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뜻한 바다의 제국-1009화 (958/1,000)

01009  105. 대국의 길  =========================================================================

왕도 북쪽 해중국은 현대의 페이퍼 컴퍼니처럼 서류상 국가, 유령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번 반란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고산국 왕실 친위세력으로서 진압군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 시대 모든 군주들이 극찬할, 왕실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였다.

또한 시험적인 정책을 이 작은 나라에서 실시하다가 문제점을 보완한 다음 고산국 전국에서 실시한 적도 많았다. 이민호와 총리 혜영, 세자 부부가 해중국을 활용할 시험적인 정책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매춘 합법화나 공창을 실시하기에는 해중국이 너무 좁지?”

“예, 아바마마. 해중국 인구가 5만 이하라 익명성 보장이 안 됩니다. 외국인 여성에게 매춘을 시키는 것도 문제지 않습니까?”

혜영과 세자빈이 노려보는 가운데 세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현대 네덜란드에서 보듯 공창제가 가진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대부분이 반대하므로 매춘 합법화 자체를 입에 올리기도 어려웠다.

“아편이나 다른 마약은 도저히 풀어줄 수가 없고, 그나마 건강에 덜 해로운 대마초는 다들 싫어한단 말이야.”

“예. 담배가 떨어질 경우 대마 잎을 말아서 피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만, 그저 담배가 없을 때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괜히 대마초를 금지해서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만들 필요는 없지. 해중국에서 시험해볼 것도 없이 당분간 내버려두자.”

현대 국가에서 대마는 중독성 문제보다는 세금 같은 경제적인 문제로 금지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대마초를 품질 나쁜 최하급 담배로 여기는 현재 상황에서 딱히 금하거나 판매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대마초가 유행하고 이를 금지시킨다 해도 시인과 화가, 작곡가라는 특정 직업군에 한해 허용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구태여 대마초의 효능을 알려줄 이유도 없었다. 현대 한국에서 대마초는 20세기 중반까지 담배가 없었을 때의 임시 대체재 수준이었으니 당분간 이대로 놔둬도 괜찮았다.

“아리수 항에 한해서 공창을 시험해볼까? 아니면 수요가 높다는 홍콩을 이용해볼까?”

“주인님! 백성들이 굳이 창부를 찾지도 않는데 왜 자꾸 공창 이야기를 꺼내세요?”

총리 혜영이 반발하자 이민호가 찔끔했다. 당연히 여자들, 특히 결혼한 여자들은 매춘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통치자는 모든 사안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정책을 실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음성적인 매춘이 주거지역까지 확산되거나, 창부 공급을 위해 폭력조직과 인신매매 조직이 개입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야. 이 문제는 범죄조직보다 국가가 먼저 장악하는 게 나아.”

“국가의 위신보다야 범죄 피해자 보호가 더 중요한 건 맞아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돈을 벌기 위해 창부가 되겠다는 여자는 극히 드물어요. 몸이 뜨거운 여자나 밝히는 남자는 동네에서 알아서 상대를 찾으면 돼요.”

“험! 험! 홍콩이라도......”

“그만 하세요.”

총리 혜영이 적극 반대하고 찬성하는 사람도 없어서 매춘 합법화와 공창제도는 물 건너간 것 같았다. 이민호 생전에 붉은 전등 아래 헐벗은 여자들이 전시된 사파리 관람을 하는 것은 틀려먹은 것 같았다.

“아바마마. 내, 외국인 모두에게 지문 등록제를 실시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쎄. 지문 감식이 범죄 수사 분야에서 아직도 비밀이다. 범죄자가 장갑을 끼는 식으로 간단히 피할 수 있게 하느니 차라리 비밀로 묶어놓는 게 낫지 싶다. 저번 익명 편지를 보낸 이맘을 색출할 때처럼 결정적인 증거로 이용할 수 있지 않느냐?”

현대에도 지문을 등록하는 나라는 극히 드물었다. 만주국이나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 이후의 한국, 내국인과 외국인은 안 해도 재일교포에게만 지문을 등록시켰다 폐지한 일본, 911 테러 이후 외국인 지문 등록을 강제한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들이다. 한국에서는 성인 외에 미아 방지를 위해 아기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지문 사전등록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수사경찰들과 법관들이 알고 있으니 지문이라는 게 조만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질 것입니다. 지문은 범인 수사에 이용하는 외에 범죄 피해자나 자연재해 피해자들의 시신 신원 확인을 위해서도 효율적입니다.”

“세자 말이 옳아요. 그렇게 해요, 주인님.”

현대적인 인권 의식이 별로 없는 혜영과 세자빈이 세자의 주장에 찬성했다. 통치자 입장에서 매우 편리한 제도라서 이민호도 어물쩍 승인해주려 했다.

