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6 105. 대국의 길 =========================================================================
“우리 왕자님들은 눈이 너무 높아요. 겨우 두 분만 공주님들과 다음에 만나기로 기약했대요. 저리 아리땁고 유능한 공주님들을 놓치다니, 아까워 죽겠어요.”
“하긴 돈에 넘어갈 놈들이 아니지.”
혜영이 몹시 안타까워했지만 이민호는 예상하고 있었다. 집단으로 선을 본 고산국 왕자들은 류큐 공주들의 장점인 재산과 상업적 능력보다는 체력이나 전투력,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지적 능력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힘센 여자 쿨리키가 고산국 왕자들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았던 이유였다.
앞으로도 류큐왕국의 해운과 해상 무역 능력이 고산국에 필요하긴 했다. 그러나 류큐왕국의 필요에 따라 교육을 받은 공주들은 고산국 왕자들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고산국 왕실과 혈연관계를 맺으려면 공주들이 상업 외에도 다양한 전공 공부를 하는 편이 나았다.
“얼마 전에 런던 남쪽 그리니치에 천문대를 세우셨잖아요?”
“응. 런던을 고산국 표준시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천문대 건설비 절반을 지원해줬지. 사실은 우리 영토의 동쪽 끝인 셰틀랜드 제도를 기준으로 하려고 했는데 이왕이면 같은 경도의 유명한 대도시가 낫잖아?”
“날짜 변경선이 런던에 그어져 있어서 잉글랜드 어부들이 많이 헷갈리나 봐요. 날짜 변경선을 대서양 중간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묻던데요?”
“누가 고산국 표준시를 따르래? 우린 그저 우리 영토에 맞춰서 우리의 편의를 위해 런던을 기준점으로 삼은 동시에 날짜변경선을 그은 것뿐이야.”
고산국 영토 동쪽 끝에 위치한 셰틀랜드와 경도가 같은 런던을 기준으로 표준시를 정해야 광대한 고산국 영토 전체가 같은 마이너스 시간대에 들어온다. 그리고 런던 기준 180도인 태평양에서 남북으로 선을 그어 날짜 변경선을 설정하면 플러스 12시와 마이너스 12시가 같은 위치가 되는데, 태평양 중심선에 날짜 변경선을 설정할 경우 귀찮은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약 고산국 영토 두 곳이 거의 항상 다른 날짜가 된다면 계산하기 복잡해질까 걱정돼 아예 날짜 변경선까지 런던 경도로 잡아버렸다.
덕택에 유럽 대부분 국가들이 런던 기준 플러스 시간대에 속하게 됐으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마이너스 시간대에 남게 됐고 바로 옆 나라 프랑스와 하루 차이가 나게 됐다. 그러나 현재는 국제 표준시를 정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고산국 표준시 체계를 따를지 말지는 각 국가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고산국이 국제 무역과 해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서 결국 대부분 국가들이 고산국 표준시를 기준으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인님은 처음부터 런던을 경도의 기준점으로 잡았어요. 설마 건국 전부터 셰틀랜드 제도를 가질 생각을 하셨어요?”
“에이, 설마! 그냥 우연이야. 영토에서 시간의 연속성을 가지려다 보니 그렇게 됐어.”
서울이 동경 126도 58분이라고 이민호가 기억하고 있어서 해양탐사 초기에 이를 기준으로 나머지 지역들의 위치를 끼워 맞출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중에도 런던을 기준점으로 잡아야 했다.
그런데 고산국 영토가 넓어지면서 영토 중심의 반대쪽에 경도 기준점과 날짜 변경선을 긋는 게 오히려 국가 통치와 실생활에 훨씬 편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래서 이민호가 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고산국 영토에 펼쳐진 시간대가 18시간 이상이야. 전 영토의 국기게양대에서 국기가 다 내려오는 순간이 없는 ‘해가 지지 않은 나라’가 됐어. 이로 인한 장점이 뭔지 알아?”
