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02 105. 대국의 길 =========================================================================
“국왕전하! 반란 진압을 경하드리옵니다.”
“뭐, 고맙소.”
이민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오스만 제국 대사의 축하를 받았다. 고산국 입장에서는 전혀 자랑할 게 아니었지만 국제 외교가에서 이번 사건은 고산국에 사절단을 파견할 좋은 핑계꺼리가 됐다.
비슷하게 명나라에서 대규모 반란을 진압할 때마다 조선 같은 명목상 제후국들에서 축하 사절단을 북경에 파견했다.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관행이지만 당연히 외교적 이익과 이에 동반된 공무역에서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듣자 하니 수륙양용 경전차라는 수레는 땅 위를 달리는 것처럼 물 위에서 달릴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국에 딱 열 대만 팔아주시면 무도한 반역자들로부터 제국 황실의 안전이 보장될 것 같습니다만.”
“외국을 침공할 때 동원할 우려가 있으니 결코 판매하지 않겠소.”
반란이 진압되자마자 가장 먼저 알현을 신청한 오스만 제국 대사는 경하 사절단 혹은 위로 사절단의 입국 절차를 논하는 것은 아예 뒷전이었다. 대사의 뇌리에는 오직 경전차밖에 들어있지 않은 듯했다.
오스만 제국 대사는 반란군 기갑부대가 어떻게 궤멸되는지 대사관 옥상에서 똑똑히 지켜봤다. 대사는 즉시 오스만 제국 주재 고산국 대사관에 전보를 쳐서 왕도에서 반란이 진압됐음을 제국 황실에 알렸다.
그리고 황제와 대재상으로부터 재가를 받아 빠르게 움직였다. 황실과 대재상부에 전보를 칠 때 고산국 대사관을 이용하므로 고산국 예조에서 그 내용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사람이 직접 왕복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금으로 경전차와 같은 무게의 금, 어떻습니까? 고산국이 주조한 금화가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탓에 고산국에 금이 항상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만성적인 금 부족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기회입니다.”
“쿨럭! 그래도 고산국에서 외국에 무기를 수출한 적은 없지 않소?”
오스만 제국 대사가 집요하게 경전차 수출을 요구했다. 그만큼 이번 경전차의 활약이 대사가 보기에 몹시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경전차와 같은 무게의 금을 지급하겠다는 대사의 제안에 이민호가 살짝 흔들리기도 했다.
사실 철갑탄을 빼면 경전차가 다른 전차와 다를 것은 별로 없었다. 다만 습지에서 활동할 것에 대비해 무게를 줄이고 수상항주 능력을 부여한 것뿐이었다.
“전하! 화승총이나 경전차나 사람 죽이는 무기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국은 지금까지 고산국에서 2만 정 이상의 화승총을 수입했으니 신용은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고산국은 전통적 우방이지 않습니까?”
“화승총이야 다른 나라에서도 생산하고 있어서 무기수출 금지 목록에서 삭제된 것뿐이오. 고산국 정규군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절대 팔지 않을 테니 억지 부리지 마시오.”
“아! 몹시 섭섭합니다, 전하. 제국의 속국이었던 이집트가 고산국 속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용인해드렸고 이웃나라 베네치아가 고산국 속국이 된 것도 눈감아드렸습니다. 더욱이 제국 해군이 베네치아 배를 약탈하지 않도록 칙명을 내리게 해드렸습니다.”
이집트가 고산국 속국이 됐다 하나 여전히 이스탄불에 공물을 바치고 있어서 오스만 제국이 손해 볼 건 없었다. 베네치아가 속국이 됐을 때는 크레타 섬 동쪽에 오스만 제국 해군을 위한 항구를 건설해주었다. 이렇게 고산국만이 일방적인 이익을 취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베네치아가 속국이 되면서 오스만 제국이 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평소 베네치아 선박을 나포해 젊은 베네치아 여자들을 황궁에 바쳤는데, 베네치아가 고산국 속국이 되면서 하렘을 여자들로 채우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렇다고 여자 노예를 사서 오스만 제국에 줄 수는 없었다.
“오스만 제국에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만 다른 외국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무기를 판매할 수는 없소. 대신 무역에서 제국이 약간의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드리겠소.”
