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08 105. 대국의 길 =========================================================================
왕도에 북경반점이라는 이름의 최고급 호텔이 준공되고 꽤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드디어 문을 열었다. 명나라 황실에서 소유하고 명나라와 고산국의 대도시에 건설 중인 호텔 체인 중의 하나였다.
이민호는 북경반점이라는 이름에서 당장 짜장면과 짬뽕을 떠올렸으나 중국어권에서 반점과 주점이면 고급 음식점 및 숙박시설을 뜻했다. 현대 베이징에도 영어로 지은 그럴싸한 호텔 간판 옆에 나란히 주점이나 반점 같은 한자 간판이 붙어 있다.
객잔은 주점, 즉 호텔의 옛 이름이기도 하나 현대 중국에서 비즈니스호텔이나 호스텔 정도 등급으로 통했다. 숙박을 배제한 전문 음식점은 찬청 등의 이름을 달고 고산국 주요 도시에서 영업활동을 벌였다. 고산국 도시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스만제국과 무굴제국에서 국영 또는 민간인이 운영하는 음식점도 많았다.
- 짝짝짝짝짝!
북경반점 개점일에 초빙된 이민호와 세자가 명나라 병필태감과 고위 환관들, 관료들과 함께 가위로 오색 테이프를 잘랐다. 고산국 왕도와 홍콩, 마카오,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명나라 무역상들 거의 전부가 왕도에 몰려와서 북경반점의 개점을 축하했다.
“건물 내부를 온통 색유리와 대리석으로 치장해서 정말 고급스럽소. 황상폐하께서는 참 돈도 많으시오.”
“하하! 국왕전하. 고산국이 대명에서 상업을 영위하니까 반대로 우리도 고산국에서 영업활동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상업은 상호호혜가 기본이니 당연한 말씀이오. 그저 황상폐하의 화수분 같은 내탕고가 부러워서 하는 소리요.”
북경반점은 왕도 상업지역의 제한 층수인 30층을 꽉 채워서 건설됐다. 왕도 시청에서 웬만하면 20층으로 권유했을 텐데 황제가 특별히 칙서를 남발하면서 반드시 30층으로 지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고층건물 주변에 중국식 기와집 건물도 수십 채에 달했다. 이른바 명나라의 강대함과 부유함을 고산국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선전용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이민호는 명나라 내륙지방에서 굶어 죽어가는 유민들과 농민반란군을 떠올렸지만 명나라 황실의 정치적 목적을 알고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기와집들 중에서 가장 안쪽은 황실의 별궁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지금 당장은 고산국에서 유학 중인 황실 가족들이 기거하시고, 가끔은 황상께서 직접 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속국에 둔 황실의 별장이라고 생각하겠소.”
“역시 국왕전하께서는 대명 제국의 충신이십니다.”
이민호는 설마 명나라 황실의 피난처로 이 호텔이 준비된 것은 아닐 것으로 믿었다. 요 몇 년 사이 농민반란군이 압도적인 병력의 관군에게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실에서 직영한다는 이유만으로 돈 좀 만진다는 명나라 상인들이 비싼 가격에도 많이 이용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손님들이 호텔 직원인 환관에게 굽실거리면서 룸서비스를 요구, 아니 건의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았다.
“고산국 숙박업소 직원들의 투철한 봉사 정신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끔 고산국 여관을 이용하셨던 황상폐하께서는 아마도 그 봉사 정신에 감동하셔서 이런 업소를 제국 대도시들과 고산국 몇 군데에 만들라고 명하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국왕전하께서도 자본 절반을 투자하셨으니 반점 운영을 잘 지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명나라 신민들이 주로 이용할 테니 태감이 더욱 신경 쓰셔야 할 것이오.”
“제 책임이 무겁습니다, 전하.”
한 끼 식사에 최소 은 닷 냥이 들고, 방 2개짜리 가장 작은 객실의 하루 숙박비용이 고산국 금화로 자그마치 20원이었다. 고산국 백성들이 짜장이냐 짬뽕이냐, 부먹이냐 찍먹이냐를 두고 이곳에서 논란을 벌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부유하다는 고산국 농민들도 이 가격은 너무 부담스러울 게 분명했다.
그리고 환관에게 잡다한 심부름을 시켰다간 자칫 외교 문제가 발생할 우려도 있었다. 이민호는 이 호텔을 명나라 황실과 관료, 신민들의 전용 공간으로 이해해줬다. 황실 소유라서 반점 주변에 명나라의 상인들이 감히 몰려들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음식점, 숙박업소들처럼 이 반점에서도 위생 문제 하나만큼은 철저히 관리할 계획이었다.
“세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유한 사람들이 고산국에서 돈을 쓸 곳이 없다는 소리는 가끔 들었습니다만, 명나라에는 과연 이런 시설이 필요하겠다 싶습니다. 명나라에서는 부자들이 과하게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 반면 소비할 곳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반점으로 인해 도박과 마약이 국내에 유입되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돈 쓸 곳이 없는 자들의 마지막 유흥은 도박과 마약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이 호텔에서 도박장 개설을 허가해주지 않았지만 객실에서 도박판을 벌일 수도 있다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아편 등 마약은 고산국에서 꽤나 민감하게 다루는 약품이었다.
