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8 105. 대국의 길 =========================================================================
새남포의 제지공장 이전 문제를 물어봤더니 혜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소한 문제라서 굳이 이민호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만 명 이하를 고용하는 국영기업의 신설과 폐쇄, 이전 문제는 보고할 필요 없다면서요?”
“그랬지. 제지공장 종업원은 5천 명이라더군. 원주민으로 인원을 채울 수 있대.”
말년병장이 내무반 일에 열외가 되듯이 이민호가 국정운영에서 따돌림 당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행이라 여기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혜영이 이민호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언명하신 임기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님이 확실한 권력을 쥐고 계실 테니까요.”
“고마워.”
“고맙긴요! 군주와 후계자가 권력 다툼을 벌이는 것은 간신과 반역자들에게 기회를 주는 일밖에 안 돼요.”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지.”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서 문제였다. 부왕의 죽음을 기다리다 못해 지친 후계자가, 혹은 후계자로 선택받지 못한 왕자가 반란을 일으킨 사례는 무굴제국 외에도 이 시대에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때로는 권력의 축이 후계자로 서서히 이동하는 현상에 과민하게 반응한 부왕이 말년에 후계자를 내치기도 했다.
바로 이때 양쪽 눈치를 살피다 강한 쪽에 붙어서 특단의 조처를 취하도록 부추기는 세력이 발호하기 마련이었다. 일이 성공하면 공신이 되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므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권력을 쥐기 어려운 자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어느 나라든 승계 과정에서 준비할 게 참 많을 것 같은데, 공화정에서는 국가 원수가 바뀔 때 어떻게 하나요?”
“정권 교체가 언제 이뤄질지 모르니 정권 인수에 필요한 모든 것이 야당에 미리 준비돼 있어야겠지.”
“그래서 에이레의 소수 당파에도 그림자 내각이 있었군요. 에이레는 주인님이 쓴 <이상적 공화제>라는 책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대요.”
“나는 저자가 아니라 책 내용을 최종 감수했을 뿐이야.”
“저자를 고르고 책 내용을 정해서 일을 맡긴 분이 주인님이세요.”
현재 에이레 공화국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화파가 압도적인 다수당이었다. 친 잉글랜드 왕당파나 브리튼 제도 연합파는 출마 자체가 금지됐고 에이레 독립을 반대하는 주장을 하는 자는 반역죄 혐의를 쓸 각오를 해야 했다.
심지어 고산국과 완전히 합병하자는 주장도 에이레에서는 반역죄에 해당했다. 명목상 에이레 공화국이 고산국의 피보호국인데도 에이레에서는 자주적인 분위기가 훨씬 강했다. 이 모두가 이민호가 원하는 바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현재는 독립운동 주체 세력의 일당독재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것은 건국 초기에 에이레 사람들이 일치단결할 때나 가능한 정치 구도였다. 국민들의 이해가 갈리면서 시간이 갈수록 정치세력들이 분열되거나 이합 집산을 거듭할 것으로 예상했다. 최종적으로 양당제가 안정적이라서 더욱 바람직하겠지만 여러 정파들이 모인 연합 정권이 탄생하더라도 우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다음 날 저녁 새나하에 도착했다. 출발 전에 미리 통보했더니 류큐왕국 백성들이 해협 진입로 주변 해안에 잔뜩 몰려들어 선단을 격렬하게 환영했다. 백성들이 활짝 웃으며 태극기와, 태극기가 왼쪽 상단 4분의 1을 차지한 유구국기를 양손에 들고 힘차게 흔들었다.
해협을 가로지른 금문교 아래를 지나다가 동쪽 작은 섬에 세워진 거대한 석상 두 개에 눈길이 갔다. 위치는 형무소로 악명 높았던 알카트라스 섬 같았다.
“저건 전에 못 보던 석상 같은데?”
“주인님과 아라 공주님 석상이잖아요. 좋으시겠어요.”
“뭐, 좋다기보다는.”
속국 수도의 항구에 마치 자유의 여신상처럼 우뚝 솟아있는 석상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데 솔직히 싫지는 않았다. 다만 이민호와 아라 공주를 너무 정답게 석상으로 표현해서 조강지처인 혜영에게 눈치가 보일 뿐이었다.
