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07 105. 대국의 길 =========================================================================
“신의 혜총을 받아 이스탄불의 칼리프께서 직접 임명한 영광스런 마니 술탄이시며, 위대한 고산국의 더욱 위대한 말리크이신 국왕전하께 수니파 여러 파의 이맘들이 인사 올립니다.”
“국왕전하께 시아파 이맘들과 울라마들이 인사 올립니다.”
옥좌에 앉아서 여러 이슬람 지도자, 법률학자들 50여 명이 하는 절을 받았다. 평소라면 서서 허리를 굽히는 정도로 충분하지만 지금은 종교 회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의 예법을 존중해주었다.
이민호가 술탄인 것은 오스만 제국 황제가 기독교의 수호자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종교적 권위를 억지로 빌려와서 권력자를 치장하는 수니파와 달리 시아파들은 페르시아처럼 현세의 권력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무슬림으로서 혹시 신앙과 생활에 문제가 없소?”
“예, 전하. 모든 사람들이 저희들의 종교를 존중해주고 있습니다.”
에스파냐에서 추방된 모리스코, 혹은 브루나이와 동남아 출신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고산국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역겨운 무신론자와 이교도들을 알라의 은총으로 인도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스스로 소수파라는 자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현대 유럽에 이민 간 무슬림들처럼 극소수인 주제에 전 유럽에 샤리아 율법을 전면 시행하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민호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무슬림들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종교 갈등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꾸준한 관심을 두고 관리했다.
“히잡이나 할랄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관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시오. 관리들이 무시할 경우 왕도에 편지를 보내시오. 내가 반드시 모든 백성들의 종교적 권리를 보장해주겠소.”
“혹시나 오해로 인해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금방 화해합니다. 그러니 걱정을 거두어주시지요, 전하. 국법에 따라 저희들도 다른 종교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좋은 말로 진행하고 있었지만 몹시 예민한 문제들이었다. 기본적으로 고산국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 타지에 나가서 생활하는 경우가 드물어 아직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무슬림 상인들의 경우 전통적으로 이교도나 무신론자들과도 아주 잘 어울려 문제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이런 개방적인 태도가 오히려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교를 널리 포교하는 원천이 되었다. 종교를 가리지 않고 광신도들이 인간은 신앙을 최우선 가치로 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항상 돈이 더 위에 있었고, 광신보다 더 효율적인 전도 수단이 되었다.
“다만 이민 올 때 여러분이 각서에 서명했듯이 여성 할례나 명예 살인, 이교도와 무신론자에 대한 증오범죄는 결코 용납지 않을 것이오.”
“이집트와 아프리카 흑인들이나 여성 할례 같은 야만스런 풍습을...... 헙! 죄송합니다, 전하. 그런 풍습이 야만스럽다는 뜻이지 이집트인과 흑인들이 야만스럽다는 뜻은 전혀 아니옵니다.”
현대 아프리카에 광범위하게 퍼진 여성 할례 풍습은 클리토리스를 절단하는 것을 넘어 여성 음부를 몸에서 파내고 질 입구를 꿰매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에도 같은 풍습이 있으므로 반드시 이슬람 풍습이라 하기 어려웠다.
명예 살인은 발칸반도나 시칠리아의 기독교 문화권에도 있었다. 다만 이슬람권에서 발생 빈도가 높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고산국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은 주로 에스파냐에서 추방된 모리스코들이거나, 브루나이, 동남아시아 여러 섬들, 혹은 명나라 북서부 출신이었다. 여성 할례나 명예 살인과 거리가 멀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런 사례가 전혀 없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알았소. 하지만 오해할 말은 애초에 입에서 꺼내지 말아야 하오.”
“황공, 황공하오이다, 전하.”
종교 차별과 같은 무게로 다스리는 것이 인종 차별이었다. 고국에서 심하게 차별받고 학대당했던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몇 가지 법규만 지킨다면 고산국은 지상낙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화장실 갖다 오면 생각이 달라지고 앉아있다 보면 눕고 싶어 한다. 옛적에 당했던 일을 잊고 고산국이 종교와 관련이 없는 세속 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극단주의자들은 추방될 각오를 해야 했다.
“돼지는 할랄에서 아예 벗어난 동물이라서, 돼지기름을 쓰는 것도 주의하고 있소. 식품이나 공산품에 돼지기름을 사용한 경우 포장지에 반드시 표기하도록 했으니 물건을 살 때 조심하도록 하시오.”