“비단과 도자기 가격을 인하해주십시오!”
“좋소. 고산국 국영기업의 수출품 중에서 몇 가지 품목의 가격을 오스만 제국에 한해 5년 동안 1퍼센트를 인하해드리겠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무역상의 특혜는 본국에서 출발할 사절단이 왕궁을 공식 방문했을 때 선물로 풀어주십시오.”
“대사는 제국의 충성스런 신하이며 몹시 유능하니 금방 승진하게 될 것 같소.”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혹시나 제가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받는 것도 있어야 했다.
“국익을 위한 협상 기술의 하나로 이해하겠소. 대신에 폴란드 국경, 특히 우크라이나 방면 국경이 조용해졌으면 좋겠소.”
“토르구트 기병 3천이 우크라이나에 상시 배치됐다는 사실을 이미 들었습니다. 어느 누가 감히 목숨을 걸고 우크라이나를 약탈하려 하겠습니까? 제국의 속령 신민들 중에서 거지가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은 없으니 우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뛰어난 승마실력을 갖춘 토르구트 기병이 그 동안 멋모르고 도전했던 노가이 타타르나 코사크들이 탄 말과 물건을 모조리 빼앗아버린 사실이 그 지역에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약탈자들이 토르구트에 더 이상 도전하지 못하는 것은 고산국이 뒷배를 봐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코사크나 노가이, 크림 타타르는 쉽게 몇 만 병력을 동원할 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굳이 토르구트 기병 3천을 치다가 고산국이 개입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고산국에서 병력을 파견해 국경을 안정시켜준 것만으로도 오스만 제국에게는 이미 충분한 이익이었다. 폴란드 입장에서도 남쪽 국경이 안정된 만큼 북쪽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 있게 됐다. 푸츠크가 요새화되고 군항이 건설됐으며 함대가 빠르게 재건되고 있었다.
“아바마마! 알현실 밖에 각국 대사들이 끝없이 줄을 섰습니다.”
“안 되겠다. 인사만 받고 실무 협의는 예조로 넘기자.”
“예. 하지만 앞으로 정식 사절단이 방문하면 아바마마께서 직접 알현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 할 수 없지. 세자도 힘을 내거라.”
세자 표정이 울적해졌다. 국왕이 외국 사절들과 만나는 자리에 세자도 반드시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이 넘쳐나도록 만든 반란군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반란을 진압한 다음 후속 조치가 마무리 되어가는 9월 하순, 반란 수괴와 적극 가담자들에 대한 공개 처형이 아리수 강변에서 진행됐다. 대역죄는 사형 집행 방법이 참형 한 가지로 정해졌기에 죄인 65명이 줄줄이 목이 잘렸다. 그러나 묵묵히 칼을 받는 죄인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끝까지 살려달라고 울고 짜는 추태를 부렸다.
수사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추밀원 의원 5명, 지방의회 의원 12명, 고등법원 판사 3명, 지방법원 판사 6명, 각급 검사 12명, 변호사 31명, 경찰 142명, 군인 39명이 체포됐다. 이들 중에서 의원 및 판검사, 장교 전원과 변호사, 경찰, 군인 중에서 주모자급 27명을 참형에 처했다. 나머지는 평생 탄광에서 일하도록 직업을 알선했다.
세자를 체포하겠다고 왕궁에 들이닥쳤던 경찰 다섯 명도 적극 가담자로 분류돼 참형에 처했다. 수사를 위한 단순 체포가 아니라 거사 중에 세자를 인질로 활용하고 거사가 끝난 다음 처형하려는 음모가 군 수사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영장을 신청하고 발부한 판사와 검사도 주모자급으로 분류했다.
“씁쓸합니다, 아바마마.”
“관료나 의원, 법관, 장군들은 우리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자들이지만 대체로 권력에 매우 민감하다. 이들은 우리가 힘이 없다거나 반항해도 유화적인 대처를 할 거라고 판단되면 언제든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다. 그러니 감시를 결코 게을리 하지 마라.”
