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7 106. 제국 선포 =========================================================================
제국 선포와 대관식, 일주일에 걸친 축제가 끝나자 제도는 갑작스레 평온에 잠겼다. 축하하러 온 손님들을 다 배웅하고 나서 제도 티완과 수도권 주민 전체에게 사흘을 쉬도록 명했다.
축제 기간 마지막 날 밤, 가장무도회와 불꽃놀이에 이어 현무대로에서 250만 명이 함께 밤새도록 격렬한 군무를 추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뜨는 순간 어둠의 족속들처럼 다들 축 늘어졌다.
처음 고산국을 세웠을 때 따뜻한 풍광과 강열한 태양, 그리고 어디서건 훌떡훌떡 잘 벗는 고산족 원주민들 덕택에 백성들이 감정 표현에 전혀 서툴지 않게 됐다. 그건 티완으로 수도를 옮겨서도 마찬가지였고, 에스파냐 풍의 음악이 대거 도입되면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백성들은 ‘동서 춤추소.’라고 남에게 먼저 권유할 필요도 없이 흥에 겨우면 스스로 나서서 리듬에 몸을 맡겼다. 축제 마지막 날도 광란의 춤사위가 밤새도록 이어진 탓에 다들 지독한 근육통에 시달렸다. 좀 쉬려고 할 때마다 강남스타일 개사곡 같은 흥겨운 춤곡이 확성기에서 흘러나와 잠시도 쉬지 못했다.
“이 인간들이! 쉬라니깐 아침부터 웬 운동이야?”
“일주일 동안 마음껏 먹었으니 한 달 동안 운동으로 빼야죠.”
현무대로에서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민호가 툴툴대자 혜영이 거들었다. 치렁치렁한 의상과 두꺼운 화장을 벗고 난 혜영이 이제야 겨우 사람처럼 보였다.
“축제가 끝나면 쓰레기가 산처럼 쌓일 줄 알았는데.”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어요. 조선의 고을 원님 같은 청소부들이 무서워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못한대요.”
사실 백성들이 황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현무대로를 감히 더럽힐 수 없다는 이유가 더 컸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적절한 위치마다 쓰레기를 버릴 곳이 지정됐고 청소부들이 매시간 치웠기에 깔끔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가로수가 얼른 자라야 건물을 적당히 가려서 사람 사는 곳 같아질 거야. 아무리 신도시라지만 지금은 너무 황량해.”
“어머나! 폐하께서는 인공 구조물을 너무 싫어하세요. 관광객들에게는 자연 풍광이 아니라 거대한 황궁과 현무대로 주변에 신축된 고층건물들이 최고의 관광 상품이에요.”
현대에서 살다 온 이민호야 자연 풍광에 더 높은 가치를 두지만, 이 시대 사람들에게 자연은 그저 극복해야 할 귀찮은 대상일 뿐이었다. 티완에 몰려온 축하객들도 오히려 고층건물의 숲 같은 인공 구조물들에 더욱 감탄을 자아냈다.
이민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자연과 유리된 황량한 대도시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야자나무와 대추야자나무가 자라 도시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열매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없지?”
“예. 신경 써야 할 일은 명나라 내전과 포르투갈 독립전쟁 뿐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별로 남지 않았어요.”
“내정이야 혜영이 항상 잘해왔으니 문제가 없겠지.”
이민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혜영이 마치 강아지처럼 눈을 감고 이민호의 손길을 느꼈다. 그 동안 이민호가 한 일도 많았지만, 전쟁에 나간 동안에는 매우 역설적으로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혜영은 그야말로 평생을 일로 보냈고 임신과 육아기간에도 일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좋아요. 더 해주세요.”
“평생 고생했어.”
예전에 이민호는 임진왜란 기간에 세계 통틀어 조선에서만 전쟁이 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16세기 말과 17세기 전반은 그야말로 온 세상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전란의 시대였다. 유럽과 중동,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하지 않는 나라가 오히려 드물었다.
그러나 고산국에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원해 남의 전쟁에 적당히 개입하고 적당히 압력을 가해 지금은 전 세계가 비교적 평화로웠다. 루스 차르국과 우크라이나에서 얼어 죽고 굶어죽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를 퇴치하지는 못했어도 유아 사망률이 뚝 떨어졌다. 이민호는 세계를 지도하는 제국의 황제로서 평생 의무를 다했다.