그러나 언젠가 민주주의가 상식이 될 후손들에게 전근대적인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 시대뿐만 아니라 먼 미래의 후손들 평가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이민호는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좋아. 내외국인 모두의 지문을 등록시키자. 대신에 인권 보호를 위해 수사와 미아 구호에만 이용하도록 하고, 엄격한 규정을 두어 열람자를 극도로 제한해야 한다. 지문을 비교하려는 수사기관이 판사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범죄연구소에 의뢰하는 방식으로 정하자.”

“아바마마. 범죄자의 지문을 확인하려는데 굳이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경찰 고위 간부의 비리를 폭로하는 투서를 한 자를 경찰 조직이 쉽게 잡아들여 은폐한다고 생각해봐. 우리는 법 집행기관들이 독주하지 못하고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어야 해.”

“과연 그렇습니다. 지문 열람권을 엄격히 제한하는 제도가 필요하겠습니다.”

현대 한국인들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전에 지문을 찍어 국가기관에 보관된다는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일반 국가 기준으로는 인권 억압의 소지가 많았다. 그래도 모든 백성과 고산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의 지문을 수집해놓으면 편리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천도 준비는 잘 돼 가느냐?”

“예, 아바마마. 두 달 후부터 학교 교사와 의료인, 경찰들이 가장 먼저 이주할 예정입니다. 다른 행정부서나 민간인 이주도 계획에 따라 차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주할 사람과 남을 사람들이 이미 거취를 확실히 결정했습니다.”

이미 보고를 받았듯이 왕실 이전은 내년 중순으로 잡고 있었다. 왕도에 주둔하던 일부 부대들도 이전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새 왕도 현지에서는 제2 기병사단이 제1 기병사단처럼 기갑부대로 탈바꿈하면서 훈련에 돌입했다. 1기병사단 예하 몇 개 대대가 통째로 새 왕도로 이전하는 중이었다. 부대 구성원들의 전입과 전출로 군에서 늘어난 일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현재 육군과 해군에서 태평양 서쪽이 홀수, 태평양 동쪽 해안부터 대서양까지 짝수를 부대 번호로 가졌고, 이는 천도 이후에도 계속 유지될 예정이었다. 북미 대륙에 2보병사단, 12기병사단 등이, 대서양에 2, 4, 6함대가 있는 식이었다. 태평양 함대 예하에 기수 함대(numbered fleet)로 1, 3, 5, 7함대가, 현재 왕도와 여진 땅, 시베리아에 1기병사단, 3보병사단. 11기병사단 등이 배치돼 있었다.

“각종 연구소 이전이 가장 큰 문제다. 고북 시에 그대로 남겨둬도 되는데 말이야.”

“수도 거주는 전체 백성들 중 극히 일부만이 누리는 특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연구원들과 가족의 사기 고양을 위해 반드시 이주 대열에 포함돼야 합니다.”

“졸지에 생이별할 이산가족들도 많겠구나.”

“여객선과 여객기 정기선을 늘려서 취항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고산국 백성들은 작은 고향이 아니라 큰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경험시켜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 세계 속의 고산국이다.”

고산국이 왕국으로 남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제국을 선포하는 것은 물론 고산국이라는 이름마저 바뀔 가능성이 컸다.

“아바마마. 새 나라의 이름으로 대한제국이 어떨지요? 현재 왕실과 관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름입니다.”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만.”

“역사학자들이 전혀 새로운 이름이라며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 삼한의 정통성을 잇고 조선과 차별화하면서 유목민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국명입니다.”

“다른 좋은 이름이 있을지도 모르니 좀 더 시간을 두고 검토해라. 국명에 제국이 반드시 들어가야 할 이유도 없다.”

전에 살았던 세계에서 이미 실존했던 이름이라 딱히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민호는 본인에게 결정 장애가 있나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새섬의 마오리족 여러 부족들이 왕도에 사절단을 보냈다. 마오리족 전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혀를 내민 채 격렬한 하카를 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중하게 옥좌를 향해 절을 했다.

“어마어마한 마나를 몸에 지니신 대왕께 저희 ‘땅의 사람’들이 인사를 올립니다.”

“내 몸에 마나가 많은 것을 어떻게 알았지?”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 흔히 등장하는 개념인 마력의 원천,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힘과 비슷하게 오스트로네시아 언어에서 마나는 우주를 가득 메운 초자연적인 힘을 뜻한다. 세부적으로 폴리네시아 문화권에서는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발현되는 천둥과 폭풍, 바람 등의 강력한 힘을 가리킨다.

