할뿐만 아니라 시멘트 공장, 연탄 공장 등 대단위 공단이 준공돼 명나라 노동자들을 대량 고용했다. 당연히 문제도 많이 생겼는데, 문제를 해결해야 할 두 나라 합작기관인 홍콩행정청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예전에는 북경에서 파견된 환관 한 명이 행정청장에게 지시를 전담했습니다만, 요즘은 황제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황제폐하께서는 사소한 일에도 매우 꼼꼼하게 처결하십니다. 덕택에 사소한 일마저 북경의 황제에게 일일이 재가를 받느라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냥 이익금 분배만 받으라니까, 당금 황제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
홍콩행정청의 부청장이 보고하자 이민호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고용 문제를 명나라에 맡겼더니 공장 노동자나 부두에서 일할 인부 한 명을 새로 고용하는데도 최소 6개월이 걸렸다. 홍콩에 고용되기 위해 여러 부서에 뇌물을 바쳐야 하는 노동자들은 회사에서 무료 제공하는 점심 한 끼로 하루를 버텼다.
“저들끼리 임금을 어떻게 나눠먹든, 노동자를 뜯어먹든 상관없습니다만, 고용 문제가 이렇게 경색되면 앞으로 더 큰일입니다. 공장의 이익이 문제가 아니라 작업장의 안전이 문제가 됩니다.”
“알겠네. 북경에 특사를 보내겠네.”
돈에 관한 중국인들의 집요함을 무시한 게 실수였다. 설마 황제쯤 되는 이가 신규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위에 바치는 뇌물에까지 신경을 쓰는 줄은 미처 몰랐다.
“외국 영토에서 일하면서 생기는 당연한 문제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항구를 전하의 직할지인 해남도로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동남아와 유럽에 더 가깝고 인력은 충분한 편입니다.”
“아리수 항에서 너무 멀어. 그리고 광저우의 수출항이라는 역할을 해남도가 대신할 수는 없지.”
해남도가 이민호의 관작인 주애공의 영지라 하나 홍콩처럼 명나라 영토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명나라 본토의 일부에 고산국의 거점을 마련해둔 전략적 이유가 따로 있었다.
“요즘 상하이를 개척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홍콩과 똑같은 문제에 부닥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조만간 해결될 테니 걱정 말게.”
서광계가 자비를 들여 개척하던 상하이를 인수해 고산국 공조에서 항구도시로 개발 중이었다. 복건성 외에 홍콩, 상하이, 텐진에 고산국의 거점을 마련하는 장기 계획이 현재 맹렬히 실행 중이었다.
그러나 홍콩과 마찬가지로 이들 항구도 명나라의 영토라서 원활한 운영이 불가능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부청장은 이민호가 직접 해결하는 것이 아닌 ‘해결될 테니’라는 말에 주목했다. 이민호가 눈치 채고 얼른 말을 돌렸다.
“참! 상선 선원들의 무장과 훈련은 제대로 돼 있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대홍단 계획에 따라 남중국 해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상선 선원들이 철저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해적선은 우리 배에 접근도 못하고 혹시나 밤에 해적이 배에 넘어오더라도 바로 사살당합니다. 그런데 혹시 대홍단이 무슨 뜻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험! 험! 그런 게 있네.”
소말리아 해적들을 역으로 털어버린 북한 대홍단호 선원들에게 감명을 받은 이민호가 상선 자체 무장계획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2007년 대홍단호는 생포된 해적들을 선상에서 처형하려는 쇼를 보여준 다음, 1인당 몸값 백만 달러를 미국으로부터 받아냈다.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의 명나라와 달리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은 몹시 안정적이었다. 메콩 강 개발계획이 완료되면서 베트남이 남진을 멈추고 참파 왕국은 살아남았다. 시암이 고산국에 붙은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수마트라 섬에서는 아체 술탄국이 주변 바다를 평정했다.