고산국과 그 뒤를 이은 따뜻한 바다 영토 내에서는 거의 항상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파푸아 섬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식인종들도 마나에 민감한 새섬의 마오리족 전사들에게 남김없이 적발돼 죗값을 치렀다.
가끔 행정체계 안에 들어오길 거부하는 북미나 남미 원주민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 외에는 국내에 딱히 큰일은 없었다. 그 원주민들도 능숙한 탐사전대 대원들과 협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함께 닭튀김을 뜯고 있었다.
“나라가 평안하니 백성들도 다들 행복하겠지?”
“글쎄요?”
그러나 그건 이민호가 보는 시각일 뿐이었다. 관료와 연구원들이 과로에 시달리는 것은 국초부터 지금까지 여전했고 농민들은 밤늦게까지 코피를 흘리며 일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땅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사람 키만 한 작은 무덤에 드러누운 주인공 바흠처럼 농민들의 땅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래도 일한 만큼 소득을 올리니 다들 큰 불만은 없었다.
“백성들은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까?”
“농담 마세요. 폐하께서는 함포고복(含哺鼓腹)이란 고사성어도 싫어하시잖아요.”
“지배자 입장에서는 생각 없는 백성들이 많아진다면 결코 나쁘지 않지.”
백성들이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 다른 일에 전혀 신경을 못 쓰는 상황을 지배자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본다. 현대 국가로 따지면 먹고살기 바빠서 투표일 하루라도 쉬겠다는 젊은이가 많을수록 청년들에게 배분되는 예산이 줄어든다.
“폐하께서는 가능한 모든 것을 백성들에게 해주셨어요. 백성들이 다들 불만 없이 산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그래도 군주제의 한계가 있으니까.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쓸수록 좋아.”
이민호가 재위하는 동안 끝내 입헌군주제로 전환하지 못했다. 흠정헌법 초안을 마련해두었으나 황태자가 재위하는 기간에도 선포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아직은 건국 초기이고 다음 대가 중흥기로 예상되므로 시간 여유가 꽤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인적이 드문 산맥에 국가비밀 1급에 해당하는 연구단지를 건설하는 이유가 뭔가요?”
“음. 퇴위 후에 그곳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동양의 이기론에서 논의하는 물질의 근원을 연구하려고.”
이민호는 제국 최고의 화학자와 물리학자들을 비밀리에 연구원으로 모집하고 있었다. 연구단지 입지로 처음에는 현대의 네바다 사막 지역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바위산맥을 선정했다.
“원자력이 뭔지 모르겠지만 굳이 45세 이상만 연구원 자격이 되는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만큼 위험한 일이니까.”
각종 위험한 실험 중에 연구원들의 안전을 우선하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닥치더라도 방사능 피폭이 2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이가 충분히 든 자들 위주로 연구진을 꾸렸다.
“제국에 유용한 연구겠죠?”
“별로. 연구가 진행되면 웬만한 화력발전소 몇 개나 되는 막대한 양의 전기를 생산할 수도 있고, 도시 하나쯤은 그냥 날려버리는 폭탄을 만들 수도 있어.”
“세상에! 그게 가능해요?”
“인도 신화에 비마나에서 쏴서 도시를 멸망시킨 것과 비슷해. 워낙 위험해서 연구만 해놓고 실제로는 인공위성의 동력원으로 원자력 전지만 사용할 거야.”
원자력 전지는 소형 원자로가 아닌 RTG, 즉 방사성 동위원소 열전기 발전기처럼 방사성 원소가 붕괴할 때 나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장치다. 인공위성과 무인등대, 인공심장 등의 동력원으로 사용된다.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동안에는 싼 에너지로 느껴지겠지만 방사능 폐기물을 수십만 년 동안 안전하게 보관해야 하는 문제에 임해서는 미래 세대의 기술발전에 떠넘긴다. 그러나 그건 한국 이야기고, 2003년에 발간된 MIT 보고서에서는 석탄이나 가스복합발전보다 원자력발전 단가가 50퍼센트나 비싸다는 결론을 내렸다.
폐로 비용과 폐기물 보관비용까지 감안하면 원자력은 엄청나게 비싼 에너지다. 핵폭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자력발전을 할 이유가 없다.
이민호는 고민 끝에 실험용 원자로 운영과 플루토늄 농축, 지하 핵실험까지만 추진하고 핵폭탄을 따로 보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쓰지 않고 있는 동안에 오히려 더 강한 정치적 위력을 갖는다지만 핵폭탄을 50년 이상 장기 보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위험하다면 안 만들면 안 되나요?”
