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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32화 (981/1,000)

01032  106. 제국 선포  =========================================================================

농업연구소장이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광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소장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으로 보고서를 바쳐서, 이민호가 씩 웃으며 책을 펼쳤다.

“암스테르담 시의회에서 일정 기간 내에 체결된 모든 튤립 선물 계약을 무효화하기로 결정했소. 만약 소장의 말을 믿고 선물에 투자했다면 큰 손해를 봤을 것이오.”

“불충한 소신을 죽여주시오소서, 전하!”

튤립 가격이 폭락했으나 일부 품종은 여전히 인기리에 판매됐다. 붕괴된 것은 튤립 선물 시장이지 네덜란드에서 튤립 인기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서 현물 시장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네덜란드는 고산국이 튤립 선물 투기에 나서지 않고, 현물 공급을 통해 투기를 진정시킨 공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보상은 감사패 하나에 불과했지만 압도적인 경제대국인 고산국이 선물계약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 셈이 되었다.

튤립 투기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으나, 이민호는 몇 달 새 3백만 원이라는 돈보다 실제 시장에서 얻은 지식이 더 소중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품목에 대한 투기 광풍이 몰아칠 때 이번 사건의 교훈이 적용될 것으로 기대했다. 튤립 거품 외에 근대 유럽의 3대 버블 경제는 잉글랜드의 남해 거품 사건과 프랑스의 미시시피 계획이었다.

“소장에게 벌을 내려야겠소.”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전하.”

“소장에게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에 데카르트 백작이 지은 <방법서설>이라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시오.”

“전하! 데카르트 백작 각하는 철학자이며 수학자 아니십니까? 제 굳은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차라리 저를 일반 연구원으로 강등시키시고 평생 내한성 볍씨 개발에 종사하라는 어명을 내려주십시오.”

“생각하는 법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의미요. 벌은 대체할 수 없소. 물론 농업연구소 소장 직무는 계속 수행하시오.”

농업연구소장이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지만 철학책을 읽으라는 어명을 소장이 아주 큰 벌로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보름 전에 만났던 에스파냐 대사가 다시 알현을 신청했다. 겨우 보름 사이에 10년은 늙어 보였고, 세상 다 산 표정이었다.

“부끄럽게도 에스파냐 국왕군이 리스본으로 진격하다가 포르투갈 반란군에게 대패했습니다.”

“포르투갈 군 병력이 절반밖에 안 되는데도 국왕군이 크게 패했다고 들었소. 브라간사 공작이 이 정도로 군사에 밝은 줄은 몰랐소.”

포르투갈 영토는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동쪽 국경선 대부분이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고 북쪽 갈리시아 방면과 남동쪽 안달루시아 방면만 열려 있었다. 포르투갈 북동쪽 카스티야에서 출병한 에스파냐 귀족군이 산맥에 배치된 포르투갈의 소수 병력에 막혀 진군하지 못하는 동안 국왕군은 남동쪽 평원이 이어진 안달루시아를 통해 포르투갈 영토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에스파냐 국왕군 2만 5천이 리스본으로 진격하는 도중 절반 병력에 불과한 포르투갈 군과 세 번을 싸워 세 번을 패배했다. 리스본을 사흘거리에 앞두고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3천이 전사하고 5천이 포로로 잡히면서 국왕군은 완전히 궤멸하고 말았다. 에스파냐 국왕군 나머지 1만 정도만 간신히 안달루시아로 퇴각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은 패잔병을 추격하는 대신 마티아스 데 알부케르크 장군에게 전체 기병을 주어 국경선 동쪽 에스파냐 땅인 몬티호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 지역을 방어하던 몬테레이 백작은 전쟁터보다 주둔지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리스본 근교의 포로수용소에서 편히 지내게 됐다.

“국왕전하! 포르투갈 반란군의 작전을 고산국 공주님이 수정하셨다고 합니다. 혹시 국왕전하께서 유학생 공주님이 아니라 군사 전략가를 포르투갈에 파견하신 것이 아닌지요?”

“그건 아니요. 군사에 재능이 뛰어난 왕자와 공주들은 다들 국내에만 머물고 있소.”

이민호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후궁들 외에 이민호와 가장 가까운 이들은 계복을 비롯해 대부분 군인이었다. 왕자와 공주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민호는 사관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왕자와 공주들에게도 전략과 전술 외에 그 중간 개념에 해당하는 작전술을 따로 가르쳤다.