“영토가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곤란하다는 생각만 했는데 장점이 있었어요?”
“새원산과 본토, 이제는 고산도지. 어쨌든 시간이 13시간 차이가 나잖아? 전화선은 이미 깔려 있어. 그럼 한쪽이 퇴근해도 다른 쪽에서 업무를 계속 볼 수 있다는 거야.”
“세상에! 주인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지 못해 안달이 나신 것 같아요.”
“큭큭! 나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지.”
사실은 미국에 본사를 둔 회사가 고객센터를 인건비가 싸고 영어가 통하는 인도에 둔 것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미래에 인터넷이 연결된다면 고객 응대와 보안업무뿐만 아니라 모든 업무를 24시간 체제로 돌릴 수 있게 된다.
왕실 별장 겸 군인 휴양지인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바로 동쪽 사쿠라지마 섬이 다시 분화를 멈춰서 다행이었다. 세계 전역에서 잇따른 화산 분화가 이 시대 소빙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자연 현상이었다.
오무타에 위치한 구주 총독부의 고위 관료들과 시코쿠에 사는 일본인 다이묘들이 미리 도착해 가고시마 항구에 도열해 있었다. 이민호가 배에서 내리자 앞머리를 민 일본인 다이묘들과 사무라이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왕자와 공주들이 일본인 다이묘들의 특이한 행색과 예법에 놀랐으나, 이런 장면을 보는 것은 이민호에게도 여전히 어색했다.
“내일 오전에 출항할 테니 바로 보고를 하시오.”
“예, 전하. 그럼 시어소로 지정된 별궁에 드시지요.”
가고시마뿐만 아니라 규슈 전역이 급속히 발전 중이었다. 시가지는 깔끔하게 정리되고 인구는 매년 폭증했다. 2층 건물은 무조건 석조 건물로 지을 것을 강제해 이제는 화재로 인한 피해도 많이 줄어들었다.
구주 총독이 사진 수십 장을 영사기를 통해 은색 천에 투영하며 그 동안의 발전상을 보고했다. 규슈의 일본인들은 옛 전쟁을 다 잊고 지금은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규슈 전역이 따뜻한 기후대라서 소빙기에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일본인들이 아직도 키가 너무 작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어명을 받들어 연구하는 의학자, 영양학자들이 제출한 보고서입니다.”
원래 키가 작아서 왜인이 아니겠냐는 반문을 구주 총독이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현재의 일본인들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천천히 읽어볼 테니 총독이 요약을 간단히 해보시오.”
“예, 전하. 임진왜란 때까지만 해도 조선인은 일본인의 세 배를 먹었다고 합니다. 현재 일본인들이 예전보다 두 배 정도를 먹고 있지만 키와 체구는 10년 전부터 더 이상 커지지 않습니다. 의학자들이 일본인의 성장이 정체된 원인을 연구하고 있는데 일본인들의 식습관을 주요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호! 성인 남자 평균 키가 예전 150cm에서 현재 158cm,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면 163cm까지 커질 것 같다고요? 하지만 좀 더 커질 수 있을 거요.”
이민호가 기억하기로 현대 일본 20대 남자의 평균 키는 170cm 갓 넘어서 한국 20대보다 2~3cm 정도 작았다. 대대로 일본인들은 키가 작은 것으로 유명했으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같은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성인 남자 평균 키가 일본인보다 더 작을 때도 있었다.
조선 후기 수군 관련 자료를 보면 수졸들이 죄다 키가 다섯 척에 용모상 특징으로 얼굴에 점이 있다고 돼 있다. 소빙기에 체구가 작아진 점도 있겠지만 일일이 조사하기 귀찮아서 문서에 잘라서 붙이기를 했다는 의문이 드는 사료였다.
“일본인들에게 생선 외에도 육고기를 먹는 습관을 들이는 사업이 계속 진행 중이오?”