“다른 나라에서 먼저 만들어 우리에게 사용하거나 위협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물론 당장은 아니겠지만 미리 준비를 해놔야지.”
오들오들 떠는 혜영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었다. 원자력을 연구한다면서도 아직 시간 여유가 넘쳐서 이민호는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맨해튼 계획에서는 전시라서 금방 핵폭탄을 만들었지만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다면 십 년이 모자랄 수도 있었다. 자칫 이민호 살아생전에 원자로나 원폭 개발을 완료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민호는 원자력 연구와 동시에 컴퓨터와 디지털에 대한 기반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반드시 이민호 생전에 원자력발전소나 핵폭탄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규칙 따위는 없었다. 원자력공학은 이민호도 어차피 잘 모르는 분야였고, 원심분리기나 열교환기 같은 몇몇 개념만 겨우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민호는 개념과 방향을 제시하고, 실제 연구 대부분은 연구원들에게 맡길 계획이었다.
가을이 되면서 명나라의 내전이 격화됐다. 추수철에는 현지 보급이 추진 가능해서 병참 부담이 줄어들기에 병력 동원이 쉬운 탓이었다.
보름 전에 남명에서 100만을 북경을 향해 출전시켰고, 이에 맞서 북명에서 150만 대군을 남하시켰다. 그러고도 본거지에 각각 50만씩 남겨두었다고 한다. 역사의 전환기답게 동원된 병력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문제는 비슷한 시기에 촉나라가 동원한 80만 대군이 북동쪽으로 움직인 것이다.
“촉나라가 남명이 아니라 북명을 친다고? 저놈들이 하필 서쪽 내륙에 있어서 걸핏하면 우리 정보망을 우롱한다니까!”
“황공하옵니다, 폐하. 엄밀하게 따지자면 촉나라의 목표는 북명 정권이 아니라 빈집이 된 북경 점령입니다. 일단 북명이 크게 패배했고, 북경수비군이 와해돼서 텅 빈 북경을 향해 남명과 촉이 경주를 하는 모양새입니다.”
그 전에 합참 정보참모본부장이 자세한 전투의 경과를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황도 북경 탈환이 급선무인 남명 정권이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제공격을 해야 할 만큼 전략적으로 결코 유리할 게 없었다.
그러나 북명 정권도 대군을 유지하는 일이 몹시 버거워서 차라리 단기결전을 노렸다. 전투는 제남 인근 벌판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남명에서 누군가 전략에 밝은 자가 병력의 열세를 만회해 회전 한 번에 북명의 150만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철천지원수 두 나라가 싸우는 와중에 촉나라가 어부지리를 노리고 급속히 기동하는 중이었다.
“쯧! 세 나라로 고착되길 바랐건만, 역시 중원은 습관적으로 통일될 수밖에 없는 땅인가?”
“뜻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몹시 그럴 듯한 말씀이옵니다. 어쨌든 폐하의 어록에 기록하겠습니다.”
“습관적이라는 단어를 적당히 바꾸게.”
이민호가 대학생 때 읽었던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가 어렴풋이 기억났다. 유럽은 산맥과 강으로 인해 여러 나라로 분열될 수밖에 없고, 중국은 약한 세력이 근거지를 방어할 만한 자연지형이 없어서 통일되기 쉽다는 주장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저자에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실제 역사는 그의 주장처럼 흘러갔다.
“북명이 재기할 기회는 없겠나? 패잔병 50만쯤 모아서 남경을 친다던가 하는 경우 말일세.”
“농민반란군의 특성상 한 번 무너지면 완전히 해산하는 수준입니다. 나중에 다시 봉기하더라도 일단 이 조직이 재건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촉왕이 장헌충이던가? 잘못하면 이상한 사람이 대륙을 석권하겠군.”
합참 차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국 사람들은 명나라 3국이 할거하는 땅을 더 이상 대륙이라 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한 명나라 3국 전체보다 북미나 남미 대륙이 확실히 더 크다. 북미 대륙과 비교하기는커녕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영토가 미국보다 살짝 작다.
“남명의 전략가가 뭔가 마술을 부릴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입장인 이민호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전황에 시선을 집중했다. 전황 변화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이 약간 아쉬웠지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싸움 구경이었다. 물론 황궁에서는 주상아 공주 눈치가 보여 남명을 지원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 작품 후기 ============================
일단 올립니다. 감사합니다.