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006화 (955/1,000)

01006  105. 대국의 길  =========================================================================

1634년의 새 아침이 밝았다. 다시 한 번 외국 사절단들이 떼를 지어 왕도를 방문했으나 어느덧 연례행사가 돼서 이제는 고산국 관리들이 익숙하게 대처했다. 주작대로에 늘어선 거대한 건물들을 사절단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경하게 만드는 것이 고산국의 새해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루스 차르국에서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검은담비 모피코트 수백 벌을 보내왔다. 왕실 가족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이민호도 하나 골라잡았다. 모피코트를 입고 전신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자 혜영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칭기즈칸 이야기를 보니까 이게 엄청 비싼 거라더군. 마르그레타가 외국에 시집가더니 아주 효녀가 됐어.”

“대금을 보내줘야죠. 가난한 나라에서 국력을 기울여서 보낸 건데 설마 공짜 선물일 리가 없잖아요.”

이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영이 보기에 이민호는 이 나이에도 아직 철이 없었지만, 남자들은 선물이란 순수한 정성이라고 흔히 착각하기 마련이었다.

“그런가? 철도 건설비를 좀 깎아주지 뭐.”

“좀 더 기다려 보세요. 아마 우랄산맥 서쪽 유전을 개발시켜달라고 할 거여요.”

“해마다 추워져서 유전 개발을 해주긴 해야겠는데, 자본 참여하기도 좀 그렇고.”

“고산국이 식민지 종주국이 될 것도 아니니 남의 땅에서 지하자원을 빼앗지 않겠다면서요?”

“쳇! 알았어. 그깟 유전 따위 현금박치기로 건설해주지 뭐.”

새해에는 이민호도 몹시 바빴다. 광대한 영토뿐만 아니라 루스 차르국, 핀란드, 에이레 공화국, 베네치아, 브루나이 등 속국을 관리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결국 큰 문제만 안 생긴다면 이민호는 세자와 해당부서 실무진에게 맡기고 결재만 해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새 수도 건설작업이 착착 진행 중이라서 세자로부터 자주 보고를 받았다. 군항과 배후 도시는 새목포라는 이름 그대로 두고 그 남쪽 수도 이름을 새로 정하는 일이 이민호를 빼놓고 진행되고 있었다. 그 동안 이름을 너무 대충 지었던 이민호는 모르는 척하고 넘어갔다.

유럽에서는 독일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회의가 덴마크 쾨벤하운에서 열렸다. 언제 끝날지 모를 협상과 매일 저녁마다 열리는 연회가 몇 달 동안 이어졌다. 각국의 이익이 워낙 복잡하게 얽힌 탓에 협상이 길어져 해를 넘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벌써 연초부터 나왔다.

그 사이 제국군 총사령관 발렌슈타인이 부하 스코틀랜드 용병들에게 참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수사가 진행될수록 누가 배후에서 주도했는지 오리무중에 빠졌다. 황제가 되려는 발렌슈타인의 야망을 경계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혹은 그의 아들인 헝가리 국왕 페르디난트가 사주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나갔다.

“아바마마! 북미 카나타 원주민들의 겨울 외출용 신발이 눈신으로, 유럽인들의 신발이 스케이트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다들 빙하기가 도래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많이 합니다.”

“기온이야 올랐다 내렸다 하는 거라지만 인간은 대자연의 변덕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다. 당분간 세계적 인구 감소 현상은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다.”

이민호와 세자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더욱 속도가 빨라진 세계 기후 변화였다. 내정을 총리 혜영과 세자빈에게 거의 전적으로 맡기고 이민호와 세자는 매일 같이 세계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세계 평화와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고, 여자는 부동산 투자, 이사, 자녀 교육 같은 사소한 일을 결정하는 현대 가정과 비슷한 분업 체계였다.

북유럽과 시베리아, 북미 북부는 이미 완전한 소빙기에 접어들었다. 아열대에 거주하는 고산국 농민들은 체감을 거의 못하지만 온대 지방인 북미 오대호 주변에서는 확실히 곡물 출하량이 줄어들었다. 생산성 저하를 농지확대로 대응하는 것도 조만간 한계가 올 것으로 예상됐다.

그리고 북미 매입 초기에 더워서 못 살겠다던 텍사스 지역이 최근에는 여름날 밤에 제법 선선해져서, 이곳을 새 수도로 정했어야 했다는 여론이 일었다. 기온이 내려간 덕택에 텍사스를 농경지와 목초지로 개간하는 사업에 속도가 붙었다.

