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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35화 (984/1,000)

01035  106. 제국 선포  =========================================================================

북미대륙 서쪽에 자리 잡은 수도 티완 주변은 지중해성 기후로서 원래는 여름 내내 건조하고 겨울에는 온화하면서도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 소빙기가 다가오면서 티완은 여름에 시원하고 가끔 비도 내렸다. 최근 연간 강수량이 600mm가 넘어, 현대에 비해 두 배 이상이었다.

현대에는 염호가 되는 솔턴 호 자리에 그보다 네 배 면적의 카우이야 호수가 아직도 담수호로 남아있는 이유였다. 예전보다 일조량이 적고 강수량이 많아 호수가 마를 일이 없었다. 그러나 기상학자들이 언젠가 호수 전체가 완전히 마르거나 면적이 줄어들어 염호로 바뀔 것을 경고해, 호수보다는 콜로라도 강을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하도록 했다.

“새나하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오전에는 해무가 꽤 자욱하게 끼는구나.”

“해무는 곧 사라진대요. 여름인데도 하늘이 조선의 가을 하늘처럼 새파래요.”

오늘은 제국 선포식과 황제 대관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 날을 위해 평생 달려온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세계 역사에 큰 획을 그을 오늘 행사에 이민호는 꽤나 큰 자부심을 가졌다.

황후 혜영도 잔뜩 들떠서 오늘만큼은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혜영에게 평생 예산 걱정을 하게 만든 사람이 이민호였으니 그 동안 뭐라 하지도 못했다.

“여름에는 선선하고 겨울에 온화해서 참으로 좋은 곳이야.”

“폐하! 황제의 홀(笏)을 잡는 폐하의 손을 좀 더 높이 해서 폐하께서 걸친 망토가 살짝 들리도록 하면 더 멋지실 것 같아요, 폐하.”

“폐하 소리 좀 그만해.”

“듣기 좋잖아요. 헤헤!”

고산국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 초강대국이 된 만큼, 대관식도 기존의 모든 제국들이 행했던 것보다 더욱 화려하고 장엄하게 거행할 계획을 세웠다. 황제와 황후가 입는 복식도 마찬가지로 기존 동서양의 황제와 황후들이 입었던 예복을 촌스럽게 만들 파격적이면서도 위엄을 갖추는 방향으로 제작됐다.

이민호는 그저 군복 비슷하게 단순하면서도 간편한 예복을 만들라고 주문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궁정의상 제작자들이 근세를 넘어 SF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우주해적 함장 비슷한 검정색 복장을 만들어 바쳤다. 실제 우주전쟁에서 결코 실용성이 없을, 오로지 뽀대만을 위한 디자인 바로 그것이었다.

빳빳한 옷깃을 너무 높이 세워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불편했으나, 전신거울을 보니 제법 멋져 보였다. 검은 색이 가장 화려하다는 말을 이 예복을 입어보고 나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명나라 황제처럼 펑퍼짐하거나 유럽 국왕들처럼 스타킹과 하이힐로 각선미를 강조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더욱 다행이었다. 이 시대 유럽 남성복 스타일은 국부를 특히 강조해서 보기에 몹시 민망했다.

깔끔한 검은색 예복과 두터우면서도 치렁치렁한 은색 망토에 더해 전혀 쓸데없는 막대기를 장신구 삼아 들었다. 황금으로 만든 기다란 지팡이 위에 주먹만 한 루비를 박은 황제의 홀(Imperial scepter)을 들고 있자니 마치 제우스 신상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민호가 홀을 살짝 휘둘러 혹시 마법이 발동되지 않나 확인했다.

“마법사나 양치기 같아. 이 홀을 다시 쓸 일이 있을까?”

“없죠. 신년 정조(正朝) 때 한 번 쓰시고 양위하면서 황태자에게 넘기세요. 이건 일 년에 딱 한 번만 써요.”

혜영은 황제의 홀에 박힌 커다란 루비가 인공루비임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 언젠가 인공보석임이 밝혀질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여왕의 홀에 박힌 보석이나 흑태자의 루비가 사실은 스피넬임을 감안하면 차라리 이 인공루비가 훨씬 큰 가치를 가졌다. 제작기간도 오래 걸렸고 이것 하나를 만들기 위해 전력도 엄청나게 소모했다. 그래도 만들고 나니 극도로 화려해서 제국의 부를 자랑하기에 좋았다.

“왕비를 안 하겠다고 몇 십 년 동안 거절하더니 황후는 날름 받네?”

“왕비를 안 하겠다는 약속은 지켰잖아요. 주인님이 싫으시면 저 황후 안 할게요.”

“농담도 못해? 총리로 몇 십 년이나 일했는데 황후 자리를 못 받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저는 황후 자리에 욕심이 없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분을 황후로 간택하세요.”