“그런데 지나치게 사치스럽다고 욕을 먹을 것 같다.”
“명나라 황실과 아국 왕실의 공동재산이라고 밝혔으니 큰 상관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앞으로 사유재산에 대한 보장을 해달라는 요구가 강도를 높일 것 같습니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지. 그런데 사람들이 꼭 상속을 사유재산 보장이라고 하더라. 두 가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유의하겠습니다, 아바마마.”
이민호는 이 고급스런 반점을 고산국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명나라의 반격으로 이해했다. 명나라의 정치적 선전에 고산국 왕실 재산이 투입된 것이 아까웠으나, 명나라 부자들의 돈을 원 없이 긁어모을 속셈으로 반점 건축을 허가했다.
역시나 사유재산 보장으로 포장된 상속 문제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이민호는 차기 국왕에게 결정을 미룬다는 교지를 발표해 간단히 떠넘겼다. 이 시기 유럽에서도 상속세 세율이 높아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장기적으로 낮출 계획도 있었다. 나중에 상황을 봐서, 평균적인 수입을 기준으로 결정할 일이었다.
“왕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경의 저서가 역설적으로 왕권이 강한 고산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됐소. 이 자리에 모인 왕자와 공주들이 경의 애독자들이라오. 자! 잉글랜드에서 오신 에드워드 쿡 경을 박수로 맞이하라!”
- 짝짝짝!
이민호가 박수를 유도하자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켜보던 왕실 식구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오늘의 강연자를 환영했다. 그러나 바퀴의자를 탄 주인공은 몹시 거북한 모양이었다.
권리청원을 작성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잉글랜드의 전직 하원의원, 판사 겸 법학자 에드워드 쿡 경(Sir Edward Coke)이 고산국의 왕실 저녁식사에 초대받았다. 82세인 그는 현직에서 은퇴하고 기존 저작물을 손봐서 완성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코카콜라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며 발음도 코크가 아닌 쿡이었다.
“몹시 두렵습니다, 국왕전하. 제가 잉글랜드에서 어떤 법리를 펼쳤는지 아시면서도 고산국 국왕전하께서는 저를 왕궁에 초청하셨습니다. 영광스럽긴 하나 제가 이 자리에서 제 이론을 주장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경의 이론을 듣기 위해 초청했소. 이 자리에는 데카르트 백작, 그로티우스 자작과 법을 공부하는 왕자, 공주들이 참석했소. 만약 경의 것이 아닌 다른 이론을 전개한다면 몹시 실망할 것이오.”
에드워드 쿡은 80살 넘어서도 정정했는데 말이 그에게 엎어지는 바람에 큰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그는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아시아의 모든 약, 아프리카의 모든 금, 유럽의 모든 의사를 모아도 내 병을 치료할 수 없으니, 그것이 바로 노환이다.’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치료를 거부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에드워드 쿡의 결정을 단순한 3대 거짓말의 하나로 치부할 수는 없을 정도로 그의 신념은 단호했다.
그러나 이민호가 고산국 의사들을 보내 거의 강제로 치료하고 본토로 후송해 억지로 몇 년 더 살게 만들었다. 나이가 많아 부러진 다리가 쉽게 봉합되지 못하고 있으나 어쨌든 더디게라도 회복되는 중이었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에 대한 논의는 20세기 후반에나 나오고 21세기에도 법적으로 보장받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고산국은 잉글랜드처럼 국왕과 의회가 대립하는 나라가 아니라 제가 분류한 기준에 따르면 절대왕정 체제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하는 발언은 고산국에도 적용되는 게 아니라 오직 잉글랜드에서만 통용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좀 다르오. 경이 주장한 보통법이나 자연법은 신으로부터 비롯된,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에 기반을 두어 실정법을 초월하는 법 아니오?”
데카르트가 의문을 제기하자 에드워드 쿡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솔직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살기 위해 발악할 나이는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처형할지 말지는 국왕전하께 맡기겠습니다.”
“고산국에서 국가체제에 대한 논의는 언제든 가능하고, 심지어 왕정을 폐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자는 논의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소. 다만 실제 군사력을 동원한 반란행위를 처벌할 뿐이오. 에드워드 쿡 경은 병을 치료한 뒤 고향의 서재로 돌아가서 저작을 완성할 것으로 믿고 있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저도 누워있는 것보다는 바퀴의자를 밀면서 산책을 하는 게 더 좋습니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이민호가 무사 귀환시킬 것을 보장하자 에드워드 쿡이 설명을 해나갔다. 그런데 뜻밖에 의회 주권이 아니라 국민 주권을 주장하는 논리였다.