남반구도 기후 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테우엘체 족이 쉽게 고산국에 복속한 것은 기후 변화로 인해 생존에 위협을 느낀 탓이 컸다. 새섬에서는 산간지역의 빙하가 크게 확장하고 있으며, 호주 남부는 서늘해지고 북부는 건조화가 심해졌다. 세계적으로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들이닥쳤다.

“식량이 풍족한데도 인구가 감소할 수 있습니까? 기온이 조금 더 내려가더라도 북미 생산량만으로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너무 추워져서 여자들이 임신과 임신 유지가 어렵다는 거지. 더 이상 털모자 정도로는 체온 유지가 어려울 지경이야. 다들 집안에서도 모피 코트를 걸쳐야 해.”

검은담비와 비버의 모피는 모자 재료로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 시대에 모피 모자는 패션 아이템이 아니라 소빙기에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그런데 북미에서 유럽으로 수출하는 모피의 양은 실제 역사에서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북미 원주민들이 유럽인들과의 모피 교역에서 구입하던 쇠도끼와 쇠 창촉, 손칼을 근처 도시와 마을에서 아주 싸게 정찰제로 구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유럽 상인들과 교역을 할 때는 비버 모피 한 장에 쇠도끼 한 개를 샀던 원주민들이 고산국이 들어선 이후 쇠도끼 100개를 살 수 있게 됐다. 북미 원주민들이 사냥 시간을 줄이고 여가 시간을 늘리자 비버들 다수가 살아남아 수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우랄산맥에서 모피 동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덕택에 코미 원주민들과 루스 차르국이 모피 무역으로 먹고 살게 됐습니다.”

“나도 들었다. 백산부 놈들은 사냥꾼의 규칙 따윈 모른다니까. 아무리 곰과 늑대 사냥을 허가했더라도 암컷과 새끼를 왜 잡아?”

“인간을 공격하는 해수(害獸)에는 사냥꾼의 규칙을 적용하지 않는답니다. 덕택에 우랄산맥의 생태계 균형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자연을 보존하려면 모피 동물을 현재보다 두 배는 더 잡아들여야 합니다.”

“어휴! 그럴 줄 알고 곰과 늑대를 적당히 남겨두라고 했는데 이 인간들이 말을 안 들어. 나중에 종 복원 사업하려면 골치 아파질 거야.”

“사냥감이 나타나면 머릿속에 든 것들이 싹 사라지고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된답니다. 참 재미있는 인간들입니다.”

고산국과 루스 차르국의 국경지대인 우랄산맥을 백산부 여진족이 지키면서 곰과 늑대 같은 해수가 씨가 말라버렸다. 그리고 백산부는 사슴 말고는 작은 초식동물을 안 잡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한 여파가 매우 컸다.

우랄산맥에서 상위 포식동물들이 사라지자 여우와 토끼, 사슴, 담비 등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덕택에 사냥으로 먹고 사는 코미 족을 비롯한 우랄산맥 서부 원주민들과, 그 모피를 수매했다가 외국에 수출하는 루스 차르국 황실이 큰 이익을 얻었다. 북미 모피 교역 산업이 성장하지 않고 우랄산맥에서 사냥이 쉬워진 덕택에 루스 차르국은 소빙기에도 식량을 수입할 여유 자금을 쌓아놓을 수 있게 됐다.

“적도 선상에 가까운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도 고도가 높은 곳은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남부는 추위가 더 심합니다. 아프리카로 난방기구 판매가 해마다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석유난로를 팔게 될 줄은 몰랐어.”

말라위 호수에서 넘쳐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 쌓이는 침전물의 양이 대폭 줄어든 시기가 1570년부터 1820년까지였다. 동굴 석순 성장으로 파악한 아프리카 남부의 소빙기도 비슷한 시기에 걸친다.

킬리만자로도 아닌 에티오피아의 고산지대에는 이 시기에 만년설이 쌓였다. 아프리카 서부 사하라 사막에 위치한 팀북투는 니제르 강에서 20km나 떨어져 있는데도 이 시기에 최소 13차례나 홍수가 났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던 일이었다.

“추위 때문에 아프리카 제국에서 석유 소비량이 크게 늘어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사를 만나보시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문제가 많아. 불러봐.”