포르투갈 군과 에스파냐 국왕군이 세 번 싸웠다고 했는데 앞의 두 번은 에스파냐 국왕군 본진과 떨어져서 따로 행동하던 부대를 포위해 완전히 격멸한 전투였다. 포르투갈 독립군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빠른 기동을 통해 수적 우세를 점했기에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 전에 주앙 4세가 포르투갈 군을 재정비해놓았기에 승리가 가능했다. 주앙 4세는 요새와 그 주변 지역을 엮어 재정적 지원을 하게 만들고, 요새와 수비대를 근대화시켰다. 승리는 더 오래 준비한 자들의 것이었다.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을 상대로 해전에서도 패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아! 해전에서도 역시나 공주님께서 작전을 수정하셨다고 합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외교관을 파견해 대관식 전에 미리 구원을 요청해놓고, 에스파냐 함대를 리스본으로 깊숙이 끌어들인 것은 공주님의 작품입니다.”

“나는 윤지가 해양사학을 연구하는 줄만 알고 있었지, 설마 군사전략에도 일가견이 있는 줄은 몰랐소. 학생에 불과한 공주의 책략에 당하다니, 에스파냐의 장군과 제독들이 생각보다 무능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

카디스에서 출발한 에스파냐 함대는 육군보다 더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에스파냐 함대가 리스본에 접근하자 리스본과 다른 항구에서 군함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에스파냐의 예상과 달리 포르투갈 단독 함대가 아니라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연합한 대규모 함대가 출동했다. 그러나 연합함대 함선이 30퍼센트가 많았어도 에스파냐 군함이 더 컸기에 해전은 비등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대대로 관계가 나빴지만 에스파냐와는 사이가 더 나빴기에 포르투갈이 요청하자마자 자진해서 연합함대에 가담했다. 에스파냐가 프랑스 위그노 반란을 지원한 일을 비롯해 지금도 프랑스 남부에서 반란을 꾸준히 충동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쪽 피레네 산맥 너머와 동쪽으로 과거에 부르군트 백작령이었던 프랑슈-콩테, 북쪽 플랑드르가 에스파냐 영토라서 세 방향으로 포위된 난국을 타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탈리아 영토 중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의 영향권인 사보이 공작령을 공격하려는 에스파냐의 기도를 미리 꺾어두려는 목적도 포함됐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비슷하게 유럽 국가들은 모두 타국과 사이가 나쁜데 유일하게 포르투갈과 잉글랜드는 14세기부터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포르투갈이 국권 회복 운동을 하는 중에 유일하게 도와준 나라가 잉글랜드였으며, 나폴레옹 전쟁 때도 두 나라가 프랑스에 대항해 싸웠다.

“그래도 전쟁은 고위 귀족이 지휘해야 합니다, 전하.”

“귀족 지휘관을 보좌할 유능한 인재를 키우고 선발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려.”

에스파냐 함대와 연합함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은 사흘을 끌었다. 그런데 연합함대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계속 선점한 덕택에 해전 내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해전 이후 상륙전을 수행해야 하는 에스파냐 함대에 비해 연합함대는 리스본 항구를 왕복하면서 보급을 추진할 수 있었으므로 포를 무제한 쏠 수 있었다.

결국 에스파냐 군선 70여 척 중에서 여섯 척이나 침몰하고 30척 가까이 나포되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나무로 만든 범선들이 벌인 해전 중에 이렇게 많은 배가 전투 중에 침몰한 적이 없어서 양쪽 해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네덜란드 해군이 이 해전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2월에 있었던 리자드 포인트 해전에서 패한 때문이었다. 플랑드르 됭케르크에서 출항한 에스파냐 함대 8척이 잉글랜드 남서부 콘월 연근해에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상선 44척과 네덜란드 호위함 6척을 공격했다. 에스파냐 함대에 선박 피해가 없었던 반면, 네덜란드 호위함 3척이 침몰하고 나머지 3척이 나포됐으며 상선도 14척이나 나포됐다.

“국왕전하 말씀대로 에스파냐에는 인재가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에스파냐에도 전략가를 파견해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대사! 에스파냐 영토인 마드리드와 나폴리, 신성로마제국 영토인 밀라노에도 고산국의 왕자와 공주들이 유학 중이오. 그들에게 의향을 물어보시오.”