“예, 전하. 일단 불고기 같은 살코기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육류 요리를 식단에 올리는 실험이 진행 중입니다. 일본인들도 예전부터 새 종류와 개고기, 멧돼지 고기는 잘 먹었습니다. 앞으로 익숙해지면 소고기와 돼지고기, 양고기도 가리지 않고 먹게 될 것입니다.”
중세와 근대 일본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받들어 성불하기 위해 네 발 달린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한국 스님이 곡차를 마시고 무슬림들이 대추야자 술을 음료로 여겼듯이 일본인들도 얼마든지 빠져 나갈 길을 열어두었다.
토끼는 긴 귀가 새를 연상시킨다며 새고기로 간주해서 먹었고, 멧돼지는 야마쿠지라, 즉 산에 사는 고래이니 물고기라고 우기며 먹었다.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은 개들을 풀어놓고 활을 쏘는 옥내 사냥대회가 끝나면 죽거나 부상당한 개를 잡아먹었다.
그러나 농사에 중요한 소의 고기를 먹을 기회는 일본에서 극히 드물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쪽 기록에, 왜병들이 소를 잡아 다리만 뜯어가서 왜인들이 고기를 먹을 줄 모른다고 썼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을 뿐, 고기를 사양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웬만하면 모든 민족의 전통을 존중해줄 생각이나 된장국에 작은 밥공기 하나, 정어리 세 마리, 장아찌 반 종지로는 너무 부족하오. 잘 먹이도록 하시오.”
“하오나 전하. 일본에서는 소식을 해야 장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도 일본인들은 많이 먹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건 성인이 된 다음 개인이 선택할 일이오. 어려서 못 먹으면 잔병이 자주 생기고 커서도 힘이 약하오. 어려서 잘 먹어야 성인이 돼서 크고 튼튼해진다오. 일본인들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도록 더 키울 방도를 찾으시오.”
“예, 전하. 제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일본인들이 네 발 짐승의 고기를 무서워하지 않고 잘 먹도록 만들겠습니다.”
일본 규슈의 법적 지위는 속국이 아닌 고산국 국왕의 직영지에 불과했다. 일본이든 유럽이든 수탈할 자본이 별로 없는 시대라서 고산국은 제국주의 정책을 쓰지 못했고, 그나마 노동력이라도 수탈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먹고도 약간 남는 쌀은 고산국 상표를 붙여 조선에 수출했다.
“사국의 영주들은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 다행이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모두가 국왕전하의 은덕이옵니다.”
시코쿠 다이묘들은 지난 40년 동안 정말 쥐 죽은 듯이 지내고 있었다. 40년 전과 비교해 인구와 생산력 등에서 거의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이민호가 강요하긴 했지만,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시코쿠에는 변화가 전혀 없을 것 같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사국 몇 곳에 병원을 설립해줬으니 사망률이 줄어들었을 테고, 그럼 그만큼 인구가 늘어야 하는 것 아니오?”
“그, 그렇긴 하옵니다만 생활이 안정된 요즘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적게 가지는 추세입니다.”
시코쿠의 다이묘들은 비좁은 영지에 농토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지역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시코쿠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인구 조절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대부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정한 수단을 동원하기 마련이었다.
20세기 초반 일본의 농토와 생산력 증대가 정점에 이르면서 인구 부양 능력이 한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더 이상 인구압을 이기지 못해 인구 다수를 해외에 내보낸다.
브라질, 동남아시아, 하와이 등으로 이주한 일본인 하층민들은 육체노동과 매춘을 하면서 생존에 급급했으며 대부분이 그 지역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일본이 경제적으로 성숙한 1970년대 이후 이들의 후손들이 귀국자녀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으나 일본어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하층민을 구성하거나 다시 돌아갔다. 20세기 전반 조선과 대만, 만주국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패전 후 거의 빈손으로 본국에 돌아가 역시 다시 하층민이 됐다.
“식량이 부족하면 규슈나 본국에서 지원해준다고 하지 않았소?”
“으흐흑! 이래저래 어려운 일입니다. 제발 저희들의 처지를 혜량해주시옵소서, 전하!”