혜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황태자를 이미 책봉한 마당에 그 어미가 아닌 다른 황비를 황후로 뽑을 이유가 없었다. 황비들과 나머지 후궁들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데, 이민호 흉을 보는 게 틀림없었다.

“폐하! 시간이 되었습니다.”

“준비됐으니 언제든 문을 열게.”

잔뜩 긴장한 궁내부 장관이 직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대전으로 통하는 거대한 문의 개방을 담당한 궁내부 직원이 바짝 긴장한 채 자동 개폐장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 쿵! 쿵! 쿵!

바깥에서 황제 행진곡 서곡이 울려 퍼지는 순간 궁내부 장관이 밑에 무거운 추가 달린 지팡이를 바닥에 연달아 찍었다. 황제 행진곡은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이 아니라 5번 <운명 교향곡>이었다.

“황제폐하, 황후폐하 납시오!”

궁내부 장관이 외치자 화려하게 양각된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민호가 혜영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오자 대전을 가득 채운 장군들과 고위 관료들, 여러 나라의 군주들과 외교관들, 성직자들, 그리고 대전 바깥 정원과 활짝 열린 대문을 지나 북쪽 현무대로를 가득 메운 백성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황제폐하 만세에~ 만세~”

이민호와 혜영이 옥좌 앞에 설 때까지 만세 영창이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졌다. 그러나 이민호가 홀을 드는 순간 돌연 침묵이 찾아왔다. 대전과 황궁 정원, 현무대로 양쪽 건물에서 늘어뜨린 거대한 태극기가 미풍을 받아 살랑거렸다.

“서기 1637년 7월 1일, 고산국이 제국이 되었음을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세계만방에 선포하노라. 만백성은 기뻐하라!”

“우와아아아~”

널찍한 현무대로에 꽉꽉 들어찬 사람들과 건물 창문마다 얼굴을 내민 사람들이 함성을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흰 비둘기 수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풍선이 솟아오르며 꽃잎을 군중 위에 흩뿌렸다.

이민호가 두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2백 5십만이 축하하러 수도에 몰려왔다고 궁내부에서 추산했으니 대충 그 숫자가 맞는 것 같았다. 축하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결국 사막에 천막을 쳐야 했다.

“황제폐하와 황후폐하의 대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우리 제국에 국교가 따로 없고 개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므로 성직자에게 관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나라에서 백성들을 가장 우선하므로 백성들 중에 선발된 다섯 사람이 황제폐하와 황후폐하께 관을 씌워드리겠습니다.”

궁내부 장관이 확성장치 수화기에 대고 대관식 절차를 설명했다. 대전과 현무대로 곳곳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나온 소리가 겹쳐 웅웅거렸으나 알아들을 정도는 됐다. 이민호와 혜영이 옥좌에 앉자 예행연습에 참가했던 다섯 명이 각자 관을 들고 다가왔다.

이민호와 혜영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예행연습을 몇 번이나 했던 다섯 명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다행히 관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차곡차곡 이민호와 혜영의 머리에 씌웠다.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이민호가 다시 일어났다. 다섯 겹이나 되는 황제의 관의 무게가 실감됐다.

“고산국이 제국이 되면서 짐은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를 이끌고 나가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도다. 만백성은 지금보다 더욱 열심히 생육하고 번성하여 제국의 영토에 충만하라. 모두가 항상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짐과 제국이 뒷받침하겠노라!”

“우와~ 황제폐하 만세에~”

창세기에서 내용을 좀 베꼈다. 내친 김에 황태자와 황태자비 책봉식도 거행했다. 반 년 후에 황제 부부가 될 두 사람에게 백성들이 열렬한 축하를 해주었다. 그러나 어느덧 중년이 된 부부는 걱정이 태산 같은 표정이었다.

중간에 황태자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본 이민호가 속으로 통쾌하게 웃었다. 선대에서 일을 크게 벌려 놓으면 후계자는 평생 고생만 하고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이순신 상원수는 황제폐하 앞에 무릎을 꿇으시오.”

궁내부 장관이 호명하자 이순신이 어리둥절한 채 앞으로 나왔다. 오랜 노인 학대를 끝낼 날도 이제 머지않았다. 바로 오늘을 위해 이순신을 억지로 현직에 앉혀놓은 것이었다.

“개국공신 태평양 공작 고산국 해군 상원수 이순신을 제국 제1 원수 겸 충무왕에 봉한다. 평생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황제폐하.”

시호 충무공에서 충은 자기 몸과 가족을 잊고 오로지 국가와 군주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에게 내리는 문자였다. 반드시 전사할 필요는 없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주로 전사한 무관에게 내리는 시호로 굳었다. 무는 강직하거나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거나 난을 평정한 신하에게 내리는 문자였다.