“예, 아바마마. 백성들을 항상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확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1 기병사단장이 왕도 주변에 주둔하는 휘하 2개 여단 병력 중에서 겨우 1개 대대밖에 반란에 동원하지 못했다. 특전여단에서는 반란에 가담한 중간 지휘관을 수하 장병들이 제압하기도 했다.
이는 현대사를 배운 이민호 입장에서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지휘관이 명령하면 소속부대 장병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혹은 알더라도 반란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1월에 명나라 예부상서 서광계가 사망했다. 그가 말년에 개척하던 상하이를 몇 년 전에 고산국에서 인수해서 아직도 건설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서광계가 생전에 교회와 학교, 고아원과 병원을 지었다면 고산국에서는 완벽한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상하이의 배후도시는 남경과 쑤저우, 항저우 등 거대 도시들이었기에 발전 가능성이 극히 높았다.
그런데 상하이에서도 홍콩처럼 명나라 황제가 지분 참여를 시도해 결국 50퍼센트를 가져갔다. 황제로부터 금을 받는 대신 은을 풀게 돼서 이민호 입장에서 별로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홍콩처럼 상하이에서도 인력 수급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조금 걱정됐다. 이민호의 뇌리에 언뜻 개성공단이 떠올랐다.
“복건 차밭과 홍콩, 상하이에 이어 조만간 텐진도 우리 손에 들어올 것이다. 우리가 야금야금 명나라 해안 지방을 잠식하는 와중에 명나라 조정에서 뭐라고 떠드는지 세자는 아느냐?”
“고산국은 해안지방에서만 힘을 쓸 수 있다는 평가가 어느덧 정설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 만약 우리가 침략야욕을 드러낼 경우 해금령과 이주령을 내려서 해안지방을 깨끗이 비우면 우리가 지레 포기하고 물러날 것으로 믿는다. 사실 내륙지방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명나라 해안지방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었다. 이민호는 명나라 항구 몇 개만 장악하고 교역을 유지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항구라는 것도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을 고산국에서 직접 건설해서 운영했으니 명나라 황실이나 관료들은 고산국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만약 19세기 유럽 국가들처럼 기존 항구도시를 무력으로 점령하거나 조정을 압박해 조계(租界)를 설정할 경우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중국인들 입장에서 외국인은 침략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예상치 못한 온갖 곳에서 중국인들의 태업이나 반발에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행정청을 통해 항구도시를 건설, 운영하고 지분에 따라 이익을 나눈다는 개념이 명나라 황실과 조정에 잘 먹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홍콩에서 겪었듯이 세금을 걷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익 배분을 받으니까 지금 당장은 저들에게도 좋겠지. 유사시에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해보지도 않고 말이야.”
말하기 좋아하는 시골 학자들이 고산국이 건설한 항구도시가 침략의 교두보가 될 거라고 비판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다만 고산국이 명나라라는 지배체제를 공격할 의사가 없을 뿐이었다. 만약 농민반란이 다시 대규모로 일어날 경우 상하이와 홍콩은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서 칸디다 부인은 만나봤느냐?”
“예, 아바마마. 선교에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선사업에만 쓴다는 계약서를 받고 매년 은 삼만 냥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이민호와 세자는 순양함을 타고 상하이의 중심인 황포강을 거슬러 오르는 중이었다. 멀리 보이는 교회와 병원, 학교와 고아원은 서광계의 손녀 서 칸디다가 짓고 운영하는 곳이었다.
“은 삼만 냥이라면 국가 자선사업체 예산 중에서 극히 미미한 비율에 불과하다. 주상아 공주가 부탁했으니 들어줘야지.”
“종교단체가 병원과 학교,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은 순수한 자선활동이 아니라 선교활동의 일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부르게 하고 배고픈 고아들이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분명 종교적 중립에서 벗어난 일들이었다. 그러나 자선 기관에서 무료로 봉사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무턱대고 비난만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는 거니 그 정도는 눈감아줘라. 기부금을 꿀꺽하는 인간들을 전에 봤잖느냐?”
“예. 그 인간들 때문에 명나라 빈민 수만 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남들 보라고 자선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다가 나라 하나쯤은 쉽게 멸망시킬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자선사업과 예산을 맡기느니 차라리 체계적인 자선활동을 오랜 세월 지속하는 종교단체가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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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대충 완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