부두에 내리는데 나하에서 봤던 상풍 국왕과 왕세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민호가 영토 곳곳을 순시하며 천천히 오는 사이 상풍 국왕은 기관이 달린 상선을 타고 바로 새나하로 달려왔다고 한다. 상풍 국왕은 얼마 전에 만났을 때와 달리 입이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국왕전하.”
“나보다는 왕자들을 기다린 것 같군.”
“허허! 두 나라에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환영식이 거행되는 도중에 류큐왕국 공주 두 명이 왕족 처녀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오더니 고산국 왕자 두 명을 채갔다. 왕자들이 구원을 요청했으나 다들 웃고 넘겼다. 다시 만나보기로 약속만 했었던 왕자들은 졸지에 등 떠밀려 결혼하게 생겼다.
“이 정도 분위기면 왕자들도 거절하기 어렵겠소. 하지만 실망할지 몰라 미리 말해두겠소. 고산국 왕자라고 해서 모두가 정치와 행정을 배운 것은 아니요.”
“물론입니다, 전하. 왕자저하의 능력을 유구국에서 이용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니 심려 놓으시옵소서.”
이미 아라 공주가 이민호에게 시집갔지만 사촌간인 상풍 국왕 입장에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두 나라 왕실의 직계끼리 결혼시킴으로써 고산국과 좀 더 강하게 핏줄을 연결하고 싶다는 욕구의 발로가 이번 일로 나타났다.
“그리고 고산국 사람들은 왕자와 공주, 일반 백성들을 가리지 않고 외국에서 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소.”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문명국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니 왕자저하들이 유구국에서 살도록 붙잡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시오.”
“저희는 그저 왕자저하들께서 계속 원하시는 삶을 사시도록 돕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 손녀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다른 왕족 처녀들이 채워줄 것입니다.”
“험! 험! 왕자들이 무슬림이나 기독교도가 아니니 문제는 없을 것이오.”
이민호가 아라 공주를 얻으면서 왕족 처녀들까지 시녀로 거느리게 됐었는데 왕자들도 마찬가지 길을 걷게 될 것 같았다. 이민호가 받아들였던 류큐왕국 시녀들은 호위 전사, 교사, 상업전문가, 생산전문가 등이 한 세트로 구성됐었다. 덴마크 공주 헤드비히의 시녀들도 비슷한 구성이었다.
“국왕전하! 왕자저하의 배필이 유구국 세자인 저의 딸이 아니라서 조금 아쉽습니다.”
“현 세자. 나는 유구국의 권력 핵심과 직접 혼사관계를 맺는 것이 부담스럽다네. 그래서 차라리 잘 됐다고 여긴다네.”
“국왕전하께서 유구국의 독립을 위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한 편으로는 섭섭합니다.”
“고산국은 항상 유구국의 합법적인 계승자를 지지해줄 테니 걱정 말게.”
상풍 국왕의 장남 이름이 상현, 차남이 상질이었다. 왕자와 만나고 있는 류큐왕국 공주들은 왕세자 상현이 아니라 차남 상질과 삼남의 딸들이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세자 상현이 류큐국왕에 즉위하나 겨우 7년 만에 졸하고 차남 상질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류큐국 왕실 입장에서는 바라던 대로 된 셈이겠지만 아직 미래의 일이었다.
“세계적으로 기후가 추워지고 있는데 새나하에는 문제가 없소?”
“예, 전하. 금문교 주변에 안개가 예년보다 심하게 끼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아! 눈 산맥에 눈이 많이 쌓여서 중앙평원을 흐르는 강이 사철 내내 수량이 더욱 풍족해졌습니다. 유구국은 오히려 기후 변화의 덕을 봤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새나하 동쪽에 위치한 시에라네바다 산맥이라는 스페인어 이름은 1777년에 붙었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맥 덕택에 중앙평원 전체가 온화한 기후와 함께 풍부한 수량의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그것 참 다행이오. 대권항로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항로를 수정하는 문제를 해운국과 협의해야 할 것이오.”