“나라에 얼마 안 되는 무슬림들을 위해 세심하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힌두교인들을 위해 소고기와 소기름, 무슬림과 유대교도들을 위해 돼지고기와 기름이 사용된 제품 포장지에 그림과 다양한 언어로 그 성분을 표기했다. 그 외에 우유와 땅콩, 갑각류 살 등 사람에 따라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식품은 포장지에 반드시 표기하도록 하는 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물어봅시다. 학자들에 따르면 중동지역에서 키우기에 비효율적이라서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오? 레위기에는 돼지가 발굽 동물임에도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에 부정하다고 나왔소만.”
“돼지가 중동 같은 건조지역에서 사육하기 어려워 돼지고기 가격이 높고, 이로 인한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몰았다는 학설은 교리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전하. 단지 예수님께서, 그 분께 알라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거라사 지방에서 두 사람에게 달라붙었던 악령을 돼지 떼에 봉인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기록돼 있는 명확한 사실입니다.”
돼지나 그 고기가 부정할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도 부정한 자로 취급되기에 이민호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신약성서도 줄줄이 꿰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새삼 확인했다.
“몇 년 전에 발간된 추리소설에서, 범죄자가 필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신문지를 오려서 내용을 적은 편지를 보내는 이야기가 있었소. 이번에 내가 그런 편지를 받았소.”
“혹시 그 내용이 무엇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전하?”
“샤리아를 고산국 전체에 시행하지 못하겠다면 일부 내용을 법에 반영하거나,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 국법을 배제하고 샤리아를 시행하라는 요구였소.”
“그런 무도한 자는 결코 무슬림이 아닐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저희 무슬림들을 음해하려는 공작이 분명합니다.”
접견실 분위기가 확 변하고, 이맘과 율법학자들이 오들오들 떨었다. 무슬림들 중에서 그런 극단주의자가 없다고 단정해서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에 무슬림들이 연대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었다.
“그 편지를 복사했으니 여러분들이 한 부씩 받아 읽어보시고, 다시 반납하시오.”
고산국에 이미 복사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복사 품질이 아직 좋지 않았으나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이맘들과 울라마들이 편지 내용을 읽고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고산국 국왕 이민호가 어떻게 대응할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잠시 후 호위들이 복사한 편지를 걷어갔다.
“사람들은 흔히 인쇄활자가 다 같다고 오해한다오. 그러나 신문마다 사용하는 활자가 다르오. 전국지라 해도 배달하는 지방마다 크기나 모양이 약간씩 다른 활자를 사용해 인쇄한다오. 그러니 범인의 의도와 달리 이 편지를 보낸 지역이 어디인지 특정할 수가 있소.”
“헉! 거기가 어디이옵니까? 순박한 이리 시의 무슬림들이 그럴 리는 없을 것입니다. 저희 모리스코들은 에스파냐에서 심한 박해를 받았기에 국왕전하를 구원자로 여기고 있사옵니다.”
“전하! 편지를 보낸 지역을 밝혀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지역에 불이익을 안겨주어서 다시는 이런 불미스런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수사력을 집중해 범인을 잡아내어 나머지 무슬림들의 명예를 회복해주소서!”
모리스코들이 충성 경쟁을 하듯이 범인에게 저주를 쏟아냈다. 그러나 이민호도 아직 범인이 누군지 색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대 책임을 지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범인을 색출해서 그에게만 책임을 묻겠소. 다만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잘해야 할 것이오.”
“국왕전하만 믿겠사옵니다.”
율법학자들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아뢰었다. 무슬림들에게 특권으로 부여된 교육권을 이번 일로 인해 여차 하면 정부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으므로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이민호는 진화론과 지동설이 교과과정에 편성된 무슬림들의 교육에 개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범인은 이 안에 있소.”
모두에게 눈을 감게 하고 범인은 손을 들라고 하는 식의 유치한 장난은 치지 않았다. 편지 내용을 복사해 나눠준 종이들 중에서 범인의 지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자수하라고 권하지 않겠소. 한 사람씩 내 앞에 나와서 ‘내가 범인이면 알라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선서하시오.”
“아바마마.”
“험! 험!”
세자가 말려서 장난은 그만두었다. 한 명을 뺀 나머지 이맘과 율법학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선서하길 원했지만 이는 범인에 대한 인격모독일 뿐이었다.
“호위들은 범인을 체포해라.”
“예? 나, 난 아니오! 절대 아니오! 국왕전하가 마법을 쓴 것이오!”
지문 감식 결과, 북미 건설 초기에 오대호 이리 시로 이주했던 이맘이 범인으로 드러났다. 젊은 광신도라면 철이 안 들었다고 이해할 텐데 다 늙어서 그런 장난질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모리스코들 사이에 일정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걱정됐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종교를 존중해줄 수 있지만, 세속 권력에 도전하는 자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소.”