그러나 이민호는 새로운 제국의 황제였으므로 중국이나 조선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충무를 제국의 작호로써 이순신에게 하사했다. ‘하사’라는 말을 쓰기 매우 민망했으나 어찌 됐든 이순신은 황제의 신하였다.

그리고 황제에게는 황족이나 신하에게 왕이라는 작호를 줄 권한이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직후 우의정에 추증됐고, 선조 말기에 좌의정에 가증(加贈)됐다. 영의정은 전사 후 약 200년이 지난 정조 때 가증됐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인조 때 받았다.

그러나 이민호는 반드시 이순신이 살아있는 동안 왕호를 주고 싶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이민호가 양위를 앞두고 굳이 제국을 선포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왕작을 책봉하겠다고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것은 이순신이 사양할 것이 뻔해서였다.

“고계복 상원수는 황제폐하 앞에 무릎을 꿇으시오.”

“저는 안 줘도 되는데요, 도련님.”

“닥쳐! 험! 험!”

평생 이민호를 도운 계복과 감동, 감불에게도 왕호를 내렸다. 세 사람에게는 예전에 국성 고 씨를 하사해 영광을 더했었는데, 이제는 자그마치 왕이 되었다. 한 국가의 군주는 아니고 사실상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명나라 황족처럼 왕부(王府)를 열어 몇 가지 특권을 누리게 됐다.

계복은 노비, 감동과 감불은 여진족 포로 출신으로서 실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냈다. 단순히 이민호와 가까워서가 아니라 꾸준한 자기 계발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출세가 가능했다. 같은 수원 노비나 포로 출신들 중에서 지금은 평범한 생활을 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황제폐하와 황후폐하께서 행진을 하시겠습니다!”

궁내부 장관이 선언하자 백성들이 다시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이민호가 혜영의 손을 잡고 황태자 부부를 뒤따르게 한 채 붉은 카펫이 깔린 대전 중앙을 걸었다. 대전에 모인 장군과 각료들, 외국 군주들과 외교사절들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명나라와 조선 사신들, 그리고 브루나이 술탄과 아체 술타나를 비롯한 이슬람 군주들은 바닥에 엎드려 최상의 예를 표했다. 토르구트의 타이지는 대관식 내내 아들 넷과 함께 얼이 빠진 표정이더니 지금은 오체투지에 가깝게 절을 하고 있었다. 허리를 숙였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고개를 살짝 들어 이민호에게 윙크를 날렸다.

“크리스! 부럽지?”

“나도 황제가 되고 싶었었는데.”

덴마크가 제국으로 발돋움할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스웨덴을 다시 정복하고 독일 땅 일부를 점령했다면 신교도 선제후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가톨릭 선제후 하나를 영입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될 수도 있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군함을 직접 설계하고 군제를 화기 위주로 개편하는 등 정복자로서 소질은 충분했다. 그러나 충성스런 신민들보다 잘 싸운다는 용병을 더 믿었기에 패전 두 번 만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4세가 시간과 예산을 들인 군제 개편의 효과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톡톡히 누렸다.

“아바마마! 축하드려요!”

“윤지 너 대관식 끝나고 시간 좀 내라.”

이민호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딸과 신뢰의 눈길을 주고받았다. 루스 차르국에서, 핀란드에서, 그리고 이집트와 포르투갈에서 자식들이 아주 잘해주고 있었다.

조선에 시집간 은지는 대관식에 직접 오지 못했지만 축하드린다는 편지를 보냈다. 조선에서 여의도를 조차해서 상관을 설립하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는데, 63층 건물을 지을까 생각 중이었다. 함포로 강제 개항시키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효과가 클 것 같았다. 물론 조선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가 예상됐지만 대부분 금 두꺼비 한 마리에 넘어갈 자들이었다.

- 빰 빰 빰 빰빠 밤 빰빠 밤~

SF 영화의 임페리얼 마치는 결국 제국 행진곡이 돼버렸다. 대전에서 나간 이민호와 혜영이 무개차에 타고, 황태자 부부도 뒤에 서 있는 무개차에 올랐다. 차량 행렬 앞을 화려하게 꾸민 장갑차와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 흉갑과 투구를 착용한 기병들이 선도했다.

검은 무개차 두 대가 정원과 대문을 지나 현무대로에 접어들자 군중들이 끝없이 환호를 내질렀다. 장병 3만 2천명이 4열 횡대로 4km에 달하는 현무대로 좌우에 도열했고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서 열광했기에 안전상 문제는 전혀 없었다.

“황제폐하 만세에~”

무개차에 탄 이민호가 손을 흔들 때마다 만세가 열창됐다. 건국 이래 최고의 이벤트가 카퍼레이드로 절정에 달했다.

============================ 작품 후기 ============================

행사 한 건입니다. 감사합니다.

앞에 주작대로로 표현된 것은 현무대로로 바꿉니다. 언덕에서 남쪽 폭이 짧아서 4km가 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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