“마그나카르타는 봉건 귀족들의 권리와 지위를 보장한 문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 보다 정확히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 문서입니다. 물론 저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마그나카르타가 내전에서 승리한 귀족들과 수세에 몰린 존 왕 사이에 체결된 계약에 불과하다고 합니다만, 국왕도 계약이나 성문법에 의해 권한이 제한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권리청원 초안을 작성하면서 좀 더 명확하게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는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경께서는 성문법이나 계약이 전제 왕권에 앞서야 한다는 주장입니까?”
“그렇습니다, 공주 저하. 물론 성문법이 잘못된 경우에는 자연법이 보충해야 합니다. 저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인간 공통의 선과 규율이 이 세상에 있다고 봅니다.”
에드워드 쿡과 그로티우스, 그리고 왕자와 공주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민호는 토론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어서 묵묵히 식사에 열중했다.
“아바마마. 잉글랜드인들의 자존심 때문일까요? 국왕을 압박해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드는 행태는 폴란드의 국왕 선거에서 보던 현상과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저 분은 폴란드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래. 바로 그래서 엉뚱하게 마그나카르타를 왜곡해서 해석하는 거지. 권리청원의 주요 내용이 폴란드 국왕이 즉위 전에 서명하는 팍타 콘벤타를 닮은 것을 반대자들도 언급을 안 한다 뿐이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동유럽의 역사발전의 성과를 무시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었다. 그리고 책임은 없는데 소수 귀족들이 누리는 권리만 많은 귀족 공화정에 대한 평가는 예나 지금이나 좋을 수가 없었다. 결국 폴란드는 귀족들의 분열로 국력을 모으지 못해 몇 차례에 걸쳐 주변 국가들에게 분할 당한 끝에 결국 멸망한다.
“아바마마께서 에드워드 쿡 경을 초빙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저런 정연한 논리를 이겨내면서 왕위를 유지하기가 벅찰 지도 모릅니다. 주권을 백성 모두에게 나눠준다는데 소수 왕실과 귀족들 외에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기존 권력자를 지지하는 선천적 왕당파가 인구의 일정 비율을 차지하기 마련이었다. 체제 순응 교육이란 바로 이런 성향을 가진 자들의 비율을 늘리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고산국 왕실이 강조하는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것도 지지자를 포섭,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봐도 좋았다.
“여러 가지 주장의 하나일 뿐이야. 하지만 사람들이 앞으로 언제까지나 천자설이나 왕권신수설에만 매달릴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거지.”
“예, 아바마마. 고산국이 왕정제인데도 국가체제에 대한 토론을 개방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런 생각을 가진 자들을 하나둘 반란죄로 처벌했다가는 나중에는 진짜 대규모 반란이나 독립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입법 과정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속국, 주, 혹은 지방들이 독립을 하는 절차가 왕법으로 규정돼 있었다. 만약 고산국에서 벗어나고 싶은 민족 혹은 지방이 있다면 언제든 국왕에게 독립을 청원할 수 있었다.
물론 고산국 백성이 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특권으로 인식됐기에 당분간 독립운동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미국에서 일부 주가 독립할 권리를 유보하면서 합중국 연방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에 속한 주는 독립할 권리가 없다고 연방대법원이 뒤통수를 때린 것과 정반대였다.
“법적으로 독립국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세력권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서로 이익이 된다면 그만일 뿐이다. 루스 차르국이 명목상 독립국이지만 웬만한 속국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과 같다.”
“예. 그래서 에이레 공화국이나 베네치아 공화국이 언젠가 다시 독립해도 무방하다는 거군요. 하지만 주나 군현을 독립시켜줄 수 있다는 규정은 조금 걱정됩니다. 독립을 내세워 다른 지방들과 다른 특권을 획득하려는 기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라 안에 두지 못할 정도면 포기해야지. 그리고 독립을 빌미로 장난치는 놈들이 있다면 과감히 독립시켜줘. 실제로는 나라에서 그 지방을 내쫓는 거지. 그런 음모자들을 지지했던 자들이 징징대면서 복속시켜달라고 요청하더라도 일정 기간 무시해서 아주 혼을 내줘라.”
“손해 볼 게 뻔한데도 귀가 얇은 자들은 사탕발림에 넘어갈 겁니다.”
“그럼 경험을 통해 배워야지. 어쨌든 백성들의 강력한 지지를 잃지 않는다면 왕권을 빼앗길까 걱정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20세기가 가까워지면 왕권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민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헌군주제를 대안으로 미리 제시해 놓았다. 그러나 이민호와 세자 대에서 잘 이끌어간다면 한동안 자손들에게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만약 왕실이 망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손들이 정치를 잘못하건, 혹은 군부 세력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했건 오롯이 왕실의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앞으로 최소 100년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 이후라도 고산국이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한 왕실이 존속할 것으로 믿었다. 만약 잘못되면 못난 후손 탓이므로 억지로 왕실이 유지되도록 미리 손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명나라 농민반란을 좀 축약해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