“은혜와 너그러움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저 이맘이 유독 이상한 자였습니다.”
무슬림의 교리와 무함마드 사후 수십 년 뒤에 정립된 율법인 샤리아를 무작정 따른다면 논리적으로 세속 국가가 존속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대에 터키를 비롯해 숱한 이슬람 국가들이 세속주의를 표방하고도 멀쩡히 유지되고 있었다.
문제는, 현실을 합리적인 중도파가 쥐고 있더라도 극단주의자들이 자신의 광신과 만용을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무슬림 사회의 분위기에 있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조화시키는 것을 비겁한 현실주의라고 비난하는 자들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면 그 무슬림 사회의 미래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여러분이 각서에 서명한 잉크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소. 이번에는 개인에 한해 형벌을 주겠지만, 광신도들이 설친다면 무슬림 지역사회 전체에 징벌을 가할 수밖에 없소. 만약 무슬림 사회가 독립을 추구하거나 고산국을 이슬람화시키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고 착각한다면 고산국 영토 바깥으로 내치는 수밖에 없소. 알겠소?”
“예, 전하.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무슬림 지역사회 내부를 단단히 단속하겠습니다.”
“모로코로 이주한 자들처럼 해적질이나 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면 내 경고를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이번 이슬람 회의 내용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잘 알려졌다. 국법보다 교리를 앞세우는 자들에게 아주 훌륭한 교훈이 될 것으로 믿었다.
또한 인간에게 종교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모든 종교의 교리와 어느 정도 척을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백성들도 알게 된 것 같았다. 통치자 입장에서는 현실성이 없는 종교를 굳이 보호해줄 필요가 없었다.
따듯한 왕도의 봄은 조선보다 한두 달 일찍 찾아왔다. 해가 서쪽 수평선에 저물어가고 하늘에 붉은 석양이 가득한 부두 방파제를 이민호가 산책하고 있었다. 눅눅한 바닷바람 속을 걷는데 거리를 두고 호위들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학생! 거긴 위험해!”
“아저씨는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방파제 앞 별모양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앉은 10대 후반 여학생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테트라포드에서 미끄러지면 머리와 팔다리를 다친 다음 틈새로 쏙 빠져버릴 우려가 있어서 이민호가 이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나는 왕이거든. 백성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고충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어.”
“풋! 됐어요.”
오징어땅콩 과자를 먹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없어서 이민호가 가볍게 물었다.
“설마 남자친구한테 채인 건 아니겠지?”
“아저씨가 뭔데 그런 걸 물어요?”
농담을 건넸다고 생각했는데 사나운 대답이 돌아왔다. 하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나라의 왕이라니까. 문제가 뭐야?”
“이 나라에서 여자는 무조건 예쁜 여자가 최고에요. 저처럼 못 생긴 여자는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니까요?”
“저기, 내가 보기에 학생은 학교에서 열 명 안에 들어갈 정도로 예쁜데? 설마 그 정도로 아직 부족해?”
“저한테 아부하세요? 깔깔깔!”
여학생이 책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마침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고작 미모로 사람의 서열을 짓다니, 아주 나쁜 나라로구나.”
“생각해보니 외국처럼 신분과 부모님 재산으로 서열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그건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잖아요? 용모는 부모님에게 이미 받은 것, 지식을 쌓고 체력을 올려서 저만의 매력을 만들어야지 어쩌겠어요.”
“좋은 생각이야. 스무 살 넘으면 미모가 꽃필 테니 좀 더 기다려 봐. 물론 지금도 충분히 예쁘지만.”
“고마워요, 아저씨. 하지만 이 나라를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기분이 풀렸는지 여학생이 폴짝폴짝 뛰어갔다. 여학생이 멀리 사라지자 호위대장 선영이 씩 웃으며 다가왔다.
“주인님. 설마 젊은 후궁을 새로 들이시려는 건 아니죠?”
“당연하지. 요즘 손만 잡고 자잖아.”
옛날에 한국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아재 서요?’라는 드립이 떠올랐다. 다 늙어가는 요즘 그런 말을 듣는다면 심적 타격이 클 것 같았다.
“만약 여학생들 용모가 똑같아진다면 그때는 다른 것으로 서로 비교하겠지?”
“그럼요. 남들과 예민하게 비교할 때인 걸요? 잘 먹고 잘 자란 고산국 여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대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랜만에 선영과 손을 잡고 걸었다. 이민호가 평생 쌓아온 업적이 젊은 학생의 심경 변화를 통해 드러난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았다. 대낮처럼 불을 밝힌 항구와 상선, 그 뒤에 늘어선 웅장한 건물들은 자그마한 업적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 작품 후기 ============================
고산국에서 무슬림은 극소수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