“예. 저번 달에 해도를 받아서 상선들이 이미 새 항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북쪽 바다에는 여름에도 빙산이 떠다니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고산국과 협력한 대가로 가장 크게 성장한 속국이 류큐왕국이었다. 실제 역사가 그대로 진행됐다면 지금쯤 사쓰마의 학정에 시달리며 과도한 조공을 바치는 외에 잔혹한 인구 조절 정책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류큐왕국은 태평양에서 고산국의 해운 물동량 절반을 맡았고 북미 대륙에서도 대표적으로 기름진 땅을 받아 수륙 양면에서 풍요를 구가하고 있었다. 덕택에 약 40년 동안 인구가 3배 이상 급성장했다. 물론 고산국에 의해 발전 가능성을 제한당하는 한계가 엄존했으나 왕실과 일반 백성을 막론하고 고산국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새나하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야트막한 언덕에 고산국 왕실 전용으로 지은 별궁에서 본 새나하의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항구 도시가 대체로 그렇듯이 만 건너편 지평선에 떠오른 달빛을 받아 온 바다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집들과 가로등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수면에 가득 어렸다.
“하나같이 일이층뿐이구려. 건물을 좀 더 높이 지어도 될 것 같소만.”
“전하께서 내리신 어명은 유구국에서 무조건 절대적인 법이 돼요. 지진과 화재에 대비하라는 어명은 유구국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유구국에서 어느 누가 감히 어기겠어요?”
테라스에 나와 새나하의 야경을 구경하면서 아라 공주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아담한 아라 공주의 몸을 뒤에서 안고 있자니 옛 생각이 절로 났다. 아라 공주의 시녀들이 기쁜 표정으로 침실을 정돈하고 있어서 더욱 신혼 때 같았다.
다음 날 오전, 제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왕자 두 명을 부둣가에 내버려두고 선단이 새인천으로 출항했다. 류큐왕국 공주를 비롯해 최소 너덧 명의 처녀와 결혼하게 될 왕자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은 선단에 아무도 없었다.
왕자들이 마지막으로 부두에서 멀어지는 호위전단 순양함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해군과 해병대 장병들은 표리부동한 왕자들을 비웃으며 매몰차게 홋줄을 걷었다.
“쟤들을 그냥 버리고 가도 되나?”
“결혼식을 올린 다음 새 왕도에 오시겠죠. 왕자님들의 개인 짐과 처가 어른들에게 보낼 선물을 선별해서 부두에 내려놓았어요.”
혜영이 알아서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아라 공주와 시녀들이 결혼식을 주관하기 위해 배에서 내렸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주 선단 후발대를 이끌고 오는 대원군 이응화에게 연락했더니 얼씨구나 하고 새나하로 달려오고 있었다. 매번 그랬듯이 왕실의 관혼상제는 부친에게 맡기기로 했다.
선 본 자리에서는 함부로 예의상의 애프터 신청을 하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혼식 때 신부가 아니라 때로는 신랑이 울기도 한다.
새인천은 항구를 중심으로, 그리고 주요 도로를 따라서 급속히 도시화되고 있었다. 북미 서해안 도시에서는 기본적으로 내진설계에 따라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나 석조건물을 단단히 짓는 것이 법이었으므로 허술한 건물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통바족 등 북미 원주민들도 지금은 오두막이나 천막에서 살지 않았다. 국왕 일행을 환영하러 부두에 나온 백성들 사이에서 원주민 아이들의 웃는 얼굴도 잔뜩 눈에 들어왔다.
“백성들이 다들 기뻐해서 다행이에요.”
“총리가 온다는 소식에 더 많은 환영인파가 몰려나왔어.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이민호가 아부하자 혜영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백성들이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지평선 끝까지 석조 건물이 들어섰어요. 빈민촌이 없는데도 50만 명이 사는 대도시가 가능하군요.”
“새인천은 다 좋은데 딱 하나, 지진이 문제야.”
현대 로스앤젤레스 시는 인구가 4백만도 안 되지만 광역권 인구를 포함하면 천이백 만, 혹은 천팔백 만에 이르는 거대도시였다. 살기가 좋은 지역이므로 앞으로도 끝없이 성장할 것으로 기대했다.
“수도권에 이런 대도시가 있어서 든든해요.”
“그래. 티완이 좀 작긴 하지.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수도가 될 거야.”
새 수도 티완을 중심으로 일일생활권 내에 들기 때문에 새인천도 수도권에 포함됐다. 행정과 고등교육을 제외한 대부분의 업무를 새인천에서 분담할 수 있도록 도시의 발전 방향을 새로이 잡았다.
새인천 덕택에 티완이 수도로서의 임무 중 하나, 특히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문명국의 위엄을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현대 국가의 수도나 주도는 대도시보다는 행정도시로서 역할만 할 수 있다면 충분하겠지만, 아직은 방문객의 심리를 압도하는 대도시가 더욱 적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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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가기 힘드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