하와이와 타이티 문화에서 마나는 특정 장소나 물건, 혹은 사람에게 존재하는 영적 에너지, 또는 치유력을 지칭한다. 마오리족이 활용하는 마나라는 단어는 한 단어로 번역되기 어렵고 문맥을 통해 다양하게 파악할 수 있다.

“대왕께서 재위 중에 실로 엄청난 업적을 쌓으시고, 거대한 도시들을 세우시고, 하늘과 바다 가득히 비행기와 철선을 부리시고, 수많은 군대와 관리, 백성들을 거느리신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마오리족 전사가 말한 이민호의 마나는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도움이나 은혜를 받은 자들을 상호 의무로 엮어놓는 사회적 힘을 뜻했다. 교환 경제에 대비되는 선물 경제(Gift economy)를 통해 발휘되는 폴리네시아 추장의 통치력이나 카리스마로 이해하면 된다.

“설마 내 살을 달라고 하지는 않겠지?”

“꿀꺽! 대왕의 살을 한 점이라도 취한다면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갈 것입니다. 감히 바랄 수 없으니 대왕께서 저희들에게 일을 맡겨주십시오.”

“일을 해준다? 그럼 너희들이 바라는 보상은 무엇이냐?”

“저희들이 바라는 것은 대왕께서 내려주시는 임무를 수행해서, 대왕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흩뿌리신 마나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정당하게 흡수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대왕을 따르며 더욱 강해지고 싶습니다.”

강함을 추구하는 마오리 전사들이 이민호에게서 바라는 것은 경제적 보상이 아니라 마나였다. 게임에서 NPC로부터 퀘스트를 받듯이 이민호가 시키는 일을 하고, 그 보상으로 마나의 상승을 노리는 것이다.

마오리족 사회에서 전사들이 공을 세우는 것도 마나를 획득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그러니 실체가 없는 마나만으로도 전사들에게 이미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 공짜로 부려먹을 기회였지만 고산국에서는 항상 정당한 보상을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새섬에 부족마다 학교가 세워지지 않았나? 아니면 전사들이 새로운 배움을 거부하는 건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성인 전사들도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은 다 배웠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고 족장과 전사들이 토의한 결과, 역시 대왕께서 가지신 마나가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난 양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왕도를 방문하고 대왕을 알현한 것만으로도 저희들의 몸과 영혼에 마나가 충만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사들이 새섬으로 돌아가면 신분 상승은 이미 떼놓은 당상이라는 소리였다. 왕도 방문과 국왕 알현만으로 마나를 충분히 많이 획득했다고 판단함으로써 가능한 논리였다.

여기에 더해 이민호가 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더욱 마나가 높아져 부족에 돌아가 더 높은 지위를 얻는 것도 가능하다고 전사들은 판단했다. 전사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아내와 노예의 숫자를 늘릴 수 있었다.

“좋다. 요즘 가장 골치 아픈 일은 파푸아 섬의 식인종들이다. 다 그런 건 아니고 극히 일부의 원주민들이 요즘에도 사람 고기를 노리고 몰래 사람 사냥을 하고 있다. 식인종들을 소탕하되, 절대 먹지는 마라.”

“마나를 취할 것도 아니면서, 그것도 정당한 전투가 아니라 기습해서 죽인 사람의 고기를 먹는단 말입니까? 파푸아 식인종들은 실로 야만인들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 자들의 고기에는 마나가 한 모금도 없거나 오염된 마나가 들어 있을 것이므로 먹을 가치가 없습니다.”

이이제이가 아니라 식인종으로 식인종을 상대하는 전략이었다. 물론 두 문화권에서 식인의 이유는 전혀 달랐다.

“특전여단장!”

“예! 전하.”

“이들을 데리고 가서 훈련을 시켜라. 체력훈련은 의미가 없을 테니 밀림에서 적을 추격하는 교육과 훈련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 전하. 체력훈련은 오히려 우리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훈련이 끝나면 이들을 재무장시켜 파푸아 섬에 배치하겠습니다.”

특전여단장이 오랜만에 얼굴을 활짝 폈다. 그는 항상 국왕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극소수 특전여단 장병들이 반란에 참가한 것 때문에 마음고생이 몹시 심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오리족 전사들의 덩치와 근육은 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체질이었다.

만약 고산국이 파푸아 섬에서 원주민들을 몰살시키려 했다면 벌써 예전에 끝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욕을 얻어먹기 싫었던 이민호는 원주민들을 국가체제 내에 흡수하려고 몇 배나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노력했고, 그 와중에 아까운 특전여단 병력만 소모했다.

마오리족 전사들은 이민호가 꺼내든 마지막 카드였고, 그래서 파푸아 원주민들에게도 마지막 구원줄이었다. 마오리족을 투입해도 실패한다면 파푸아 원주민들에게 수용소 집단 수용과 강제 감화라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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