아프리카 동부에 흔한 키가 아주 큰 흑인이 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 작은 흑인이 아프리카 제국의 대사라면서 알현실에 들어섰다. 므부투와 비슷한 종족인 모양이었다. 인사 절차가 길게 이어진 다음 대사가 입을 열었다.

“므부투 2세 황제께서는 니제르 강 하구 유역에서 발견한 유전을 개발하고 싶어 하십니다. 마침 그 유전이 철도에서 가까운 곳이라 수입 석유보다 가격을 더 인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이제는 아부다비에서 수입하는 석유가 지나치게 많아져서 고산국에도 부담이 크오. 드디어 아프리카 땅에 매장된 석유를 사용할 때가 왔소.”

고산국 자원탐사단이 니제르 강 하구 삼각주 주변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한 것은 이미 5년도 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제국의 기온이 높고 산업수준이 낮아 기관차와 황궁 외에는 석유를 사용할 일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난방유 수요가 대폭 늘어나, 더 이상 석유를 수입에만 의존하기 어려워졌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산국 국왕전하께 니제르 강 유전 개발 계획과 석유류 판매대금 사용처를 보고 드립니다. 여기 보고서 요약본입니다, 전하. 세자저하도 받으시옵소서.”

“오호! 앞으로 10년 동안 유전 채굴시설과 송유관 건설비용을 변제하고, 유전 운영비와 주변 지역 환경 관리비, 지역 주민 보조금을 다 합한 비용이 판매량의 3할에 불과하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전하. 하루 10만 배럴 채굴을 기준으로 개발 첫 해부터 7할 이상, 건설비용 변제가 끝나는 10년 후부터는 8할 이상이 순수익이 될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내수 석유소비와 채굴량이 현재보다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국제 시장 가격이 1배럴에 0.3원이므로 매년 고산국 금화 팔백만 원 이상이 고스란히 아프리카 제국 황실의 수입이 됩니다.”

“기온이 내려간 것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구려. 부럽소.”

현대 나이지리아는 21세기 초반 일일 석유 생산량이 100만 배럴을 넘었다. 그 10분의 1만 채굴하더라도 이 시대 아프리카 전체에서 사용할 석유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아프리카 서부 해안지대를 가급적 빨리 장악하도록 므부투 1세 황제를 독촉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체체파리와 말라리아모기의 활동성이 줄어들어 환자 숫자도 대폭 줄어들었다. 아직 농산물 생산에 큰 타격이 없으므로 소빙기가 온 것이 아프리카 제국 입장에서는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니제르 유전에 자본 투자를 해달라는 선대 황제의 권유를 사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유전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오. 아부다비 유전을 개발하면서 그 지역 아랍인들에게 혜택을 준 것을 대사도 알 것이오. 그러니 내수 가격을 싸게 책정하길 바라오.”

“국왕전하의 어명은 곧 제국 황제폐하의 칙명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싼 값에 석유를 사서 추위를 벗어나도록 돕겠습니다. 그리고 석유 판매 이익금으로 가난한 지역을 적극 개발하겠습니다.”

현대 나이지리아 정부는 석유 생산을 외국 석유 메이저들에게 맡겨놓고 가만히 누워서 세금과 뇌물을 받아먹었다. 그 많은 석유 수출 대금 중에서 국민에게 쓰는 돈이 극히 적은 탓에 무장반군이 석유공단을 공격했고, 국제 석유 선물이 급등하기도 했다.

“세자는 기분이 어떠냐?”

“아주 뿌듯합니다, 아바마마. 그 동안 아프리카를 도운 보상을 몇 배로 돌려받은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다.”

그 동안 아프리카 제국을 지원해준 대가로 고산국이 남아프리카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했으므로 더 이상의 욕심은 없었다. 그러나 유전 하나에서 얻는 이익으로 그 동안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제국을 단번에 흑자 재정으로 전환시켰다는 사실에 이민호는 몹시 놀랐다.

“고산국 왕실에 아프리카 제국이 충성을 다짐합니다.”

아프리카 제국의 충성 서약은 덤이었다. 지금까지 아프리카 제국으로부터 한두 번 충성 맹세를 받은 게 아니었지만, 받을 때마다 즐거웠다. 폴란드와 독일도 아프리카 제국처럼 고산국을 떠받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미래는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환절기 건강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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