“법학과 요리, 의상을 공부하는 분들이 전술전략을 안다는 말씀입니까? 아! 윤지 공주님도 해양사학을 전공하고 계십니다.”

“직접 참전하는 것이 아니라 작전 계획 수립 단계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면 분명 도와줬을 것이오. 영토에 우수한 인재가 있었음에도 활용하지 않은 것은 에스파냐 잘못이오.”

그러나 이민호는 자식들이 잘 났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윤지가 작전술에 뛰어난 것은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윤지가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행동인 작전술에만 뛰어났을 뿐, 전략과 전술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윤지가 전쟁이 아니라 항해와 정복전쟁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고산국 무기체계가 유럽과 달라서 공주님의 지식이 포르투갈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요소는 비슷한 법이오. 어쨌든 초전은 에스파냐가 패했소. 귀국은 다시 포르투갈을 공격할 계획이오?”

“본국의 전략을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포르투갈을 포기하면 네덜란드도 포기해야 하고, 나폴리 왕국이나 프랑슈-콩테, 그리고 다른 해외 영토에서도 물러나야 합니다. 심지어 같은 이베리아 반도 내에 위치한 카탈루냐마저 독립시켜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포르투갈이 독립할 기회를 잡은 것도 에스파냐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 덕분이었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꽤 오래 싸우지만 에스파냐로부터 피레네 산맥 일부를 영토로 얻는 평화조약을 체결한 프랑스의 배반으로 독립에는 실패한다.

“에스파냐가 강대국인 것은 사실이나 훌륭한 지배자가 되지는 못한 것 같소. 아직도 프랑슈-콩테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노라고 들었소. 프랑스와 비교해 농업생산성이 매우 떨어지고 예전과 달리 몹시 낙후한 지역이 돼버렸소.”

“에스파냐의 내정에 관한 일입니다, 전하.”

“에스파냐 영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이유를 말한 것뿐이오.”

50여 년 전에 에스파냐 국왕을 지지했던 포르투갈 귀족들이 지금은 독립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에스파냐 왕실과 중앙정부가 무능한 탓이었다. 에스파냐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정치권력에서 포르투갈 귀족들을 꾸준히 배제시켰다. 에스파냐 국왕이 포르투갈 국왕을 겸한 이후 국운이 계속 쇠하고 독립국이 아닌 일개 지방으로 대우를 받자 포르투갈 귀족들이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가 지배하는 시기의 다른 지역들도 착취와 발전 정체로 이름 지을 수 있었다. 국왕과 일부 총신들은 궁정에서 사치를 즐기면서 필요한 재원을 지방에서 충당하고, 이에 반발하는 지역을 군대로 진압하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국왕전하께서는 유럽 왕실과 혼사관계를 맺더라도 덴마크처럼 국왕이나 왕위 계승자와는 혼사를 피하신 줄로 압니다만.”

“그랬소만, 당사자끼리 서로 좋다는데 내가 어쩌겠소? 포르투갈만 예외가 아니오.”

“합스부르크 가문과도 혼사가 성사되면 좋겠습니다.”

“거기는 직계 친족끼리만 결혼하는 가문 아니오? 내 자식이 합스부르크 방계와 결혼한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소.”

이민호는 고산국이 에스파냐와 혼맥이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고산국 왕자와 공주들이 외모보다 내면을 중시한다 해도 거대한 주걱턱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리는 자와 연애를 통해 결혼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스파냐는 고산국은 물론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제구조와 문화면에서 매우 낙후돼 있었다. 고산국 왕자와 공주들이 배우자 선택은커녕 이런 나라에 관심을 갖기도 어려웠다.

에스파냐가 유럽에서 강대한 국력을 가졌다 하나 다른 나라에 비해 나은 것은 군사력뿐이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경제력을 비롯한 다른 요소가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그 동안 우월했던 군사력도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봤다.

“저번에 고가 대사에게 한 말을 잘 기억해두시오.”

“에스파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잉글랜드를 상대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산국 국왕전하께 중재를 요청할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아! 전쟁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다음 국왕전하께 중재 요청을 드리겠습니다.”

“아직은 자신감이 넘치는구려. 에스파냐의 오랜 우방국으로서 걱정된다오.”

에스파냐의 적국 명단에 4개국이나 뜬 것만으로도 패배는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내세울 거라곤 과거의 영광밖에 없는 대사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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