혼슈가 철저히 망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시코쿠 다이묘들은 혹시나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 고산국에 손을 벌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규슈가 성장하는 것을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거나, 시코쿠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안절부절못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규슈도 조만간 인구 과잉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오. 세자가 등극하면 오사카 서쪽 혼슈에 남는 인구를 정착시키는 문제를 고려해보겠소. 그러니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시오.”
“황공하옵나이다, 전하!”
다이묘들이 눈물을 쏟았으나 여전히 이민호를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민호가 조금만 변덕을 부리면 당장 멸망당할 위협을 느끼는 다이묘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관동지방은 여전히 소규모 군장들이 다스리는 수백 개 지역으로 분열돼 있었다. 혼슈 동부의 인구는 다 합해서 겨우 시코쿠와 비교될 정도였다. 이제 혼슈 땅을 처리할 때가 왔다.
이민호는 혼슈 서부에 말 잘 듣는 규슈 사람들과, 고산국을 몹시 두려워하는 시코쿠 사람들을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일본인들이 조몬인들을 몰아내면서 정이대장군을 세웠듯이, 혼슈인들을 더욱 동쪽으로 밀어붙이거나 아예 멸족시킬 정책은 시도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혼슈는 동과 서로 영원히 나뉠 것이다. 일본 땅을 2개의 혼슈, 시코쿠와 규슈, 동북지역의 아이누까지 다섯 개로 나누고 나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가고시마를 출항한 선단이 시코쿠 남쪽 바다를 지나 동쪽으로 항진했다. 북태평양 항로에서 살짝 벗어난 혼슈 남쪽 바다에는 배가 단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잔잔한 만 안쪽에 노를 젓는 조각배들이 고기를 잡는 모습을 확인했다. 혼슈 일본인들이 돛단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고산국 해군과 태평양 탐사전단이 지금도 철저히 막고 있었다.
아이누 섬에 도착해 해안도시 두 곳과 동쪽 평원에 위치한 농업연구소 아이누 분소를 방문했다. 아이누 사람들은 고산국을 모방해 산업과 의식주 생활을 비슷하게 따라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록 모피 옷에 사냥용 창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지만 시가지와 주택들은 고산국 지방도시와 큰 차이가 없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과 직접 대화해보니 안심해서는 안 될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여름에는 괜찮지만 겨울마다 예년보다 훨씬 혹독한 추위가 닥친다고 다들 걱정이 많았다. 석유와 난로를 대규모로 지원해준 데 대해 감사 인사를 여러 번 받았다. 사할린 유전을 개발하고 싶었으나 심해 유전을 개발한 경험이 아직 없어서 문제였다.
농업연구소 아이누 분소를 떠나 다음 날 사할린 남단 항구도시에 도착했다. 사할린은 겨울에 사람이 거의 살지 못할 얼음의 땅으로 변하고 있었다. 대륙 서부 해양성 기후대에서는 거의 느끼지 못했으나 대륙 동부 대륙성 기후대에서는 심각한 환경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꺅! 너무 귀여워.”
“정말 손만 잡고 자요.”
선단이 쿠릴열도를 지나는 중에 두꺼운 모피코트를 입은 공주들이 여객선 갑판에 몰려나왔다. 그리고 바다에 누워서 자는 해달들을 구경하면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해달들끼리 서로 앞발을 잡고 자는 모습은 이민호가 봐도 정말 귀여웠다.
몇몇 어린 공주들은 해달 모피로 모자와 모피코트를 만든다는 이민호의 설명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결국 혜영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다음 날 감자 반도로 입항하려 했으나 바다에 떠다니는 유빙 때문에 항구로 접근하기 곤란했다. 전파 통신만 간단히 마친 다음 항로를 동쪽으로 틀었다. 북쪽 영토를 관리하기가 해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 작품 후기 ============================
천도를 빙자해 태평양 연안 지역들에 대한 묘사를 마무리하면서 넘어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