고산국이 주도하는 평화에 의해 덕을 본 것은 아시아에 진입한 유럽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카오와 마닐라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선들이 매년 수십 척이 입항했다. 수에즈 운하 개통과 고산국 항로국에서 발행한 정밀한 해도 덕택에 항해의 안전이 보장된 탓이었다. 해류와 무역풍을 이용해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방법이 상세히 알려진 이후 해난사고가 대폭 줄어들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바 섬 서쪽에 건설한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동남아에서 적극적인 무역활동에 나섰다. 향료 제도에서는 파는 자와 사는 자 사이에 공정한 거래가 이뤄졌다. 실제 역사처럼 향료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나무를 죄다 뽑는다거나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일은 없었다. 항구를 갖지 못한 잉글랜드 선박들은 다른 나라에서 개발한 항구에 빌붙어 상행위를 영위했다.
“가난한 잉글랜드의 무역선에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찌 된 셈인지 강대국인 고산국의 젊은 분들이 영어를 꽤나 잘 구사하시더군요. 출항 전부터 저희 선원들이 애써 고산국어를 배웠는데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흥! 대문호를 배출하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나라라고 자랑하는 건가?”
이민호는 시간이 날 때면 아리수 항에 입항한 외국 무역선 선장을 만나 현지 사정을 물었다. 요즘 입국하는 잉글랜드 무역선 선장들은 이민호가 예전에 알던 것보다 훨씬 지적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잉글랜드 상선은 해적선이나 다름없었으나 고산국이 세계의 해양을 장악한 이후 안전이 보장되자 급속히 비군사화된 탓이었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훌륭한 작품을 쓴 것은 사실입니다만, 고산국에서 약간 과대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맞아! 바로 그렇지! 선장이 뭘 아는구먼.”
잉글랜드와 영어가 국제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꾸준히 견제했던 이민호는 요즘 몹시 속이 쓰렸다. 잉글랜드는 별 것 아니지만 영어가 고산국에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작가 한 명의 힘은 이렇게 위대했다.
켈트어가 바탕인 브리튼 섬에 앵글족과 색슨족의 독일어가 바이킹 데인인의 침략을 받고, 이어서 노르드 계통으로서 프랑스 귀족이 된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어쩌고 하는 이론은 신경 쓸 것 없었다. 피진 잉글리시나 크레올처럼 여러 언어가 뒤섞이면 문법이 몹시 간단해진다.
고산국 학생들이 외국어로 영어를 선택하는 이유였다. 고산국에서 활용 가능성이 높은 스페인어나 불어, 독일어와 러시아어는 기본적으로 문법과 성, 수, 격에 따른 단어의 굴절 양상이 지나치게 복잡했다.
“요즘 잉글랜드에서 찰스 1세 국왕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는 것 같아. 선장이 보기엔 어떤가?”
“그렇습니다, 전하. 의회 권한이 강한 잉글랜드에서 국왕이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국왕이 권력구도를 개편하겠다고 군사를 동원한다면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자칫 국왕에게 대역죄가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신성로마제국 등 강대국들이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스웨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사적 성공이 유럽의 군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군주들은 구스타브가 민중들에게서 얻은 인기와 이로 인한 군사적 성공에만 주목했지, 그가 왜 인기를 얻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들 귀를 닫았다.
“종교 정책에도 문제가 많다면서?”
“맞습니다, 전하. 찰스 국왕은 올해 켄터베리 대주교로 윌리엄 로드를 지명했습니다만, 그가 전례 형식을 죄다 예전 가톨릭 방식으로 되돌렸습니다. 그는 성공회 신자가 아니라 가톨릭 성직자나 마찬가지인 인물입니다. 그가 말로는 성공회의 개혁과 기독교 통합을 내세우지만 개신교도들과 청교도들의 반발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앞으로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선장의 입에서 런던 주재 고산국 대사관에서 올린 정보 보고와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됐다. 이민호는 선장에게 좋은 숙소를 배정하고 무역에도 약간의 특혜를 베풀었다.
============================ 작품 후기 ============================
하루 이틀 정도 쉬겠습니다. 추석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